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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개척에서 성공까지 - Tommy Reid

작성자종로사랑|작성시간22.04.07|조회수8 목록 댓글 0

□ 교회 성장 수기 □

 

 

개척에서 성공까지 - Tommy Reid

 

현대목회 (1982.5)

 

-내용 일부 중략(中略)

 

 

 

제 1 장 미래에 대한 묵시

 

나는 부흥회가 한창인 가운데 앉아 있었다. 1962년의 일이었다.

한국 전주시에 있는 Y 장로 교회의 큰 성전은 오순절의 열기가 휩쓸고 있었다.

 

지난 몇 주째 나는 아버님과 함께 한국의 전역을 누비며 5개 대도시에서 대부흥 집회를 열어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하는 일을 축복하사

놀라운 치료의 기적과 열광적인 성령충만을 허락해 주셨다. 온갖 종파를 망라한 수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하며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였다.

 

이 특별한 날 밤에 나는 강단에 앉아 어떤 목사님이 많은 교인들을 찬송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얼굴은 감동으로 차 있었다. 이때 갑자기 희미한 환상이 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교인들과, 찬송 인도자가 사라지더니 이상한 충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감았다 떴다 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얼굴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한국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교회 안은 서양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찬송을 부르며 굉장한 열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나는 찬송을 인도하는 목사님을 보았다. 환상 속에 나는 그가 카톨릭 신부님이 입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장면이 나의 고향 도시인 미국 뉴욕 주 버팔로우(Buffalo)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묵시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음성으로 내 마음 속에서 말씀하였다.

“토미야, 나는 네가 전에 이룩한 것 이상으로 버팔로우 시에서의 사역을 성취시켜 주겠다.”

그 순간 묵시는 사라졌다. 나는 다시금 한국의 전주 시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몹시 어리둥절 했다.

 

이번 일은 하나님께서 전에 내게 주시곤 했던 것과 같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미래의 사역을 과거의 것보다 더 크게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 30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미 사역을 크게 성공시켰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필리핀에서 아버님과 함께 가장 많은 성도를 거느린 교회에서 목회를 해왔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사역을 통해 나는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 대부흥 성회의 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해왔다. 나의 명성은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서는 확고 부동했다. 나의 사역은 굳건히 서 있었고 또 나는 내 성공을 자부하고 있었다.

 

 

 

제 3 장 채찍에 끌리는 인력거

 

엘리자베스 여왕 대로(Queen Elizabeth Way)는 내가 런던과 온타리오, 버팔로우 사이를 차를 몰고 달리는 날 밤 마치 영원을 향해 뻗어 있는 길 같았다. 우리 교회는 교회 건축 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으므로 나는 시간 나는대로 자주 건축 대지를 보러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번 주일에 나는 런던시에서 열리고 있는 박람회의 야외 집회에 주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 버팔로우에 돌아오기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 대로를 밤 늦게 달려 와야만 했다. 야외 집회는 그럭저럭 잘 되어가고 있었으며 사람도 꽤 모여드는 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교회 건축계획 역시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나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으로 차 있었다. 나의 영혼은 어딘지 모르게 목마른 데가 있었다.

 

그날 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는 졸음이 오는 것을 떨쳐버리려고 라디오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흥미를 줄만한 프로를 찾고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던 중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명한 여성 전도사 캐트린 쿨먼이

캐나다 출신의 라디오 대담자와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느라고 졸음은 약간 덜 했으나 피로는 여전하였다.

 

그러자 그때 갑자기 캐트린 여사가 한 말이 피곤한 중에도 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저는 강단에 설 때마다 수 천 번 죽습니다.”(Every time I go to the platform, I die a thousand deaths)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 말에 움칠했다. 캐트린 쿨만이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대중 집회가 겁나서 그러는가? 조용하면서도 진지한 음성이었지만 이 음성은 그녀가 마치 라디오에서 뛰쳐나와 내 뺨을 후려치기나 하는 듯 했다. 캐트린 쿨만은 지난 수 년 동안 수많은 대중들 앞에 서왔다. 그녀의 말씀 증거는 아름답고 내용이 뚜렷했으며 균형이 잡혀 있었다. 나는 이토록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전국을 상대로 한 방송에서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예배때마다 겁을 먹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 나는 그녀의 말 뜻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격언 같이 들리는 “수 천 번의 죽음” 중 단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다. 나는 설교를 좋아하며 대중 사역에 관한한 꽤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해왔다. 강대상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내 몸에 아드레날린을 촉진시키려는 개인의 생리적 노력에 불과했다. 나의 사역에는 캐트린 쿨만의 모습을 닮은 데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강단에 서서 그렇게 움추려야만 하는가? 그녀가 정녕 그렇다면

(물론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은 나의 건과 전적으로 다르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저는 천 번 죽습니다.”라는 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갖지 못한 투시력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이 주님 앞에서 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속에 성령님에 대한 싱싱한 부르짖음이 일고 있으며 버팔로우에서의 나의 사역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다.

 

“토미, 그녀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어느 날엔가 너는 그녀가 겪은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캐트린 쿨먼의 의미심장하면서도 간단한 이 한마디 말은 나의 생활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근심에 찬 마음으로 곧장 성경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즉 사역에 대한 새로운 관점, 내 인생의 사업에 대한 새로운 전망에 관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캐트린은 자기의 사역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청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무능력은 나의 경우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토미 리이드라는 인간의 능력이 매우 쓸모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사실은 우월감이었다. 나는 대교구의 행정 업무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스스로를 능변가라고 생각했고 교인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나는 캐트린을 바라보고 나서 나 자신을 반성했으며 캐트린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사역에 성공하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수고하지 않는다. 그러기보다 도리어 그녀는 청중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전사역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성령님께서 담기에 알맞는 그릇이 되도록 자기를 완전히 비운 채 하나님께 드렸다.

 

내가 아름답고 균형잡힌 사역이라고 해석한 그의 사역이 실은 성령님께서 캐트린 쿨만을 통해 역사하신 것에 불과하다. 캐트린 자신은 그 사역에 책임이 없다. 그녀는 자기의 성회가 성공을 거둔데 아무런 힘도 보탠 것이 없다. 그녀는 하나님께 그토록 굴복하였으므로 예배 때마다 죽고 또 죽고 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그 성회를 성공시키고 무엇인가 유익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삭을 바치듯이 자아를 바쳤다. 아브라함처럼 그녀는 자기의 믿음을, 자기 인생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위에 두었다. 아브라함은 죽음의 제단 위에 자기의 외아들을 드릴 때 절대적인 자아 포기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했다.

 

소유권의 이전이 일단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그로부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아버지로 세워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캐트린 쿨만이 자기의 전 생애와 사역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사업을 놀랍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그녀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치료의 역사를 행한 복음 전도자가 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공은 결코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다만 성회가 있을 때마다 첫 번의 죽음을 죽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소유에 대해 축복하셨던 것이다.

 

 

캐트린 쿨만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 축복하신다.”는 영원한 원리를 찾아냈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축복하시는데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한 가정이나 교회나 또한 한 국가 전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축복하신다.

 

성령님께서 이러한 원리를 내 마음 속에 처음으로 일깨워 주어 나는 눈을 바로 뜨게 되었다. 나는 강대상에 서서 도대체 누구의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토미 리이드의 성공이었다. 내가 교구 안에서 드높여온 명성은 누구의 것이었던가?

 

토미 리이드의 명성이었다. 내 사역은 내 자신의 것이었고 내 손으로 꾸며낸 것이요 교만을 위한 자기 만족의 근거가 되었을 뿐이다. 나의 이삭은 내 자신의 사역이었다. 물론 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안 것처럼 내 사역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역을 통해서 태어난 자손을 하나님께 한 번도 바친 일이 없었다.

 

내가 지금 범하고 있는것은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찮은 특징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고 부동한 원리를 어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가운데 자기 백성에 대해 이러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되돌려 바쳤고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예수님은 자기의 온 생명을 드렸다. 그러한 본보기는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소유하신 것에 대해 축복하셨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 보는 가운데 나는 내가 교회를 위해 해온 모든 것에 대해 일종의 정신적 구역질을 느끼게 되었다. 문제의 중심에서 볼 때 나는 정말 “나의 교회”(my church)를 만들어 왔다.

 

남부 버팔로우 성막교회(South Buffalo Tabemacle 뒤에 순복음 성막 교회 : Full Gospel Tabemacle로 개칭됨)는 내 것이었다. 신도들은 “나의”(my) 신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시야를 더 넓혀 주셨다. 그리고 보니 내가 앓던 병은 세계 도처의 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목회자란 목회자는 “자기의”(his) 교회라는 소유권 주장을 해왔다. 슬프게도 상황은 내게 분명해졌다. 수많은

사역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충분히 받지 못해 마땅히 받을 만한 축복을 제대로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 사역에 주권을 행사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목회자들 역시 내가 그런 것 같이 그들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축복하시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세상을 축복하고 계시다. 하늘의 창문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 태도 때문에 닫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운 원리의 범위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가 자기의 사역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한도 내에서 축복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재능과 능력, 우리의 목회 계획과 기술, 교회와 모든 사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 사람의 손은 묶여 있다.

 

나는 나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강대상에서 하는 일은 성도들과 하나님의 축복의 중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내 능변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채찍에 몰리는 인력거를 그리듯 어중간한 사역에

그럴듯한 장식물처럼 설교를 꾸며왔다.

 

전등불 밑에서 지내온 많은 시간들이 이제 하나의 낭비처럼 보였으며 하나님께서 소유하시지도 않은 것에

대해 축복을 받아내려고 애써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설교 때마다 나 자신을 배우고 그 자리에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통해 빛을 발하게 하는 대신 나 자신을 채우는 것으로

장만해 왔다. 나는 내 사역을 손아귀에 꽉 움켜진 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이 침체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와 하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한채 지내 왔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준비한 미끈한 설교요지를 놓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 상기되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손쉽게 그리고 전문가답게 꾸며내곤 하던 메시지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시도록 열심히 간구하였다.

그러자 성령님께서는 어떤 특이한 장면들을 통해 내가 이삭을 드리지 않음으로써 놓쳐왔던 여러가지 사역의 징표들을 보여

주셨다.

 

이제 나의 사역에 관해 내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이 분명해졌다

(나의 사역이란 말이 그렇게도 속된 말처럼 들리게 되다니!).

나의 이삭을 드린다는 것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뜻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강대상 위에 오르는 나 자신이 확실히 그리고 실제로 바뀌어야

함을 뜻한다.

 

내 뱃속 어디에선가 이제 내 마지막 공연은 끝났다고 말하는듯 하다. 쇼는 막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맡을 차례이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장면 장면을 마련하실 차례다.

 

 

 

제 4 장 낙담자로 차있는 세계

 

내가 차를 몰고 달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 상각을 완전히 사로잡는 듯 했다. 뉴욕 주 횡단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뻗어 있는 나이야가라 연장선을 달리는 동안 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나는 “하나님, 주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제게 알게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간단한 기도조차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Seneca Street 교차료를 막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희미해지더니 전면 하늘에 커다란 둥근 것이 나타났다.

나는 우주인처럼 공중을 날으면서 지구를 외계에서 내려다 보는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하나님의 손길 같은 커다란 두 팔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세계를 두 쪽으로 갈라놓고 그 속을 들어냈다.

나는 갈라진 그 세계 속에서 낙담자의 큰 무리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내 영혼 속에 깊은 슬픔이 넘쳐흐르는 것을 나는 느꼈다.

 

 

“아들아, 내가 보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너도 세상을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낙담자의 세계에 관한 이 때의 환상은 그로부터 몇 달, 몇 년이 지나도록 나의 생각을 붙드는 중심이 되어왔다. 낙담자의

세계에 대한 환상이 내 생각에 미칠 때마다 지금까지의 내 사역이 서서히 내 앞에 벌거벗은 모습을 들어내 놓았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환상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낙담자를 상대로 사역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사람을 상대로 사역해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내려다 볼 때 나는 그들을 욕구를 지닌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서 본 것은 죄 뿐이었다. 물론 그 죄는 용서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나는 오직 죄에서 구원 받아야할 영혼들, 즉 강대상 위에서 회개한 자의 수를 확인하여 다음 달 잡지에 그 숫자를 발표하는 것만을 생각해왔다.

 

나는 사람을 겉으로 볼 뿐 좀 체로 짐에 눌린 속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죄는 보면서도 그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또한 신도들이 자기의 인생문제에 관해 기도한 것이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적도 없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서서히 나로 하여금 내 사역의 실상과 내 사역의 모든 방법에 관해 눈을 뜨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그런 깨달음을 내게 주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도들에게 형식적인 설교를 했음을 고백한다.

 

 

교회의 전도 활동이란 분명히 하나님 왕국에 새로운 결신자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문제의 핵심을 “새로운”(new)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의 괴로운 영혼이 아버지의 인도에 눈을 뜨자 하나님께서는 문제의 핵심이 “새로운”(new)것이 아니라

“태어난”(born) 것임을 알게 해 주셨다. 나는 출생과정(birth process)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해왔다.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법칙은 땅이 생물을 “그 종류대로”(after their own kind, 창 1:24) 내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러한 법칙에 따라 창조되었고 동물이나 식물 역시 그러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6) 라고 한 해묵은 성경 귀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내게

다가왔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태어날 것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방법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숫자 놀이(number game)는 숫자를 만들어 낼 뿐 부흥은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출생원리의 조명을 통해 처음으로 나의 교회의 계획을 바라볼 때 느낀 체험은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우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 마음 속에 뛰어드세요. 다음은 성령님께서 맡아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오늘날 목사님들과 교회의 일군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출생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란 말씀은 인간적 술수로 교회에 끌어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술수이므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해서 내 사역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육신의 팔이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 건설 사업을 가로막아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경쟁과 시위와 자선 사업 등 자기를 들어내려는 이 모든 얕은 술책들이 믿음의 눈 앞에 육신의 모양을 들어내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일을 하도록 택함 받았다. 하나님의 장막인,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우리는 광고매체, 즉 라디오, 신문, 서신 등에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다.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매달 너무 많은 예산을 이 분야에 쏟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육신적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아직 나는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사역자가 광고를 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전광고 없이 어떻게 새로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노력 없이 어떻게 교회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가?

 

“주여, 제가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내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호소하였다.

 

나는 귀찮은 현실만이 다가올 뿐 이런 나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은 받지 못했다. 하나님의 출생원리에서 파생되는 모든 진리가 내 마음을 온통 괴롭히기만 했다. 만일 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를 갖고자 했다면 그것은 내가 성경 말씀을 깊이 파고 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에 눈을 떠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날이 감에 따라 나는 영적인 회의에 빠졌다. 나의 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 날의 교회 전반에 관해 나는 오랫 동안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방법 즉, 설교와, 성장 운동과, 심지어 예배 의식에 이르기까지 재검토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적인 전환은 오직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도행전에 3000명이 일시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기록은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의 마음 속에 잉태됨으로 가능했다. 놀란 군중들은 120문도를 통해 성령님이 넘쳐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모여들었던 것이며 어부 출신의 베드로에게서 거창한 말씀을 기대하거나 신문 광고에 눈에 끌려 모여든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영적 거듭남’의 과정이 활동을 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이 나의 사역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사역에 있어서 그저 평범하게 작용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많은 사역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관심과 돈을 쓰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지 물어보라.

아마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내가 버팔로우(Buffalo)라는 자그마한 고장의 교회를 이끌어가기 위해 “달러는 영혼을 뜻합니다.”(Dollars mean souls)라고 옹호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은 오늘 날 교회의 신조가 되고 있다. 이 말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만 하세요.

그 다음은 성령님이 맡아주실테니까요.” 하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흔히 사람과 사역 양자의 영적 효과를 그릇되게 만든다. 돈이 정말로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으면(물론 나 역시 성령님의 창조력은 도외시하고 설교가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은 적이 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사물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더구나 그럴 경우 새로운 결신자는 영적 양식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금 모집 운동원으로서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 괴물(monster)을 사육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설교와 예배와 교회 성장을 위한 구상 속에 나타나고 있는 세속화를 특히 내게 보여 주셨다. 나는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몰랐다. 나는 신문 광고와 라디오 프로의 출연, 텔레비젼을 통한 설교 계획을 중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갑자기 설교를 중단하거나 교회 예배 순서를 뒤바꾸어 놓는 것도 내게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 거듭남’의 원리가 내게 하도 큰 자극을 주었고 지금도 그 원리가 나의 생각의 중심을

잡고 있는 지금 오직 한 가지 해결 방안은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선택 뿐이라고 여겨진다.

 

 

 

 

제 5 장 성령님과 동행

 

세번째 교훈은 가장 귀에 거슬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조용히 다가왔다. 나는 토론토에 있는 기독교 회관에서 집회를 인도하도록 계획이 짜여 있었으나 계획 과정에서 여러가지 장애가 우리 일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집회 준비가 중단되지 않도록 애를 쓴 결과 집회는 시작되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집회 인도는 나의 토론토 여행의 제2차적 목적인 것 처럼 느껴졌다.

 

집회는 잘 되어가고 있었으나 어느날 저녁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은 꽤 깊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파자마와 슬리퍼 차림으로 내가 머물고 있던 고층 아파트의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토론토의 밤은 차갑고 상쾌했으며 넓은 시가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는 특별한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날 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 번째 메시지는

그 어느 것보다도 나의 사역의 중심을 깊이 찌르는 것이었다.

 

“내 사역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하지 말아라 토미야, 지금부터는 내 사역의 일부가 되어라.”고

하나님께서는 발코니에서 떨고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놀란 나머지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분부인 줄로 생각해왔고,

나의 계획, 나의 설교, 나의 음악, 나의 전도 매체가 모두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으로 여겨왔다.

 

 

나는 그와 동일한 원리를 나의 생애 속에서 이미 관찰하였다. Oral Roberts와 같은 사역자들과 손잡고 1950년 대부터 신유의 대 부흥 운동에 참여해온 우리 교단 산하 교회들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성령 운동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교회들은 쇠퇴를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 있어서도 나는 성령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는 성장하고 있음을 본다.

성령 운동에 반대하는 교회는 여전히 고투를 계속해가고 있다.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 역시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그러했듯이 목이 곧은 사람이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순절 교단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웃의 성령 운동을 하는 교회와 같은 은사를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신선함과 열심은 갖고 있지 못했다. 도리어 신선함은 하나님과 행동을 함께하는 그들 교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되자 마치 꽃이 활짝 피듯이 눈에 뜨이지 않던 성경 귀절이 내 앞에 환히 다가 왔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나의 교만은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었다. 위의 성경 말씀이 나의 영적인 본성을 깊이 찌르기 시작하자 나의

저의(底意)가 들어났다. 나는 그릇 행했을 뿐 아니라 동기가 불순하고 비성서적이었다. 나는 다른 사역자들의 일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었고 오직 나의 유익만을 생각해왔다. 더구나 나는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내 교회의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일찍 이런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나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

라고 하신 아름다운 귀절을 놓치고 살아온데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사업은 보통 순수한 동기 이 외에 다른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 성취된다. 나는 그러한 검은 점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병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의 세계 속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우리는 영혼 구원이라는 가면 속에 너무 많은 노력을 허비하고 있으나 실상은 명성과 인간들의 눈 앞에서의 성공과

교구 내에서 가장 큰 상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숫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우리 자신들에게 말하는데 결국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의 대규모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정당화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기를 들어낼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요에 관심을 별로 두고 있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곳에 내 마음을 두고 있었다.

 

즉 나는 이기적인 동기가 나의 교회의 변속 장치를 태우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수 백의 교회들이 마치

내가 그러했듯이 성공을 추구하는 목사님들의 불순한 동기에 따라 보람없이 엔진을 내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는 마음을 오싹하게 만든다.

“가정에서 다른 식구를 위해 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이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교단을 초월하여 나 자신을 헌신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이상이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전에 겪지 못한 체험이다. 이에 대해 내가 보인 최초의 반응은 내 왕국을

웅켜 잡으려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이것들은 어렵게 얻어진 것들이고 내게는 커다란 즐거움과 교만의 원천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감정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내손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게 구약 속에 나오는 섬뜩한 귀절을 보여주셨다.

위대한 왕 느브갓네살은 궁전을 활보하면서 외쳐댔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느브갓네살을 짐승처럼 들에 내 몰아 소가 풀을 먹듯 풀을 뜯어 먹게 했으며 머리칼이

덥수룩하고 손톱이 고양이 발톱처럼 자라게 하는 등 비참한 몰골로 만드셨다.

 

이 귀절은 나를 몸서리 치게 했다. 나 역시 내가 만든 궁전 안을 활보하면서 내 창조의 거창함을 자랑삼아 왔다.

물론 이러한 자랑은 공공연히 또는 의식적으로 해온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서 거듭 거듭 그래 왔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성취한 것을 보고 스스로 스릴을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축복하신다.

목사가 자기 왕국의 건설자가 될 때 이미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다.

그런 사람은 본인이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의 성령의 흐름을 자기의 영토를 가리는데 이용하려 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내 눈을 뜨게 하셔서 내가 해온 일들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일들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아무리 헐벗은 사막의 거주자도 리오 그란데의 물줄기를 바꾸어 자기 정원에 물을 댄 일은 없다.

 

 

성령님은 나를 단호하게 붙잡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험하시고 계셨다.

이것은 나의 교회인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나는 믿음의 요단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껏 이보다 더 큰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약의 문제(question of covenant)와 직면해 있었다.

 

 

오늘날 목회자나 평신도가 직면하는 가장 광범위한 문제의 하나는 성서의 폭넓은 원리를 무시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현대인의 태도가 이들 원리를 과소평가할 때나 또는 이들 원리가 너무 낡아빠져 그것을 도외시

경우에도 생긴다.

 

 

그러한 원리 중의 하나가 언약 관계이다. 오늘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 관계속에서 말하는 일은 별로 흔치 않게

되었다. 마치 유행에서 밀려난 꿰맨 나이롱 양말처럼 언약 관계란 말은 낡아빠진 귀절이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의 원리조차 인식되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언약이란 말은 성경말씀 중 여러 곳에 등장하고 또 많은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매우

민감한 것이다. 그야 어찌되었든 언약 관계는 지금까지의 내 모든 사역을 뒤집어 놓은 원리로 등장했으며 내가 시무하는

교회가 부흥하는 요인이 되었다.

 

 

언약 관계는 사실상 성경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이며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개체 사이에 교환된 아름다운 이야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환(exchange)이란 약속을 마음 속 깊이 주고 받는 것을 뜻한다. 구약 시대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약속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언제나 세 가지 물건 즉, 옷과 무기와 허리띠를 교환하였다. 옷은 부요를 상징했으므로 그 옷을 교환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나의 재산은 당신 것이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뜻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맺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줄 것이 더 많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광활한 땅을 약속하신 후 이런 보장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찌이다.』(창 12:2)

 

 

그러나 아브라함 쪽에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갈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에 당도한 그는 기근을 겪는 동안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애굽 땅에서 모은 재산을 버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을 다시 한 번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아브라함의 재산을 요구하셨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 시에 교환하는 두 번째 물건은 무기라고 했다. 이 무기는 힘을 상징한다.

그들은 약속을 하고나서 칼 집에서 칼을 뽑아 서로 교환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힘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싸우고 계시다.

시편 91편 7절에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고 기록했다.

그 대신 인간은 하나님께 비록 하잘 것 없는 것이기는 하나 자기의 힘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오늘날 이 힘을 드리는 행위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 관계가 실제로 지켜지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허리띠의 교환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대단히 큰 효과가 있다.

허리띠는 한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재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이다. 이유는 인간이 바치려고 하는 모든 재물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주실 때 자유 의지를 아울러 허락하셨다.

선택의 문제는 다른 것과는 달리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살아갈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살아갈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교통하려는 갈망을 인간 속에 심어주셨으나 그러한 교통을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피조물을 사랑하시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자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통해 확장(extension)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종자 씨앗과 족보를 주셨으며 그 족보를 통해 만 백성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기 전에는 죽은 자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왔다. 자식도 없고 종자 씨앗도 없는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의심했으며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백 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므로 그런 약속을 의심할만도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게 언약하거니와 네게 후손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교환 조건 위에 서 있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인간은 이어서 허리띠를 서로 교환해야 했다. 언약은 “우리의 생명이 정말로 서로에게 달려있느냐?”는 질문을 돌아가면서 하도록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어떤지를 시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산으로 불러 “네 아들 이삭이 정말로 나에게 속해 있느냐?”를 물으셨다.

 

이 질문은 모든 목회자들이 직면해야 할 질문이다. 나 역시 나의 사역에서 이 질문에 직면했다.

그러나 나는 집요하게도 나의 이삭을 내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내 사역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었으니까.

 

 

나는 마치 가망 없는 빈털터리 부랑자(hobo)가 어여쁜 아가씨 즉, 마이더스 왕(디오니서스로부터 손에 닿는 것을 모두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부여 받은 히랍 신화의 왕 – 역자 註)의 딸 정도로 부자집 여인과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혼 약속 조로 교환할 세 가지 중 둘은 간단하다. 부랑자는 있는 것 중에서 주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는데다 힘도

없었으므로 지불 내용은 뻔하다. 그와는 반대로 신부 쪽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재물과 힘을 주어 신랑으로 하여금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신부는 온갖 사치와 지위까지 남편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이 부랑자는 떠돌이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부랑자는 마이더스 왕의 재물에 손을 대어 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황금으로 변했다. 그는 아내의 재물에도 손을 대어 황금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손은 마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그런 것을 해냈다. 그는 독자적인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내의 돈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지위 역시 아내 혼자서 행사하도록 버려둔 것에 불과했다.

 

 

이쯤되자 신랑된 부랑자는 약속으로 주어야 할 세 번째 물건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의 생명은 그 자신의 것이다. 자기 생명을 어느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가 않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는 부자였다.

그는 자기의 토지에서 살아 왔고 후손을 남길 아들도 있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언약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언약에 관해 질문하셨다.

“너의 이삭은 정말로 내 것이냐? 우리는 지금도 계약 관계에 있느냐? 우리의 모든 생활이 상대방에게 속해 있느냐?”

나 역시 그러한 질문을 받는 처지에 서 있었다. 나는 언약이 파기될 위기까지 와 있었다.

“나의 이삭은 내 것이었던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었던가?” 나는 이렇게 자문하게 되었다.

 

모든 다른 목회자들도 그런 체험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목회자들도 그런 위기에 직면해야만 한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삭이 내 것이냐? 나는 내 모든 소유, 즉, 내 사역과 내 교회와

내 명성과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의 교환 조건으로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인물들조차도 이런 언약의 질문과 직면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출중한 사역자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각기 독립된 장소에 도달한 지금에 있어서도

“이삭은 너의 것이냐? 너는 정말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게 주려느냐?

너는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느냐? 우리는 아직도 계약 관계에 있느냐?”하고 물으신다.

 

 

목사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없이도 설교할 수 있다. 사역자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없이도 거대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목사는 하나님께 의지함이 없이 순전히 자기 생각에 의지하여 기계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맺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법이 없으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사역 위에 올라 앉아 축복을 계속해서 발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각자에게 “이삭은 너의 것이냐?”라고 묻고 계시다.

 

교회는 목회자가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까지는 진정한 부흥을 이룰 수 없다.

목회자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계약 관계에 들어가기까지 자기의 전 재산과 힘과 생명 조차

하나님께 다 드리기까지 교회의 진정한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나의 내적 존재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내 온 존재가 압박감으로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숙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우리 교회 집사님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교인들 모두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가톨릭 계통 사람들이나 순복음 실업인회, 그 밖의 교단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 동안 기력이 다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주여, 제가 파산을 하고 경멸의 대상이 될지라도, 제가 교회와 현재의 직위와 저의 사역 전부를 잃게 될지라도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삭이 내 것이냐?”

 

교회는 목회자가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까지는 진정한 부흥을 이룰 수 없다.

 

우리 교회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나 개인 속에서도 계속 역사하셨다.

머지 않아서 나는 내 설교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설교는 인간이 꾸민 것이요, 사람을 홀리는 말투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그릇에서 역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스타일의 설교를 그만 두기로 하였다.

 

그 대신 나는 성령님의 인도에 내 맡기기로 작정했다.

나는 설교자로서의 자존심을 제단 위에 바쳤고 내 설교를 하나님 앞에 내놓았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내 말씀에 기름 부어 주시도록 간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나를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대로만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구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마치 시원한 수도물처럼 나의 사역은 성령님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얻어내려고 토요일 밤이면 몸부림치던 나의 버릇도 사라졌다.

오랜 시간을 이 교리 저 교리를 꿰어 맞추는 작업 대신에 나는 일주일 내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찬송하고 또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영감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교인들이 그런 요청을 한 바도 있지만 이제 나의 예배 진행은 아주 기쁨이 넘치는 것이 되었다.

나는 토요일 밤을 편안히 자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고 주일 새벽이면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설교 메시지가

내 마음 깊은 곳에 와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설교만으로는 충분한 것이 못되었다. 나는 사역을 해야 했다. 성령께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나는 설교의 스타일이 바뀌었고 버팔로우의 다른 곳에서 성도들이 그곳 담임 목사님들과 나누는 것과 꼭 같은 식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고장 목사님들도 결국은 같은 한 권의 책, 다시 말하면 성경 한 권을 통해 설교를 마련해 왔던 것이며 이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흐름 속에서 함께 흐르게 되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오래된 감정은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맥박치고 있었다.

하나님의 몸 전체를 통해 흘러넘치는 메시지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기름 부음은 우리가 기도 하고 구하는 대상이라기 보다 우리가 그 속에 흘러들어가야 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왕국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가 될 때 기름 부음은 거침 없이 우리의 몸에 흘려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물결 속에서 함께 가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우리가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신

별로 대단치 않은 원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는 오늘 날 교회에서 두 가지 큰 비극을 보게 된다. 그 하나는 “사람 찾기”(people quest)다.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또 줄기차게 사람들을 긁어 모으거나 주일학교 참석 인원수를 늘리기 위해 사람을 찾아나서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내 교회를 통해 교회가 불순한 동기의 기초 위에 성장할 수도 있으나 공동체 내의 다른 교회 성장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는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비극은 아주 묘한 이야기가 되겠으나 바로 그 “사람 찾기”의 이면(裏面)으로 눈에는 잘 뜨이지 않지만

“교회는 사람이다.”(Church is people)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제 8 장 교회는 곧 인간이다.

 

나는 오순절 운동의 원로인 J. Robert Aschroft 목사님과 뉴욕 주 Syracuse의 어느 호텔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새 교회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내게 해준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토미 목사, 만일 내가 도시에 교회를 짓는다면 벽이 없는 교회를 짓고 싶어요.”

 

평생을 사역에 몸 바친 후 Aschroft 목사님이 터득한 진리는 오늘에 사는 우리 목회자와 평신도가 다 같이 마음에 새겨야 할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the church is not a building – it is people)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 건물을 지으라든가 교단 간판을 세우라든가 지도를 들여다 보고 인구 10,000명 이상의 도시를 찾아 그 곳에다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기념비적인 건물이나 교단의 방대한 기구를 만들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기보다 예수님은 사람을 찾았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을 구원하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버팔로우에 있는 동안 이런 깨달음은커녕 심지어 내 교회 교인이 상당수 늘어난 후에도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우리 교회 교인들은 교회 건물에 유난히 집착하는듯 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기초 건물이나 가정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오늘 날의 교회는 이러한 예배 태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렇게 때문이다.

많은 목사님들은 오랫 동안 가정 성경학습(Home bible studies)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일부 목사님들은 사람들이

가정 성경 학습에 너무 매달리게 되면 교회에 신경을 덜 쓰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방법이 목회 사업의 최우선의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목회자들은 교회 건물에 투자한 거대한 재산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 건물 전면에 교단 간판을 세우는 일에 마음을 쏟기를 원하시진 않는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일 교회 건물이 불타고 교단이 해체될지라도 교회는 계속 존속해 갈 것이다. 무리를 이루어 예배를 드리지 않더라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로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집이나 서식 행위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는 건물 자체가 존재 이유처럼 되고 있다.

목사님들은 건물이 우뚝 솟아 그럴 듯해 보일 때 교인들은 교회에 대해 책임의식을 더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는 실은 목사님들이나 자기의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모시고 그의 인도를 따르려는 것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면 자기 자신이 교인들의 신임을 얻을 자신이 없다는 것을 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사역을 하려 할 때 특히 그러하다. 이런 목회자는 양 무리의 영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오도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교회는 성서적 표적을 잃는 결과가 되고 만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교회 건물은 일의 시작이요 목표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교회의 벽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사도 바울이라면 뉴욕 시에서 어떻게 교회를 지을까? 그는 고린도에 교회를 세운 것과 꼭같은 방식으로 세울 것이다.

그는 전도할 때 건축 계획을 놓고 시작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다.

그는 사람을 구했고 그의 지도력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가 임명한 장로들을 따르게끔 가르쳤다.

바울은 한 번도 교회 건물에 헌신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몸 바치라는 설교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 지도자들은 건물을 짓는 일 보다 가정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 속에 교회를 짓는 일에

더 열심을 다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인도하도록 임명된 일군들에게 헌신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일 바울이 오늘 날에도 전도 사업을 한다면 그는 모든 관심을 사람에게 집중 시킬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 사업에 참여케 하고 장로를 임명할 것이며 그들을 이웃으로 보내 수 천 개의

작은 예배 구역(prayer cells)을 조직해 그것이 온 도시에 확장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공장과 은행, 사무실, 식당 그리고 각 사회 계층과 빈민굴과 교외 주택지로 보낼 것이다.

 

바울이 세운 교회는 가정 안에 있었다. 그 교회는 어떤 건물의 일부라기보단 가정의 일부였다. 따라서 오늘날 성서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일부 교회들은 그들이 오래 도안 의지해 온 전통적인 예배 방식의 한 두 가지를 버리고 있다.

 

예컨대 Ron Haus 목사님은 그와 그의 교회 임원들이 더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 구역 조직 때문에 점점 쇠퇴해가는 주일 저녁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고 실토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웃을 파고드는 교회 즉, 구역 예배조직이 위력을 나타낼 때가 머지 않아 오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판에 박은 듯한 낡은 방식의 교회는 오늘날 미국 전역에서 보다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 새로운 흐름 앞에서

쇠퇴하고 말 것이다.”

 

Haus 목사는 앞으로 교회 건물이 영적 성장과 관련해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널리 만연되고 있는 건물짓기 병으로 말미암은 비극은 아직 끝날 엄두를 내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영적 기반인, 곧 사람에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교회를 원위치로 다시 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사람 중심으로 예산을 짜야하고 사람 중심의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교회가 건물이라는 낡아빠진 개념을 벗어버리고 진실로 그리스도께 우리의 헌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교회를 손수 지으시겠다는 뜻을 내게 확인시켜 주셨으며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자기를 내드렸다.

나는 다만 우리 교회와 교회의 모든 계획, 즉, 교인과 건물을 다 함께 하나님께 양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끌어 가시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별 다른 프로그램이 없다. 교인 수를 늘리려는 목표나 헌금을 측정하는 계측기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통해 당신의 목표를 달성하신다.

물론 그렇다고 목회자가 일손을 멈추거나 될대로 되라고 버려 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인들은 성령의 흐름에 순행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시공을 초월, 개인이나 집단에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계획된 부흥회나 제단 위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특별 행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언제 어디서나 흘러 오신다. 왜냐하면 이제 교회는 성령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강력하면서 간단한 교회성장 원리, 즉, 성령의 물결, 그 흐름에 순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차트 위에 세운 목표를 뒤쫓는 것이 아니다. 비젼(Vision)을 쫓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매달려온 Vision이 그 당시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이삭을 주님께 드리고 나자 곧 적극적이며 강력한 사역의 도구로 사용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비젼을 보여주실 때 그 사람은 매일 그 비젼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사역을 이끌어 가려 한다면, 기도실에서 매일 그러한 비젼의 새로운 차원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살려고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비젼을 보여 주실 것이다.

 

 

나는 사역을 하는 동안 비젼 없이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던 때가 가끔 있었음을 기억한다. 교회 성장이 그쳤을 뿐 아니라 교회 가체가 쇠퇴해 들어가는 때가 실제로 있었다. 한 동안 주일마다 좌석이 점점 비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사태에 관해 일부 친구들과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왔을 때야 비로소 그 원인을 깨달았다. 과거에 교회가 성장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지 내 능력으로 인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로부터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비젼 속에서만 살고자했다. 나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비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이것이 전부였다.

 

우리 교회에는 이제 참된 목표가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 임원들 마음 속에 그 목표를 심어 주셨다.

그러나 이 목표는 사심이 없는 것이고 토미 리이드나 그 어떤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세우기 위한 비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버팔로우 시를 전도하기 위해 다른 교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의 방향이 달라질지라도 성령님과 동행할 것이다.

나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기도가 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

“주여,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강대상에서 내려와 기도실에 들어가라고 할 때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틀림없이 하나님의 비젼은 실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어떤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그 사람 주변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회사는 교회가 얼마나 성령의 역사를 외면한채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거역한 목회자들의 교회 부흥 정도를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역사하기 시작할 때부터 매일 같이

“성령님, 오늘은 어느 곳에서 일하시겠읍니까? 성령님께서 오늘의 비젼을 어떻게 이루시고자 하십니까?”라고 묻곤 한다.

 

한때 제자리 걸음만 해오던 교회라는 바퀴는 이제 전진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과 연합된 완전한 개념, 즉, 교회에 대한 하님의 비젼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뒤를 밀어주기 시작해셨다. 다가올 미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속에서 교회에 관한 가장 진부라고 광범위한 관념들을 제거해버리는 대신 그 자리에 버팔로우

시의 사역 전체를 흔들어 놓을 진리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통해서 일하신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한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시종 예수님이야말로 몸의 지체를 인도하시는 교회의 참 머리가 되신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몸의 지체에 대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하셨다.

 

처음 예수님은 그의 열 두 제자에 대해, 나중에는 70명에 대해, 그보다 더 뒤에는 수 백명의 추종자들에 대해, 다시 말하면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회자, 교사와 같은 직분에 합당한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했다(엡 4:11).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각기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 받았다.

 

예수님은 택함 받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 받는 것은 몸된 교회의 모든 지도적 직분에 대한 권위까지를 통틀어 위임 받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새삼 놀랐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1:5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장로의 자격에 대해 계속 이렇게 말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7~9)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장로란 말은 관리자(administrator)를 뜻한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를 집사(deacon)나 목사에 대해 교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장로는 두 가지 책임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서 어느 도시에서나 직분을 맡긴 사람들을 뜻한다. 그 두 가지 책임이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 그리고 바울이 말한대로 목사나 복음 전도자, 선지자, 사도 같은 지도적 직임을 맡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직임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장로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이면에는 단일 교회 도시(single-church city)의 개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도시마다 하나의 대교회를 갖되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아니라 많은 장로들(multiplicity of elders)이 인도하는 교회를 갖게 하려 하신다.

이웃 목사님들과 내가 마치 한 교회를 인도해 가듯히 협력할 때, 마치 우리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팔을 잡고 지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보다 빨리 접근하게 된다.

 

우리 각 사람은 각자가 시무하는 교회의 수석 장로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 우리는 모두가 버팔로우 시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협동 장로(Co-elders)인 셈이다.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 디도가 우리에게 직분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계획 안에서 볼 때 다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마음이 편협된 목회자는 이 분야의 일을 하나님의 인도에 잘 내어 맡기려 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거나 성령의 흐름과 동행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당혹감을 주고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성령님이

하나님의 교회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온 세계 교회에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제 10 장 동역자와의 관계

 

공산주의는 미국인 개개인을 그들의 마음 가짐에 따라 위협하기도 하고 화를 내게 하기도 한다. 개인의 헌신과 노력에 의존하는 부(富), 즉, ‘국가의 부’(state pot)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개념은 자유 기업,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개념과는 상치된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자들이 초대 교회의 형태가 사회주의적이었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당연히 도외시 한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초대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를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every-man-for-himself)는 개인주의 사상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서로 의지해서 살았고 교인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살았다. 그들은 서로가 언약 관계에 있었다.

 

성경은 그들이 매일 빵을 나누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빵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언약의 상징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빵은 생명의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의 교인들은 그들의 부와 힘과 생명까지도 주고

받는 언약 관계를 맺고 있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모든 것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진리를 도외시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회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는 현대 교회와 현대 미국사회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서 그것들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초대 교회의 모형에 기초하여 볼 때 우리는 오늘 날도 하나님 뿐 아니라 같은 교인들 사이에도 언약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 기업을 신봉하는 것에 관계 없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의 돈과 힘과 생명까지도 나누어야 한다.

 

 

대부분의 큰 교회는 많은 급료를 받는 목회자와 그렇지 못한 목회자들이 함께 어울려 일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중부 지방에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두 대의 캐딜락을 굴리며 마치 왕 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목사님 밑에는 한 동안 협동 목사님 내외가 함께 일했다. 그들은 하루 15시간씩 고된 목회일을 도왔다.

 

남편 목사는 교회의 오르간 반주와 출판 관계 일을 맡아 보았고, 아내는 교회 도서관과 교회 음악 전반에 관한 업무, 그리고 담임 목사님의 서신을 타이프 치는 일까지 도왔다. 두 부부는 거의 매일 밤 열 두시까지 일했으며 그러다보니 아기는 보모에게 맡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받는 급료는 보통 공장 노동자들이 받는 액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완전히 지쳐 교회를 떠날 때 손에는 일전 한 푼 없었다.

그 반면 담임 목사님은 날로 부자가 되고 영향력도 커 갔다.

 

 

수 많은 다른 교회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나를 세우시고 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형을 본받도록 가르쳐 주심으로 해서 나는 목회자가 그들의 동역자들과 완전한 성서적 언약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언약의 첫째 표시인 옷을 교환하는 행위, 즉, 재물을 나누는 일은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많은 목사님들은 여러 해 동안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합당한 수준까지 끌어 올린 수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너의 이삭은 누구의 것이냐?”를 물으신다.

 

내가 버팔로우의 장막 교회를 맡은지 얼마 있지 않아 교인들은 나에게 교회 수입의 비율에 따라 급료를 지급해 주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나중에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자 이러한 결정은 내게 유리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밖의 재정적 도움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숙모님이 내게 주기로한 재산을 교회에 도로 바치도록 명하시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편안했으며 또 수입은 내가 필요로 하는 이상이었으므로 교회에 대한 나의 충성은 더해만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그와의 언약 관계 속에서 다루기 시작하시자 나는 돌연 나의 동역자와의 사이에도 언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소유가 실은 그들의 것이기도 하였다. 내가 받는 배당의 비율은 내 것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의 것이었다.

 

만일 내가 몸된 교회 안에서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그들 역시 목회자로서의 정당한 수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출발이란 다름 아닌 가장 민감한 언약 즉, 옷을 교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나에게 베푸는 대우는 나의 동역자들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깨달음이 있는 날로부터 나와 나의 동역자들은 교회의 같은 특별기금에서 급료를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필요한만큼의 돈을 특별기금에서 끌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지난 몇 해 동안 나의 동역 목사들은 나보다

더 많은 돈을 그 기금에서 인출해 썼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언약 자체가 그러하듯이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같은 호주머니(common purse)가 마련된 것이다.

 

 

언약의 또 다른 항목은 ‘무기의 교환’(exchange of weapon)이다. 이것 역시 필요한 것을 채우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수석 장로(head elder)의 입장에서 나의 장로님들과 힘을 합하고 정력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윗과 요나단이 무기를 교환했듯이 나는 가진 힘을 송두리째 그들에게 주어야 했고 그들 역시 나에게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힘의 교환은 나와 동역 목사님들이 지난 세월 동안 온갖 일을 함께 대처해 가는데서 얻어진 것이다.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밤 중 긴급 사태에 이르기까지 동역 목사님들은 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어려운 일을 처리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들은 나와 힘을 서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내 아내를 통해 잠든 나를 깨우느니보다 그들은 자기네까리 일을 처리하곤 했다.

 

나 역시 그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해 왔다. “뭐니뭐니 해도 당신은 나를 보좌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소.”라는 식의 우두머리 목사(Kingpin pastor) 노릇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날 나의 동역 목사님들은 협동 장로님들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순종한다. 그들은 나의 종이 아니다. 설령 내가 그들을 인도하는 입장에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다 함께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따름이다.

 

 

세번째로 언약은 우리가 목숨까지도 나누기를 요구한다.

이 언약 관계의 참 모습은 실제적인 ‘죽음의 언약’(death covenant)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과 언약 관계에 있었듯이 나 역시 나의 동역 목사님들과 ‘죽음의 언약’을 해야 하며 목숨까지도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언약은 그것이 몸된 교회의 교인들 전체가 실천에 옮기기를 바라기에 앞서 목회자들 스스로가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 지상의 언약 관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볼 때 죽음의 언약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죽음의 언약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셨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나와 장로님들은 그리스도의 생명 즉, 거룩함과 의로우심을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게 함으로서 죽음의 언약을 실천할 수 있다.

 

나는 장로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야지 인간 Tommy Reid를 들어내서는 안된다. 만일 내가 이기심과 나쁜 성미와 탐욕과 시기와 그 밖의 육신적인 것을 들어낸다면 그것은 내가 장로님들 앞에서 나를 위한 인생관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죽음의 언약 관계에 있다면 나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 즉,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을 나타내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언약의 형제를 위해 나는 죽음을 무릅써야만 한다. 죽음의 언약의 결과 하나님과 인간은 교통이 회복되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과 생명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나와 장로님들과 맺은 죽음의 언약의 결과 역시 교통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교통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마음의 정결을 유지하게 해 주신다.

 

목회자들이 서로 언약 관계에 있음을 밝히는 것은 교회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밝혔듯이 목회자들 역시 자기의 장로님들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구역 조직이 모두가 언약으로 맺어진 집단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특별히 교회에 와서

자선 기금을 낼 필요는 없고, 교회까지 구제품을 실어나르는 일은 필요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 집단 속에 있는 가난한 자는 이미 가족들 사이에서 보살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구역 단위로 해결되지 않을 때 비로소 교회가 지원하면 된다.

 

먹을 것을 도와주는 따위는 부분적인 일에 불과하다. 병자를 위한 기도와 지원은 주일 예배 때 목사님이 불러세워 기도해 주는 일외에 언약의 형제 자매 즉, 구역 식구들의 도움을 받도록 되어야 한다. 구역 형제자매들은 병원에서 철야하며 같은 구역식구의 병상을 지켜 줄 수 있다. 집에서 나다닐 수 없는 사람은 목사님의 심방보다는 구역 식구들의 보살핌이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역 조직은 어디 까지나 목사나 협동 목사 등 목회자와의 관계를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자기의 재물과

노력과 생명까지도 장로들과 나누려할 때, 그리고 목사가 장로들을 대하듯이 동역 목사들과도 최우선의 대우를 하려 할 때

비로소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이상적 모형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모형은 진정한 교회 성장의 전제 조건이다. 나는 교회 성장이란 개념이 20세기에 들어와 생긴 말이요 더욱이 교회의 초대형 성장은 1970년대에 생겨난 개념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교회 성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사역이면 어찌할 수 없이 나타나는 부산물이다.

 

 

더우기 하나님의 눈은 우리 인간이 보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교회 성장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성장은 대중(mass)이 아니라 동력(energy)이요, 동력은 곧 영(spirit)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헌신하고 교인들이 상호간에 헌신할 때 그리고 언약 관계가 힘을 발휘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 그러한 성장은 가능하다.

그와 같은 힘찬 전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경 속에 하나의 교회를 지으셨을 뿐이다. 세계 교회는 하나의 실체이며, 이미 하나님의 것이다. 오직 자아 의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성령에 의지하는 목회자는 그 어느 때보다 교회 존립의 극적이며 성서적 전제를 찾아내고 있다. 어느 한 도시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통틀어 볼 때 오직 단일 그리스도 교회(One Christian Church)가 있을 뿐이다.

 

 

우리 목회자들은 많은 장로들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왕국 건설의 시대는 지났다. 남의 교회 교인들을 훔쳐내는 시대도 지났다. 양 무리를 지키는 목자는 함께 일해야 하며 목회자는 교인을 섬기는 장로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가르치고 서로 사랑하며 여러 도시의 장로들이 일체감을 이루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완전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건물 지향적(building oriented)이 아니라 인간 지향적(people oriented)으로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이웃 교회 죤스 목사님을 앞질러 더 큰 기념비적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건축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커다란 충동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 때 건축 자재와 원동기와 각종 도구의 노예가 되어온 교회는 이제 교인들을 섬기는 곳이 될 것이다.

사회 복음(social gospel)에 냉소적이던 사람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미래 교회의 예산은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예산은 가난한 자를 먹이고 핍박 받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데 쓰이도록 될 것이다.

 

 

내일의 교회는 교회 참석자의 수를 늘리는데 보다는 영혼 구원에 더 많은 돈을 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의 합동 예배나 가정 예배할 것 없이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임을 인정해 주는

성서적 개념으로 복귀할 것이다. 내일의 교회는 그 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를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성령님이 역사하고, 목회자들은 각자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모든것을 성령님께 내어 맡길 때

우리의 교회 건물은 새로운 결신자들을 미처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것이다.

 

그때 가서는 우리의 교회 재정을 아무리 많이 늘려도 재래식 예배 방식으로 교인을 모두 수용할 만큼 충분한 시설을

마련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건물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교회가 되길 원하신다.

 

 

그리고 앞으로의 교회는 ‘하나님 왕국 지향적’(Kingdom-oriented)이 될 것이지 더 이상 ‘인간 왕국 지향적’(Empire-oriented)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도시마다 목회자와 종교 단체들은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목회자들 각자가 같은 도시의 다른 사역자들을 장로권의 동역자(co-eldership)로 인식하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왕국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단들은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왕국의 건물 속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을 가리켜 지상의 교회가 이루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일하고 있는 교회는 이 땅의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조직이다.

 

교회의 머리된 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 땅의 교회에 대한 사령탑은 하늘에 있다.

교회를 다스리는 율법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책이다.

 

교인들은 이 땅에 존재함과 동시에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교회는 성공을 추구해야 할 뿐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주후 이래 처음으로 인간의 마음이 단합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함으로 얻어진 결실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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