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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8.녹록지 않았던 생활, 그러나 은혜가 넘쳐났다 / 김도일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3.26|조회수45 목록 댓글 0

8.녹록지 않았던 생활, 그러나 은혜가 넘쳐났다

  •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3.03.21 18:58

◇ 1989년, 수진이의 두 번째 생일잔치

 

   결혼 적령기란 것 외에는 결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소설에서나 보던 데릴사위가 되었다. 본격적인 공부도 시작되지 않았고 이민 생활의 틀도 잡히지 않았다. 영어로의 소통도 여전히 엉성했고, 문화를 돌파하기는커녕 새로운 문화를 이해할 여유도 없었다. 한국에서의 안락했던 경제생활과는 딴판으로 가정의 경제 형편은 최악의 상태였기에 장남으로서 심적인 부담도 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미국에서 자동차공업사, 공장업무. 청소원, 슈퍼마켓 현금출납원,

가정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해봤고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경제생활이 안정된 적은 없었다.

 

   그러한 생활의 분주함을 뚫고서도 영적인 개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네비게이토 2~7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나성영락교회 대학부의 제자훈련과 청년부에서의 임원을 맡으면서 그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성경공부 인도와 찬양 인도, 봉사, 그리고 무엇보다 김계용 목사님의 맑고 지혜로운 설교와 그분의 삶을 통해 매우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대학부의 송영선 전도사님은 학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나와 친구들(훗날 동역자가 된 황인철, 김경환 목사)을 존중하며 이끌어 주신 것도 큰 몫을 했다.

 

   그러다 어찌어찌하여 결혼한 후, 나의 영적 여정의 개혁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함께 살게 된 장모님은 잠시 자고 먹고 하는 시간 외에 온종일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환자를 돌보는 신기한 삶을 살고 계셨다. 장모님이자 권사님인 그분은 알고 보니 장로교에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다 젊은 시절 두 번의 암을 기도로 이겨내고 치유의 은혜를 고백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급기야 자신의 약한 몸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되었고, 때때로 임재하는 성령님은 그분의 손을 통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

 

정작 본인은 언제나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고 고백하셨지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니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환자들의 행렬이 이어지곤 했다. 병든 사람은 밤과 새벽에 그 아픈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찾아오는 환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장모님과 함께 사는 아내와 나에게 일상이 되었다. 일하며 학교 다니던 젊은 커플은 아파트에서 하나뿐인 방을 차지한 채로 잠을 청하고, 장모님은 거실에서 환자를 종일 돌보셨다.

 

   아내는 평일에는 어린이집에서 가르치고 주말에는 유년주일학교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다. 나는 영어가 조금 익숙해져 바이올라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풀타임 학생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정 부분 생활비도 감당해야 했던 터라 수업이 끝나면 과외수업을 해주기 위해 낡은 자동차를 몰고 하루에 150km 이상을 운전하며 세 팀을 가르쳤다. 너무 고단해서 학생이 수학 문제를 푸는 짬을 빌어 잠시 졸았던 기억도 난다.

 

주중에는 학생으로, 가정교사로 주말에는 교회학교의 교사로 섬기다가 바이올라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들어가게 되자 동양선교교회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교육전도사로 나를 초대해주었다. 그리하여 부부가 같은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장모님과 부모님이 의기투합하게 하시고 두 젊은이가 일종의 순종을 하지 않았다면, 나의 형편에 결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젊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나의 형편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 강력하였기에 그대로 따라갔다.

 

   결혼한 지 일 년이 겨우 되었을 때, 첫째 수진이가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다. 임신한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정 형편이 아직 넉넉지 않았고 아기를 키울 장소도 마땅치 않았는데 덜컥 손님이 찾아왔다며 흘린 눈물이었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나 첫 손님 수진이는 우리 곁에 찾아왔다. 상황이 좋아진 건 아무것도 없이 오히려 기저귀, 분유, 아기용품 등을 마련할 비용만 더 늘어났다. 아내와 나는 어린이집 교사, 대학원생, 전도사, 가정교사로서 도에 넘치게 뛰고 있었다.

 

그나마 장모님이 자녀들이 보내주는 용돈과 나라의 지원금 등을 모아 주셨기에 우리는 월세를 덜 내는 것으로 늘어난 부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눈치채고 어떻게 해서든지 장학금을 지원하려고 애쓰셨다. 물질이 궁핍하니 매달릴 데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결핍들이 나의 신앙을 더 단단하게 이끈 샘이다.

 

   장모님은 거실에서 수진이와 함께 지내면서 은연중에 “수진이가 자신을 그리스도인 외에 다른 존재로 알지 않게 양육”하셨다. 장모님이 호레이스 부쉬넬의 기독교적 양육을 아실 리 만무했으나 훗날 공부하고 보니, 말로 하는 교훈이나 가르침보다 삶으로 신앙 정서(sentiments)를 전수하는 것이 신앙교육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수진이는 손님이 오면 울다가도 바로 그치고, 똑바로 앉아서 같이 예배하며, 기도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아가 신자가 되었다. 이제 36세가 된 수진이는 세 아들의 엄마로서 기도의 용사가 되었는데, 아마도 어릴 때부터 피부로 느끼고 배운 기도의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넉넉함과는 거리가 먼 결혼 생활이었지만 전심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기도하는 어른이 곁에 계셔서 놀람과 은혜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었다.

 

장모님은 내가 장로회신학대 교수가 되자마자(2001년) 칠십 대를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노환으로 소천하셨다. 경기중학교와 창덕여중에서 수학교사를 하셨던 한 번도 뵙지 못한 장인어른(그는 1975년에 돌아가셨다)이 계시는 곳으로, 한 아들과 여섯 딸을 키워낸 어머니로서의 생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1978년에 처음 한국에서 대학물을 먹었던 나는 군대복무를 마치고 도미하여 전공을 바꾸는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교육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아내는 바이올라대학교 기독교교육학 학사과정을 마치고 석사과정에서 일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나 또한 내게 잘 맞고 흥미를 느끼던 기독교교육학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먼저 공부하고 있던 아내와 한날에 졸업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리 급하게 할 일도 아니었는데 당시 나의 동기들은 이미 학업을 마쳤다는 생각에 밤낮없이 공부하며 택할 수 있는 학점을 최대로 하여 일 년 반 만에 졸업한 것이다. 절실한 마음이어서 그랬는지 학업성취도 성공적이었다. 나를 지도하던 교수님들은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교에 가서 박사학위를 하고 돌아와 함께 교수로 일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토양에서 자라났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나성영락교회의 김계용 목사님 때문인지 장로교신학교나 최소한 풀러신학교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라는 경건한 생활을 중시하는 선교중심의 학교였지만 세대주의를 기초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세대주의는 종말론에 있어 전천년설을 주장하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Church)의 개념은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바이올라의 신학적 성향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으나 세상과의 분리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신학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린 사람이 신학적 성향만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결정하기엔 무리였다. 그리하여 나는 중립적인 신학을 표방하는 풀러신학교에 들어가 개혁신학을 더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입학허가를 받았다.

 

바로 그때 섬기던 교회에서 새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지지자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1990년 당시 어린이 교육부를 총괄하던 전도사인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아직 30대 초반 전도사인 내가 교회분쟁의 중심에 들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기도하던 중에 이곳 서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동부의 프린스턴 신학교로 지원해야겠다는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프린스턴은 바로 나를 받아주지 않았고 길고 긴 인터뷰 끝 이듬해에 나를 받아주어 91년 가을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가까스로 정착한 곳을 떠나 3,000마일(4,800킬로미터)을 가는 대륙횡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측불허의 인생살이가 늘 그렇듯 유머와 개성이 넘치는 둘째 예진이가 우리에게 찾아온 때가 그때였다.

하지만 계속되어야 할 공부의 여정이 동부로 정해진만큼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생활은 거기까지였다.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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