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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역경의 열매] 손봉호 (1~4) 해마다 생일이면 가난과 죽음의 아픈 어린 시절 떠올라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4.24|조회수12 목록 댓글 0

[역경의 열매] 손봉호 (1) 해마다 생일이면 가난과 죽음의 아픈 어린 시절 떠올라

굶주림·전염병에 시달리던 일제강점기
아이들 중 절반이 한돌 전 세상 떠나자
선친께서 1년 기다렸다 늦게 출생신고

입력 : 2023-04-18 03:04

일제 강점기 시절 경북 포항 북구 상원동의 거리 풍경. 포항시 제공


내가 태어난 곳은 이원수 시인의 고향처럼 봄이 되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학야리다. 지금은 포항시 북구다. 그러나 나에게 각인된 고향의 풍경화는 그런 ‘꽃 대궐’이 아니라 가난, 배고픔, 아픔, 죽음으로 점철된 잿빛 세상이다.

나는 평생 매년 한 번씩 그 어두운 풍경을 떠올려야 한다. 내 생일에 그 아픔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937년 5월 14일(음력)에 태어났지만 1938년 8월 18일에 출생 신고가 이뤄져 그날이 나의 공적 생일로 정착되었고 지금까지 그 가짜 생일을 지켜 왔다. 수십 년간 정직 운동을 했는데 80 평생 가짜생일을 지키고 있으니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에 태어난 아이들은 거의 절반이 한 돌 안에 죽었기 때문에 선친께서 1년을 기다리셨다가 그래도 죽지 않으니 출생신고를 하신 것이다. 내 동생들은 넷이나 돌 안에 죽었고, 그 죽음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가슴에 멍이 되었으며 우리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오후반에 등교한 동생이 오전반에서 공부하던 나를 찾아와 “히야(형아), ○○가 죽었다”고 알려줬을 때 어린 가슴에 차올랐던 슬픔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일찍 죽음의 아픔을 경험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초여름, 학교 수업을 마치고 혼자 가랑비를 맞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아기를 업은 젊은 부인 하나가 들길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토성동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왜 우시느냐고 물었더니 등에 업은 아기가 아파서 병원이 있는 안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아기가 방금 죽었다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정신이 혼미해져서 방향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비가 억수로 내린 그 날 밤이 새도록 흐느껴 우셨다. 그 젊은 어미가 너무 불쌍하고 얼마 전에 죽은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입도선매(立稻先賣)라 하여 벼 추수가 이뤄지기 전에 면사무소 직원이 논에 바로 와서 공출할 곡식 양을 결정하고 추수가 이뤄지면 즉시 빼앗아 갔으니 주민들이 굶는 것은 당연했다. 어렸기 때문에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소나무 껍질은 질겼고 칡뿌리는 쓰기가 짝이 없었다. 그런 굶주림은 일제 때뿐만 아니라 해방된 후 상당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거기다가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고 말라리아는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주린 데다 병까지 걸려도 병원은커녕 약도 없어서 살아남는 것이 기적이었다. 보릿고개에는 쪽박을 들고 밥 얻으러 오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없지 않았다. 모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을 어느 집에도 대문이나 자물쇠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도둑맞은 집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약력=1938년 출생,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철학박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한성학원 이사장,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밀알복지재단 이사장,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현 푸른아시아 이사장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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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손봉호 (2) 배움 한 맺힌 아버지 덕에 가난했지만 대학까지 진학

천재라 할 만큼 공부에 소질 있던 아버지
신식 교육 받으려면 상투 잘라야 하는데
유학자 증조부의 극구 반대에 입학 좌절

 

입력 : 2023-04-19 03:04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4년에 치러진 경북 포항 기계초등학교 1회 졸업식 사진. 손 교수는 이 학교 27회 졸업생이다. 기계초등학교 제공


비록 가난했지만 나는 특혜를 받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그 지역에 흔하지 않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가정에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문을, 어머니는 한글을 읽고 쓰실 수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유일했고 주위에도 드문 경우였다. 아버지는 그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까지 수많은 가정들의 제문(祭文)을 맡아 지으셨고 어머니는 혼사를 치른 부인들의 사돈지를 모두 대필하시거나 대독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분들이 가끔씩 감사의 표시로 가져 온 떡이나 한과를 먹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선친은 독자였는데 가히 천재라 할 만큼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하셨다. 증조부로부터 기본적인 한문을 배우셨지만 그 후에는 독학으로 소학(小學) 대학(大學) 주역(周易)을 공부하셨고 한시(漢詩)도 쓰셨다. 가끔 한문으로 된 삼국지를 큰 소리로 외우시는 것을 듣곤 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였다. 우리 동네에서 2㎞정도 떨어져 있는 면사무소 소재지에 기계국민학교가 개교했다. 아버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시고 그 신식 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러나 완고한 유학자였던 증조부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다니지 못하셨다. 학교에 가려면 상투를 잘라야 하는데 증조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은 바뀌었고 상투는 사라졌다. 그렇게 원하셨던 신식 교육 받을 기회를 놓친 아버지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때 학교에 다니시고 계속해서 신식 교육을 받으셨더라면 아버지는 꽤나 유명한 인사가 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 싶던 공부를 하지 못하신 것이 큰 한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많이 드셨고, 그 때문에 생긴 위장병은 온 식구의 걱정거리였고 아버지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배움에 대한 한은 아버지로서는 크나 큰 아픔이었지만 나와 동생들에게는 큰 복이 되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동생이 그 동네에서 가장 먼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여동생 둘도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 선친께서 이루지 못하신 꿈을 자식들이라도 이루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훗날 내가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도 그 지역에 유학자로 알려지신 아버지께서는 별로 반대하지 않으셨는데 이 또한 상투 자르기를 허용하지 않은 유교의 고루함에 불만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종가 시제에 제관으로도 참여하셨다. 하지만 내가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꾸짖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죽은 뒤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제사에 참석해라”고 딱 한 번 부탁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말씀도 순종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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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손봉호 (3) 산수 기호를 한문 숫자로 오인… 1+1=14로 풀어 매번 0점

집안 행사 있으면 결석 당연시 될 시기
산수 기호 배우는 날 학교 결석한 탓에
더하기, 빼기, 등호 등 기호 이해 못해

 

입력 : 2023-04-20 03:08

1950년대 한 초등학교의 수업 풍경 모습. 손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국민학교를 입학해 다녔다.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제공


1945년 4월에 입학시험에 합격해서 기계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해방이 된 8월까지 교실에 앉아 공부한 기억은 없다. 일본군용 목탄차 연료로 쓰이는 솔방울을 줍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해방이 되자 한글을 아는 교사가 한 분도 없어서 교회에 다녔던 4학년 학생(후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된 고 박석규 목사님)이 전교생과 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에서는 한글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한글에 능통했다. 얼마 후에는 면사무소 추천으로 우리 어머니도 동네 아낙네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셨다.

어쨌든 우리가 한글을 잘 배웠는데도 읽을 책이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임진록’이라는 필사본 소설 한 권밖에 가지신 책이 없었고, 그 책을 하도 여러 번 읽으셔서 몽땅 외우실 정도였다. 어떤 학생이 어쩌다가 한글로 된 동화책이나 만화책 한 권을 구하면 전교생이 돌려 읽을 정도로 책에 목말라 있었다. 얼마 후 처음으로 교과서가 배부된 날 나는 산수 책을 포함해서 모든 책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날 밤에 다 읽어버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해방으로 학교는 상당기간 갈피를 잡지 못했고 학부모들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몰랐으므로 모심기, 타작 등 집에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결석했다. 그러나 짬짬이 할아버지로부터는 천자문을 배우고, 아버지에게 한문 배우러 오는 동네 청년들 뒤에 앉아서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夢扁),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옛날 서당에서 사용했던 한문 교과서를 같이 배웠다.

그런데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다. 3학년 때까지는 전 학급에서 꼴찌였는데 산수 과목에서 계속 0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성적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셔서 꾸짖지 않으셨고 나도 왜 산수를 그렇게 못하는지에 별로 애달아하지 않았다.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 -, = 등이 더하기, 빼기, 등호란 것을 알았다. 한문을 배운 덕으로 3학년때 까지는 +는 10, -는 1, =는 2라고 이해해서 1+1=14란 식으로 이해했으니 0점 받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 산수 기호를 배우는 날에 결석했던 것 같다. 한 학급에 학생이 거의 70명이나 되었으니 담임교사도 나의 산수 0점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 글자가 한문 숫자가 아니라 산수 부호란 것을 알고부터는 산수에도 100점을 받아 4학년 때부터는 학급에서 늘 1, 2등이 되었다. 늘 꼴찌였던 녀석이 갑자기 1등이 되니까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와이로(뇌물)’ 준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부모님은 꼴찌였을 때도 꾸짖지 않으셨지만 1등이 되었을 때도 칭찬하지 않으셨다. 옛날 서당에는 1등, 2등 같은 것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공부하란 말씀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덕으로 공부는 나 자신의 몫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아들, 딸, 손녀들에게 일찍 자라고만 했지 공부하란 소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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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손봉호 (4) 학교 앞 논둑 총살 장면, 80년이 지났어도 눈에 선해

공산주의 이념에 매료된 빨치산들
한밤중 마을 급습 식량 등 빼앗아
그들 가운데 전향한 보도연맹 사람
6·25전쟁 나자 재전향 우려해 제거

 

입력 : 2023-04-21 03:04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 부역 혐의자들이 연행되고 있다. 국민일보DB


배고픔과 질병 다음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했던 것은 공산주의란 이념이었다. 물론 나는 그 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나쁜지는 전혀 몰랐다. 나뿐 아니라 그 시골 주민 대부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깊은 산골에 그 이념에 매료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걸핏하면 빨치산들이 한밤중에 마을에 들이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에는 악독한 지주나 부자가 없었기 때문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거나 집에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뜩이나 부족했던 식량과 생필품은 많이 빼앗아 갔다.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아버지만 신문을 구독하셨는데, 그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지 빨치산이 동네에 내려왔을 때마다 예외 없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다행히도 빨치산들 가운데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이 급습할 때마다 미리 귀띔을 해 준 덕으로 아버지는 동네 다른 집으로 피신하실 수 있었다. 파출소가 2㎞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버지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질 정도로 시간을 끌지는 못했고 아버지가 그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매번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이 지나 간 다음날에는 반드시 순경이 찾아왔다. 왜 그놈들에게 식량을 주었느냐고 다그쳤지만 어쩔 수 없어 빼앗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파출소로 잡혀가진 않았다. 아버지께서 피신하신 것도 빨치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해를 받고 파출소에서 시달리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쨌든 무고한 양민은 이래저래 힘들기만 했다.

빨치산 가운데 상당수는 잡히거나 전향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전향한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란 단체에 소속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이 다시 좌익으로 전향해서 북한군을 도울까 남한 정부는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 것 같다. 그 상세한 곡절은 잘 모르지만 어떤 재판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보도연맹 사람들을 군인들이 총살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내가 다녔던 기계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살하겠다는 것을 교장 선생님이 애걸해서 학교 바로 앞 논둑에서 집행했는데 전교생이 창문을 통해서 보고 말았다. 평생 처음,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총으로 사람을 직접 죽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가? 80년이 지났는데도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구의 아버지 한 분도 그 시대에는 좀 개명된 분이었는데 보도연맹에 소속되었다가 총살당했다.

돌이켜보면 이념 때문에 우리만큼 고통을 많이 겪은 국민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념 갈등이 다시 심해진 오늘날 성숙한 시민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반성하고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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