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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065. [역경의 열매] 김바울 (1-13) 종교의 나라에 ‘진정한 믿음’ 심는다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7.22|조회수34 목록 댓글 0



***간증: 1065. [역경의 열매] 김바울 (1-13) 종교의 나라에 진정한 믿음 심는다

 

나는 인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다. 뉴델리 중심부에 위치한 니잠무딘이란 지역에서 교회 개척과 개발 사역을 펼치고 있다. 니잠무딘은 이슬람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 무슬림 공동체가 모여 있는 곳이다.

 

2000년 3월, 인도에 첫발을 디딜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곳이 미전도 지역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무슬림도 1억8000만명이나 살고 있는 국가다. 이들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 잊혀진 사람들이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인도에 살던 무슬림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편입됐다. 그러나 북인도 무슬림은 조상 때부터 살아온 땅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소수 약자로 전락했다.

 

니잠무딘은 13세기경 무슬림이 인도에 들어올 때 정착했던 수피 성자(聖者), 니잠무딘 아울리야라는 사람에 의해 시작된 공동체 마을이다. 지난 800년 동안 외래 종교에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었다. 자연히 선교사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변방이었다.

 

인도 선교사로 오기 전 1999년 이곳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인구 20만명 정도가 살고 있었고 주민의 98%가 무슬림이었다. 기독교인은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극소수의 힌두교인이 함께 살았다. 그때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복음의 갈증 같은 것을 느꼈다.

 

인도는 내게 특별한 곳이다. 1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선교사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침례교 선교사들이 많았고 선배 한 명이 신학교 활동을 하자고 요청했다.

 

인도 여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콜카타에 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는데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나는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습한 더위와 냄새가 덮쳤기 때문이다.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역한 냄새는 내 생애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여행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이곳은 정말 올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며 다녔다. 4일째 되는 날 콜카타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세람포르라는 지역을 방문했다. 현대 선교의 창시자 윌리엄 캐리 선교사가 200년 전 사역했던 장소이자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의 무덤 주변을 돌아보면서 200년 전 이곳에 도착한 그의 삶을 상상해봤다. 영국인으로서 이곳에 와 사역을 하면서 더 심했을 냄새를 맡았을 것이고 더위도 심했을 것이다. 풍토병의 위험과 원주민의 방해에도 복음을 전하며 다녔을 그를 생각하니 창피했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온갖 문명 혜택을 받으면서도 덥고 냄새나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오지 않겠다고 했으니 부끄러웠다. 캐리 선교사의 묘지 앞에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주님! 제가 이곳에 오겠습니다. 윌리엄 캐리 선교사님이 이루지 못했던 사역을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 주십시오.

 

이후 열흘을 더 북인도 지방을 여행했고 북인도 선교 상황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은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주민이 예수를 모르고 죽어 가고 있다는 경악스런 현실 앞에 하루하루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위해 내 생명을 드리자.

 

나는 어떠한 악조건과 상황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바울 (1) 종교의 나라에 '진정한 믿음'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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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바울 (4) 예비하신 길로 가지 않을 때마다 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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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바울은=1961년 부산 출생으로 침례교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2000년부터 인도 선교사로 활동 중이다. 교회개척 사역과 지역사회 개발, 문명퇴치운동, 어린이 개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2) 다른 종교 믿다 처음 가 본 교회서 회심

 

나는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다.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 아버지는 나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우셨다. 내가 손에 힘이 없어서 물건을 잡아도 금방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서도 우셨다.

 

그 후 침을 잘 놓는다는 한의원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6개월을 다니면서 온몸에 침을 맞았다. 매일 형님 등에 업혀 한의원에 갔었고 2시간 이상 침을 맞았다. 놀랍게도 6개월이 지나자 회복되기 시작했고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소아마비는 한번 발병하면 회복될 수 없다고 들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에서 들어온 일연정종(남묘호랑게교)을 믿었다. 내가 아팠던 것과 어머니 몸이 좋지 않으셨던 것 때문에 더 열심히 모임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그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 종교를 열심히 믿으셨다. 하지만 병으로 누우시고 세상을 떠나시기 일주일 전 예수님을 믿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열심히 그 모임에 참석했고 일연정종의 경전을 읽고 주문을 외웠다. 하루 3시간 이상씩 동쪽 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외웠다. 가족 전부 그 종교를 믿은 것은 아니지만 유독 나를 예뻐하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나갔다. 나 역시 어린 마음에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신봉했다.

 

그러던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때다. 고등학교 선배가 교회에 한번 가자고 강제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일연정종에 심취해 있을 때 나는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사는가? 그리고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처음 교회에 갔을 때 한미전도대회라는 집회가 한창이었다.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모임에 참석했는데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평안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곳에 무엇인가 있구나. 지금까지 내가 고민했던 질문의 답을 얻을 수도 있겠구나.

 

그 후 나는 아버지 몰래 교회에 나갔다. 성경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말씀을 읽는데 10장 10절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나는 이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됐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 침례를 받았고 남묘호랑계교에 열심을 냈던 그 이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집에서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대학 2학년 때 어느 날 아버지가 불렀다. 그리곤 성경을 내 앞에 내놓으셨다. 이것이 네 것이냐?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조용히 교회에 나가느냐? 하고 물어 보셨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성경을 던지면서 이것을 불태우고 집에 있든지 아니면 집을 나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3) 반기독교 가족의 핍박 말씀으로 극복

 

나는 성경을 들고 그 자리에서 집을 나왔다. 막막했고 어떻게 할 줄 몰랐다. 갈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은 없었고 옷도 집에서 입던 채로 나왔다. 아무 것도 없었다. 밤에 교회에 도착한 후 기도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구했다.

 

3일을 교회에서 기도만 했다. 배고픔은 목사님과 친구들을 통해 해결했다. 얻어먹으며 지냈다. 답답했다. 그러던 중 주일이 돌아왔다. 오전 예배를 드리고 갈 데가 없어 오후 어린이 예배에 참석했다. 마루바닥으로 돼 있는 교육관으로 건너가 예배실 맨 뒤에 앉았다.

 

대학 1학년 때 선배 형에게 강제로 끌려서 교회에 왔을 때도 맨 뒷자리였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막막한 상황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런데 그 예배가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나님은 어린이 예배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날 말씀을 전하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기 위해 주먹만한 돌 하나와 계란 한 개, 그리고 스테인리스 밥그릇 하나를 들고 강단에 올랐다.

 

설교 본문은 시편 46편 1∼3절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그 교사는 먼저 계란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돌을 들어 계란을 치는 시늉을 하면서 이 돌로 계란을 치면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물었다. 아이들은 깨어지지요라고 대답했다.

 

이번엔 계란 위에 밥그릇을 엎어놓고 그 위에 돌로 치면서 아이들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달걀 위에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엎어 놓고 이렇게 돌로 치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다시 말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피난처이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도와주시는 힘입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고꾸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본당에 돌아와 울며 기도했다. 그날 나는 용기를 내 집에 들어갔다.

 

그 말씀을 붙잡고 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가족들은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반대하고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나는 집에서 한 번도 학비나 용돈을 타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해야 했고 매번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나중에 모든 가족을 구원해주시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고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신다. 87세이신데 이젠 권사님이 되셔서 매일 새벽마다 우리 가정과 사역을 위해 기도하신다. 눈이 전혀 어두워지지 않아 1년에 세 번 이상 성경을 통독하신다.

 

그때부터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시편 46편1절 말씀처럼 밥그릇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계란과 같이 연약한 우리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보호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피난처이시다. 나는 그 하나님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간다. 행복하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4) 예비하신 길로 가지 않을 때마다 발병

 

1982년 군 입대 직전 목회자 소명을 받았다. 이사야 6장 8절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하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신학대학원에 가려고 했으나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직장 생활을 해야 했다.

 

직장 생활 8개월가량 됐을 때다. 휴가 기간을 이용해 청년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회 마지막 날 갑자기 턱 아래가 불편했다. 손으로 만져 보니 큰 혹 같은 것이 만져졌다. 병원 진찰 결과 침샘에 돌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돌이 침샘 입구를 막고 있어서 부어올라 혹같이 됐다는 것이다. 의사는 수술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직감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수술 대신 약물 치료로 전환하고 약을 먹었다. 다행히 부은 곳이 가라앉았고 그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본격적인 신학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신대원 3학년 때 만나 결혼을 했다. 우리는 부모님 전도를 위해 분가하지 않고 본가에서 살았다. 아내는 어려운 시집살이를 마다 않고 부모님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가 교회 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며느리의 헌신적인 섬김 탓인지 점차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시 아내와 결혼한 지 1년 만에 교회에 나가셨다.

 

그 후 3년이 지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예수를 영접하셨다. 하나님은 남묘호렌게교에 깊이 빠져 있던 우리 가족들을 그분의 계획대로 나를 처음 불러내셨고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으로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가족 구원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은 가족과 세대를 통해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대원에서 세계 선교에 눈을 뜬 후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의 길로 부르셨다. 하지만 곧바로 선교사로 나가지 못했다. 신대원 졸업 후 부산의 한 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막연했지만 확신에 차서 북한 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열리지 않았고 선교 소명도 점차 흐려졌다.

 

그러던 중 98년 초 왼쪽 두 번째 손가락 끝에 까만 줄이 생기더니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커졌고 의사는 손톱 무좀이라고 했다. 무좀약만 발랐다. 하지만 낫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져서 손톱 전체를 덮을 지경이 됐다.

 

몇 개월이 지나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암 진단이 나왔다. 악성 흑색종으로 동양인들에게는 많이 발병하지 않고 서양 사람들에게 가끔 발병하는 희귀암의 일종이라 했다. 치사율이 높고 치료가 어려운 암이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왜 이렇게 병을 달고 살까. 소아마비와 침샘 돌, 이번엔 암이라니. 수술을 위해 입원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술을 하면서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을 뿌리째 제거하게 됐다.

 

수술 이후 두 달이나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찬송을 부르며 손뼉을 치고 싶어도 치지 못해 안타까웠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손뼉 치면서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적인가를 그때 알았다. 나는 수술 이후 하나님께서 선교지로 부르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역을 내려놓았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5) 현지어 배우고 오다 사고 왼쪽 발 중상

 

1999년부터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12주간 과정에서 선교 전반을 배웠다. 선교에 대한 시각 교정과 구체적인 선교활동 내용을 총망라했다.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합숙하면서 배운 인간관계는 내 평생 소중한 시간이었다. 훈련생 가족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타인과의 관계와 협력하는 법 등을 배웠다.

 

훈련을 받는 동안 몇 차례 영적 전쟁도 겪어야 했다. 차를 몰다가 논두렁에 처박히는 경우도 있었고 아이가 아파 응급실을 찾은 적도 있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하나님은 나를 빚으셨다.

 

마침내 선교 훈련이 끝나고 2000년 봄,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인도에 도착했다.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말이 떠올랐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우리는 캐리 선교사의 꿈을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님을 기대했다.

 

선교사들은 현지에 도착하면 우선 집을 구하고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해당 지역 언어를 배운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움도 많이 발생한다.

 

언어 습득은 선교사에게 필수다. 복음을 전하려면 현지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북인도 니잠무르 지역 주민들이 사용하는 우르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우르드어는 아랍어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문법이나 단어는 산스크리트어를 차용하고 있어서 외국인이 배우기에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언어는 현지 문화와 역사를 반영한다. 말과 글을 배우며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하자 안개 걷히듯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우르드어를 배운 지 1년 정도 지났을까. 단순히 우르드어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지역에는 무슬림만 사는 게 아니라 힌두인들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힌두어도 배워야 했다. 그런데 힌두어를 배우면서 우르드어를 공부하니 서로 연결되면서 우르드어 학습이 쉬웠다. 두 가지 언어를 공부하면서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러던 중 사고가 터졌다.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9개월 무렵이다. 2000년 11월 8일 오후 7시. 그날도 우르드어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우리는 차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날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가까운 정류장에 내리기 위해 버스 앞문에 서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데 운전기사가 내리라고 했다. 너무 위험하게 보여서 버스가 완전히 정지하면 내리겠다고 했다.

 

결국 한 정류장을 지났고 다음 정류장에 내리려고 앞문 입구에 있었는데 버스가 지하도 공사장을 통과하면서 뭔가에 걸렸는지 갑자기 기우뚱했다. 차체가 심하게 흔들거렸고 이 바람에 문 앞에 있던 나는 중심을 잃고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동시에 버스 뒷바퀴가 내 왼쪽 다리를 타고 넘어갔다. 피할 새도 없었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여 있었다. 다리 상태를 확인했다. 왼쪽 다리는 거의 떨어져 나갔고 일부만 붙어 있었다. 끔찍했다. 피가 많이 났다. 황당한 것은 사고를 낸 버스 기사는 나 몰라라 도망을 가버렸다. 나는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이윽고 한 청년이 나를 안더니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6) 고난의 교훈 인도 영혼을 더 사랑하라

 

처음 도착한 병원은 의사가 없어 응급처치를 할 수 없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라 했다. 나를 데리고 온 청년은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당장 의사가 없다며 이튿날 아침에야 의사가 온다고 했다. 소독과 지혈만 해놓고 밤새 기다리라고 했다. 답답하던 차에 가까스로 아내와 연락이 닿았고 근처에 있던 선교사들도 내 소식을 접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밤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의사들은 내 상태를 확인했다. 밤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피가 모자란 상태였고 수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델리에 있던 선교사 가운데 다섯 명이 혈액은행에서 헌혈을 했고 나는 혈액은행에서 인도 사람들의 피를 수혈받았다.

 

다리가 회복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여요.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수술실로 들어가며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마음으로 응수했다. 그래, 마음을 굳게 한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수술은 꽤 오래 걸려 8시간이나 소요됐다. 수술실 바깥에서는 가족과 선교사들이 나를 위해 기도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왔다. 수술을 마쳤을 때는 두 다리 모두 붕대로 둘둘 말아 꼼짝하지 못한 채로 나왔다. 감사한 것은 처음에 나를 수술한 젊은 의사의 솜씨가 좋았다. 수술이 매우 잘됐다고 했다. 왼쪽 다리의 부서지고 날아간 모든 것을 연결했고 오른쪽 다리 피부 거의 모두를 떼어내 왼쪽 다리에 붙이면서 수술을 했다.

 

나는 한 달 동안 인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를 받았다. 며칠 동안은 약물 부작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고 한 번은 드레싱을 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의사를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

 

인도 의료시설은 너무 열악했다. 환자는 넘쳐나고 의사 숫자는 부족해 한 번 치료를 받으려면 보호자가 의사를 찾으러 다니면서 수차례 요청을 해야 했다. 요청 끝에 의사가 해주는 것은 단지 수술과 드레싱뿐이었다. 입원 시 침대시트까지 환자가 모두 준비하고 가져와야만 했다.

 

한 달간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내는 내가 학교 시간이 끝나고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자 불안해하며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은 계속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인도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아내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한 달 후 강제 퇴원이 돼 한국으로 이송됐다. 한국에서는 4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동안 수술도 3차례 더 받았다. 전신마취 수술이었다.

 

교통사고를 통해 선교사는 영적 전투의 치열함 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며 우리의 사명을 확인해 주셨다. 인도 영혼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삶을 드리라는 교훈이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다. 왼쪽 다리 발목 관절이 잘 움직이지 않아 아직도 발을 끌면서 걷는다. 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래 서 있거나 걸어도 발목 부분이 많이 붓는다.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어디인가.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도 내 몸을 회복시키시고 치료해 주신 하나님 은혜만 생각하면 목이 멘다. 나는 감사로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7) 인도 하층민 어린이 도울 神은 오직 하나님

 

나는 북인도 지역에서 교회 개척과 지역개발 사역을 함께 하고 있다. 인도 무슬림을 위한 사역이 4년을 넘기면서 힌두인 사역도 시작했다. 힌두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했고 교회를 중심으로 어린이 개발 프로그램도 병행하고 있다. 이중 깔리얀뿌리라는 힌두 지역은 길거리에 방치된 어린이들이 많아 어린이집을 시작한 곳이다.

 

어린이집은 기아대책과 함께 아동 결연 사역을 시작, 550명의 어린이들이 한국의 후원자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서적, 영적, 육체적 부분에서 도움을 받게 된다. 우리가 돌보는 아동 중에는 아픈 아이들이 많은데 그중 10여명은 어릴 때 약물 부작용으로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낸다. 알리야라는 10세 아동은 생후 4개월에 감기가 걸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7세 된 아이를 위한 처방약을 먹이는 바람에 신장 기능이 파괴됐다. 그 후 아이는 자라지도 못하고 매월 수혈을 해야 했고 매일 약을 먹어야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아이를 위해 매달 수혈 비용과 병원비, 약값 등을 공급하고 있다. 자라지 못해 10세인데도 4세밖에 되지 않아 보인다.

 

인도에는 약물 부작용이 많다. 나 역시 교통사고 후 병원에서 약물 부작용으로 몇 차례의 혼수상태를 경험했다. 병원의 약물 부작용이 워낙 심해 이런 이야기까지 회자된다. 만약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아라. 왜냐하면 의사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너를 진료하고 약을 처방해 주면 너는 그것을 약사에게 가지고 가서 약을 사라. 왜냐하면 약사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사가 너에게 약을 지어 주면 너는 그 약을 먹지 마라. 왜냐하면 너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보는 아이 가운데 소헵이라는 6세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생후 6개월 때 등에 난 종기가 심해져 종기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하는 의사가 척추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아이는 하반신 마비가 됐다. 하지만 의사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고 아이는 지금도 하반신 마비 상태로 살아간다.

 

워낙 가난하게 살아서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상태였는데 우리가 돌보기 시작했다. 휠체어 대신에 유모차를 공급해 주고 병원에 데리고 다니고 있다. 지난 여름엔 위생이 좋지 않아 엉덩이에 욕창까지 생겼는데 잘 낫지 않아 아직도 고생하고 있다.

 

여덟살짜리 안젤리나는 역시 약물 부작용으로 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2008년 9월쯤 갑자기 몸의 기능이 악화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숨이 가빠지면서 산소호흡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30분 정도 지난 뒤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확인해 보니 안젤리나보다 더 급한 환자가 왔다면서 안젤리나가 썼던 산소호흡기를 떼어 다른 아이에게 씌워주었다고 했다. 그 결과 30분 만에 안젤리나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어 병원에 강력 항의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워낙 하층민이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죽은 아이를 안고 나오면서 많이 울었다. 다음날 장례식을 치렀는데 분하고 원통해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안젤리나의 부모와 할머니를 만나면 눈물만 흘린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8) 이번엔 癌 주님, 인도 위해 3년만 더…

 

교통사고 사건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갈 즈음 또다시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2001년 11월이었다. 그날도 사역지에 갔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왼쪽 겨드랑이에 혹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자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갔다. 인도 의사는 암이라고 했다. 인도에 오기 4년 전 손가락에 생겼던 암이 전이되어서 겨드랑이까지 타고 올라왔던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선교사로 와서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이처럼 허무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1년간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항암치료 자체도 힘든 것이었지만 이제 막 언어를 배우면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중도에 멈추는 것이 힘들었다.

 

주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예수의 복음이 조금씩 퍼져가고 있을 때 이런 일이 터지다니. 왜 나는 이렇게 항상 아픈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항암치료를 시작해야만 했다. 16차에 걸친 스케줄이었고 1차, 2차, 3차 치료를 받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고통이 클수록 인도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따지듯 기도했다. 하나님! 정말 왜 나에게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저를 정말 목사로 부르시고 선교사로 부르셨다면 왜 병실에 누워 있어야 합니까.

 

항암치료를 받을 때마다 절망과 회의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에게 3년만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십시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갈 때 작은 열매라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서 4차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날부터 항암치료 주사약이 투여되는데 절망 속에서 기도하게 됐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꿈 속 같은 환상을 보여 주셨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를 향하여 손으로 가리키면서 내가 너를 20년 전에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를 20년 전에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하면서 두 번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울면서 하나님 말씀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20년 전 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갔다. 군에 가기 직전인 1982년 목회자로 부르셨던 그 자리. 이사야 6장 8절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셨다. 그때 내가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했던 그 말씀 그대로 기억하게 해 주셨다. 나는 그날 밤새 울었다. 그리고 모험을 시작했다. 주님! 그렇습니다. 20년 전 분명히 나를 불러 주셨는데 지금 이 작은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고 소명이 흔들렸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인도로 가겠습니다. 저에게 3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날 아침 의사들이 와서 주사약을 투입하자고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치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깜짝 놀라 만류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퇴원했고 일주일 후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9) 무슬림 전도 낙담하다 말씀으로 회개

 

인도로 다시 돌아갈 때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다는 확신이 있었고 또 나를 기다리는 인도의 영혼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내가 퇴원해서 인도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의사들은 3개월 안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명을 확신하고 가는 나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죽어도 인도에 가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인도에 들어간 후 하나님은 우리 가정과 사역 속에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셨다. 3개월 만에 죽을 것이라고 했던 나는 8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 그리고 아들 한 명을 더 주셨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아들 갈렙이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주시고 3년 이후 주신 나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임을 알게 하셨고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게 하셨다.

 

사역을 시작한 후 3년간은 지역 무슬림들과 만나고 또 관계를 맺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열매가 없어 탈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당시 나와 함께 활동을 했던 현지인 사역자 5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어렵고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곤 했다. 외국인도 아니고 현지인조차 이렇게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데서 힘이 많이 빠졌다.

 

그때 이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그래도 우리가 이 지역에서 계속 사역을 해야 합니까? 열매도 전혀 보이지 않고 너무 지쳤습니다. 이 지역 20만명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곤 우리가 유일하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1시간씩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2005년 12월, 그날도 사역자들이 모여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사도행전 18장 말씀을 읽고 있었다.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그곳 사람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 때문에 그 지역을 포기하고 떠나려고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말씀 속에서 주의 사자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동시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10절 이후에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우리가 읽었던 힌두어 성경은 더 구체적이었다. 말하라, 입 닫고 살지 말아라고 기록돼 있었다. 우리는 그날 아침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우리는 이 지역에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마을에 우리 말고도 구원받을 영혼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워했고 말하지 않았고 입 닫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아침 기도회는 눈물 바다였다. 하나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입 닫고 살지 않겠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준비하신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10) 예수는 거룩 코란 구절로 무슬림 전도

 

우리는 무슬림들이 사는 한가운데서 사역하고 있다. 1년에 네다섯 번씩 학교 앞 공원에 대형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한다. 성탄·부활절 행사와 문화공연 행사, 의료 캠프 등이다. 이 모든 행사에는 적게는 700∼800명, 많게는 1300∼1400명의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인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 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행사는 2006년부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무 번도 넘게 집회를 했다. 집회 때마다 항상 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해 왔다. 그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과 사도행전 4장 12절, 그리고 코란 수라 (3:42∼55)를 인용하면서 같은 설교를 반복했다.

 

두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구세주로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또한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코란 구절은 예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로 몇 년 전부터 코란을 통한 복음 전도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아주 유용해 많은 무슬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코란 내용에는 첫째 예수는 거룩하다는 것과 둘째 예수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 셋째 예수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2007년의 일이다. 성탄 행사 시작 전 무슬림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일단 그때는 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다음날 우리 센터에 정통 무슬림 복장을 한 K씨가 찾아왔다. 나는 처음에 약간 두려웠다. 그는 센터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만나자고 했고 나는 그 형제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집회에 한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집회를 해서 공원 근처 자기 집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나의 설교를 계속 들어왔다고 말하면서 자신 역시 코란을 읽는 사람으로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그런 내용이 어디에 나오는지 궁금했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놀라웠다. 선교지에 와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해서 그랬는지 K씨의 등장에 순간 움찔했었다. 또 무슨 반대를 하려고 그러나 조마조마했었는데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 사람이 참 선지자와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나는 본격적으로 K씨 앞에서 인질(복음)에 대해 그리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성경 말씀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복음서는 변질된 책이 아니냐?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이 있을 수 있냐?는 질문 등이었다.

 

나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찾아가면서 질문에 답했다. 그는 말씀을 확인하면서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설명을 하면서 그에게 복음에 반응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했고 예수를 믿겠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감사해 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나는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대중 집회를 통해서도 일하시고 집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소리만 듣고도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11) 문맹퇴치센터 3곳 운영, 말씀도 전해

 

우리가 사역하고 있는 문맹퇴치센터는 3개다. 전부 빈민촌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중 깔레칸 지역에 살고 있는 13세 여자 아이가 생각난다. 아이는 시골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때까지 성장하다 부모를 따라 델리로 이사 왔다. 아이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자연히 센터와 연결됐는데 6개월 만에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됐다. 또 말씀을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나는 학습 능력이 남달랐던 이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 몇 군데 부탁을 해 학교에 입학하도록 했다. 1년 만에 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공부를 잘했다. 아이는 힌두어, 우르두어뿐 아니라 영어도 잘하게 됐다. 아이는 신앙도 성장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지난해 부활절 침례도 받았다. 아이는 커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나는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지난해에는 기아대책을 통해 딘도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우물 파는 사역을 했다. 충북 어느 마을 김부순 할머니께서 평생 아끼고 모은 헌금으로 판 우물이었다. 우물을 판 이유가 있었다. 딘도리에서 자주 집회를 열었는데 갈 때마다 마을에 물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씻을 물은커녕 먹을 물도 없었다.

 

사람들은 물이 없어 개울에서 졸졸 흐르는 뿌연 흙탕물을 가라 앉혀 마시고 있었다. 나 역시 갈증이 너무 커서 그 물을 마셨다. 입을 대자마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 이후 우물 생각이 간절해 기아대책에 문의했고 마침 김 할머니께서 자신의 돈을 헌금해 지난해 하반기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200m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사방 10㎞ 이내에 있는 주민들을 살리고 있다. 아직도 인도의 시골은 물이 없어 10∼15㎞씩 걸어 다녀야 하는 곳이 허다하다.

 

센터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는 전도사 가운데 따라 씽 형제가 있다. 가난한 시골 힌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힌두 미신에 찌들어 살아 왔다. 그는 자라면서 힌두 신에게 잘 보이고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하여 힌두 사찰에서 뿌자(힌두인들이 하는 예배)를 드리고 부적을 사서 지니고 다녔다.

 

그런데 그가 16세 되던 때 원인 모를 병에 걸리게 되었다. 계속 말라갔다. 그러던 중 마을 힌두 점쟁이가 발병 이유가 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목사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형제는 목사를 죽이기만 하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회가 되면 죽일 준비를 했다.

 

씽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그 목사가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면 뒤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죽을 결심을 했다. 어느 일요일, 씽은 목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뒤를 쫓아가 죽이려 했다. 순간 목사님이 형제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며 함께 모임에 가자고 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목사님을 찌르려 했던 팔의 힘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목사는 그를 안아 예배드리는 집으로 데려와 성도들과 함께 보살피기 시작했다. 예배에서 씽은 자신의 몸이 새처럼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기도를 마치자 씽은 자신의 병이 치유됐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됐다. 그 이후 하나님을 믿어 신학 공부까지 하게 됐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정말 예측을 불허한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12) 힌두 극렬분자 방화·난동 뚫고 교회 건축

 

교회를 개척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성도들이 늘어나 교회 건물이 필요하게 됐다. 인구 50만명이나 되는 지역이었지만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다. 게다가 강성 힌두교 세력이 활발해 교회 건물은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교회가 필요했기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침 한국에 계시던 장모님은 그동안 아껴서 모았다며 1000만원을 헌금할 테니 교회를 지으라고 했다. 또 지역의 교인이 땅을 기증하기로 해 건축을 시작하게 됐다. 재정은 부족했지만 성도들이 직접 나서서 건축 일을 돕는 등 합심해 교회를 건축했다.

 

교회당은 단층 건물로 짓기로 하고 기초공사에 이어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매일 성도들이 나와 벽돌을 쌓았고 콘크리트를 만들었지만 비전문가들이어서 공사 속도는 느렸다. 그런데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우리가 교회 짓는다는 것을 지역 힌두 극렬분자들이 알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된 지 두 달 가까이 되던 2009년 6월. 우리는 힌두인들의 공격에 대비해 한밤중에 나와 있었다. 현지인 사역자 및 교인들과 함께 신축 중인 교회 옆집 옥상에서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그러는 가운데 힌두 극단주의자들로 구성된 바지랑달이라는 단체 회원 30여명이 몰려왔고 이들은 순식간에 교회에 불을 지르고 공사 중인 교회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옆에 쌓아놓은 자재로 옮겨 붙었고 우리가 불침번을 서고 있던 집까지 번졌다. 혼비백산했다. 옥상은 올라오는 계단이 따로 없어 내려갈 수도,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했다.

 

힌두인들은 20분 정도 난동을 부리다 달아나 버렸다. 잠시 후 이웃 사람들이 일어나 불 끄는 것을 도왔고 덕분에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다음날 사역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여호수아 1장 3절의 말씀을 읽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나님은 이미 땅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만 붙잡고 다시 자재를 구입했고 불탄 기둥을 걷어내 공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교인들이 교대로 밤에 나와 현장을 지키면서 공사를 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7월 18일 힌두 극렬분자들은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60명 정도의 패거리를 이루고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삽과 곡괭이, 망치 등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교인을 때려서 상처를 냈고 땅을 기증한 교인의 딸을 잡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또 그동안 겨우 복구한 건물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달아났다.

 

경찰에 신고하고 소송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주 정부가 힌두 세력으로 구성돼 있다보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포기하고 돌아서면 다시는 교회가 들어서지 못한다는 절박감이 밀려왔다. 교인들은 또 다시 힘을 합쳤고 밤낮으로 교회 짓기에 나섰다.

 

마침내 한 달 만에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다. 힌두인들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힌두인의 사고에는 사찰이나 모스크, 교회당이 지어지면 그 속에 신이 거주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지금도 심심찮게 극렬분자들이 예배당을 공격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바울 (13·끝) 갈등의 땅 카슈미르에 복음의 씨앗을

 

2002년 처음으로 카슈미르 지역을 다녀온 적이 있다. 많은 무슬림이 살고 있어서 관심이 많았던 데다 한 선교사로부터 사역의 가능성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을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이는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란 말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카슈미르 분쟁의 한 단면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는 일을 경험했다. 사건은 카슈미르에서 돌아오던 길에 터졌다.

 

잠무역에서 델리로 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출발시간보다 한 시간 앞서 역에 들어갔다. 기차를 타려고 육교를 건너 2번 플랫폼으로 가는데 1번 플랫폼으로 다른 기차가 한 대 들어오면서 갑자기 기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민간인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독립 반군들이었다.

 

나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그곳에 서 있던 다른 기차에 급하게 올라탔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죽어갔다. 기관총 소리가 수십 발 들렸고 플랫폼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어떤 사람은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어떤 사람은 부상을 입고서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순식간에 기차역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반대편에서도 반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총격전은 30여분 동안 이어졌고 내가 있던 2번 플랫폼으로 총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너무 무서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동시에 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땅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총격 소리가 다행히 잠잠해졌다.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상황이 끝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 내가 타려고 했던 기차는 1시간 후에 도착했고 무사히 델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델리로 돌아와 아침 신문을 보니 그날 잠무역 총격 사건으로 16명이 죽고 50여명이 다쳤다고 나와 있었다. 한 달 동안 잠무역은 폐쇄됐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아온 것에 감사했지만 아직도 카슈미르가 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카슈미르는 분쟁 때문에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됐고 아직도 1300만명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카슈미르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암 선고를 받고 한국을 떠난 지 8년이 됐다. 3년을 넘기지 못할 거란 의사들의 말은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3년 시한을 떠올릴 때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확인할 때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서일까. 3년 시한은 내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됐다.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 일이다. 나는 없고 주님만 있다. 나 혼자 선교하는 것도 아니다. 나 없이도 하나님은 선교하신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행보를 따라갈 뿐이다.

 

더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기를 바란다. 특히 북인도 같은 미전도 지역에 말이다.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송이 힘들면 기도만이라도 해달라고 감히 부탁드린다. 선교를 위한 기도 한마디, 간절한 부르짖음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 기적의 목격자다. 하나님의 평강이 교회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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