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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067. [역경의 열매] 박영신 (1-12) 가난마저 여유롭던 ‘4대째 신앙 가문’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7.26|조회수68 목록 댓글 0



***간증: 1067. [역경의 열매] 박영신 (1-12) 가난마저 여유롭던 4대째 신앙 가문

 

나는 기독교의 진수는 초월의 능력에 있다고 믿는다. 모든 것 밖에, 모든 것을 넘어서고,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는 하나님의 속성, 그 초월성에 기독교의 핵심이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초월성이란 이 세상을 방관하고 저 세상만을 생각하는 내세신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돌파하는 믿음이다. 그 초월의 힘이 조선 사회를 뒤집었고, 한국 현대사의 초석을 담당했다. 기독교는 초월성의 믿음에 더하여 모든 것을 넘어서 질문하고 도전하고 바꿀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가 되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초월성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초월성은 나의 믿음과 삶을 떠받치는 근간이고 지금 내가 목회를 하고 시민운동을 하는 이유다.

 

나는 경북 문경에서 목사 가정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문경새재가 바라보이는 아주 조그만 시골 동네였다. 몰락한 양반 가문이 경남 밀양에서 쫓기다시피 이주하다가 정착한 곳이 그 동네였다. 다행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리실 때 기독교인이 돼 4대째 신앙 가문을 이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도 그 영향으로 신학교를 가셨다. 어린 시절을 문경에서 보내는 동안 기독교는 내 생활과 의식을 완전히 지배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게 일상이었다. 예배 후엔 가족들이 둘러앉아 얘기를 나눴는데, 성경 인물, 성경 이야기 등 주로 성경에 대한 것이었다.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건 내게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오히려 성경이 아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때 교회 전도사를 하셨다. 가정 형편은 빤했다. 하지만 가난했으나 물질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다. 오히려 물질 그 너머의 신앙세계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이해하고 즐겼던 것 같다. 가난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난 때문에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 가난 속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가 언제나 집안의 이야기 주제였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세계는 가난과 상관없이 내 마음과 삶 속에 내면화됐다.

 

작은 시골 동네이다 보니 여유 있는 사람보다는 여유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어릴 적 집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와 식탁을 함께했다. 같이 호박죽도 먹고, 텃밭에 심은 배추도 나눠먹었다.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식탁을 나누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 그늘에 가려진 사람, 사회에서 짓밟힌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언제나 지켜가야 하는 게 우리 집안의 자연스런 분위기였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평생 약자에 관심을 갖게 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됐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영신 (1) 가난마저 여유롭던 '4대째 신앙 가문'

* [역경의 열매] 박영신 (2) 신행합일 아버지 삶, 7형제가 이어받아

* [역경의 열매] 박영신 (3) 미션스쿨 대구 계성고서 알찬 인생 수업

* [역경의 열매] 박영신 (4) 페스탈로치 전기 읽고 사회사업가 꿈꿔

* [역경의 열매] 박영신 (5) 공군장교 복무하며 교육·사회학에 눈떠

* [역경의 열매] 박영신 (6) 교육·사회·기독교 공부위해 미국 유학

* [역경의 열매] 박영신 (7) 학문통해 주님의 영광 드러내겠다 다짐

* [역경의 열매] 박영신 (8) 대학원서 반려자 문익환 목사 여동생 만나

* [역경의 열매] 박영신 (9) 고국의 후학 가르치려 유신시절 귀국

* [역경의 열매] 박영신 (10) 문익환 목사 매제란 이유로 감시받아

* [역경의 열매] 박영신 (11) 창조질서 회복 도우려 환경운동 동참

* [역경의 열매] 박영신 (12·끝) 페스탈로치 목사 꿈꾸며 예람교회 개척

 

◇약력=1938년 경북 문경 출생. 연세대 교육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 종교학 석사, 버클리대 사회학 박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현상과 인식 편집인, 한국사회이론학회 초대회장, 한국사회운동학회 초대회장, 노인시민연대 공동대표, 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역임. 현재 녹색연합 상임대표, 예람교회 공동목사, 재단법인 목민 이사장. 저서로는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새로 쓴 변동의 사회학

 

***[역경의 열매] 박영신 (2) 신행합일 아버지 삶, 7형제가 이어받아

 

아버지 박명수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70회 총회장을 역임하셨다. 아버지는 일제 강탈기에 경성신학교를 다니셨다. 하지만 그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가 생겨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낙향을 하셨다. 이 같은 신분 때문에 아버지는 작은 시골동네에서 언제나 일본 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순사들이 찾아와 아버지를 데려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아버지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고,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혐의를 씌울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떻게 순사들은 아버지를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불러가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일제 강점기의 부도덕함은 나에게 아픔, 분노 같은 것을 갖게 했다.

 

광복 이후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서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셨다. 학교를 다니실 때는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 학우회(총학생회) 회장도 하고, 당시 감신대, 조선신학교, 연희대 등 6개 기독교학교 학생회연합회 회장도 하셨다. 졸업 후인 1946년, 아버지는 인천의 송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셨다. 그때 나는 송현초등학교 2학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는 풍금도 있고, 서울의 음대생, 의대생들이 주일마다 열심히 가르치셨다. 하지만 고향 교회에서 아버지를 간절하게 부르시는 바람에 송현교회에서는 몇 년밖에 목회를 하지 못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교와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문경에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다. 내가 문경초등학교 5학년 때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들이 서울에도 계시고 북쪽에도 많이 계셨다. 이분들이 우리 집에 많이 피난 오셨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피난처를 구하기도 했다. 일제 강탈기,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 난 우리가 참 힘없는 나라구나 거대한 세계체제 속에서 한 부분으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당시 문경이라는 공동체와 유엔군 사이에 자그마한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셨다. 전혀 영어를 잘하시는 분은 아닌데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든지, 아군은 지금 어떤 상태라든지 등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를 얻어서 문경 공동체 분들에게 알리는 일들을 하셨다. 군대의 중요 부서 책임자들이 자주 교회를 방문해 의논하고 자문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교회 목사가 지역 공동체의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 롤 모델이었다.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은 나로 하여금 세계를 더 넓게 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었다.

 

아버지는 1960년대에 서울의 청량교회에 부임하셔서 1989년에 원로목사가 되셨다. 아버지는 지나치리만치 아주 검소하신 분이었다. 2008년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한번도 당신의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몸을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하시겠다고 밝히셨다. 실제 그대로 실천하셨다. 난 아버지의 그런 정신을 우리 7형제가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나와 형제들도 아버지의 삶을 실천하겠다고 이미 다짐했다. 난 지금도 가진 게 많든 적든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삶의 자세를 갖는 게 세상의 어떤 명예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3) 미션스쿨 대구 계성고서 알찬 인생 수업

 

내가 다닌 문경 서중학교는 우리 집 바로 옆이었다. 아주 조그만 중학교였다. 내가 3회 졸업생이니까 신생 학교였던 셈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6·25가 발발했다. 아버지는 피란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먼저 아셔서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알리셨다. 다른 목사들 집안과 함께 피란을 갔다. 포항 울산 등 바닷가에서 몇 개월을 살았다.

 

전시(戰時)였지만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학교는 다 좋았지만 아주 힘든 경험도 했다. 주일이 되면 꼭 학교로 나오라는 거였다. 풀도 뽑고 청소도 시키기 위해서였다. 난 주일엔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해야 하기에 학교엘 안 나갔다. 친구들 중에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몇 안됐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꼭 빠지니까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훈육주임선생이 몽둥이로 심하게 때리셨다.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 사친회(학부모회) 회장을 하셨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난 일하는 게 싫어서 학교에 안나간 게 아니고 주일날에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야 되는 집안의 전통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억울한 일을 겪은 것이다. 신앙에 대해 회의는 안했지만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은 많이 들었다. 오히려 신앙을 더 바라고 사모하게 됐다.

 

하지만 대구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계성학교는 기독교 학교로서 개화를 빨리 했다. 경상도가 개화가 좀 늦다는 얘기를 하는데 계성학교는 그 와중에 근대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앞장섰던 학교다. 선생님들이 교장선생님의 뜻을 따라서 민주식이라고나 할까, 열린 학교를 만드셨다. 반기독교 학교에서 기독교 학교로 극과 극을 오간 것이다. 그 계성고 시절은 지금 돌아봐도 행복한 기억이 많다.

 

그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여서 서울에서 피란오신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 중엔 대학교수를 하셔야 할 분들이 시국이 불안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분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하셨던 이성화 선생님은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다. 그런데 그분은 나중에 내가 연세대 3학년 때 교육학과 교수로 오셨다. 고1 때 담임선생님을 대학에서 뵌 것이다. 계성고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셨던 이극찬 선생님은 나중에 연세대 정외과 교수가 되셨다. 영어 선생님 중에도 나중에 영문과 교수로 간 분이 계셨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기에 계성고의 수업 분위기는 마치 대학 같았다. 당시는 고등학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고, 학생들도 성적순으로 줄 세우지 않았다. 대학도 무조건 서울로 보내지 않았다. 의사나 교사, 농과대 갈 사람도 다 서울로 갈 필요가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내가 그 당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계성고를 간 이유는 기독교 학교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또 다른 조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 중에 선발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준다는 거였다. 나도 열심히 하면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겠구나 하고 계성고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졸업할 당시에는 그만 그 규칙이 바뀌고 말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해서는 미국에 못가고 대학교에서 2학년까지 다녀야만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4) 페스탈로치 전기 읽고 사회사업가 꿈꿔

 

내 아명은 보라(保羅·바울의 한자 이름)였다.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만큼 가족과 친지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목사로 살아갈 것을 기대하셨고, 나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인천에 있을 때 소년소녀 잡지에서 스위스의 교육가인 페스탈로치의 짧은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페스탈로치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은 정말 특별하게 산 사람이구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일하신 분이구나. 나도 페스탈로치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 전기를 읽고 어린 마음에 주제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마음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대학에 입학할 때도 바뀌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전공을 택해야 할 때였다. 페스탈로치는 교육자이면서 사회사업가, 사회개혁가이기도 한데 그런 공부를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찾아봤다.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생각했다. 당시 서울대엔 교육학과가 사범대에 속해 있었다. 교육학과가 사범대에 있다는 것이 페스탈로치가 되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단순히 중·고등학교 선생을 배출하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사범대학은 왠지 좀 비좁은 것 같고, 거기다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생각도 사범대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했다.

 

내 관심을 광범위하게 확장시킬 수 있고 또 인접한 다른 인문학과 소통하면서 내 관심세계를 넓힐 수 있고 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연세대는 기독교 학교인데다가 교육학과가 문과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내가 입학할 때는 학과별 모집이 아니고 요즘 식으로 하면 문과 계열별 모집이었다. 입학해서 2학년 될 때까지 자기가 자유롭게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56년 연세대 교육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당시 연세대엔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특히 내가 다녔던 문과대는 기독교의 봉사정신이 주류였다. 난 학생 자치조직인 사회사업회에 소속돼 활동했다. 페스탈로치 같은 목회자가 되려면 사회사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학년 2학기 때는 내가 회장이 됐다. 농촌계몽을 한답시고 시골 개울을 정비하거나 우물 파는 일을 도왔다. 여학생들은 농촌 여성들과 대화를 하고, 채플 시간엔 특별연보도 해서 고아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무용단과 합창단을 만들어 강원도 화천 같은 군부대에 가서 군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어떻게 바깥의 사람들, 이웃들에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페스탈로치 같은 목사가 되려면 신학교를 가야 하는데, 학부 공부만 가지고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교육학과 외의 철학, 문학, 신학 수업을 청강했다. 그래도 부족하니까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무시험이었던 학부와 달리 대학원은 필답시험이 있었다. 대학 4학년 때는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킬 패트릭의 교육철학 원서를 사서 모르는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외웠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5) 공군장교 복무하며 교육·사회학에 눈떠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게 별로 없지만 4·19를 경험하지 못한 것만큼은 후회하고 있다. 난 4·19를 대학에서 맞지 못했다. 대학원에 입학해놓고 4월 10일 즈음에 공군사관학교에 갔기 때문이다. 공군장교 하면 대학원도 갈 수 있다는 친구들의 얘기도 있었고, 다른 대학교 출신들을 만나 교제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전에서 6개월간 훈련받고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보라매공원으로 올라왔다. 사관학교 교관으로 복역했다. 힘들었지만 군대에서 다른 학교 출신들을 많이 만났다. 아마 내가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평생 연세대 출신들만 알았을 것이다.

 

제대하기 1년 전부터는 대학원을 다니려고 했는데 연세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원 교학과장이 한태동 박사였다. 학교 다닐 때는 그분 강의가 좋아서 청강도 했었다. 그분께 대학원 복학하러 왔다고 하니까 호되게 나무라셨다. 대학원 공부는 전념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군대에 있으면서 자네가 대학원 다닌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가 변명조로 따졌다. 다른 대학은 되는데 왜 연세대는 안 됩니까? 그랬더니 한 박사님은 다른 대학은 다 돼도 연세대는 안 된다고 하셨다. 당시 대학원은 지금과 달리 허술하고 엉터리였다. 등록금 내고 교수한테 얼굴 보이고, 그 다음 학기말에 보고서 하나 써내면 학점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2년 후 논문을 쓰면 석사가 되었다. 그런데 연세대는 학사 행정을 아주 깐깐하게 봤다.

 

난 군대에 있을 때부터 사회학을 독학했다. 당시 사관학교는 시간이 많았다. 제대하기 몇 개월 전부터는 거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 공군도서관에는 다양한 사회학 서적이 있었다. 페스탈로치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있으면서 일부러 사회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책을 통해 북한이나 러시아식 사회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인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깊이 매료됐다. 영국 노동당 관련 책도 내 생각의 범위를 많이 넓혀 주었다. 그런 것을 통해 난 사회학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던 것 같다. 특히 노동당의 역사를 보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기독교와 깊이 연관돼 있다는 걸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군대는 내게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교육과 사회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복학을 해보니까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어느 곳에서도 지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음에 두고 있던 한 분을 찾아갔다. 고 원일한(H G Underwood·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 박사였다. 그분께 선생님, 지도해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분이 한참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시더니 지도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분은 오래 전부터 한 과목 정도는 언제나 가르치는 분이셨다. 하지만 선교사이기 때문에 학교 행정이나 학교 이사를 주로 하시지 강의를 많이 맡지는 못하셨다. 엄격하셨지만 나에겐 특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분 서재를 자유롭게 쓰게 하신 것이다. 시간이 없어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좋은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그분께 지도를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학생이 아닐까 싶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6) 교육·사회·기독교 공부위해 미국 유학

 

나의 세 가지 주요 관심 범주는 교육과 사회, 그리고 기독교였다. 이 다음에 내가 무엇을 공부하든 이 세 가지를 드러낼 수 있다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쯤 유학을 결심했다. 우리나라보다는 미국 대학이 여러 면에서 훨씬 체계가 잡혀 있을 거라고 봤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유학을 결심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장학생이 되어 예일대에 들어갔다. 내가 입학한 곳은 신학부였지만 종교와 사회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회학과에 가서 청강도 했다. 졸업 후엔 목사도 할 수 있고, 신학자나 사회학자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일단 사회학을 더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데이비드 리틀 교수가 종교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리틀 교수를 만나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분은 학생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살려주시는 아주 인격적인 분이었다.

 

나는 사회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예일대 사회학부가 내가 생각하기엔 좀 작고 약했다. 리틀 교수께 이런 내 생각과 앞으로의 꿈을 얘기했더니 하버드에 계신 교수 한 분을 추천해주셨다. 하버드대 사회학과 로버트 벨라 교수였다. 그는 동아시아에 대해 관심도 많고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버드에 연락하니까 벨라 교수가 지난 학기에 버클리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벨라 교수에게 전화를 해 찾아가게 됐다.

 

1968년에 학교를 버클리로 옮겼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옮긴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가 문은희씨와 결혼한 지 1년 됐을 때다. 운전면허를 딴 지 4주 만에 1700달러짜리 자동차를 사서 대륙횡단을 했다. 그때의 버클리는 지금의 버클리와 달랐다. 진보적인 데다 영국이나 프랑스 학생들도 거기에 와서 공부하고 싶어할 만큼 아주 출중한 학교였다. 특히 사회학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야였다. 내 배경이나 성적 가지고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벨라 교수를 찾아갔더니 내 얘기를 한참 듣고 난 뒤 일단 너도 학교를 알아야 하고, 나도 너를 알아야 하니까 1년간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 교수의 배려로 1년간 동양학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동양학과에서는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을 다 공부할 수 있었다.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그 기간 나는 그야말로 두문불출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오직 도서관, 강의실, 집 외에는, 심지어 말하기 부끄럽지만 1년간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성경을 읽었다.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그렇게 컸기 때문이다.

 

그때 쓴 석사 논문은 일본의 기독교 지성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지성 구조를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난 일본말을 못하지만 일본어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토씨를 달았다. 공군사관학교 때 독학으로 일본어를 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논문은 내게 아주 유익했다. 일본의 지성사와 교회사를 훑어보는 계기가 됐다. 벨라 교수도 논문이 재미있다며 흡족해 하셨다. 1년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점수가 잘 나왔다. 드디어 버클리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정식 입학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7) 학문통해 주님의 영광 드러내겠다 다짐

 

로버트 벨라 교수는 다른 사회학자와는 다른 점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사회를 깊이 있게 보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 속의 어떤 상징이나 가치, 의미, 종교를 들여다보려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주로 사회학 이론을 강의했는데 그 강의 외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그분을 만나는 인디펜던트 코스에도 참여했다. 한 학기는 막스 베버, 한 학기는 에밀 뒤르케임을 주제로 토론하는 식이었다. 그분이 학부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일본사였다. 그만큼 동양에 관심이 많았고, 학생들로 하여금 동양에 관심을 갖도록 하셨다.

 

그분의 또 하나 특징은 감투를 쓰지 않는 것이다. 학교 안팎의 여러 자리에 대한 얘기가 오갔지만 그분은 오직 강의에만 전념하셨다. 내가 그분 책을 여러 권 번역했지만 아직 못한 게 있다. The Broken Covenant깨어진 언약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200여년 전에 만들어졌을 때는 비전, 이상, 가치가 있었는데 200년 후에 이것이 다 깨져버렸다고 하는 내용이 담긴 두껍지 않은 책이다. 그 책은 미국의 역사를 예찬하지 않는다. 그것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비판하는 책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사회과학도나 인문학도들이 이런 학문 세계를 받아들이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덮어놓고 미화하려는 것보다는 문제가 무엇인지 뿌리부터 되짚어보려 하는 그런 공부, 그것이 진정한 지성인이라고 생각한다.

 

벨라 교수는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의 자세로 미국 사회를 진지하게 성찰했던 것이다. 난 벨라 교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진정한 사회학자구나 하는 감화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학문을 열심히 하게 되면 신앙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을 열심히 하게 되면 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학문을 세속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학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가 잘 안 바뀐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사 경영자나 노동자도 기독교 윤리에 의해 개혁하고 바꾸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공동체 내에 부정부패가 있으면 거대한 구조의 부속품으로 알아서 기계적으로 돌아갈 뿐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난 이런 부분에서 벨라 교수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분은 나의 중요한 모형(롤모델)이 되었다. 그분을 통해 나는 대학 교수가 되려면 학문을 통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야지 학문 따로 신앙 따로여서는 안되겠다. 이 영역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분을 알고 나서 나 스스로를 사회학자라고 보지 않았다. 공부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난 뒤늦게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그렇게 사회학을 공부해 보니 미국에서 한 과목만 들어도 한국에서 사회학과 학부를 나온 것 이상으로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학 교재라고 하는 것은 형편없었다. 번역 등 언어의 장벽 때문인지 이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주로 사회조사 수준에 머물렀다. 나는 한국 사회학을 그야말로 표피적이고 수준 미달로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8) 대학원서 반려자 문익환 목사 여동생 만나

 

공군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했는데 당시 대학원생 가운데는 여학생이 많지 않았다. 아내 문은희는 그 당시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올드미스였다. 연세대 의대 2년을 다니다가 교육심리 전공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동기 여학생들이 항상 언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질문도 하고 발표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은희와는 금방 친해졌다.

 

은희와 나는 교단으로 보자면 대조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녀는 문익환 목사의 동생으로 당연히 기장의 영향을 받았고, 난 보수적인 예장에서 자랐다. 하지만 우리 둘은 차이를 별로 못 느꼈다. 당시는 문 목사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다. 그냥 평범한 한신대 교수셨다.

 

내가 먼저 유학을 떠나고 은희는 4주 후에 미국에 도착했다. 당시 학교에서 1시간 거리에 그녀의 오빠인 문동환 목사 아내의 집이 있었다. 은희와 나는 주말이면 결혼 전에 그 집엘 찾아가곤 했다. 결혼은 유학간 뒤 1년이 지나서 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 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존 크로스 목사가 주례를 했다.

 

내가 공부하는 동안 아내는 일을 했다. 그래도 난 생각이 열린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남자가 먼저 공부하고 여자가 나중에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질 못했다. 나 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아내는 버클리대 내 연합신학대학원 도서관에서 일했다. 내가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혼자만 겨우 생활할 수 있는 형편이었기에 아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할 쯤인 1971년 아기가 생겼다. 아이를 볼보는 일을 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는 힘들어졌다. 그래도 점심때면 가끔씩 도서관에 있는 아기를 데리고 집에 가서 아내가 짜놓은 모유를 먹이던 일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아내는 이후로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귀국 후 아내는 연세대에서 교육심리 박사과정 논문만 남겨놓은 상태로 여성개발원에서 일을 했다. 이후엔 전주대 교수로 있다가 46세에 영국 글래스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는 교수를 오래 하지 못했다. 연세대 교수로도 부임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당시 문익환 목사가 정권과 전면적인 대치에 나서면서 겪게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 목사는 나 때문에 은희가 그렇게 됐다며 아내와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셨다.

 

아내는 알트루사라는 단체에서 오랫동안 상담일을 해오고 있다. 거기서 발행하는 계간지 의 편집인도 맡고 있다. 아내는 한국 여성들의 우울증을 연구해 한국 여성들만의 독특한 심리구조를 포함이론으로 규명하기도 했다. 이혼 위기, 가정폭력 등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이 정신건강을 되찾아 사회운동을 하도록 돕고 있다.

 

아내는 사회에서 억눌리고 불만 있는 자들의 얘기를 들어주자는 생각으로 봉사하고 있다. 난 그런 아내의 정신이 나의 변동 신학 이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변동이나 변화란 것은 체제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변두리의 사람들은 불편하고 어렵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체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불편한 게 없다. 이 시대 변방의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것은 성서 속 예언자의 전통과 닿아 있다고 아내와 나는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9) 고국의 후학 가르치려 유신시절 귀국

 

학위를 끝내고 국내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대로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종신재직권(tenure)을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미국에서 일생을 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공부한 이유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작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할지를 알리는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한 목소리라도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존경하던 백낙준 박사 같은 분이 행정을 하지 않고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역사학만을 연구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가 역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가고, 다른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수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에 가는 그런 일은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 만약 한국에 돌아간다면 선배들이나 교수들, 백 박사도 하지 못했던 그런 것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좋지 않을까. 다른 일 하지 않고, 심지어 정치활동이나 민주화운동도 양보하면서 학문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등의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일보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가 벌어졌다. 동아일보가 줄기차게 유신반대 논조를 유지하자 박정희 정권이 1974년 말부터 광고무더기 해약이라는 보복조치를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실었다. 그때 나도 이럴 때 우리도 광고를 좀 해야 되지 않나라며 미국의 유학생, 지인들을 찾아가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내 결심은 확고해졌다. 내 박사학위 논문 초고는 이미 74년 11월에 벨라 교수에게 다 제출된 상태였다. 난 유신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75년 8월에 귀국했다. 마침 그 즈음 아내의 오빠 되는 문익환 목사나 문동환 박사가 한국 사회의 표면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저분들이 민주화운동을 하시는데 나까지 한국에 가서 그 일을 할 수는 없다. 만약에 그 일을 한다면 나는 미국에 남아서 민주화운동을 해야지 한국에 가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간다면 순수하게 대학의 울타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무엇보다 학계를 학문하는 분위기로 만들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주 혹독하게 학생들을 다룬 기억이 난다. 강의 때 모든 학생들에게 자리를 정해줘 앉게 했다. 이름과 번호가 적힌 자리표에 따라서 학생들에게 질문해 강의가 느슨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했다. 학생들 사이에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동료가 발언하는 것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 엄격한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그런 훈련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 또한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존중과 대화, 그리고 토론을 시민의 기본소양으로 중요하게 봤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10) 문익환 목사 매제란 이유로 감시받아

 

아내의 오빠인 문익환 목사와는 집안 행사 때는 물론 감옥에서 나왔을 때도 찾아가 만나곤 했다. 신촌에 오실 일 있으시면 우리 집에도 찾아오곤 했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에 안식년으로 가 있을 때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오시거나 혼자서 찾아오시기도 했다. 그때는 전화도 다 도청한다고 믿었기에 늘 조심하면서 대화를 했다.

 

내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왔을 때는 유신의 절정기였다. 학교 건물마다 형사들이 상주했다. 내 방에도 수시로 와서 여러 가지를 묻곤 했다. 압력이나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 목사의 매제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1975년 9월부터 연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해 가을 연세대 신앙강좌에 문 목사가 설교자로 오셨다. 문 목사는 서슴지 않고 설교 중에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셨다. 학생처장한테 연락이 왔다. 문 목사를 자제시켜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 양심에 따라 하는 것이다고 사실상 거절해버렸다. 그것은 문 목사가 내 친척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설교를 통제해서는 안 되는 한국 교회사의 입장이나 학문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학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도 국민교육헌장 반대운동으로 학교서 쫓겨났다.

 

하지만 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학이란 게 사회의 근본 문제와 씨름해야 하기에 강단에서도 주로 학문 차원에서 얘기했을 뿐이다. 학생들이 나한테 찾아와 시국 때문에 의논도 하고, 주장도 하고, 질문도 했다. 하지만 난 정치나 민주화운동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려고 작정했다. 그건 학문 때문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맑고,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난 연세대 내에서 반정부 노선에 선 뚜렷한 교수 가운데 한사람으로 인식이 돼 갔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몇몇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대학가로 확산돼 갔다. 그런데 누군가 새벽에 연세대 내에 대자보를 붙여 놨다. 이런 영향 때문에 연세대에서는 나와 몇몇 교수들이 주축이 돼 직선제 개헌 요구 서명운동을 벌여나갔다.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죽었을 때는 교수들이 중심이 돼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스스로를 비주류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중심가치를 존중하지만 그 중심가치는 특정 세력이나 다수에 의해, 그 시대의 분위기에 의해 언제나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난 비주류이고, 비주류로 사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어쩌면 진실된 삶에 대한 감수성이 살아 있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본다. 그들은 다수에게 언제나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불편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살릴 수밖에 없고, 또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비주류라고 이야기하지만 억압된 가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야말로 중심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중심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 중심가치를 다시 세워야 할 책임, 그것은 나를 비롯한 지성인, 크리스천들의 것이라고 본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11) 창조질서 회복 도우려 환경운동 동참

 

내가 녹색연합 대표를 맡은 것은 2000년 봄부터다. 그 한 해 전부터 녹색연합 사람들과 교분을 가졌다. 난 사회운동을 강단에서 꾸준히 가르쳐왔던 사람이다. 또 내가 관찰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분석하고 발표도 했다. 그 가운데 환경운동도 물론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하다가 내가 환경이나 생태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게 알음알음 녹색연합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나는 사실 학교 담 밖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고 글이나 말로써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돼서 공동대표로 들어가게 됐고, 공동대표가 되니까 또 상임대표를 하라고 해서 상임대표로 활동해 왔다.

 

나는 녹색 환경운동을 창조질서에 대한 감수성의 표현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오랜 기간 인간들이 자기 편리와 이익을 위해 무모한 파괴를 일삼아온 것을 뉘우치며 그 질서를 회복코자 하는 것이, 내가 참여하는 녹색운동의 뜻이다. 이 일에 반드시 기독교의 이름을 달거나 그 이름을 내세우는 것만이 최상의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 파괴와 그 회복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지구 시민들의 어깨 위에 지워진 공동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녹색연합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신앙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만난다. 그들과는 출발점과 지향점이 다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공동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한다.

 

난 개인적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에 있을 때는 차를 가졌는데, 한국에 와서는 자동차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교수일 때도 그랬지만 녹색연합 대표를 하면서도 개발을 내세우는 정권은 가차 없이 비판해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녹색연합이 내세우는 것은 세상을 녹색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개발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까지 아우를 수 있는 더 큰 비전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녹색연합은 삶의 모든 문제를 몇몇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참여해서 결정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권력자들이 결정한 것에 의해서 힘없는 자들이 언제나 피해를 봐왔다. 이런 간격을 좁혀서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결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언제나 전문가라는 이름 밑에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겨야 하고, 시민은 따돌림받는 어처구니없는 사회가 되고 만다.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 정치와 경제를 우리가 함께 걱정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여기는 그런 사회가 속히 오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이 운동은 어쩔 수 없이 기득권 세력과 맞서야 한다. 현존 체제를 지켜가고자 하는 다수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따라서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만다.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믿고 있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간중심주의에 반한 정책 집행, 권력 행사, 자연 파괴에 대하여 침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계가 있는 이들 인간들의 생각과 결정을 고백하고 표출하는 공간이 시민운동이라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박영신 (12·끝) 페스탈로치 목사 꿈꾸며 예람교회 개척

 

페스탈로치 같은 목사가 되자. 어릴 적 이 꿈은 사회학을 공부하고 교수로 있는 동안에도 떠나지 않았다. 버클리에서 논문을 쓰면서 버클리연합신학대(GTU)에서 신학(M.Div)을 공부했다. 교수를 할 때도 믿음의 교수에 대한 뜨거운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목사 가운만 걸치지 않았을 뿐이지 목사 같은 교수였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대학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됐다. 대학 행정, 인사, 학생, 학과에 대해 내 나름의 기준에서 판단했을 때 아주 실망스러웠다. 그 기간은 오히려 내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됐고, 그런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사라는 자리를 더 열망했던 것 같다.

 

목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다 갖춘 만큼 언제 목사가 되느냐가 관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도 내가 얼른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셨다. 하지만 한국에서 목사 안수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속한 예장 합동에서 안수를 받으려면 1년간 총신대를 다녀야 했다.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김세윤 박사, 박아론 박사 등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양지캠퍼스에서 1박2일간 치른 강도사 시험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경기노회의 면접을 거쳐 2001년 10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는 분의 소개로 미국에서 온 한 목사를 만났다. 그분을 비롯해 15명 정도 모여 교회의 정체성, 역할, 방향에 대해 함께 공부했다. 개척 준비 모임이었던 셈이다. 이 모임을 통해 교회의 방향을 잡았다. 초교파에 교회건물 없이 공동목회를 하고, 설교 후엔 설교 내용을 가지고 1시간 정도 대화의 시간을 갖고, 사례비를 받지 않고, 평신도 중심에 성도 수가 40명 이상 되면 분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해 예람교회를 개척했다. 장소는 서울 서초동 대한성서공회 건물을 빌렸다.

 

그런데 함께 동역하던 목사가 어느 날 예람교회의 방향에 대해 다른 얘기를 했다. 교회는 커져야 하고, 설교 후 대화의 시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결국 개척 1년2개월 만에 교회가 나뉘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시간이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예람교회는 오후 2시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3시에 예배를 드린다. 기성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기성 교회를 다니다 치인 사람도 있다. 일종의 대안 교회다. 나이가 많은 분들과 젊은이들이 함께하는 교회다. 고졸 출신도 있고, 나처럼 대학 교수도 있다. 내가 가장 의미를 두는 성경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회의 모든 칸막이를 허물어버렸다는, 사회학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말씀이다.

 

교회에서는 절대 목사가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목사나 평신도는 서로 진리를 향해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 이외에 사람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면 결코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한국 교회에서 나올 수가 없다. 난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페스탈로치 같은 목사를 꿈꾸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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