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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14.뜻하지 않았던 미 대륙횡단과 LA에 머물게 된 식구들 / 김도일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8.01|조회수36 목록 댓글 0

14.뜻하지 않았던 미 대륙횡단과 LA에 머물게 된 식구들

  •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3.06.21 09:04

◇ 롱아일랜드 연합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임직예배를 드릴 때 함 께 했던 롱아일랜드 노회임원들과

 

   나를 15년 만에 모국으로 소환한 부르심은 영남신학대학교 권용근 교수의 연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권 교수가 영남신대에서 기독교교육학 전공교수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그러던 중 호남신학대학교 황승용 총장도 전화를 걸어왔다. 호남신대에 재직 중인 황영훈 교수의 소개로 전화한다며 “김보일 박사가 맞냐?”는 것이다. “저는 김보일이 아니고 김도일”이고, 기회가 되는대로 한국에 가면 찾아뵙겠노라 답했다. 그때가 1996년 늦봄 정도였을 것이다. 졸지에 두 학교의 연락을 받고 보니 한국에서의 부르심이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 사안은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 담임목사님과 림인식 목사님께 분별을 요청했다. 나의 상황을 모두 경청해주신 림인식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 목사님, 한국교회는 아직도 인재를 많이 필요로 합니다. 고생스러워도 한국에 가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때까지 이민 교회에서 부르심을 받고 목회에 전념하는 것을 소명으로 알았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 조언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두 분 선배 목사님들의 기도와 응원을 힘입고, 먼저 초대했던 영남신학대를 방문했다. 거기서 프리스턴신학교에서 사귐이 있던 이규민 교수가 나를 맞아 주었고, 우리는 경산 영남신대 앞 조그마한 식당에서 당시 총장서리였던 허성군 교수를 만났다. 그런데 허 교수는 나에게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는데, 지금 학교가 학내 분규 상황이라 다음 학기에 모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선택지 하나가 가볍게 없어지게 되었다. 그날 저녁 당시 계명대에서 가르치고 있던 이 교수 댁에서 잠을 청하고 아침에는 아파트 시설 중의 하나인 수영장에서 여독을 풀었는데, 이 교수가 너무 수영을 잘해서 깜짝 놀랐다. 한국의 아파트에 대한 기대치가 부쩍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를 데려다주며 고맙게 광주로 가는 버스표도 끊어주었다. 그때 떠오르는 장면 하나는,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어주던 직원의 손동작이다. 여직원은 한 손으로 돈을 받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표를 전달해 주는 게 아닌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그 장면으로 나는 “과연 신속하고 정확한 한국에 오긴 왔구나!”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가보는 전라도였다. 대학 시절 여름마다 열리는 농촌활동의 일환으로 순천시 교외에 가서 보리 추수를 돕는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학우들의 공연을 위해 밤새 연극 대본을 썼다. 제목이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뭘 했는지는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다. 낮에는 손에 익지 않은 추수를 도왔고, 밤에는 농촌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어설프지만 유쾌한 공연을 하며 막걸리도 실컷 얻어먹었다. 아마도 그때가 1979년 정도였을 것이다.

 

그 후 1996년에 광주광역시 양림동 108번지에 위치한 호남신학대학교에 당도했다. 학교에 가보니 리치몬드에서 같이 공부했던 오덕호 교수와 절친 황영훈 교수가 나를 환대해 주었고, 평생 좋은 형이 된 노영상 교수도 복도로 나와 맞아 주었다.

 

황승룡 총장과 차종순 교수, 노영상 교수와 같은 이들이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 “김도일 박사님 호남신대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는 지금 인사위원회를 하고 있어요”라며 마치 내가 이미 수락한 것처럼 대했다. 나는 무척 당황했으나 속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미국 이민 길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 수유리 장미원을 향했다. 인서 목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가는 곳마다 옛친구들이 맞이해 주어 무척 고마웠고 나는 실로 복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니 호남신대 오덕호 교수로부터 전화가 와서, “호남신학대가 기독교교육학 교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며, 학생들의 학구열도 대단하고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기독교교육에 대한 목마름이 크니, 와서 함께 가르치자”며 정성껏 권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좋아하던 황영훈 상담학 교수의 “함께 하자”는 권유는 나에게 위로와 격려를 동시에 전해주었고,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것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직 롱아일랜드 연합장로교회에는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에 교회로 복귀한 나는 담임목사님과 다시 긴 의논을 하였다. 그리고 가족들과의 회의와 맹렬한 기도 후에 결국 새로운 소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장로님들은 무척 아쉬워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점점 자리가 잡혀서 성황을 이루던 한글, 영어 성경공부 사역은 이제 누가 맡아서 할지와 담임목사와 짝을 이루어 다니던 심방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염려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낯선 한국에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 있냐며 걱정도 살뜰하게 해 주셨다.

 

그동안 돌보던 구역의 식구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분들이라 차비와 이사비가 없어 차를 몰고 대륙횡단을 해야 했던 우리 가족의 사정을 몰라서 그랬는지 “레녹스”라는 상표의 고급 시계를 선물했다. 그 시계는 장착된 배터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만 시계로서의 사명을 다했고, 그 이후에는 골동품 취급을 받았다. 어떤 성도는 영전해 가시니 마음이 기쁘다고 했고, 어떤 성도는 이제 조금 마음을 열 수 있을 만하니 떠난다고 하며 아쉬워 하셨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사비용이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광주까지 짐을 부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커다란 컨테이너에 싣고 가야 하기에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때 홍성택 집사님이 자기가 해외무역을 하는데 부치는 짐에 같이 넣어준다고 해서 이른바 ‘꼽사리’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많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 가족을 위해 헌금하는 심정으로 짐 수송비를 부담한 것 같았다.

 

그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자기가 예수를 믿고 나니 한 가지 마음이 불편한 게 있는데, 어째서 예수님은 “외식하지 말라”고 하셨나며, 외식을 자주하던 자신 가족에게는 너무 힘들다는 얘기로 구역식구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안겨주던 흥겨운 분이었다. 아직 초등학교 4학년, 유치원생이었던 우리 아이들(수진, 예진)과 아내는 LA 친정집(처형댁)에 잠시 가 있게 되어 다시금 3,000마일 이상의 장거리를 운전했다. 그렇게 우리의 길지 않은 뉴욕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교우들과 함께 관람하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그루먼 비행기 회사와 밀당하며 유대인 변호사를 고용하여 복잡한 뉴욕 롱아일랜드의 건축법을 배워 법적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아름다운교회)의 현재 모습을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한 일,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며 사역했던 시간과 새벽 설교 후 맛난 음식을 먹던 장면, 한밤중까지 담임목사님과 병원, 사업체 심방을 다녔던 기억, 부목사였으나 부임 당시 미장로교 롱아일랜드 노회에서 모든 임원이 다 와서 부임 예배(Installation Service)를 드리며 감격했던 순간, 노래를 잘 부르던 교역자들이 모든 성도와 캐롤을 부르며 성탄예배 드리던 중에 눈물을 흘렸던 경험, 목사님이 같이 일하게 되어 목회 일생 중 가장 행복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 잠이 부족해 교회 사무실에서 코를 골며 자던 일까지… 너무도 행복한 일들과 오롯이 남아있는 추억들이 대륙횡단을 하면서 내 눈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아이들은 뒷자리에 누워 “아직 멀었어? (Are we there yet?)”라며 지루해하던 그 말과 목소리마저 생생하다. 만약 지금의 딸들과 그런 여행을 했다면 무척 즐겼을 텐데, 그때 아이들은 너무도 어렸고 부모도 미숙하여 일생에 한 번밖에 없었을 여행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기회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4,800킬로미터를 신나게 우리 아이들, 손주들, 사위들과 마음껏 즐기며 달리고 싶다.

 

   돈 처리에 민감하던 교회였기에 이사를 나가던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던 ‘시큐리티 디포짓(일종의 계약금)을 모두 인도 집주인에게 주고 가라’는 말이 사뭇 섭섭하게 들렸으나 돈을 다 털어서라도 모두 내고, LA로 떠났던 게 잘했던 일이었다고 나중에는 생각했다.

 

주님은 그때도 우리와 함께하셨고, 우리 차의 바퀴를 우리 몸의 다리를 든든히 붙잡고 계셨다.

그러한 믿음의 고백이 지금의 내가 소망과 감사 속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주간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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