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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079. [역경의 열매] 권오승 (1-17) 시장경제 파수꾼 역할하며 그분의 섭리 깨달아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8.02|조회수75 목록 댓글 0



***간증: 1079. [역경의 열매] 권오승 (1-17) 시장경제 파수꾼 역할하며 그분의 섭리 깨달아

 

2006년 3월 16일. 모 언론에서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의 불공정한 말이란 제목의 기사가 났다. 이 언론은 내가 공정거래위원장 취임식에서 특정 종교를 찬양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취임사를 하게 됐다모든 일에 있어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에 비추어 손색이 없다면 밀어붙일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또 사람들이 오해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만 인정해주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직원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언론이 이 대목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타 종교단체에서 이 문제에 관해 논평을 내고 엄중히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사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축복을 전했는데 이를 물의라고 한다는 것을 보며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2008년 3월 6일 공정거래위원장 이임식 때도 나는 이 말을 빼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직원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 60년 동안 항상 함께하셨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던 2년 동안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시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더 열심히 노력했고, 부침도 있었다.

 

공정거래법, 경제법, 공정거래위원회 등은 말만 들어도 어렵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다. 어려운 부분은 제외하고 경북 안동의 소몰이가 서울대 교수를 거쳐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는지를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제 질서는 무엇인지도 소개하고 싶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내가 항상 묵상하는 성경구절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늘 꿈을 통해 나를 이끌어 오셨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요즘 초등학생들 꿈은 연예인이 가장 많다고 하던데, 당시 대부분 학생들 꿈은 대통령이었다. 담임선생님의 장래 희망 조사에서 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섭섭해할 것 같아서 나는 교사가 된 이후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대학 1, 2학년 때는 농촌운동가가 되고자 했다. 많은 법대생들이 법조인, 고급공무원을 꿈꿨지만 나는 농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3학년 때에야 비로소 전공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0월유신으로 휴교령이 내려져 잠시 충남 부여의 곡부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할 때였다. 우연히 율곡 이이의 상소문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접하게 됐다. 만언봉사는 남이 읽지 못하도록 밀봉한 장문의 상소란 뜻으로 율곡 이이는 이 상소에서 적절한 법 개혁 등을 강조했다. 나는 이를 읽고 감명 받고 법학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됐다. 이후 시장경제의 파수꾼으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부임했고 지금은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그간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역경의 열매] 권오승 (1) 시장경제 파수꾼 역할하며 그분의 섭리 깨달아

* [역경의 열매] 권오승 (2) 여섯살 때부터 교회 출석… 믿음 약해 뒤늦게 세례

* [역경의 열매] 권오승 (3) 공부 좀 한다고 기고만장하다 대입 낙방 좌절

* [역경의 열매] 권오승 (4) 신앙-율곡전서 두 바퀴가 법학자의 길로 인도

* [역경의 열매] 권오승 (5) 말씀 묵상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 깨달아

* [역경의 열매] 권오승 (6) 무소유 실천 목회자에 끌려 주님의교회 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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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50년 경북 안동 출생. 용산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한국경쟁법학회장, 공정거래위원장, 주님의 교회 장로 역임. 현 서울대 법대 교수, 사단법인 아시아법연구소장, 서울대 경쟁법센터장, 크리스천 리더십 아카데미 대표

 

***[역경의 열매] 권오승 (2) 여섯살 때부터 교회 출석… 믿음 약해 뒤늦게 세례

 

나는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내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 가정에서 중요한 것은 아들의 공부보다 집안일이었다. 논밭에서 김을 매거나 소에게 꼴을 먹이는 일,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오는 일이 내 몫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항상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일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는 늘 부족한 시간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가 야속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졸업식 때 학교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도 이를 기뻐하셨다. 나는 불만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지난 6년 동안 학교에 한번이라도 오신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없다고 하셨다. 또 지난 6년 동안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번이라도 해 보신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미안한 표정으로 없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공부는 잘하니까 하라고 할 필요가 없었고, 일은 안 하니까 하라고 할 수밖에 없지라고 하셨다.

 

안동 권씨 유교 집안의 35대손이었지만 나는 여섯살 때부터 집 앞에 있는 이천교회에 다녔다. 일하는 것만 빼면 어린 시절 농촌에서 보낸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많은 기억이 그곳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일들이 새롭다. 하루는 성경공부를 하다 하나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했다. 이를 전도사님에게 물었다.

 

여섯살 꼬마에게 의외의 질문을 받은 전도사님은 잠시 당황하더니 잘 모르겠다. 다음에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1주일 후 전도사님은 굳이 따지자면 남성 쪽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쉽게 이야기했다. 물론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초월적인 존재라고 앞서 설명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집사님이 어린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에 모여 있는 어린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들 중에서 장차 목사도 나오고, 장관도 나오게 해 주세요.

 

이 기도를 들으며 저렇게 기도해도 되나. 너무 우리 욕심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저런 기도도 과연 들어주실까라고 의문을 가졌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몇 명 안 되는 아이들 가운데 실제 목회자가 나왔고 장관도 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매우 순조롭게 지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학습을 받았지만 곧 바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세례 예식에서 1년 선배들이 하나님께 하는 선서를 보며 나는 선서할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선서를 정직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미룬 세례는 1980년 부산 오산교회에서 받았다. 그때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적인 세례만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을 것이라면 진작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상태는 40세가 넘어 구역장으로 활동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베푸셨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3) 공부 좀 한다고 기고만장하다 대입 낙방 좌절

 

어릴 때는 기고만장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공부만 잘하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 또 자신도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이후 많은 시련과 역경을 통해 내가 다듬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그 기고만장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1963년 중학교 2학년 때 며칠간 폭우가 계속됐다. 지각을 걱정한 나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내 방 불이 켜진 것을 본 옆집 친구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침 먹고 내 아들하고 같이 가려무나. 친구가 여전히 자고 있자 그 어머니는 오승이는 벌써 일어나 공부하고 있던데, 너는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래서 좋은 학교 가겠니라고 크게 꾸짖었다. 하지만 이 친구 아버지는 웃으시며 그러면 뭘 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오승이나 늦잠 자는 우리 애나 모두 같은 고등학교에 갈 텐데라고 했다. 무심코 하신 말씀이었으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는 것, 그것이 현실이었다. 또 집안 형편상 타지로 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같은 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이 일은 내게 약이 됐다. 나는 서울의 용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문제는 학비였다. 합격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한마디로 일희일비(一喜一悲)라고 하셨다. 한편으로 기뻐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슬퍼하셨다는 것이다.

 

입학을 했지만 내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후암동 해방촌에서 자취하며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2학년 때부터는 입주과외에 나섰다. 용산중학교 1학년 학생의 집에서도 지냈고 심지어 같은 반 학생 집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당시 반에서 58등 꼴찌였던 그 학생이 겨우 두 달 만에 30등으로 껑충 뛰었다. 난 전교 1, 2등을 다퉜고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고3이 되자 성적이 떨어졌다. 다들 공부하는 시간에 다른 학생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과외 학생과 같은 방을 써 집중이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밤 11시쯤 인근 사립독서실에 가서 밤새워 공부하고 아침에 돌아와 학교로 향했다.

 

며칠 후 학생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밤에 어린애를 혼자 집에 놔두면 어떡해라며 심하게 꾸짖었다. 과외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독서실에 놀러간 것도 아닌 것을 아시면서 자기 자식만 귀하다고 하는 그 어머니가 너무 야속했다. 나는 다음날 그 집을 나와 하숙집으로 옮겼다. 성적은 두 달 만에 회복됐다. 두 달치 하숙비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길은 또 열렸다.

 

이전 입주과외 학생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오라고 했다. 우리 애가 학생 아니면 공부를 않겠대. 가정교사는 따로 둘 테니 생활지도만 부탁해. 못 이기는 척 나는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그 고생을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진학에는 실패했다.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다 낙방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침 일찍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법대 캠퍼스 게시판에 내 이름이 보이지 않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밤 새워 고민하다 다음날 안동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지난밤에 내가 좌절한 나머지 혹시 딴 생각을 먹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셨다고 했다. 기고만장 권오승이 겪은 첫 패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이후 나는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4) 신앙-율곡전서 두 바퀴가 법학자의 길로 인도

 

1년간 재수를 한 후 1969년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기대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교양 교과과정이 자리를 못 잡아 너무 개론적이거나 지나치게 전문적이었다. 그래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캠퍼스에선 데모가 연일 이어졌다. 1학년 때 부정선거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전태일 사건, 교련반대, 위수령 발동, 10월 유신 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나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3학년 때는 위수령 발동으로 대학이 문을 닫았다. 학생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은 대학에서 제적돼 군대로 끌려갔다. 4학년 때에는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헌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법 공부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학업을 그만두려 했다.

 

법학에 대한 관심 회복은 당시 혼란을 피해 충남 부여군 은산면에 위치한 곡부서당에 있을 때 이뤄졌다. 판사나 변호사, 고위 공무원이 아니라 학자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이때였다. 농촌 봉사활동을 통해 알게 된 그곳에서 율곡 선생의 후예인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님을 만났다. 이분의 지도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 사서(四書)를 비롯해 성학집요(聖學輯要)의 한문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율곡전서를 보다가 우연히 만언봉사(萬言封事·밀봉한 장문의 상소)를 접했다. 그때까지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많은 글을 읽었으나 늘 아쉬움이 남았다. 적절한 대안이 없거나 대안을 제시해도 단편적, 혹은 편향적이었다. 그런데 이 상소문은 당시 우리나라가 안고 있던 제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하고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글을 읽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장차 지향해야 할 삶이 판사나 변호사 같은 법률가가 아니고, 고위 공무원도 아니요, 농촌운동가도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부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농업문제와 소유권을 깊이 연구했다. 곧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했으며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법학 교관으로 복무했다. 1979년 3월 동아대 정법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1980년 경희대, 1992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됐다.

 

법 공부를 그만두려 한 적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신앙 때문이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던 나는 서울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길 만한 법학자가 되고자 했으나 이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꿈꿨다.

 

이전에는 법학 책을 하루 종일 읽어도 지루한 줄 몰랐는데, 이후에는 성경책이나 신앙서적만 읽게 됐다. 법학서적은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공에 대한 흥미를 잃고, 급기야 법학을 의미 없는 학문으로 여기게 됐다. 아예 교수를 그만두고 신학대학원에 갈까 고민했다. 이 문제를 놓고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러다가 성경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부터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법학 전공을 결정할 때 나는 신앙이 깊지 않았다. 기도하지 않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선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법학자의 길로 인도하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관계자를 만나게 하셨고, 또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셨다. 이것을 깨닫고 전공의 의미와 가치를 신앙 안에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제법 연구 목적은 바람직한 경제 질서의 추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경제 질서의 형성으로 바뀌었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5) 말씀 묵상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 깨달아

 

팔불출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내 우일강 권사 자랑 좀 해야겠다. 예전엔 사랑자도 꺼내지 못했다. 당연한 줄 알았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들었다. 아담은 이 이브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내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됐다.

 

아내는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이화여대 법대 1학년생이었다. 우리는 서울 광화문의 귀거래라는 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아내는 예뻤다.

 

아내와 교제하며 내가 가끔 여성도 됐다는 것은 재미있는 추억이다. 부모님이 편지를 뜯어볼까봐 보낸 사람란에 여성 이름을 쓴 것이다. 권오숙 권오순 오승희를 번갈아 썼다.

 

아내와는 1973년 2월 졸업식 때 약혼, 같은 해 10월 영락교회에서 결혼했다. 나는 가장 행복하게 해주겠다. 나와 결혼하면 행복하겠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당신과 나, 당신과 결혼한 사람까지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아내는 이를 받아들일 만큼 순수했다. 첫 아이가 예정보다 빨리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2주 동안 있었다. 입원비 병원비가 당시 전세금만큼이나 큰 돈이 됐다. 겨우 선배들에게 꿔서 해결했고, 이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지속됐다. 잘 이겨내다가도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더니, 속았다고 불평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위로하면 넘어가 줬다. 한번은 7년 후 가장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 어음을 써준 적도 있었다.

 

푸른 미래에 대한 억지 논리를 펴도 아내는 못이기는 척 동의했다. 내가 최소한 평균 수준의 능력은 있고,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반드시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했던 기억도 있다.

 

아내는 또 지혜로웠다. 내가 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있었던 일이다. 연구가 잘 되지 않았던 나는 자주 거실로 나왔다. 나에게 학자적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하고 자책을 하다 하소연하자 아내는 너무 무리한 것 같으니 며칠 푹 쉬자고 제안했다. 아내의 말을 따르자 실제 복잡하고 어려웠던 문제가 술술 풀리는 것이 아닌가.

 

반면, 나는 욕심쟁이였다. 당시 사랑이란 내가 좋은 대로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신사임당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도 신사임당이길 은근히 바랐다.

 

신사임당과 비교해 아내가 부족하면 가차 없이 지적했다. 고치려고도 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표현인 줄 알았다.

 

하나님은 내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 장점은 칭찬하고 단점은 조용히 다가가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알고 나서야 그동안 아내에게 보인 행동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게 됐다.

 

나는 원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다. 애정 표현이 뭔지도 몰랐다. 아내보다 내가 훨씬 흠이 많고 부족했다. 하지만 아내는 나를 하늘같은 남편으로 섬기느라 고생했다. 요즘은 아내에게 하루에 세 번 이상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자녀들이나 제자들에게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모든 것이 기적이요, 은혜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6) 무소유 실천 목회자에 끌려 주님의교회 출석

 

대학 입학 전까지 비교적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일예배에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 사회과학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교 행사로 주일 예배에 한두 번 빠지기 시작하다 급기야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것조차 회의가 들었다. 또 점차 우리나라 교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1960, 70년대에는 군사독재 치하였다. 대학은 민주주의 수호 데모로 항상 시끄러웠다. 대학생들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다양한 학생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내 눈에 우리 교계는 대체로 이러한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개인적인 축복만 중시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교회를 찾았지만 머리는 교회를 비판했다. 예배드리며 은혜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설교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다. 논리적이지 않다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을 수긍할 수 없다 설교 시간 중에 질문하는 시간도 안 주네 등.

 

나는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난 목사님들을 찾아 주일마다 교회를 떠돌았다.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정착한 교회가 서울 잠실 주님의교회다. 90년 11월 한 고등학교 선배는 주님의교회를 이렇게 소개했다.

 

주님의교회는 교회와 목사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게 특징이야.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목사도 집과 통장을 소유하지 않지. 또 헌금의 반을 선교와 구제에 쓰고, 나머지 반을 교회 살림에 사용하지. 대단해, 한번 가볼래?

 

아내와 나는 당장 그 다음 주일 주님의교회로 향했다. 강남 YMCA의 4층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인 수는 400여명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타 교회와 다른 참신한 느낌을 받았다.

 

첫째는 내가 교회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성수주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교회를 나갔다. 이 때문에 예배 시작 전에 교회에 도착한 적이 거의 없었고, 항상 지하실이나 교육관 등에서 TV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주님의교회는 700여명 공간이 다 차지 않았다. 매번 늦는 나조차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소속감을 갖게 됐다.

 

또 목사님 설교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재철 목사님은 미리 준비한 설교 내용을 몽땅 외워 그대로 전달했다. 그때부터 몇 달 동안 아내와 함께 주님의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던 91년 4월 어느 주일날이었다. 목사님은 신앙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터치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자전거를 뒤에서 살짝만 터치해보세요. 쉽게 올라가지라고 설명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터치를 받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방법이 궁금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설교를 끝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양실로 찾아갔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터치를 받을 수 있나요? 그런데 목사님은 권 교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터치를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삶 속에서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목사들은 다 저렇게 이야기하는가 보네. 내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계속 교회에 나오게 하려면, 저렇게 말해 두는 것이 좋겠지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7) 받은 은혜가 무엇이더라… 부산했던 간증 준비

 

주님의교회는 매년 여름 전교인수련회를 개최한다. 가능하면 모든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여러 번 광고한다. 교회를 옮긴 그해 1991년. 나도 광고를 들었다. 하지만 수련회는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이 간다고 생각해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다. 특히 그 기간 지방에서 심포지엄이 있어 참가하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가 신청 막바지 때였다. 아내의 권유로 구역모임 종강파티에서 구역장이 광고를 했다. 여름수련회 참가 신청을 마감하는 날입니다. 아직 신청하지 않은 분은 지금이라도 신청하세요. 수련회를 위해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나도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야, 이 녀석아, 네가 하나님이라면 네 기도를 들어 주겠니?

 

당시 나는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채용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상황을 점검했다. 하나님의 수련회 초청에 나는 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모교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너무 이기적이었다. 당장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흘렀다. 다음날 새벽, 담임목사님이 전화를 걸어 팀별 성경공부를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때까지 성경을 완독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팀장을 위한 별도교육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팀장 교육은 5일간 새벽기도 후 1시간씩 진행됐다. 주제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였다. 나는 우선 주제부터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교인수련회 참가, 팀장 맡은 것 등이 모두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결과라는 뜻인데, 만약 그렇다면 조금 더 일찍 참가하도록 하시지… 싶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수련회에서는 마지막에 간증 순서가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나누는 자리였다. 나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했다. 그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은혜란 공짜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생에 공짜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잘 된 것은 다 내 노력의 보상이었고, 그나마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일. 나는 내게도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받은 은혜를 깨닫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라, 이제까지 받은 은혜가 하나도 없으니 은혜를 달라는 것이었다. 큰 은혜는 바라지도 않고, 작은 은혜라도 좀 달라고 기도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은 없었다. 수련회가 다가와도 변화가 없었다. 나는 떼를 썼다.

 

하나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게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결국 간증을 못할 테고, 그러면 우리 팀원 모두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무능한 팀장이라는 평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 말고 팀원들 생각해서 조금만 은혜를 주십시오. 저도 간증할 수 있도록.

 

수련회 초반 나는 계속 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3일째 되던 날, 역시 새벽예배 때 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뭐, 은혜 받은 것이 없다고 ? 하나님 말씀이었다.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 모두 은혜인데, 은혜 받은 것이 전혀 없다고 ? 지난 40여년간의 삶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8) 학생회장 직선제 관철… 원칙 고수에 석고상 별명

 

1980년 8월 서울 경희대로 옮긴 뒤 나는 법과대학에서 주로 민법총칙과 채권법을 가르쳤다. 경제법은 선택과목으로 강의했다.

 

나는 가능하면 열심히 준비해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학생 성적은 엄격히 평가했다. 어떤 학생은 권 교수님은 다 좋은데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한 학생은 내게 민법총칙을 여섯 번이나 들었다. 학기말 시험에서 커닝을 하다 발각된 그 학생은 연구실로 찾아와 이번이 민법총칙 다섯 번째라고 설명했다. 군복무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졸업반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학점을 취득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하게 된다고 사정했다. 더구나 군복무 중에 허리를 다쳐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라며, 졸업을 못하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통곡했다.

 

나는 되레 그 학생을 야단 쳐 돌려보냈다. 사나이가 그렇게 나약해서 어디에 쓰겠느냐. 그만한 일로 죽을 것 같으면 아예 죽어버려라.

 

바로 방학이어서 그 학생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학 내내 걱정을 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야단을 친 것은 아닌지, 혹시 그 학생이 정말 잘못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그 학생이 편지를 한 통 보내왔다.

 

처음에는 많이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교수님이 바라시는 게 무엇이며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저 잘되라고, 성실하라고 한 것이지 저를 미워서 그런 게 아닌 것을 잘 압니다. 장차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지를 읽고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도 답장을 썼다. 그 학생은 다음 학기에 민법총칙을 여섯 번째로 수강해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경희대로 옮겨 온 지 6개월 만에 나는 법학과 학과장이 됐다. 법과대학의 학사 행정과 학생 지도도 총괄했다. 당시에는 학교 행정에 불합리한 요소들이 많았다. 군사정부가 학교의 행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회 대표를 대학이 지명했다. 이렇게 뽑힌 학생회장은 일반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았고, 지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교수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그 다음해부터 학생회장을 학생들이 직접 선출하게 했다. 많은 반대가 이어졌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법과대는 학원 소요의 진원지였다. 학교가 조용하려면 법과대부터 평온하게 해야 했다. 이를 설득시켜 직접 선출을 강행했고, 실제 학원 소요는 가라앉았다.

 

원칙에 따라 처리하려는 내 모습이 학생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원칙주의자로 비쳤던 모양이었다. 1982년 가을 설악산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등반을 마친 우리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모처럼 마음을 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학생이 갑자기 소리쳤다. 선생님, 선생님, 석고상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설악산에 어느 석불이 그러나 보다 싶어 어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일제히 박장대소했다.

 

한 학생이 나의 이마를 가리켰다. 여기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석고상과 같은 교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가슴 따뜻한 교수라는 것을 학생들이 알고 장난을 친 것이었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나를 교수님이 아닌 선생님으로 불렀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9) 독일 유학 중 아시아 경제공동체 꿈 꿔

 

경제법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신 분은 대학원 지도교수 황적인(黃迪仁) 교수님이었다. 1977년 초 경제법 교과서를 함께 집필하자고 하셨다. 1년 이상의 준비를 거쳐 78년 황 교수님과 공저로 경제법 교과서(법문사)를 출판했다. 국내 최초의 경제법 교과서였다. 88년에는 이를 전면 개정, 나의 단독 명의로 출판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경제법에 관한 대표적인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2009년에는 한국경제법(韓國經濟法)이란 이름으로 중국에서 번역 출판됐다.

 

경제법의 체계적인 연구는 84년 독일로 유학 가 프리츠 리트너(Fritz Rittner) 교수를 만난 뒤부터다. 리트너 교수는 경제법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다. 당시만 해도 경제법과 같이 새로운 분야는 국내에서 제대로 연구하기가 어려웠다. 외국유학이 필요했고, 경제법이 발달한 독일을 선택했다. 83년 독일 훔볼트재단의 지원으로 86년 7월까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법연구소에서 리트너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첫 해에는 리트너 교수의 모든 강의와 세미나를 빠짐없이 참가했다. 책과 논문도 모두 읽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경제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해부터 리트너 교수와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시간 동안 면담을 가졌다. 1년간 꾸준히 지속된 이 시간을 리트너 교수는 월요대담이라 불렀다.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미리 질문서를 작성했다. 이 질문서를 작성하느라 며칠 동안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새로운 질문들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시간을 통해 경제법의 기본원리와 핵심적인 쟁점은 물론 시장과 정부의 관계 등 법학의 기본문제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독일의 법을 비교해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기업결합규제법에 관한 연구였다.

 

2004년에는 뜻있는 법률가들과 함께 아시아법연구소를 설립했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법과 제도를 비교 연구해 현지에 진출한 기업을 돕기 위한 것이다. 또 체제전환국과 개발도상국의 법제 정비 등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다.

 

나는 독일 유학 중 두 가지의 꿈을 꿨다. 하나는 한국에서 한국말로 한국의 경제법을 외국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유럽경제공동체와 같은 아시아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 같은 꿈은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누가 들었으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꿈은 이미 실현됐다. 아시아 경제공동체와 관련한 두 번째 꿈은 진행 중이다. 아시아경제공동체를 위한 조짐도 보인다. 국내외 여러 모임에서 아시아 경제공동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면 일단 반응이 크게 좋아졌다. 이전에는 나를 허황된 사람으로 여겼다. 지난 1월에는 방한한 일본 총리에게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아시아지역 경제공동체를 만들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다.

 

성경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시편 90:10)라는 말씀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해 앞으로 20년 이상 더 산다면 생전에 두 번째 꿈도 실현되리라. 이를 위해 법적, 제도적 장애요인을 찾아내 이를 제거하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역경의 열매] 권오승 (10) 암환자 위한 기도-수련회 사고 통해 신앙 고민

 

선데이 크리스천이던 내가 1997년 장로 직분을 받았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봉사나 교제는 전혀 않던 내가 장로까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안할 수 없었다. 순전히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게 됐다.

 

그러나 장로가 되기 전까지 내 신앙은 좌충우돌이었다. 이전 구역장이 사업 때문에 미국으로 가면서 대리 구역장을 맡게 됐다. 우리 구역에 후두암 말기 환자가 한분 있었다. 전임 구역장은 매우 헌신적이어서 금요일 저녁마다 이 환자를 찾아가 철야기도를 했다. 하지만 나는 병문안을 가기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의학적으로 후두암 말기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성도님들이 그 환자를 심방하겠다고 했다. 잘됐다 싶어 나도 따라 나섰다. 나는 병실 뒷자리에 서서 조용히 묵상만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환자 심방을 한 번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다음 주 다시 용기를 내 혼자 병실을 찾았다. 그날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환자만 혼자 누워 있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묵상기도를 드리고 투병을 잘하라고 한 뒤 일어났다.

 

이 때였다. 환자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더니 구역장님, 기도 좀 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그 때까지 소리를 내서 기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역장으로서 기도 요청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남을 위해 소리를 내어 기도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거의 뛰쳐나왔다. 무슨 기도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구역장으로 있을 때 한 번은 교회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 전교인수련회 중에 여섯 살짜리 꼬마가 숨지는 사건이었다. 92년 경기도 용인 숙명여대 수련원에서였다. 그 꼬마는 우리 구역의 가족이었다. 부모님이 버거워 할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많았다. 저녁식사 시간이 됐는데 이 꼬마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아이가 갈 만한 곳을 찾았지만 수련회장 어디에도 없었다. 한 집사님이 강당의 빔 프로젝트에 이상한 물체가 걸려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달려가 보니 이 프로젝트의 전선에 아이가 감겨 있었다. 급히 내려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아이는 숨을 거둔 뒤였다.

 

수련회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가까운 병원에서 장례 준비에 들어갔다. 아이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님들을 비롯한 많은 가족과 친지들이 찾아와서 며칠 동안 함께 기도하고 슬픔을 나눴다.

 

그러나 우리는 수련회 장소에서 어떻게 그러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지,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에 의지해 아이의 가족을 위로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생각했다. 그러면서 부족한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됐다.

 

나는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의 부장을 거쳐 장로가 됐는데 장모님이 제일 기뻐하셨다. 누구보다 내가 장로 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1) 보시기에 바람직한 경제 질서 구현 최선

 

선생님, 우리가 반드시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까? 평소 과묵한 편에 속했던 박사과정 학생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는 그럼, 자네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나라고 물었다.

 

학생의 대답은 극히 목가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오순도순 서로 협력하며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학생처럼 대부분이 경쟁의 의미나 가치를 정확히 모른다. 오랜 농경사회에서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해 온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더 그렇다.

 

공정거래법은 한 마디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는 법률이다. 조금 설명하면 시장경제에선 개인이나 기업이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한다. 여기에서 경쟁이나 협력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협력 모두 필요하다. 이를 제한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 규제에 대한 결과는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기업들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놓고 경쟁하면 소비자들은 좋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값 싸게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경쟁을 하느라 힘겹다. 기업들은 이 때문에 경쟁자를 완전히 물리쳐 독과점 지위를 얻거나 담합을 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이를 못하게 하는 것이 공정거래법의 역할이다, 당연히 법을 집행하는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을 지켜야 하는 기업 사이에는 견해가 상충한다. 법에 대한 인식 차이가 상당하다.

 

1996년 서울대 법과대학 공정거래법 연구 과정에 앞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정거래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대기업 임원이 수강하게 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공정거래법은 내용이 애매하고 절차가 복잡해 회사 입장에서는 지뢰밭을 밟는 것과 같습니다. 강의를 통해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을 구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자 바로 옆자리에 있던 공정거래위원회 과장이 나섰다. 공정거래법은 도로의 중앙선과 같은 것인데, 기업인들이 이를 모르고 침범합니다. 이로 인해 다친 뒤에는 이 법을 지뢰밭이라고 비난합니다.

 

강의에 앞서 서로 인사하는 자리인데도 공정거래법에 대해 몇 마디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나는 얼른 일어나 상황을 진정시켰다.

 

공정거래법이 도로의 중앙선과 같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앙선이 똑바로 그어져 있지 않거나 분간 못할 만큼 희미하게 그어져 있다면 기업만 탓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제법을 연구하는 교수로서 나의 역할은 중앙선을 똑바로, 그리고 분명하게 긋도록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바람직한 기준을 찾기 위해 미국과 독일 일본 등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의 사례를 비교 연구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을 찾는 게 그동안 내가 해 온 일이며 내 인생의 목표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 역할과 목표를 근본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람직한 경제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람직한 경제 질서를 연구하고 교육해 이 사회에 반영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현재의 경제질서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문제점들을 찾아내며, 주 안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이뤄질 수도 없고, 한두 사람의 힘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또 방안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실제 사회에 구체화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고민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학자인 내게 맡기신 소명이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2) 학생들 요구에 법기독학생회 지도교수 승낙

 

하나님은 의외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음을 알게 된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하는 이유다.

 

법기독학생회 지도교수가 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맡게 된 계기도 비기독인 입장에서 보면 우연이랄 수밖에 없다.

 

1992년 3월, 일찍 출근한 나는 연구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8시쯤, 어디선가 찬양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반가워 소리를 따라 가봤다. 학생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한 학생에게 살짝 물어보니 법대 기독학생 모임이라고 했다. 며칠 후 모임의 몇몇 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지체 없이 승낙했다.

 

처음 참석한 예배에서 나는 지도교수를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었음을 알게 됐다. 대표기도를 맡은 학생은 하나님 아버지, 지도교수님을 보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의례히 하는 감사가 아닌 듯해 이유를 물었다.

 

자치모임인 법기독학생회가 공식적인 동아리가 되려면 지도교수가 필요했거든요. 지난 몇 년간 지도교수가 없어서 등록도 못하고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도교수를 보내 달라고 계속 기도했거든요.

 

법기독학생회 지도교수로서 나는 학생들의 학업 및 진로, 신앙 상담을 했다. 하루는 한 여학생이 연구실에 찾아왔다. 순천여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 법대에 온 재완이란 학생이었다. 이미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두 번 떨어진 이 학생은 그간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법학에는 본래 관심이 없었고 문학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부모와 교사, 교장의 강요로 서울법대에 올 수밖에 없었어요. 학교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서울 법대를 가야 한다고요. 그런데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회의가 드네요. 왜 이 사법시험을 봐야 하는지….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1년만 더 해보라는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다시 사법시험을 치른 후 이 학생이 찾아왔다. 다행히 얼굴은 이전과 달리 밝았다. 그는 지난 1년간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법률가가 돼야 할 이유를 간절히 구했다며 이제 법률가라는 직업을 통해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재완 학생은 그해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굴지의 로펌에서 수년간 세무전문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현재는 로스쿨 교수로 일하고 있다.

 

1993년 3월부터는 보다 긴밀한 영적 교제를 위해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아침 8시에 모여 독일어 성경을 한 장씩 읽고 해석한 뒤, 받은 은혜를 나눴다. 1997년부터는 영어로 말씀을 나눴다.

 

어느 날 이 모임에 참석하는 한 여학생이 아버지가 너무 밉다. 정말 죽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해 지방에서 따로 살았다. 최근 아버지 집에 갔다가 소포 부치는 심부름을 했는데, 괜히 트집을 잡아 야단을 쳤다고 했다.

 

나는 전후 사정을 다 듣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원만치 못한 가정생활로 인해 부녀의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이었다. 이런 경우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게 마련이다. 나는 따뜻했던 아버지의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했다.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며칠 후 이 학생의 중간보고가 있었다.

 

도저히 못 쓸 것 같은 편지가 장문의 글이 됐고, 이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나중에 최종 보고를 했다. 그날 이후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학생의 부모는 다시 결합했다는 소식이었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3) 국민 위한 사법개혁 추진 한점 부끄럼 없어

 

1995년 김영삼 정부시절 세계화추진위원회(이하 세추위)는 사법개혁을 위해 소위원회를 만들었다. 나는 같은 대학에 근무하다 청와대 비서실로 들어간 박세일 전 정책기획수석의 권유로 이 소위원회의 연구 간사를 맡았다.

 

세추위는 대법원과 공동으로 법조인 수 확대와 법조인 양성제도 개편을 통해 사법개혁에 나섰다. 이에 따라 법조인 수는 점차 늘려 2000년 이후 1년에 1000∼2000명 범위 안에서 조정키로 했다. 또 법조인양성제도는 획기적으로 개편한다는 기본 방향에 합의했다. 이후 시험이 아닌 교육을 통해 법률가를 양성하는 제도가 추진돼 노무현 정부 때 결실을 맺었다.

 

사법개혁 소위원회 연구 간사로서 나는 많은 경험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사법개혁 추진과정에서 비난을 받았던 일이다. 당시 사법개혁에 대한 법조계의 저항은 엄청났다. 법률가를 시험이 아닌 교육으로 양성하려 하자 법조계 대표 인사 중에는 우리는 대학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다고 강변하는 분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법개혁을 추진하던 인사들을 법조오적(法曹五賊)이라고 힐난했다.

 

언론은 법조오적으로 P씨, C씨, K교수 등을 지목했다. 나는 설마 나까지 포함되진 않았겠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대외적으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소위원회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를 보고 P씨와 C씨는 누구인지 알겠는데, K교수는 누구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K교수가 권오승 교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사법개혁은 우리 국민을 위한 것이었다. 국민이 값싸게 질 좋은 법률서비스를 이용하게 하자는 게 기본 취지였다. 또 신앙인으로서 단언컨대 어떤 사심도 없었다.

 

2005년 하나님은 나를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 자문위원장으로 세우셨다. 그 즈음 나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에 직접 참여해 그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적용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이었다. 이전에 개정안이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소비자보호를 위한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가하기도 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를 알고 하나님이 길을 여신 것이다.

 

경쟁정책 자문위원장을 뽑는 날, 나는 회의에 못 간다고 알렸다. 그 자리를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었고 10시 자문회의에 참석 후 오찬까지 하면 오후 강의가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찬을 하지 않으면 강의에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회의에서 나는 자문위원장에 선출됐다. 특히 경쟁정책자문위원장을 선거로 뽑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비전도 주셨다. 첫 자문위원회를 주재하고 회의실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자문위원이 내게 조용히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권 교수님, 언제까지 공정위에 자문만 하실 겁니까? 자문은 그만 하시고 자문을 받으셔야죠. 법과 정책 집행을 직접 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내게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장차 시장경제의 파수꾼인 공정거래위원회를 책임지는 위원장이 되고 싶다는 도전을 이때 받았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4) 공정위장 임명후 盧 정부 전폭 지지 약속 받아

 

2006년 1월 대부분 언론들이 후임 공정거래위원장(공정위장) 하마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공정위장 임기는 그해 3월까지였다. 하마평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언론들은 대체로 갑, 을, 병과 그 밖에 권오승 교수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이는 내가 유력한 후보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나는 기사를 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공정위장 되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면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3월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비서실 인사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이 나를 제13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지명했다고 통보했다. 언론들도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대부분은 나를 경쟁법에 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일단 긍정적인 평가가 대세였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그 다음날 수업시간 때 만난 학생들은 못마땅하다는 눈치였다. 내가 공정위로 가면 해당 강의가 폐쇄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유능한 교수에게 부탁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공정위장으로서 나의 각오도 밝혔다. 공정위장으로 가는 것은 그동안의 연구를 생활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선언했다. 후에 대학으로 돌아오면 공정위장의 경험이 경쟁법 연구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큰 박수로 축하해줬다.

 

나 스스로도 공정위장 직무에 충실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임명장은 대통령이 주겠지만 공정위장에 세운 이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를 훈련시키고 준비시키신 하나님이셨다. 공정위장으로서 지혜와 능력도 후히 주실 하나님이신 줄 믿었다.

 

임명장은 16일 오후 2시에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환담하는 자리에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나는 두 가지를 부탁했다.

 

우선,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정위가 독과점 기업 등을 감시하고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려면 시장에선 기업과, 정책에선 정부 부처와 자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청와대가 신뢰해주지 않으면 그런 일을 잘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은 즉각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이에 대통령은 짐짓 의외라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임 위원장에게 물어보세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간섭한 적이 있는지. 정책은 조율하겠지만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노 전 대통령은 이 두 가지 약속을 충실히 지켜 주셨다. 이 점에 대해 고 노무현 대통령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공정위장이 된 후 나는 다시 한번 여호와 이레(하나님의 예비하심)의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공정위의 공무원 상당수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간부들 대부분은 서울대 공정거래법연구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내 수업과 교과서였던 내 저서를 통해 나의 이론과 주장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인적 네트워크와 공감대는 공정위장 업무수행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됐다. 하나님께서 이미 10여 년 전부터 내가 공정위장 될 것을 아시고, 인재들을 만나게 하시고 소통시키셨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5) 출총제 논란으로 재벌 문제 해결 어려움 알아

 

2006년 3월 16일부터 2008년 3월 5일까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던 2년은 내가 가장 많이 기도했던 시기였다. 그만큼 시장 경제 속에서 공정거래를 확립하기 위해 공정위원장의 할 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논란도 계속됐다.

 

우선 시장 경제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공정거래관련 법과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했다. 또 독과점 사업자의 지위 남용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고, 방송 통신 금융 보건 에너지 등의 규제 산업에서 불필요하고 과도한 규제는 완화했다.

 

이에 따라 우리 공정위가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건 처리 건수가 공정위 역사상 2007년도에 가장 많았다. 또 경쟁법과 정책관련 전문잡지인 영국의 GCR(Global Competition Review)은 우리 공정위 경쟁력이 2007년 세계 10위, 2008년 7위라고 평가했다. 하나님의 격려였다.

 

물론 논란도 있었다. 가장 큰 이슈는 출자총액제한제도(이하 출총제)였다. 이 제도는 대규모 기업집단의 계열회사가 계열사의 지분 등을 보유해 지배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1986년 마련됐다. 당연히 재벌과 관련돼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2006년 내정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출총제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1998년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에 폐지됐다. 외국인의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으로부터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도 폐지 이후 대규모 기업집단의 계열사 간 순환출자가 크게 증가했다. 이 때문에 재벌총수가 5%미만의 적은 지분으로도 기업 집단을 모두 지배하는 폐해가 생기면서 1999년 다시 도입됐다.

 

출총제는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인 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계열사 기업 활동을 사전 규제해 투자의욕을 저하시키고, 예외가 지나치게 많으며, 목적 실현수단으로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공정위는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6년 7월부터 민간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의 제한, 채무보증 금지 등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출총제 폐지를 위해서는 먼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환상형, 방사선형 순환출자 등의 악성 순환출자를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악성 순환출자 중 새로운 순환출자는 금지하고, 이전 순환출자는 점진적으로 해소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자 이와 관련된 곳이 반대하며 나섰다. 삼성그룹, 현대·기아차그룹, 일부 언론이 이 방안을 강력히 반대했다. 급기야 나를 몰아세웠다. 어떤 언론사는 취임 초 재벌 규제는 없다고 하더니 8개월 만에 초강력 재벌규제책을 들고 나왔다며 나를 카멜레온이라고 비난했다. 또 다른 곳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의 대기업을 국민의 기업이라고 했다며 비판했다. 이들 기업의 소유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국민적 기업이라 했는데 이 언론사가 자로 바꿨다. 대기업과 관련 있는 이 언론사가 의도적으로 조작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재벌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실히 느꼈다.

 

악성 순환출자 해소는 2008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필요하다고 인정한 부분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출총제를 폐지해 버렸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6) 법을 통한 선교 위해 아시아법연구소 설립

 

현 정부가 추구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이 강화될 때 가능하다. 공정위는 기업 활동의 기초인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를 하도록 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기업이 규제 없이 마음대로 활동하는 나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 같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일부의 인식과 철학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임기를 1년 이상 남겨 놓고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재임 2년 동안 공정위원장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그곳에서 우리나라 경제 질서 선진화를 위해 노력케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서울대 법대 교수로 돌아온 지금도 시장경제의 파수꾼인 공정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또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까.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또 다른 길을 예비하셨다. 법을 통한 선교가 그것이다. 아시아법연구소 설립은 이 같은 소명의 구체적인 열매다.

 

1998년부터 해외 각지를 다니며 나는 이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됐다. 그해 안식년을 맞은 나는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방문교수로 지내며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KOSTA의 지역대표자 모임에 참가했다. 이곳에서 캠퍼스 선교 등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1999년 8월에는 시카고에서 열린 KOSTA에 참가, 학생들에게 신앙과 전공에 대해 특강했다.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과 후 신앙과 전공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을 간증했다. 이를 통해 은혜를 나누면서 법을 통한 선교에 비전을 갖게 됐다.

 

2002년 7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열린 한국·키르기스스탄 법률가 대회에 참가했으며, 귀국길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선교 세미나에 참석했다.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선교 중인 선교사들과 가족을 위한 자리였다. 이곳에서도 선교에 대한 큰 도전을 받았다.

 

이처럼 나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학술대회에 해마다 참가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외 곳곳에서 헌신 중인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들 나라가 우리의 법과 제도 발전에도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03년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연구할 때 나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 한인교회 청년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해 묵상하던 성경 구절이 이사야 58장 12절 말씀이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 내용 중에 오래 황폐된 곳들역대의 파괴된 기초라는 부분이 크게 부각됐다. 전자는 체제전환국을 가리키는 것, 후자는 법과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황폐된 곳, 즉 체제전환국에서 역대의 파괴된 기초, 즉 법과 제도 정비를 지원하고 법률가 양성에 협력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하며 만든 것이 2004년에 설립된 아시아법연구소다. 뜻을 같이하는 법률가들이 함께했다. 이용훈 변호사(현 대법원장)가 초대 이사장을, 내가 초대 소장을 맡았다.

 

아시아법연구소는 그동안 우리의 법과 제도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중국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등의 법과 제도 정비를 돕고 법률가 양성을 지원한다. 또 아시아권 법학자와 법률가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고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권오승 (17회·끝) 빛과 소금 역할 다할때 아름다운 나라 이루어져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람직한 경제 질서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마 5:13∼14)고 하셨다.

 

목회자와 크리스천 리더들은 많은 기독인이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이 같은 예수 제자 교육이 목회자는 물론 크리스천 리더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부족한 리더지만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크리스천 리더십 아카데미(Christian Leadership Academy·이하 CLA) 설립 추진은 이 같은 책임의식에서 시작됐다.

 

우리 기독인 10%가 삶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했을 것이며 선진국에도 이미 진입했을 것이다. 우리의 예수 제자 교육은 나라 발전의 길이요, 이웃 나라를 돕는 방법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주변의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나라, 세계에 축복을 나누는 통로가 된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상명령을 수행한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해당되는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이 말씀 중 전반부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왔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편이다.

 

나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부분을 크리스천 리더들이 맡았으면 한다. 실제 삶 속에서 승리하는 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성경적인 원리를 통해 체계화, 후배들에게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각계각층에서 리더로 활동 중인 크리스천은 많다. 이들이 젊은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돼주고 비전과 도전을 준다면 그 시너지는 굉장할 것이다.

 

여러 뜻 있는 분들과 추진 중인 CLA가 이를 체계적으로 도울 것이다. 현재 많은 크리스천 리더들을 발굴하고 있다.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

 

CLA의 이 작은 활동들이 씨앗이 되면 우리나라의 선진국 진입과 남북통일이라는 열매도 조속히 맺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의 영적 리더십을 확보해 이 지역의 공존공영에 이바지하고,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오늘까지 지면을 통해 함께해주신 많은 독자 분께 감사드린다. 앞으로 서울대 법대 교수, 법을 통한 선교사, CLA의 추진위원으로서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협력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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