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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402. [역경의 열매] 유해근 <1-10> 인간 대우 못받는 이주노동자 현실에 분노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8.14|조회수113 목록 댓글 0

 

 

***간증: 1402. [역경의 열매] 유해근 <1-10> 인간 대우 못받는 이주노동자 현실에 분노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시력 장애… 둘째 아들 지적장애로 고난 겹쳐

 

나섬공동체 대표 유해근 목사가 최근 서울 광진구 광장로 재한몽골학교에서 학생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나섬공동체 제공오른쪽 발이 심히 아리다. 얼마 전 바닥에 놓인 교자상을 잘못 밟아 발바닥이 찢어졌다. 두 번의 봉합 수술을 했으니 꽤 심각한 부상이었다. 넘어지고 부딪히는 것은 내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충격은 다른 사람보다 크다. 어둠 가운데 갑자기 가해지는 아픔은 말할 수 없이 무섭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매일 아침 아내의 도움을 받아 사무실로 간다. 누군가의 안내가 없을 경우 하루 종일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은 처지가 원망스러워 하나님께 불평했다. 왜 나를 섬에 갇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존재로 만드셨냐고 말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 섬을 세계로 만들어 줬잖니라고 하셨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공동체는 몽골, 인도, 베트남,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와 중동의 각 나라에서 모인 이들로 이뤄졌다. 그들을 섬기는 사역을 한지 어느 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나그네를 섬기는 공동체의 준말인 나섬공동체. 이곳이 나의 사역지다. 공동체의 모태인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의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멤버십 카드를 소지한 이주노동자들이 2500여명에 이른다. 몽골인 근로자 자녀들을 위해 1999년 개교한 재한몽골학교에서는 현재 270여명의 학생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인재로 자라나고 있다. 이 외에도 나섬공동체는 문화진흥원과 어린이집, 은퇴목회자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섬기는 뉴라이프동대문선교회 등을 세워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너무나 약한 존재인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진부한 표현일 수 있지만 당최 그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셨다.

 

군 제대를 하고 본격적으로 목회사역을 하기 전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남들이 가지 않는 목회의 길을 가겠다는 것과 약자들을 위한 사역을 하겠다는 것이다. 막상 마땅한 길을 찾기 어려웠다.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주 놀라운 길에 나를 서게 하셨다. 미국 유학을 결정한 나를 구로공단으로 부르셨고 우리나라에 와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섬기게 하셨다. 아무도 하지 않던 사역이었다. 당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했다. 노예나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슬픔을 공감하며 함께 분노했다.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러다 보니 탈이 났다. 점점 시력이 떨어지는 병에 걸렸다. 그 시기 공교롭게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둘째 아들이 지적장애아로 태어난 것이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반복돼 일어났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을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바울은 깨달았다. 자신이 약할 때 예수가 오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도제목이 다 이뤄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까. 나의 약함을 신앙적인 시각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경험할 수 있는 큰 은혜일 것이다. 

 

내 눈이 잘 보였다면, 나의 아들이 건강했다면 내 삶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까. 아닐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강하게 보이려 했다. 그때 하나님은 나를 쓰시지 않았다. 약해지고 미미한 존재가 됐을 때 들어 쓰셨다. 이렇게 깨닫기까지 긴 연단의 시간이 있었다.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하려 한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 [역경의 열매] 유해근 <1> 인간 대우 못받는 이주노동자 현실에 분노

* [역경의 열매] 유해근 <2> 고2 여름 연합수련회 때 목회자 되기로 결심

* [역경의 열매] 유해근 <3> 군목 생활하며 군부 핵심 보안부대와 자주 충돌

* [역경의 열매] 유해근 <4> 둘째 아이 장애에 아내 탓·하나님 원망하며 방황

* [역경의 열매] 유해근 <5> 죽기로 작정하고 간 바닷가에서 예수님 만나

* [역경의 열매] 유해근 <6> "외국인 근로자들 머물 공간을"… 건물주에게 눈물 호소

* [역경의 열매] 유해근 <7> 몽골 선교의 못자리된 재한몽골학교

* [역경의 열매] 유해근 <8> 불법 체류자 도와 몽골 선교사로 역파송

* [역경의 열매] 유해근 <9> 무슬림 이란인, 개종 후 귀화 '이란 이씨' 시조 돼

* [역경의 열매] 유해근 <10-끝> "오직 하나님 의지하며 나그네 섬길 것"

 

약력=△1962년 서울 출생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숭실대 대학원 졸업 △몽골대통령친선훈장(2007) 몽골교육부장관상(2013) 태평양공익인권상(2013) 수상 △㈔나섬공동체 대표

 

 

***[역경의 열매] 유해근 <2> 고2 여름 연합수련회 때 목회자 되기로 결심

 

신학대 외엔 대입 원서 안 쓴다 했더니 고3 담임교사 정말 미친놈 불호령

 

유해근 목사가 1981년 서울 휘문고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다. 유 목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 여름수련회에 다녀온 후 목회자가 되기로 다짐했다.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서울 광장동에 살았다. 집 근처에 있는 광장교회에 다녔다. 당시에는 훗날 모교가 된 장로회신학대가 동네에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하남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멀어졌지만 광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당신의 친구가 막 개척한 역삼동의 교회에 가자고 권하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얼떨결에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학생회장까지 했다.

 

이듬해 여름수련회에 가서 일생의 중요한 결심을 한다. 작은 교회들이 연합해 개최한 수련회였다. 100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모였다. 장소는 가물가물 하지만 3일 내내 비가 억수같이 내린 것은 기억난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수련회가 끝날 무렵 강사 목사님은 간증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내가 나섰다.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고 마음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벅참과 기쁨을 나눴다. 

 

수련회 이후 진로를 바꿨다. 신학대에 진학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원래 법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당시 신학대는 후기 모집이었다. 전기 모집에 속해있는 대학에 떨어져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전기 모집에서 어떤 대학에도 지원하지 않고 오로지 신학대에만 원서를 쓰기로 다짐했다. 신학은 높은 수준의 학문이며 신학대는 특별한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전기 모집에서 대학입시에 실패 후 신학대로 진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기 지원 마감일에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너 도대체 왜 전기 원서는 안 쓰는 거야? 질문에 노기가 서려있었다. 저는 바로 신학대에 가려고 합니다. 장로회신학대 가려고요. 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 정말 미친놈이네 이거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그 미친놈이 누군지 확인하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졸업한 휘문고는 지금도 강남 8학군에 속해있지만 당시에도 학생들을 상위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풍토가 매우 강했다. 나름 공부 좀 하고 법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학생이 갑자기 변했으니 교사 입장에서는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욕을 먹어도 좋았다. 공부하고 싶은 학문이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렇게 가고 싶은 신학대였지만 마주한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장신대에 입학한 1981년, 대한민국은 혁명의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군부독재가 시작되고 학교마다 학생운동의 열기가 고조됐다. 1학년에 불과했지만 그 시절 가졌던 고민은 내게 큰 고통을 줬다. 수도원 같을 것이라 예상했던 학교의 분위기는 기대와 달랐다. 내가 너무 고지식했던 탓이다.

 

고민하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군종장교(군목) 시험을 봤고 덜컥 합격했다. 군목이란 내게 애증의 단어다. 학교에서 시위를 하다가도 누군가 너는 군목후보생이니 뒤로 빠지라고 하면 도망치듯 물러났다. 비겁했다. 다른 군목후보생이던 한 동기는 시위주동자로 잡혀 군목후보 자격이 박탈됐고 일반사병으로 강제 징집됐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나는 내 삶의 평안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3> 군목 생활하며 군부 핵심 보안부대와 자주 충돌

 

사병들에게 정신교육하라고 공문… 군부독재는 부당 설교, 감시대상 돼

 

1987년 10월 강원도 양구의 전방 부대에서 군목으로 복무하던 유해근 목사(왼쪽)가 군용 지프에 앉아있는 모습.1987년 6월은 무척 더웠다. 나는 경북 영천의 육군3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훈련소 한쪽에서는 시위진압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세상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항의하는 목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나는 세상과 담을 쌓은 곳에서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단 군목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었다.

 

강원도 양구의 전방부대에 배치됐다. 일반적인 목양사역 외에 비무장지대 초소를 방문해 사병들을 위로하는 일도 했다. 나는 군 생활을 하며 보안부대 사람들과 참 많이 충돌했다. 대학생 시절 군목후보생이라는 이유로 시위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마음에 부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군부정권의 핵심 역할을 하던 보안부대의 횡포에 저항하고 싶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부대는 당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위해 움직였다. 장교와 부사관, 그 가족들은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선거운동을 하기위해 여의도로 불려갔다. 군목인 나에게는 사병들의 정신교육을 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하지 않고 버텼지만 압력이 계속 내려와 견디기 어려웠다.

 

홍천의 신병교육 부대로 임지가 바뀐 것은 88년 8월이다. 신병들과 일반병사들까지 합쳐 수백명이 예배를 드렸다. 군목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곳에서도 보안부대와 갈등이 일어났다. 교회의 모든 우편물에 대해 보안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불온서적이 교회로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보안부대 중사에게 물었다. 불온서적이 뭡니까. 그러자 중사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운동권 애들이 읽는 빨간 책이죠라고 답했다. 아 빨간책이요. 그 빨간책은 우리 교회에 무척 많은데요. 성경책이 다 빨갛잖아요. 정적이 흘렀다.

 

그때부터 나는 보안부대의 감시대상이 됐다. 어느 날 아침 군종참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안부대에서 내가 빨갱이라며 조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나는 그길로 연대 보안반을 찾아갔다. 보안반장은 대위였지만 실제 힘은 일반 대령 못지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를 조사한다면서요.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던 보안반장은 잠시 후 부하에게 내 파일을 가져오라했다. 책 한 권이 넘는 분량이었다. 군부독재는 부당하다 노예근성을 버려라 등 설교를 하며 한 발언 등 내가 군 생활을 하며 한 말이 다 기록돼 있었다. 끝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비굴하기는 싫었다. 전부 제가 한 말이 맞습니다. 근데 이게 틀린 말입니까. 나는 목사입니다. 군부독재의 앞잡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지 당신들 종이 아닙니다. 내 계급장을 떼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당신 계급장은 내가 뗄 겁니다.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모르지만 일단 내뱉었다. 그런데 보안반장의 반응이 놀라웠다. 아이고,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라며 내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 그 후 그들은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전역신고를 하러 연대장을 찾았다. 연대장은 회식을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뜻밖의 고백을 했다. 목사님 때문에 나 죽을 뻔 했어요. 내 군 생활 통틀어 이렇게 힘들기는 처음입니다. 매일 보안사에서 목사님 군기 잡으라고 압력이 내려왔어요. 안 그러면 내가 당한다고. 목사님 후임은 내가 확실하게 잡을 겁니다.

 

좌충우돌 군 생활을 마친 나는 누구보다 자신감에 차있었다.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역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4> 둘째 아이 장애에 아내 탓·하나님 원망하며 방황

 

치료 때문에 유학 못가게 되자 불평 쌓여… 아들·아내에 사과하고 사랑하며 살기로

 

큰 아들 영규(오른쪽 끝)군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 유해근 목사와 아내 이강애 사모, 둘째 아들 영길 군이 사진을 찍고 있다.아내를 처음 본 건 1986년 7월이다. 아버지 친구 분의 소개로 만났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아내는 인천 강화군 주문도라는 섬마을의 교사였다. 훗날 들어보니 아내에겐 목사와 결혼하는 데 대한 동경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목사 사모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난 군목 제대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고 신학대 교수가 될 것이라 했다. 양가 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했고 서로 호감도 있었기에 결혼을 서둘렀다. 군목으로 복무하는 동안 아내는 우리 부모님이 계신 경기도 광주의 중학교로 임지를 옮겼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둘째 아들 영길이는 예정일보다 20일정도 먼저 태어났다. 황달도 심해 인큐베이터에서 며칠 있다가 퇴원했다. 당시 나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고 가족과 함께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째가 큰 아이처럼 잘 자라지 못했다. 돌이 지나도 걷지를 못했다. 네 살이 돼서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엄마 외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정신지체2급의 장애를 갖고 있었다. 아내는 연차휴가를 내고 종합병원과 장애인복지관 등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한 특수교육원에서 치료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결국 교사직을 내려놨다. 매일 버스를 타고 걷고 해서 특수교육원에 다녔다. 

 

나는 유학을 포기했다. 미국의 대학 두 곳에서 이미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통지서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의욕이 꺾였다. 아내는 아이의 장애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치료에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나는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에 실패란 없다고 여겼다. 그러다 장애아를 갖게 되자 방황했다. 몇몇 교회에서 부목사 초빙을 해왔지만 응하지 않았다. 못난 남편이자 아빠였다. 아내와 아이를 보듬고 격려해야 했는데도 매일같이 원망과 불평만 했다.

 

영길이는 몸이 약해 열이 오르면 경기를 하고 고꾸라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애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라며 아내에게 윽박질렀다. 아내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울 뿐이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다른 사람들이 두 아들에 대해 물으면 첫째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아이를 보고도 외면한 채 길을 피해 돌아가기도 했다. 영길이는 자신에게 차갑던 아빠를 보고 뭐라 느꼈을까.

 

아내는 나보다 더 절망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했다. 나는 유학을 가는 데 발목을 잡은 게 영길이라고, 그 책임이 아내에게 있다고 여겼다. 비겁함을 넘어 모자라고 미숙했다.

 

아내와 아들에게 평생을 사과하며 살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 영길이에게 말하고 싶다. 영길아, 참으로 미안하다.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어야 했는데 깨닫지 못하고 원망만 했으니….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후회하고 있단다.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빠가 정말 잘못했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5> 죽기로 작정하고 간 바닷가에서 예수님 만나

 

실명 위기 절망의 늪에서 건져 주셔… 외국인 근로자 사역 위해 성수공단으로

 

1990년대 중반 서울 성수공단의 외국인 근로자들과 유해근 목사(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성수공단에서의 사역은 행복했다.둘째 아들이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미국 유학을 포기한 뒤 나는 무척 방황했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경북 상주로 내려갔다. 도피였다. 상주 함창벌판의 한적한 곳으로 차를 몰아 그곳에서 아이들과 뛰어놀곤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척 했지만 불쑥불쑥 원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아이들만 데리고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를 했다. 둘째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없는 상주에서의 시간은 쓸쓸했다. 두 달여간 그곳에 더 있다가 안양으로 왔다.

 

구로공단으로 가게 된 것은 1992년 겨울이다. 남들과 다른 사역을 하고 싶었는데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선교하는 게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장애를 가진 둘째를 내게 주신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한심해 자학하는 심정으로 구로공단에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머문 몇 년의 기간은 내겐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다. 노예처럼 살아가는 외국인들의 한과 분노에 내 감정을 투영했고, 사역이 잘 이뤄지지 않아 생긴 자괴감도 얽혔다. 함께 사역하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도 겪었다. 상처받는 이들이 있을까봐 차마 말을 꺼내기는 조심스럽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어느 날부터 눈에 핏발이 서고 잘 보이지 않았다. 안과를 찾았다. 급성 포도막염이라 했다. 증상이 매우 심각하다 했다. 시력이 점차 떨어져 결국에는 잃을 것이라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예기치 못한 두 번째 시련이었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상황에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했는데 시력을 잃었다. 보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저주라고 생각했다. 더없이 약해지는 나 자신이 용납이 안됐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에 시달렸고 습관처럼 죽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95년 2월 강원도 동해시로 향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으니 나도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교만이었다.

 

바다에 빠져 죽기로 작정하고 새벽에 묵호항으로 나왔다. 눈은 침침하게 겨우 보일 때였다. 항구 앞바다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깃배를 기다리는 노파들이 있었다. 바닷가로 걸어갔다. 참 웃지 못 할 이야기지만 죽으러 가면서도 너무 추워서 잠시 그 노파들이 있는 모닥불 쪽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 새벽에 웬 젊은이가 다가오니 할머니들이 다 쳐다봤다. 그리고 그날 그 새벽 나는 믿을 수 없는 체험을 했다. 노파들 사이에 어슴푸레 보이는 것은 떨고 계신 예수님이었다. 여기 왜 왔느냐고 물으셨다. 죽기 위해서요. 당신이 나를 버리셨잖아요. 나의 원망을 들은 주님은 말씀하셨다.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너를 죽게 하려고 고난 가운데 몰아세운 게 아니야. 이 땅의 고통당하는 자의 삶을 네 몸뚱이로 느껴보라고, 그들을 입으로만 위로하지 말라고 네게 절망을 준 거야. 절망은 곧 너를 사랑해 네게 준 은총이다. 동해바다 앞에서 무릎 꿇고 한없이 울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시는지 그동안은 몰랐다.

 

마음을 다잡고 돌아왔다. 며칠을 금식하며 기도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섬기라는 확답을 들었다. 구로공단의 생활을 정리하고 뚝섬 성수공단으로 향했다. 성수동 상원교회 지하실 한구석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행복한 사역의 출발이었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6> 외국인 근로자들 머물 공간을… 건물주에게 눈물 호소

 

1996년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 창립… 근로자들 너무 많이 찾아와 결국 이사

 

1996년 겨울 서울 성수동의 한 교회 지하에 마련 된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 사무실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예배 중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있다.1995년 가을 성수동 뚝섬 근처로 사역지를 옮길 때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서울노회 노회장이던 이정일 목사님의 도움으로 몇몇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다. 한 교회 지하실 한구석에 마련된 어두컴컴한 사무실에는 컴퓨터 한 대와 전화 한 대가 전부였지만 나는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1996년 1월 28일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를 창립했다. 사무실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쉼터로도 사용됐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공간으로도 사용됐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의지할 곳 없던 그들에게 그곳은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실직한 외국인 근로자들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도 실시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생활비는 전혀 제공해주지 못했다. 매일 라면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것도 문제가 됐다. 교회로부터 나가달라는 요구를 수차례 받았고 결국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내 통장에는 정확히 100만원 밖에 없었다. 그것도 어느 집사님이 후원금으로 쥐어준 돈이다. 뚝섬유원지에서 천막이라도 치고 사역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러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공간을 얻게 됐다.

 

우연히 서울 강변역 인근 한 유치원 건물의 지하공간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건물주는 꽤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머물 공간으로는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난감했다. 건물주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너무 절박했기에 처음으로 사람 앞에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했다. 나는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남은 게 있다면 외국인 나그네들을 위한 사랑과 저들 뒤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갈 곳이 없습니다.

 

건물주는 그날 날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단돈 100만원으로 가계약을 하고 우리 선교회는 그곳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후 2억5000만원의 전세금이 채워진 것은 기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헌금을 했고, 전혀 알지 못했던 분들이 찾아와 도움을 줬다. 불과 6개월 만에 빌린 전세금을 모두 갚았다. 이사를 마친 날 외국인 근로자들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이전 감사예배를 드리고 각오를 달리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대부분의 외국인 근로자들은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필리핀 근로자 롤란도가 몇 주 째 보이지 않았다. 예배에 빠지지 않는 친구였기에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얼마 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몇 주째 어디에 갔었냐고 물어도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강남의 한 대형교회 영어예배부에 출석했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우리선교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선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편안한 공간, 분위기였지만 그에게는 가시방석이었다. 거기에 모인 외국인들은 미국, 유럽, 호주 등지에서 온 대학교수, 외교관, 외국기업의 주재원 등이었다. 롤란도는 스스로 위축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새삼 그가 의지할 곳이 우리 선교회라고 깨닫고 돌아온 것이다. 롤란도와의 대화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들이 느끼는 절망적인 열등의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가족 같은 공동체를 꾸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7> 몽골 선교의 못자리된 재한몽골학교

 

광진구청장 도움으로 학교 건축… 몽골 아이들 주님의 일꾼으로 훈련

 

재한몽골학교 2005년 입학식에서 유해근 목사(둘째 줄 오른쪽 세 번째)가 학생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1999년 12월 재한몽골학교를 세웠다. 8명의 몽골아이들이 전부였다. 그저 일시적으로 아이들에게 한글이나 가르치자고 시작한 학교였다. 서울 강변역 인근 서울외국인선교회의 작은 지하공간에서 8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270명이 넘는 재한 몽골인 학생들이 재학하며 꿈을 키우고 있다.

 

몽골학교를 운영하며 몽골의 문화를 알리는 문화원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한몽골대사관을 통해 몽골정부로부터 문화원 설립에 대한 양해각서를 받은 것도 그 즈음이다. 후원을 요청했다. 양해각서를 들고 국내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도 아닌 몽골정부의 각서는 힘이 없었다.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움은 뜻하지 않은데서 찾아왔다. 당시 고건 서울시장이 설립에 도움을 주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결국 몽골문화원을 세웠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몽골학생들이 늘어나 교육공간이 협소해졌다. 장소를 옮겨야했다. 당시 광진구청장이던 정영섭 장로님이 내게 점심식사를 청하셨다. 식사자리에서 뜬금없이 물어보셨다. 목사님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학교가 너무 좁습니다. 옮기고 싶습니다. 정 장로님은 바로 구청 재정국장에게 몽골학교를 지원하라고 하셨다. 이후 두 차례 더 지원을 해준 덕분에 2003년 6월 몽골학교 건축을 시작했다. 그해 장마는 왜 그리 길던지. 그해 12월 서울 광장동에 재한몽골학교를 세우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재한몽골학교는 2005년 2월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외국인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재외몽골학교로는 최초로 몽골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우리학교에서는 한국어와 몽골어, 영어, 수학, 물리, 몽골역사, 윤리, 음악, 미술, 태권도 등을 가르치고 있다. 몽골인 담임교사와 한국인 교사들이 학생들의 수학 능력과 한국어 수준을 감안해 맞춤식 교육을 제공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몽골 전체인구의 1%가 넘는 3만여명의 몽골인이 들어와 있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몽골 국내총생산(GDP)의 17%를 차지한다. 선교회는 그 많은 몽골인들, 특히 그들의 자녀를 주님의 일꾼으로 훈련시켜 몽골로 돌려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 빌구데라는 아이가 있었다. 매우 똑똑한 친구였다. 졸업하기 전에 이미 한국어능력인증시험(TOPIK)에서 6급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다. 한국인들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점수다. 빌구데는 우리 학교에서 9학년을 마치고 몽골로 돌아갔다. 3년 전 몽골을 방문해 울란바토르에서 빌구데를 만났다. 늠름한 모습으로 성장해있었다. 그는 울란바토르 외곽 빈민촌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주 친구 한두 명씩을 전도해 데리고 간다고 했다. 그에게 네가 몽골의 미래다라고 말해 줬다. 빌구데의 꿈은 장차 몽골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있다.

 

단언컨대 재한몽골학교는 몽골선교의 못자리다. 빌구데같이 뛰어난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서 자라나고 있다. 몽골의 정치지도자, 경제인, 학자, 변호사, 의사, NGO지도자, 목회자 등 각 분야에서 최고의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나올 것이라 믿으며 기도하고 있다. 그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8> 불법 체류자 도와 몽골 선교사로 역파송

 

울란바토르 빈민촌서 목회 열심… 역파송 선교 모범 사례로 꼽혀

 

유해근 목사(왼쪽 세 번째)가 2008년 나섬공동체에서 몽골인 보르마씨(왼쪽 네 번째) 등 외국인 근로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보르마씨는 나섬공동체의 1호 외국인 근로자 출신 선교사다.외국인 근로자들을 섬기면서 막연하게 꿈꿨던 게 있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육해 각자의 나라로 파송하는 것이었다.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꿈이 현실이 된 것은 몽골인 여성 보르마를 통해서다.

 

그는 1996년 초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에서 일하면 돈을 몇 배나 더 벌 수 있다는 소식에 15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주짜리 초청비자로 들어왔다. 그리고 1년 2개월간 불법체류자 신세로 돈 벌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전의 양계장에서 일하던 보르마는 양계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악덕 고용주들이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잡아 임금을 제때 지불하지 않는 등 착취를 했다. 우연히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를 알게 된 보르마는 우리 선교회의 도움으로 밀린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 고맙다며 선교회 안에 있는 나섬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는 차츰 변화됐다. 돈밖에 몰랐던 한 외국인 불법체류 여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 뒤로 지폐 세는 일보다 성경책 넘기는 게 좋아졌고 식당 일보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해 식사 봉사하는 일이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느껴졌다고 한다. 하루는 보르마가 내게 성경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 힘이 생겨요.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지금까지 몰랐었나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불법 체류자였다. 결단이 필요했다. 주위의 조언으로 보르마는 울란바토르로 귀향했다. 현지의 몽골연합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지 교회에서 3년간 전도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내게 편지를 썼다. 목사님, 하나님을 좀 더 많이, 깊이 알 수 있도록 저의 지경을 넓히고 싶습니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2004년 그녀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한국어훈련 코스에 이어 2005년 초, 3년 과정의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목회학석사(MDiv)과정에 보르마가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보르마는 새벽 5시부터 이튿날 새벽 1∼2시까지 한국어와 영어 공부를 하느라 매일같이 씨름했다. 학교에서는 보르마의 학업 성취도뿐만 아니라 성실함에 후한 점수를 줬다. 보르마는 교회개척 사역훈련 등을 받고 몽골로 돌아갔다.

 

보르마 목사는 현지인이기에 한국선교사와는 달리 선교와 목회활동에 제약이 훨씬 덜하다. 이것이 역파송 선교의 효과다. 그녀는 현재 울란바토르 외곽의 빈민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얼마나 열심인지 모른다. 교회를 확장해 지을 정도로 부흥을 경험했다. 그가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보르마는 한국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신앙을 수용한 뒤 본국에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역파송 선교의 모범사례다. 그를 통해 나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세계 선교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듯이 신앙 훈련을 받은 외국인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속한 민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나그네인 외국인 근로자들을 사역자로 키우는 일에 힘을 모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르마 이후 우리 공동체를 통해 또 다른 역파송 선교사가 탄생했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9> 무슬림 이란인, 개종 후 귀화 이란 이씨 시조 돼

 

한글 배우러 왔다가 목사안수까지 이어져 터키 선교사로 파송… 열달 만에 15명 세례

 

이호잣 선교사(오른쪽)와 아내 배은경 사모가 2014년 6월 터키로 파송되기 전 나섬공동체에서 중동지역의 지도를 가리키고 있다.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를 창립하고 성수동에서 외국인근로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어느 날 이란 사람 한 명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호자트, 1993년 한국으로 와 성수동 인근 공장에서 박스를 나르던 불법 체류자였다. 그는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단 조건을 내걸었다. 나는 무슬림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근데 공교롭게도 당시 성수동의 선교회 공간은 지하실 한 곳뿐이었다. 거기서 한글을 가르치고 밥도 먹고 예배도 드렸다. 호자트는 한글을 배우러 왔다가 어쩔 수 없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 예배가 그에게 퍽 감동을 줬나보다. 하루는 그가 이란어로 된 성경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성경의 내용이 궁금했던 것이다. 당장 구해줬다. 그는 열심히 읽었다. 

 

그때 나는 말씀에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호자트는 내게 와서 말했다. 매주 토요일 자신의 집에서 이란인 친구들과 성경을 읽고 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주 토요일 저녁에 그의 집으로 심방을 갔다. 정말 이란인 3∼4명이 모여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들이 너무 예뻐 보였다. 밥을 사겠다고 했다. 뭘 먹겠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삼겹살을 먹겠다고 했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는 게 금지돼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맛있는 걸 그동안 왜 안 먹었는지 모르겠다며 무척 잘 먹었다. 그날 많은 돈을 썼지만 너무 행복했다.

 

호자트는 이후 세례를 받고 개종을 선언했다. 2004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난민자격을 얻었고 한국으로 귀화했다. 그는 우리 공동체에서 봉사하던 한국인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다. 귀화를 했으니 한국식 이름을 정해야 했다. 내 성을 따라 유씨로 할까 물어보길래 이란에서 왔으니 이씨로 하라고 했다. 이름을 이호잣으로 정했다. 그는 이란 이씨의 시조가 됐다. 

 

그는 수년간 이주민 선교의 리더로 활동했다.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며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아무리 한글 공부를 했다 해도 신학용어를 알기란 쉽지 않았다. 호잣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2013년 10월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 행당동 무학교회에서 목사안수식이 열렸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안수를 받기 위해 모인 가운데 나는 호잣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불법체류자로 이 나라에 와서 각종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그가 목사가 됐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우리 공동체는 2014년 6월 이호잣 목사를 터키 이스탄불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자 주변의 이슬람 국가에서 온 난민 수백만 명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이호잣 목사는 그들을 전도하라는 사명을 마음에 품고 가서 나섬페르시안교회를 개척했다.

 

선교의 열매는 놀라웠다. 개척 10개월 만에 15명의 무슬림이 세례를 받았다. 나는 지난해 2월 터키를 찾았다. 나섬페르시안교회에서 두 명의 이란인에게 세례예식을 베풀기 위해서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기로 결심했다. 

 

외국인 근로자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무슬림 국가에서 복음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역경의 열매] 유해근 <10-끝> 오직 하나님 의지하며 나그네 섬길 것

 

어려울 때마다 나타난 도움 손길… 경계 넘나드는 선교 공동체 꿈꿔

 

최근 열린 나섬공동체의 수련회에서 유해근 목사가 참석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있다.우리 공동체에는 잠잘 곳이 없거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질병에 걸린 이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들을 돌보고 먹을 것을 줘야 하는데 당장 내일 먹을 쌀이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적재적소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어쩌면 현재까지 사역을 이어온 게 기적인지도 모르겠다.

 

구로공단에서 성수동, 강변역 인근의 지하공간을 거쳐 광장동에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 재한몽골학교 몽골문화원 등이 모인 번듯한 공간을 마련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대형교회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 정도로 성과를 이뤘으니 나름 성공했다고 자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사역을 되돌아보게 됐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많은 이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중에 몽골인 아이들은 꿈을 키우며 학업에 몰두한다. 주일 아침이면 외국인 근로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각국에서 온 이들이 각자 찬양을 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을 통해 깨달았다. 예전에는 예배드리는 것조차 그렇게 힘들어하던 이들이 이제는 예배는 기본이고 성경읽기와 기도가 생활화돼 있다. 저들 중에 선교에 헌신하는 이들도 나올 것이고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이 핵심이다. 물론 사람에 실망하기도 한다. 예전에 우리 공동체에는 통역을 담당하던 몽골인 여성이 있었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신앙도 견고했다. 그의 성장을 무척이나 기대하며 서울장신대 입학을 도왔다. 학비와 교통비도 지원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여성은 특별한 이유 없이 공동체를 떠났다. 한 대형교회에서 더 많은 지원금을 주겠다며 데려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도 통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허탈했다. 하지만 그를 원망하진 않는다.

 

나는 경계를 넘나드는 교육·선교 공동체를 꿈꾼다. 몽골의 울란바토르 시 외곽에는 옛 돌궐족의 장군이었던 돈유쿠크의 묘비가 있다. 그곳의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그러나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성을 쌓으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해진다. 하지만 길을 내고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 달려가는 것은 공생을 가능하게 한다.

 

외국인 근로자를 20년 넘게 섬겨오며 경험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공동체는 2012년부터 뉴라이프 미션 동대문 비전센터를 운영 중이다. 은퇴한 공무원, 회사원, 자영업자, 주부 등을 대상으로 외국인 근로자 섬김이 훈련을 시킨다. 평균 연령은 70대 초반이다. 수료생들은 다문화가정을 상대로 한국어교육이나 상담, 미용봉사 등을 한다. 수료생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것이 있다. 외국인근로자들이 추후에 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써달라는 것이다.

 

이 사역을 해오며 광야를 걷는 것처럼 힘들고 거친 경험을 많이 했다. 때로는 홍해와 같은 거대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약하고 약한 존재이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이 땅에 머물고 있는 나그네들을 섬기는 길을 걸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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