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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092. [역경의 열매] 신경림 (1-31) ‘백수’ 아버지가 가게·집 날리면 어머니가 다시 일으켜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8.17|조회수62 목록 댓글 0



***간증: 1092. [역경의 열매] 신경림 (1-31) 백수 아버지가 가게·집 날리면 어머니가 다시 일으켜

 

그녀는 작지만 강했다.

 

153㎝ 키에 가녀린 몸이지만 그녀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아니,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다만 주어진 길이기에 걸어갔노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린 시절엔 병을 달고 살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지긋지긋하게 가난에도 시달려 봤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영양실조로 길에서 쓰러졌던 그녀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지만 무일푼이었기에 그녀는 작은 몸을 이끌고 일터를 전전해야 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한 그녀에겐 늘 새로운 도전 과제가 주어졌다. 하다못해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작은 접시를 닦다가는 어느새 자신의 몸보다 큰 솥 안에 들어가 수세미를 문지르고 있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런 그녀를 높이 더 높이 올리셨다. 접시닦이에서 미 신학대학 부총장까지 오른 그녀의 인생 스토리를 담아봤다.

 

1953년 11월12일. 나 신경림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는 요즘 말로 하면 '백수'였다. 돈은 어머니가 벌어들였다. 벌어들인 돈은 아버지가 주로 날렸다. 사람이 워낙 순수해서 남을 잘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빚 보증을 잘못 서 어머니가 하던 가게는 물론이고 집도 수 채 날렸다. 그래도 어머니는 군말 없이 다시 일어섰다. 성경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은 우리 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일 테다. "늘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며,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었던"(잠언 31:13∼18, 31:20) 이가 나의 어머니였으니까.

 

마음 고생이야 오죽하셨을까. 국제시장에서 포목장사도 하고 식당도 했다. 어머니는 했다 하면 작은 가게라도 크게 일으켰다. 작은 체구였는데도 힘은 세셨는지 못 박는 일, 도배하는 일, 마당 콘크리트 공사까지 죄다 스스로 하셨다.

 

차순경 권사. 올해 아흔 둘이신 어머니는 원래 아이를 못 가졌다고 했다. 서른이 넘고 서른 다섯이 지나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워낙 신앙이 깊었지만 아이를 못 가져 그런지 더 기도에 매달리셨던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도 들어주시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다. 아이를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께 바치겠노라고.

 

어머니가 마흔이 되던 해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정리=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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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53년 11월 부산 출생. 이화여고, 감리교 신학대학교 졸업(76), 이화여고 성경교사(81∼84), 게렛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88), 미 연합감리교 위스콘신 연회 준회원 목사 안수(88), 메모리얼 플레전 프레리 미 연합감리교회 담임(88∼90), 위스콘신 연회 정회원 목사 안수(90), 워싱턴 선교 감리교회 교육목사(90∼95), 웨슬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93), 웨슬리 신학대학원 공동체 담당 학장(91∼95), 웨슬리 신학대학원 부총장(94∼현재), 미 연합감리교 여교역자회 회장(2003∼2005)

 

***[역경의 열매] 신경림 (2) 아버지 예수 믿게 해주세요 말 배우면서부터 기도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랐다. 교회도 안 다니셨을 뿐더러 어머니가 교회 가는 걸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어머니가 교회만 다녀오면 집 문이 잠겨 있어 고생을 했다고 한다. 밤중에 문을 안 열어줘 산에서 새댁이 홀로 밤을 지샌 적도 있다고 들었다. 결혼 전에는 전도사인 고모를 보고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는 줄 알았던 어머니. 매일 새벽마다 찬송가를 끼고 집 앞을 오가던 그 사람이 결혼해 보니 전혀 딴 사람이더라는 것이었다.

 

교회 문제로 두 분은 늘 싸웠다. 어머니의 성경책이 늘 새것으로 바뀌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이 발견됐다 하면 아버지가 구정물통에 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늘 그 자리였다. 나에게도 늘 기도하라고 가르친 게 "우리 아버지 예수 믿게 해주세요"였다. 말을 배울 때부터 늘 그 기도를 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흠씬 맞기라고 하는 날엔 나는 정말이지 속이 상했다. 하루는 그랬다. "엄마,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그러면 우리 아버지 예수 믿게 되겠지? 우리가 지금은 교회 다니지 말고 열심히 기도해서 아버지 예수 믿게 되면 그때부터 교회 가자."

 

우리 아버지는 덩치가 컸다. 자전거를 한 손으로 번쩍 드는 거구였으니까. 어린 마음엔 어머니가 행여 큰 사고를 당할까 걱정됐던 것이다. 내 딴엔 꾀를 낸 건데 어린 나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참 중요한 게 많은데 목숨보다 중요한 게 하나 있단다." "뭔데요 엄마?" "그건 믿음이란다."

 

다 포기해도 믿음은 포기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까. 그러나 그 말씀은 언제나 나와 함께했다.

 

송도에서도 살았다. 아버지는 안 좋게 말하면 한량 같았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마음이 너무 좋았다. 아직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돌아다니면서 길에서 못 먹는 걸인들은 전부 집에 데려왔다. 걸인을 봤다 하면 족족 집으로 데려와서는 밥을 먹였다. 어떤 사람은 재워 보내기까지 했다. 그럼 그 사람들이 밤 사이 우리집 물건을 훔쳐갔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시각장애인을 데려오셨다. 길에서 구걸하는 그분에게 아마도 뭘 도와줄까 물어보셨던 모양이다. 눈이 하나라도 있으면 직장을 얻어 걸인 신세를 면할 수 있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길로 성모병원에 가서 자기 눈을 하나 빼준다며 덜컥 예약부터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울며불며 말렸다. 어머니는 그분이 실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챙겨 드렸다.

 

우리 아버지는 머리도 굉장히 좋았다. 장기를 하면 누구한테 지는 적이 없었다.

 

하지만 허구한 날 장기를 두고 사람들하고 어울려 지내다가는 누군가의 꼬임에 빠져 우리 가게와 집 문서를 잡히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있다면 아마 당신의 딸인 내가 아니었을까.

 

아버지에게 제일 소중한 하나는 '신경림'이었다.

 

38세. 아버지가 나를 품에 안은 나이다. 나한테는 엄청 잘하셨는데 어머니한테는 왜 그토록 모질게 구셨는지 모르겠다. 어찌됐건 내가 아버지에게 가졌던 감정은 사랑과 미움의 복합적인 감정이랄까.

 

***[역경의 열매] 신경림 (3) 바닷가 예배당서 철야 기도하신 어머니

 

나는 병을 달고 살았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말이 적합했다.

 

네 살 때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그러고 나서 결핵성 관절염에 걸렸다. 무릎을 다친 게 결핵성 관절염이 되더니 신장염도 동시에 찾아왔다. 부산대병원에선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결핵성 관절염을 고치려면 잘 먹어야 하는데 신장염 환자는 죽밖에 못 먹는다는 것이다. 어린아인데 병행 치료가 불가능하니 포기할 수밖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나오면서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러더니 장사를 접고 나를 데리고는 강원도 죽변으로 가셨다. 바닷가에 작은 방을 하나 얻으셨다. 교회와 가까웠다. 언덕 위 예배당이었다. 어머니는 밤에는 교회에 가서 철야 기도를 했다. 나는 의사가 깁스를 해놓아 걷지 못하고 엉덩이로 앉아 돌아다녔다. 동네 사람들한테 나는 구경거리였다. 해변가 사람들과 달리 내 피부가 유독 하얗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기억나는 건 낮에는 온종일 누군가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고, 밤에는 혼자 자야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기도한 지 40일째. 교회 마루에서 누가 구두를 신고 막 뛰어다녀 어머니는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고 죽도록 기도를 했다고 하셨다. 구둣발 소리가 밤새 계속되더니 새벽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잠잠해지더란다. 그때 어머니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무슨 연유에선지 깁스 푸는 방법을 병원에 전화해 물어보셨고, 소금물을 따뜻하게 해서 풀라는 말을 듣고 즉시 실행에 옮기셨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벽을 잡고 일어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걸어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살던 어느 날, 아버지가 이사를 가자고 했다. 친구를 따라 서울에 다녀와서는 서울에 집을 샀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부산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갔더니 웬 걸 누우니 하늘에 별이 보이는 그런 집이었던 것이다. 또 속아 산 집이다.

 

나는 남대문 국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2학년 때 전학왔는데 부산학교와는 확실히 학력 차이가 났다.

 

부산에서는 공부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서울에 오니 알 수 없는 문제투성이었다. 근근이 따라가긴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는 몹쓸 기관지염에 걸렸다. 얼마나 지독했던지 휴학할 정도였다. 1년을 휴학했다. 어머니는 나를 엎고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리곤 낳았다.

 

나는 이화여중에 들어갔다. 중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갈 때인데 공부를 곧잘 했는지 선생님들은 나보고 경기여중을 가라고 했다. 어머니는 하지만 이화여중을 고집했다. 기독교 학교여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교장 선생님이 이화에 갈 거면 원서를 안 써주겠다고까지 했는데도 고집해서 이화로 갔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워낙 내성적이고 조용해서 존재감이 없었던 것 같다. 나를 기억하는 선생님도 별로 없고 친구도 적었다. 반장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특별활동을 하고 싶어도 워낙 수줍음을 많이 타니 면접에서 떨어졌다. 합창반마저 떨어지고 어디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데 종교부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말썽을 부리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생이 됐다. 나는 꼭 꼬챙이 같았다. 건강도 형편없었다. 심장 간장 위장이 한꺼번에 나빠져 세브란스병원과 인천기독병원, 성모병원 안 다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건강은 날로 악화됐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4) 가까이 온 죽음… 기도 받고 쾌유 기적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들이 하나둘 나를 찾아왔다. 방문을 나서서는 밖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짐작했다. 짧았지만 지난 삶을 돌아봤다. 어머니는 나보고 "꼭 하고 싶은 건 없니"라고 물으시며 "살면서 죄 지은 게 있으면 회개하라"고 죽음을 준비시켰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을 때 난 내 삶을 돌이켜보게 됐다. 이상하게도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그 때까지 '준비'만 하다 마는 것 같아 그것이 아쉬웠다. 국민학교 때는 중학교 입시,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이젠 대학 입시…. 다음 단계를 준비하느라 한번도 현재를 살아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번만 기회를 더 주신다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줄곧 기도원을 다니셨다. 어떻게든 기도로 고쳐보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기도원에서 설교하셨던 장로교 목사님이 떠올랐다. "엄마, 나 그 목사님 만나봤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그 목사님이 경기도 의정부에 사신다는 걸 알아내고는 그분을 찾아 떠나셨다.

 

나는 그때까지 누워서 꼼짝 못했다.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셨다. 약도 못 먹었고 주사도 못 맞으며, 온 몸은 노랗게 떠 있었다. 그런 내가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니 간병해주는 언니를 불러서는 "나 세수시켜주고 머리 빗겨줘"라고 했더란다. 아버지는 내가 죽으려고 준비한다며 기겁을 하셨다.

 

목사님과 함께 올 줄 알았던 어머니는 혼자였다. 들어보니 목사님은 한 시간 기도하고 뒤따라 오신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목사님이 오셨다. 우리 아버지는 목사라면 이를 갈고 싫어해 그때도 눈을 흘기고 있었다. 목사님은 누워 있는 내 옆에 와서는 이런 얘길 들려줬다. "내가 의정부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 환상이 보이더라. 예수님께 어디 가시냐고 물으며 경림이가 지금 아프다고 했더니 그분도 지금 거기 가신다고 하더라."

 

목사님이 시계를 보니 1시42분이었다고 하셨다. 날짜까지 기억난다. 10월16일의 일이다.

 

목사님은 기도해줬고, 어머니는 목사님이 오셨다고 닭을 잡아 대접했다.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아 닭고기를 먹겠다며 들썩였다. 아버지는 몇날 며칠 아무것도 못 먹던 애가 닭고기를 먹으면 어찌 되겠냐며 나를 말리셨다. 목사님은 닭고기를 주라 하셨고 나는 맛있게 먹었다. 목요일이었는데 사흘 만에 교회 주일 야유회에 따라갔으니 보통 기적이 아니었다.

 

가장 놀란 건 우리 아버지다. 만약 내가 약 한 첩만 먹었어도, 주사 한 방만 맞았어도 이건 약이나 주사 덕분이라고 했을 텐데 어떤 약도, 주사도 받아들이지 못하던 내가 기도로 낫는 걸 목격하신 것이다. 완전 항복이었다. 내 나이 17세 때 56세인 아버지는 주님을 영접했다.

 

우리 아버지는 사방에 간증하러 다니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에 간 뒤 2000년쯤 당뇨로 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실명까지 하고도 끝까지 간증하며 복음을 전하셨다. 직분은 받지 않으셨다. 성경에 직분이 어딨냐며 큰 교회 간증하는 것보다 가난한 교회나 부흥강사를 못 모시는 교회를 찾아다니셨다. 가서는 약정헌금까지 하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나중엔 헌금 갚느라고 허리가 휘셨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고(故) 신언익씨는 모든 것 다 내주고 돌아가셨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5) 벽에 막힌 목회자 꿈… 목사랑 결혼 하자

 

어머니는 나를 서원기도해서 낳으셨다. 나는 죽음의 목전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님이 돌아가신 뒤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행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 "참 기독교인이었어." 행인들이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면서 참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막상 '참 기독교인'이 되려 하니 막막하여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화여고 선생님들은 다 반대하셨지만 난 참 기독교인이 되는 법을 꼭 알아야만 했다. 마침 교회라면 손사래를 치던 우리 아버지도 내가 기도로 죽다 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하시고는 묵묵히 나를 지원하셨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드물었다. 목사가 된다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어찌됐건 우리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다. 나이 마흔이 되도록 아이가 안 생겨 친척들이 작은집을 얻으라는 둥, 씨받이를 하라는 둥 별 얘길 다 들었던 어머니.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기도하듯 기도해 나를 어렵사리 낳으신 어머니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니 기쁘신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한동안은 어리둥절하셨단다.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를 하실 때 염두에 두신 건 나를 목사로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딸이 나왔으니.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교단은 없던 시절이다. 나중에 어머니는 그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과 나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시리라고 무작정 믿기로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나름 큰 꿈과 기대를 안고 들어갔으나 캠퍼스 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어떤 교수님은 쓸데없이 여자들이 입학해서 남자들 자리를 뺏는다고 못마땅해 하셨다. 정원이 50명이었는데, 얼마 안되는 정원에 여학생 1명이 들어오면 남학생 1명 자리를 빼앗은 걸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4년을 다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보이지 않았다. 공부한 걸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고 목사 안수도 못 받으니 목회자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목사랑 결혼을 해야겠다."

 

요즘 말로 '취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당시 클래스메이트인 내 남편에게 우연히 커피를 마시며, 아무래도 목사랑 결혼해야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그리고 몇주일 후 그 사람이 프로포즈를 해 왔다. 4학년 10월, 나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였고, 착한 사모가 되어서 남편을 내조하겠노라며 양재학원에 요리학원, 꽃꽂이학원, 타이핑학원까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수업을 차근차근 받아 나갔다.

 

나는 1976년 23세에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했고 그 다음해 첫 아이를 낳았다. 해병대 군목을 맡게 된 남편을 따라 포항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어느날 신학교 동기인 총각 목사가 우리 집에 왔다. 그 친구가 와서는 자긴 결혼하기 다 틀렸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당시 한 아가씨를 소개받아 데이트를 하러 서울을 오가던 그에게 백령도 군목으로 발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백령도에 가려면 인천에서 12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배도 1주일에 두 번밖에 없다고 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돌아가는 그 친구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가자."

 

***[역경의 열매] 신경림 (6) 열악했던 백령도 사역 임신중독증으로 죽을 고비

 

우리 부부는 백령도에 대신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첫째가 두살이었고 둘째는 임신 중이었다.

 

백령도의 상황은 열악했다. 예배 드릴 장소도 마땅찮아 남편은 교회를 짓는다고 했다. 백령도엔 물이 귀했다. 관저 안에는 수도관이 없어 모든 물을 동네 공동우물에서 길어와야 했다. 나는 임신한 채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수많은 군인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곤 했다. 군인들이 교회 공사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둘째아이 출산 예정일은 12월이었는데 무리한 탓인지 9월에 벌써 극심한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군인병원으로 갔더니 백령도에는 인큐베이터가 없어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다고 했다. 모두 작전 나가고 군의관 한명만 있는 병원에서 남편과 큰아이는 밤새 기도했다. 다음날 진통이 어느 정도 잡혀 12시간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 시댁으로 향했다.

 

진통으로 갑자기 육지에 나왔지만 시댁에서 병원 가라는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병원 가겠다고 말을 못한 채 몇 주를 지냈다. 친정아버지 생신이 되어 친정에 갔다. 친척들은 나를 보더니 반기기는커녕 얼굴빛이 사색이 돼서 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독촉했다. 몸이 너무 붓고 보기에 이상하다는 것이다.

 

성화에 못 이겨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줌마. 대학도 나온 아줌마가 왜 이제야 병원에 왔어요. 대학 나온 사람이 왜 이렇게 무식해요. 어떻게 여지껏 참았어요."

 

사실 나는 날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진통제을 먹으면서 버티고 있었다.

 

의사는 머리 아프다고 약을 먹으면 죽는다며 오늘이라도 머리가 아프면 당장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알고보니 임신중독증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날 집에 가서 자는데 밤중에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자는 시동생을 깨워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가는데 혈압이 너무 올라 그런지 눈앞이 캄캄했다.

 

병원에 가자마자 수술을 하고 둘째를 낳았는데 그때가 11월이었다. 한 달 일찍 출산한 것이다. 나는 나흘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중에 깨어나 복도로 걸어나오니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린다. "저 아줌마 살았네. 못 사는 줄 알았더니."

 

내가 임신중독인 탓에 아이에겐 충분한 영양이 가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남편은 백령도에 태풍이 불어닥쳐 내가 퇴원한 뒤에야 우리를 보러 올 수 있었다. 엄마 품에 한번도 안겨보지 못한 채 태어나자마자 이마에 커다란 주삿바늘을 꽂고 혼자 누워 있는 아이를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며 우린 하나님이 지켜주시기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님이 지켜주신다고 '예지'로 지었다.

 

세월은 또다시 흘렀다. 나는 전업주부로 두 아이를 양육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도 제대하고 서울의 남산교회에 부목으로 목회하게 됐고 나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하고 있었다. 큰애가 유치원에 다닐 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화여고에서 온 전화였다. 성경교사 자리가 났는데 와서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솔깃하기도 했지만 나는 사실 교사 자격이 없었다. 교직 과목을 이수했어야 했는데 교사가 되기 싫어 이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나한테 연락이 왔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7) 남편 고집에 성경교사 접고 미국행

 

너무 일하고 싶었다. 사실 그 전에 새가정사와 선명회, 세브란스 교목실에 지원한 적이 있는데 번번이 거절당해서 '난 일을 못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성경 과목은 교사 자격증이 없어도 된다고 해서 1981년 성경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일은 정말 재밌는 일이었다. 학생들도 잘 따라서 날마다 신이 났다.

 

남편은 내가 성경교사를 하는 동안 매일 새벽 영어학원에 다녔다. 남편은 유학갈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권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공부 다 마칠 때까지 아이들 데리고 한국에서 잘 살고 있을 테니 유학을 다녀오라고 남편한테 말하곤 했다. 84년 1월 남편은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몇 개월 만에 다시 돌아와서는 다 같이 가지 않으면 유학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사정을 말하는데, 아이들이 우는 바람에 교감 선생님이 달려오고 난리가 아니었다. 어떤 학부형은 아이가 앓아 누웠다고 안 가면 안 되냐고까지 했다. 나도 가기 싫었다. 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학생들에게 약속했다. "너희는 못 가르치지만 언젠가 돌아와 너희 후배들은 가르칠게."

 

84년 나이 서른에 남편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다. 애 둘을 데리고 있는 대로 바짝 긴장해 있는데 스튜어디스가 내 자리로 왔다. 커피를 마시겠냐고 하는데 알아듣고 "예스(Yes)"라고 했다. 뭐라고 또 하는데 그건 못 알아들었다. 당황하니 더 안들렸다. 대충 지나가면 될 텐데 스튜어디스는 그냥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 통역을 부탁했다.

 

내용인 즉, "크림 줄까, 슈가(설탕) 줄까"였다. 너무 창피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프리마'라 안 하고 크림이라 해서 그랬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자기합리화에 들어갔다. '가면 접시만 닦을 텐데, 영어 못하면 어때. 나는 공부할 거 아닌데. 공부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고 내가 할 일은 아니다.'

 

남편은 공부하면서 톨리도 오하이오라는 데서 교회를 맡았다. 공부하랴 목회하랴 바쁜 남편을 돕기 위해 성경공부반을 시작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성경 말씀을 나누는 것이었다. 교인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이런 성경해석은 처음 들어봤다며 내 수업을 녹음해 서로 돌려 듣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는 우리 큰아이 학교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다. 가 보니 선생님은 전부 여자이고 교장 선생님 한 분만 남자다. 우리 아이들이 남자와 여자 선생님의 영향을 골고루 받아야 할 텐데 여자 선생님한테만 교육을 받다니…. 그런데 그 순간 한국교회가 떠올랐다. 한국교회에는 남자 목사님들만 있다. '하나님이 엄마와 아빠를 주신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니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하나만 있게 만드실 수도 있었을 텐데. 둘 다 있게 만드신 것은 우리들에게 여자와 남자의 영향이 골고루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하나님의 뜻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 목사도 필요하지 않을까?'

 

***[역경의 열매] 신경림 (8) 美서 여자 목사 처음 본뒤 나도 못할 것 없다

 

정말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논한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돼 있었다.

 

내게 여자 목사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남편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남편이 목회하는 걸 알고는 유학생이 일하면 불법이라며 캠퍼스로 들어오라는 경고가 내려졌다. 교회에서는 남편에게 파트 타임으로 목회를 하라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우리 때문에 그 교회 사역이 축소돼서는 안 된다는 생

 

각에 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로 들어갔다.

 

애슐랜드 신학교였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애슐랜드 신학교 부총장을 찾아갔다.

 

"한 과목만 들어보면 안될까요?" 부총장은 일언지하에 "안돼(No)"라고 말했다. 토플 시험을 안 봤기 때문에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서른 한 살의 아줌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토플은 안 봤지만 구석에서 청강만 하면 안 되겠냐고 다시 사정해봤다. 부총장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수업에 지장이 있어 교수들이 싫어한다고 다시 이유를 들었다.

 

"제가 지장이 될 것 같으면 자진해서 나올게요. 그냥 해보면 안 될까요?"

 

"당신 나랑 대화를 할 수 있는 걸 보니 그냥 가서 들어봐도 될 거 같소만…."

 

그제서야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한 과목 청강을 하는데 들어가보니 여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여자 목사도 보였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건 죄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말려야 하는 것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확실하게 규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은 그간 나조차도 무심코 지나쳐버린 여자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제법 있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큰 자극이 됐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따돌림당한 가장 힘겨운 상황에 놓인 여자였는데 그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신 걸 보면 나를 통해서도 일하시지 않으실까?' 목사 안수를 받기로 생각을 바꿨다.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가난이 일상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남편이 전도사로 지내던 때 우리가 한 달에 받는 돈은 2만원이 전부였다. 아파트 관리비가 1만1000원이었으니 남는 돈은 9000원. 오죽하면 아이를 임신하고도 길바닥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을까. 남편이 그런 일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우리집 아파트에서 밖을 내다보면 슈퍼마켓에서 파는 딸기가 보였다. 3층에 살았는 데 딸기가 너무 먹고 싶어 한달음에 슈퍼마켓까지 달려 내려갔다. 그리곤 주인한테 물어봤다. "얼마예요?" 가격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 다음날 다시 내려와서는 가격을 물어보고 돌아서고, 매일같이 헛걸음을 하고는 아이를 낳았다. 끝내 딸기를 못 먹고 출산한 것이다.

 

남편이 톨리도 교회를 사임한 후 가난은 다시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9) 두 아이 뒷바라지 위해 접시닦이로 나서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일 당시 톨리도 교회 교인들이 과자를 사가지고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상민아, 과자 먹으렴." 아들에게 과자를 건넸다. 그런데 아들은 사온 과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엄마 이거 나 지금 안 먹고 학교에 싸 가면 안 될까요?" "누가 학교에 간식을 가져가니. 여기서 먹으렴." "엄마 아니야. 간식 싸 가는 거야. 학교에서 그러는 거랬어요." "정말?" 그랬더니 우리 아들 하는 말 "매일 간식시간이 있어요." "그럼 너 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우리 가난하잖아." 가슴이 미어졌다. 난 엄마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우리 큰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간식을 먹을 때 혼자 운동장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 전체에 한국인은 상민이 하나. 그것도 2학년짜리가 간식 시간에 날마다 외따로 나와 있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두 아이를 먹여 살리려니 내가 일터에 나가는 수밖에. 이를 악 물었다.

 

나는 무작정 학교 식당을 찾아갔다. 접시닦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유학생은 학내 아르바이트만 할 수 있었다. 내가 접시를 닦겠다고 하니 식당 사람들이 몸집이 작아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주부 경력을 내세워 접시닦이를 시켜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길래 나는 갑자기 손이 비면 연락을 달라며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주고 돌아왔다.

 

하필이면 생일날이다. 내 생일날 식당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밥 숟가락을 뜨려다 말고 운동화를 신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가 보니 왜 내가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당장 앞치마를 입으니 가슴부분에 올라와야 할 앞치마가 배에 걸쳐진다. 접시 닦는 일도 철저히 분업화돼 있었다. 자기가 맡은 접시를 집어 흐르는 물에 닦고 건조기에 넣어두는 식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데에 설거지할 접시며 컵이 잔뜩 밀려 들어오는데 나는 키가 작아 점프를 해야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나는 옆 사람 일도 거들어가며 인심을 얻었다. 식당 사람들은 그런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또 오라고 했다.

 

나는 정규직원이 됐다. 키가 작아 하이힐을 신고 접시를 닦았다. 접시 닦는 일만도 힘에 겨웠지만 그것만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이 엄마 가슴 아프게 안 하려고 간식 싸 가야 한다는 말을 못 꺼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가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내가 받은 돈은 시간당 2달러 15센트. 한국돈으로 3000원선이다. 생활이 될 리 만무했다. 보통은 세 시간 접시를 닦았고, 연회가 열리면 6시간을 일했다. 나는 다른 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부엌에 있는 큰 솥을 닦아보겠느냐고 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솥이 어찌나 크던지. 감당이 안 됐다. 어떤 솥은 깊이가 하도 깊어 구덩이 같았다. 게다가 밑이 고정돼 있어 옆으로 뉠 수도 없었다. 그 솥을 닦을 때면 나는 소리를 질러야 했다. 다 닦았다는 신호로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내 발을 잡고 빼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돈은 모자랐다. 그래서 일을 더 달라고 했다. 접시닦이에 솥닦이 거기에 홀 청소까지 맡게 됐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0)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시험 성적은 A

 

몸이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내 손이 망가지는 게 가장 걱정스러웠다. 감신대에 다닐 때부터 오르간을 쳤는데 이렇게 혹사시키니 다시는 오르간을 못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중에 나는 공부도 하고 있었다. 청강하던 과목이었는데 단 한 과목이었지만 열심히 들었고 시험도 치렀다. 죄다 외웠던 걸로 기억한다. 시험 성적은 'A'였다. 학교에선 내 점수를 보더니 토플이 없어도 되겠다며 입학을 제안했다.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터였으니 제안을 감사히 수락하는 게 당연했다. 내가 들어야 할 과목은 세 과목으로 늘었다.

 

남편이 물었다. "나도 접시 닦을까?" "안 돼. 당신은 공부할 사람이니 좋은 성적 유지해야 돼요. 난 그냥 하는 거니 아무러면 어때요."

 

먼저 공부를 시작한 남편의 졸업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돈이 없으니 신학박사 과정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자니 그간 들인 공이 아까웠다. "여기에서 목회 자리를 알아봅시다." 나와 남편은 목회 자리를 찾아 나섰다.

 

미국에서 '이승우'라는 내 남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미국교회에 다니고 있던 우리는 미국 감리교 감독님이 우리 교회에 설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목사님을 찾아갔고 미국 감독님을 만나 얘기 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목사님은 감독님이 너무 바빠서 따로 만날 시간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인사를 하고 싶다면 복도에 서서 기다리다가 인사하라고 했다.

 

그렇게라도 해 봐야지. 나는 복도에 기다리고 섰다가 지나가는 감독님을 붙잡았다. 그러곤 다짜고짜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 남편이 한국 감리교 목사인데 여기서 졸업할 때가 됐습니다. 목회를 참 잘하는데 목회지를 주실 수 없을까요?" 감독님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이력서를 보내보라고 하셨다. 남편의 이력서와 몇 분의 추천서가 감독님께 보내졌다.

 

1986년 1월2일 아침, 어떤 미국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위스콘신에 있는 감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때 만난 감독님이 우리 남편 이력서와 추천서를 50개 연회 모든 감독한테 보내줬던 것이다. 자기 연회에는 이승우라는 사람이 갈 교회가 없으니 당신네 연회에 자리가 있으면 이 사람을 청빙하라고 했던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에이전트'는 곳곳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위스콘신 연회에 자리가 있다는 연락을 받은 남편은 얼마 안 있어 인터뷰를 하러 갔다. 남편은 가뿐히 인터뷰를 통과했다. 나는 애슐랜드 신학대에서 겨우 2학기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남편이 위스콘신으로 가니 나도 따라가야 했다. 위스콘신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감리교 신학교를 찾아보니 시카고에 있는 게렛이라는 곳이 나왔다. 게렛 신학대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또 토플이 문제였다. 토플 성적이 없어 지원이 불가능했던 것. 게렛 신학대에서는 토플을 보고 오라고 했다. 나는 애슐랜드 때처럼 게렛에 내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 한국 목사 부인입니다. 처음부터 제가 학생 신분으로 그 교회에 가면 모르지만 목사 사모가 나중에 공부하겠다고 하면 성도들이 아주 싫어할 겁니다. 한국교회는 목사 사모가 공부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당신 학교에서 지금 날 받아주면 내가 공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부를 아예 접게 될 것 같습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1) 밀린 집세·학비에 발목 잡혀 편입 차질

 

무조건 받아달라는 나의 억지에 게렛 입학 관계자는 "가르친 교수 이름 둘을 대라"고 말했다. 나는 애슐랜드 교수 2명의 이름을 댔다. 얼마 후 게렛 입학 관계자가 다시 전화를 했다. "당신 교수가 우리 졸업생인데 당신 안 받으면 나중에 후회할거라 해서 우선 받기로 했다." 단 단서를 붙였다. 첫 학기 안에 토플 시험을 봐서 550점을 받아오는 조건이다. 나는 부랴부랴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고 남편이 공부했던 토플 책을 찾아내어 틈틈이 토플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식으로 학교에서 뗀 성적증명서를 게렛에 제출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성적증명서를 떼주지 않는 것이었다. 빚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도 참 막무가내였던 것 같다. 애슐랜드에 살던 학교 아파트 임대료도 한참 밀렸고, 내 등록금은 물론이고 남편 등록금도 못낸 상태였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고 뒷전으로 미뤘던 일이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하늘이 노랬다.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 솥도 닦고 홀 청소까지 했지만 먹고 살기도 바빴기 때문에 수중엔 한푼도 없었다.

 

나는 우리가 다니던 미국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다. 게렛으로 전학간다고 이제 이 교회 떠날거라고 이미 말했던터라 이제 그럴 수 없다고 다시 다니겠노라고 말씀드리러 갔다. 목사님은 내 말을 들으시고는 교회에서 장학금 용도로 마련한 선교비가 있다며 500달러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목사님 감사해요. 하지만 500달러 가지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쓰였으면 하네요."

 

나는 평소처럼 일터에 나갔다. 그날은 홀 청소까지 하는 날이었다. 식당에서 즐겁게 웃으며 식사하는 나보다 한참 어린 한국 학생들 발밑을 청소하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번도 그런 일로 자존심 상하거나 마음 아파본 적이 없었는데, 늘 웃으며 인사하며 청소했는데 그날따라 '이 학생들은 이렇게 즐겁게 식사할 수 있는데, 왜 난 죽으라고 일해도 안 되는걸까'라는 원망 섞인 푸념이 맴돌았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부총장이 나를 보자고 한다. 어제 만난 미국 교회 목사님이 부총장한테 전화를 해서는 "신경림 학생 좀 도와주라"고 했단다. 부총장은 돈을 다 갚지 않으면 성적증명서를 떼 줄 수 없다고 했다. 규칙을 위반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해한다고 했다. 남편 공부가 아직 한 학기 남았으니 그냥 학교 다니겠다고 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부총장은 그동안 밀린 나와 남편의 등록금을 장학금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놀라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나에게 아파트 임대료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빌려주겠노라 덧붙였다. 나는 하도 고마워 부총장님께 남편이 첫달 월급을 타는 대로 다 갚아드리겠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부총장님 하는 말씀이 "그럼 뭐 먹고 살려고. 남편 졸업할 때까지 5개월로 나눠 갚으시오"였다.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게렛 신학교에서 위스콘신의 우리집까지는 차를 이용해 편도로 한시간반 거리. 왕복 3시간이었다. 게렛 신학대 부총장은 "하루 세시간씩 운전하면서 공부는 못한다. 당신과 같은 동네 사는 미국 학생들도 학교에서 2∼3일 머무르며 공부한다"고 나에게 누차 학교에서 머물며 공부할 것을 권했다. 내 대답은 이랬다.

 

"당신이 모르셔서 그렇죠. 한국 여자는 외박하는 거 아닙니다. 저는 이대로 다닐게요."

 

***[역경의 열매] 신경림 (12) 장학금 계속 받기 위해 이 악물고 공부

 

부총장은 의욕만 잔뜩 앞선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따라가기 어려울 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못 따라가면 자진해서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3시간씩 운전해 학교를 오고간 나는 악으로 버텼던 것 같다. 차도 보통 고물이 아니어서 일단 정지하면 다시 시동이 안 걸려 뒤차 운전자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한밤중에 인적 드문 거리에서 시동이 멈춰 두려움에 떨며 가슴을 졸인 적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학생 사모를 처음 본 교인들과의 관계도 쉽지는 않았다. 처음 이사 오던 날 교인들이 저녁을 마련해 놓고 기다렸다.

 

아이 둘과 함께 들어갔더니 한 할머니가 "목사도 거짓말하네. 애가 둘이라 하더니 셋이다." 우선 내가 '애'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교회 어른들은 이 공부하는 사모가 살림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려고 걸핏하면 우리 집에 오셔서 냉장고도 열고 장롱도 열어보고 찬장의 먼지까지 확인하곤 했다.

 

나는 행여 남편에게 누가 될까 흠잡히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림을 했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였다. 이분들이 나를 몇 번 테스트를 해보고는 흠잡을 만한 일이 생기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는 며느리들을 닥달했다는 것이다. 누구 사모는 애도 둘 키우고, 공부도 해가면서 살림도 잘 하고 사는데 너희들은 뭐하느냐라는 식이다.

 

몇 번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 교인들과도 친해졌다. 미국 사람들과 공부하는 사모가 마늘냄새 나면 안 된다고 김치도 계속 담가 주시고, 반찬도 해다 주시고, 한인 타운과 너무 멀리 떨어져 한국 음식을 대하기 어려운 나를 위해 시카고 시내에서 비싼 스시를 사 가지고 와 한밤중에 나를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너무나 정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는 온 식구가 울며 아쉬워했다. 아직도 그분들은 때마다 연락하며 나를 아껴주신다.

 

게렛에서 받아준 것만도 너무 감사한 나는 별도로 장학금 신청을 안했는데 애슐랜드의 성적이 게렛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게렛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굿뉴스였다. 남편이 목회를 하면서 받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내 학비까지 감당할 금전적 여유는 없던 때였다. 하지만 좋은 소식에도 부담이 됐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평점 3.5점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머리에 불이 나도록 공부했다. 평점 3.5점 이상을 유지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시험 때는 하루에 한두시간씩 자고는 세시간 운전하며 다녔다. 너무 졸릴 때는 다리를 꼬집으며 다녔다. 성적은 다행히 잘 나왔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나는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긴 사람이라 어지간해서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둘째아이 낳을 때는 3일간 혼수상태였고 초등학교 때에도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겼다. 미국에 와서도 한번 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박사과정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몸이 무지 약했다. 당시 153㎝의 키에 몸무게가 37㎏이었다. 말라비틀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런데도 나는 죽기 살기로 뭐든지 열심히 했다. 아플 여유도 없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3) 박사과정 입학시험 날 열병 시험도 안치렀는데 합격통지서

 

게렛에서는 마지막 학년을 남기고 학생들에 대한 심사를 진행했다. 교수님 두 분이 나를 심사했는 데 내게 박사과정을 밟을 것을 권유했다.

 

"아니오, 저는 그런 거 못해요. 저는 공부 잘 못합니다."

 

"당신 평균학점이 4.0만점에 3.88인데도?"

 

"그거는요 제가 장학금을 못 받을까 봐 공부해서 그런 거고요. 아무튼 저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닙니다."

 

두 교수는 한참을 웃기만 했다. "그래도 해보지?"

 

"아휴, 아니에요. 안 해요."

 

나는 사실 공부보다 목사 안수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엇다. 여자 목사로 목회하는 게 내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사 안수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박사 학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한인 학생들이 내 얘길 들었다.

 

"공부 안 하셔도 되는데요, 입학은 하시죠."

 

그때까지만 해도 게렛에서 외국 학생이 석사 학위 하나만 받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최소한 석사 학위 2개는 따야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한인 학생은 내가 선례를 남기면 다른 한인 학생들한테도 기회가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진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면 대학원 입학시험인 GRE를 봐야 했다. GRE 시험일이 됐다. 나는 이날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병원에 입원했다.

 

류머틱 피버(Rheumatic Fever)가 내 병명이었다. 심한 열병으로 후진국형 병이라 불리는 병이었다. 주로 아이들한테 온다고 했다. 마디마디에 염증이 생겨 온몸을 쓸 수가 없었다. 세수하려는데 손마디가 저려오더니 마비 증세가 오고, 팔목과 어깨로 올라오면서 전신이 굳어버린 상황이었다.

 

'거 봐. 하나님 뜻이 아니잖아. 나는 박사는 아니야.'

 

그렇게 병원 신세를 한동안 지고 있는데 뜻밖에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GRE도 안 봤는데 말이다. 알고 봤더니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이 점수에 상관없이 받아주라고 추천했던 것이다.

 

'박사하라는 게 하나님 뜻인가. 그래도 돈이 없어 못하지. 남편도 못했는데….' 나는 합격통지서가 왔지만 박사 과정을 포기했다. 1주일 뒤 학교에서 이번엔 장학금 통지서가 왔다.

 

그때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최대 액수는 등록금의 4분의 3이었다. 내게 날아온 통지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공부하라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 남편은 반응이 영 마뜩잖았다. 정작 공부하러 온 사람은 자신인데 부인이 먼저 하게 됐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이해가 갔다. 나는 박사 과정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남편을 안심시켰다.

 

학교측에 내 의사를 밝혔더니 "그럼 1년 보류해 드릴게요. 지나고 마음 바뀌면 오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정적일 때 아팠던 건 비단 이때뿐이 아니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의 기도 제목이었던 목사 안수. 하지만 나는 하필 안수를 받으러 가야 할 때 또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4) 목사 안수 인터뷰 날 신체 마비증상

 

미연합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선 여러 과정과 여러 번의 인터뷰를 거쳐야 한다. 마지막 인터뷰를 남겨두었을 때 류머틱 피버(Rhuematic Fever)로 꼼짝을 못하게 됐다. 인터뷰할 때 제대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면 당연히 떨어질 것이었다. 인터뷰 장소까지 데려다줄 교인을 기다리는 동안 지나간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목사가 안 되겠다고 했던 어린 시절, 미국에 와 안수받기로 결심하던 날, 밤잠 못 자며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며 준비했던 과정들…. 그런데 이제 그 마지막 고비에서 중단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하기로 했다. 사실 그런 병에 걸렸다고 하면 마음 아프실까봐 숨기고 있었다. "엄마, 나 지금 목사 안수 인터뷰하러 가야 돼요. 근데 나 많이 아파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알았다. 나 기도한다." 우리 어머니는 내 전화를 끊자마자 기도에 들어가셨다. 1988년 2월의 일이다.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땐 늘 우리 어머니께 기도를 부탁했고, 하나님께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교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차에 올라탔고 3시간 거리인 인터뷰 장소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그런데 다른 인터뷰도 아니고 목사 안수를 위한 인터뷰니 더 이상 부축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을 건 인터뷰였고 우리 어머니의 평생 기도제목이었던 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기회였고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며 두 다리로 서 보았다. 부축을 못 받으면 혼자 서지도 못하던 나는 무엇에 홀린듯 스스로 걸어서 인터뷰실로 걸어 들어갔다. 인터뷰가 끝나니 무슨 질문들이 있었는지, 뭐라고 대답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걸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인터뷰는 그렇게도 원하던 목사가 되도록 해주었다.

 

내가 안수받는 날 우리 어머니는 한국에서 먼 미국으로 오셨다.

 

나는 의도적으로 한복을 입고 안수를 받았다. 감독님과 감리사님이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그동안 쌓였던 눈물들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나님, 여기까지 왔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새로 안수받은 목사들이 성만찬을 분급할 때 내 감리사님은 우리 어머니를 내게로 모시고 왔다. 어머니의 30년 기도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것은 엄마를 위해 주신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 때만해도 결혼한 여자는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못 받을 때였다.

 

위스콘신 연회에서도 한국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게렛신학교에서는 한국 여자가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나를 기념해준다며 졸업식 때 특별상도 줬고 졸업 연사로 이화여대 정의숙 총장님을 초청하기도 했다.

 

남편은 또 그랬다. 내가 정말 안수 받을지 몰랐다고. 한국에까지 내 소문은 퍼졌지만 모두들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 신경림은 아니겠지"라며 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연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니 교회에 가야 했다.

 

나는 그런데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1984년 8월 미국에 가 3년반이 흘렀건만 내 영어실력은 아직도 설교를 하기엔 부족했다.

 

어느 교회를 가야 하나. 그렇다고 한인교회에 갈 수도 없었다. 남편이 목회를 하던 위스콘신의 케노샤에는 전체 한인이 97명. 그 중에 79명이 남편 교회 교인이었으니 내가 그 옆에 한인교회를 개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5) 문닫기 직전 교회맡아 당찬 병아리 사역

 

감리사님은 나를 우리 도시에 있는 한 미국인 교회로 데리고 갔다. 교인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까다로운 질문들도 많았다. "당신은 한국 여자인데, 한국 여자는 남편을 잘 내조해야 하는 걸로 안다. 남편도 목회자인데 남편 교회를 도와야 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만의 목사를 원하는데."

 

그들이 원하는 답은 내가 남편 교회 일을 돕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안수를 받은 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받은 겁니다. 월급은 이 교회에서 받지만 내 목회 대상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시킬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나는 목사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 대답에 그들은 오히려 감동한 눈치였다.

 

3월께 결정이 났고 나는 7월1일 자로 부임하게 됐다.

 

부임하던 날 나는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 설교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여인은 넋을 놓고 슬퍼하지만은 않았음을 전했다. 향유를 예수께 부어 그의 장례를 준비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She has done what she could)"라고 하시며,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전하여져 그가 기념되리라고 극찬하신 걸 주지시켰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영어도 잘 못하고 신학교 졸업한 지도 한달 밖에 안 됐습니다. 미국 온 지도 4년 밖에 안 되어 여러분을 잘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약속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해보기 전에 못한다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십시오."

 

성도들은 놀랍게 잘 따라와줬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첫 주만 예배를 드리고 다른 교회로 가려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정을 빼고 모두가 그대로 교회에 눌러앉았다. 성도는 60여명이었다. 유지하기 어려워 교단에 교회당 열쇠를 반납하며 문을 닫아달라고 했던 교회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감리사님이 1년만 버텨보라 하시고 나를 파송한 것이었다.

 

내가 동시에 맡은 다른 교회는 성도 수가 30명인 더 작은 교회였다. 그 교회에선 처음엔 젊은 사람들을 전도해봤다. 그런데 그들을 전도해보니 한 주일만 교회에 나오고 그 다음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얘길 들어보니 교회학교가 없어 자녀를 데리고 올 수 없다는 게 불만 사항이었다.

 

성도들의 연령대는 50대 이상이었다. 자녀들은 이미 성장해 품 안에서 떠났고 노후를 설계해야 할 분들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교회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답은 뻔했다. 애들이 없는데, 교회학교를 만들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학교가 없으니 애들이 없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러고는 선생님을 모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선생님을 자원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는 손자 손녀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무작정 일을 벌였고 1년이 지나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는데 36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대성공이었다.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가 잘 운영된다는 소문이 나자 연회에 소속된 다른 목사님들이 비결을 물어왔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결이라곤 두 가지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6) 억척스런 3교회 섬김… 밀려드는 피로·불안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결이라곤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내가 한국인 목사라는 것. 나는 '한국인 목사들은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목숨으로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또 하나는 교인들과 나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기로 약속한 게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미국 교회를 맡고 나서 정말 힘들었다. 내가 미국인들을 상대로 목회할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설교 준비하는 데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것을 영어로 준비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남편 교회 성도들은 사모인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있었으니 그 역할도 감당해야 했다. 내가 맡은 교회가 작지만 2개였다. 예배를 마치면 부리나케 남편 교회로 달려가서 성가대 연습을 시켰다. 또 저녁에는 성도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나는 3개 교회를 섬기는 셈이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열심히 했지만 꼭 좋은 소리만 듣는 것은 아니었다. 영적으로 완전히 소진됐다.

 

'이러다 죽겠구나.'

 

영적 충전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1년 전 신청했던 '스피리철 포메이션 아카데미'가 바로 이때 다가왔다.

 

스피리철 포메이션 아카데미는 감리교단에서 운영하는 영성 수련 과정이다. 나는 헐레벌떡 짐을 싸서 아카데미로 갔다.

 

아카데미에 가니 1시간 동안 혼자 있으라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 상태에서 1시간을 있으라고 했다. 나는 위스콘신 주의 큰 호수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것도 안 하며 가만히 있어 본 적이 없는 나는 몹시 불안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데 한 15분 지나니까 눈물이 쏟아졌다. 살면서 힘들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복받쳤다.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그동안 뭐든지 죽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악으로 버텼던 것 같았다. 눈물이 홍수를 이루는데 호수 위로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났다.

 

다른 때 같으면 꿈이냐 생시냐 요란했을 텐데, 너무 지친 나머지 형상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울었는데, 예수님은 계속 그 자리에 계셨다. 그냥 바라만 보셨다. 갑자기 궁금해져 고개를 들어보니 예수님도 울고 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구나. 내가 예수님이 울어주는 그런 사람이구나!"

 

가슴으로 감동이 밀려들었다. 나는 예수님이랑 한동안 같이 울었다. 만약 내가 그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에 가는 트럭을 들이받으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날 밤 침묵 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은 목사, 좋은 사모, 좋은 한국 여자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기 싫어 살림도 죽어라고 하고, 남편 교회에도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도 행여 삐딱하게 나갈까 봐 노심초사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 사람이 아닌 이상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한다 해도 미국 사람이 아니니 늘 미국 목사들만 못할 것 같아 전전긍긍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어디서든 '나는 충분하지 못하구나(I'm not good enough)'라는 생각이 나를 이렇게 눌러왔구나. 그런데 그 두 가지 모두 내 잘못은 아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7) 위로 체험후 안정… 남편 진로 안갯속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위로를 떠올렸다. 깨달음이 왔다.

 

'나는 주님의 딸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좋은 한국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미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어준 사건은 내 관점과 인생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꿔놨다. 완벽주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이른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제 충분해(It's enough)!'

 

나는 나중에 나 같은 슈퍼우먼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로 고통받는 한국 여성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박사 논문 제목을 '수치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달았다.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이제 신이 나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남편은 어딘지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위스콘신 주 케노샤에서 한인 목회를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도시 전체 한인이 97명이니 교회가 최대한으로 성장해봐야 97명뿐이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을지 모르겠다. 도전이 없으니 설렘과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던 차에 내가 정회원 심사를 받고 합격이 돼 감독님과 1박2일 수련회에 참가하게 됐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는 준회원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2년 후 심사를 해서 정회원으로 승격하는 제도가 있다. 저녁식사를 하며 감독님에게 말씀드렸다. 남편이 한창 나이인데 케노샤에서는 별 도전이 없어 답답해 하는 것 같다고. 더 많이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주실 수 없겠느냐고. 감독님은 위스콘신 연회에는 사실 그럴 만한 교회가 없다고 했다. 주 전체에 한국교회라곤 3개 밖에 없었으니…. 오하이오 주에서 위스콘신으로 오게 된 것은 오하이오 감독님이 다른 연회 감독님들에게 자리를 알아봐줘 가능했던 것이 생각나 다른 연회에 알아봐주실 수 없겠느냐고 감독님에게 여쭤봤다. 감독님은 알았다고 하더니 잠시 후 혹시 내가 아는 교회가 있느냐고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마침 우리는 워싱턴의 한 교회에 자리가 난다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남편은 선배들을 통해 그곳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선배 목사님들은 남편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하셨다. 그동안 혹시 다른 사람이 청빙됐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교회에 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씀드렸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워싱턴에 있는 감리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 올 수 있느냐, 인터뷰도 하지 않아도 되니 빠른 시일 내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위스콘신 연회 감독님이 우리 남편에 대해 말하기를 "너무 훌륭한 사람이니 무조건 받으라"고 했다는 설명과 함께.

 

우리는 그래도 교인들은 만나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인터뷰하러 가겠다고 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후 전임 목사님께 안부 인사 겸 전화를 드렸더니 감리사에게 들은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교인들이 이승우 목사는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유를 들어보니 부인이 목사이라는 것.

 

감리사가 인터뷰가 필요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인터뷰를 하고 가겠노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8) 솔직한 인터뷰… 남편 워싱턴 교회 부임

 

워싱턴 감리사님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원했던 목사가 한국에서도 공부하고 미국에서도 공부하고, 한국 목회 경험도 있고, 미국 목회 경험도 있고, 헌신적인 사모가 있는 목사를 원했지요? 여기 그런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모님은 헌신적이셔서 이렇게 인터뷰 자리까지 따라오셨고요. 이제 목사님에게 질문할 게 있으면 해보세요."

 

교인 중 한 분이 손을 들었다. "사모님이 목사라는데, 우리 교회 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교인들이 내게 질문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안 했기 때문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먼저 대답을 길게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어릴 적에 어른들이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어보셨을 때 절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이 세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목사 부인, 하나는 선생님, 하나는 목사. 우리 어머니가 당신 마음대로 나를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치셨다고 내심 서운해 한 적도 있었고요. 아마 어린 마음에 거기에 대한 반작용 비슷하게 세 가지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이 세 가지를 다 하게 되었네요."

 

교인들은 내 얘기를 무척 흥미롭게 들었다.

 

"그러면서 제가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계획은 제가 하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더라는 거에요. 제가 안수를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은 뭐든지 하고,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가겠다고 약속했으니 제 마음대로 이거는 하고 저거는 안 하겠다고 감히 약속을 못 드리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이 교회도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니, 이 교회를 존중하겠다는 것, 그건 약속 드릴 수 있어요."

 

다행히 교인들은 내 답변을 좋게 생각해주었고, 남편은 그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남편은 부임하는 첫 주일 나에게 축도 순서를 맡겼다. 오히려 내가 사양을 했지만, 아예 처음부터 목사로 나를 부각시키겠다는 것이다. 월요일이 되니 한 장로님이 부인을 통해 이제 교회에 안 나오시겠다고 했다. 심방을 가서는 왜 교회에 안 나오시냐고 여쭤봤다. "여자 목사가 축도하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모님을 좋게 생각하고, 그래서 이 목사님을 모시기로 하였지만, 막상 여자 목사가 단 위에서 축도하는걸 보니 도대체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는 그분께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그 장로님은 인터뷰때 내 답변을 들으시고는 나를 담임 목사로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농담까지 하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도 충격을 받았으니 다른 분들은 오죽했을까. 그러나 고맙게도 그 장로님은 교회를 떠나지 않으셨고, 목사 사모를 어찌 부르고,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던 교인들도 하나둘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인들이 부탁하여 2세 청년들을 위한 영어 예배를 담당하고, 한어부 청년들 성경 공부도 맡아 열심히 내조를 했지만, 위스콘신 주에서 목회하던 그 미국 교회가 많이 그리웠다. 워싱턴에서 남편 교회를 돕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할 일이 없을까 찾다보니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 길이 가장 괜찮아보였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19) 신 목사 후임도 한국 女목사 보내주세요

 

1988년부터 2년간의 목회는 90년 워싱턴에 가면서 추억으로 남았다. 위스콘신교회를 떠날 때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위스콘신 미국인 교회 목회시절 시아버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한국에 잠시 나가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내가 행여 안 돌아올까봐 걱정했다. 임원회장은 내가 안 돌아오면 즉시 데리러 오려고 여권을 갱신했다고 했다. 나로선 오히려 오지 말라고 할까 걱정했으면 했지, 안 돌아갈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살던 집은 내가 섬기는 미국교회의 목사관이었다.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 비행기가 연착해 한밤중에 집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다. 집 앞 나무에 풍선들이 매달려 있었다. '웰컴 홈(welcome home).' 옆을 보니 새로운 농구 골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키 큰 우리 아들이 농구를 좋아하는 걸 알고, 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선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상민이 이름도 거기에 새겨놓고.

 

어리벙벙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딸아이를 위한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예지가 어려서 그걸 쓸 나이도 아니었음에도 상민이에게만 선물하기가 미안해 그랬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다음날 아침 식사가 예쁘게 차려져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정이 없다고들 하는데 내가 겪어본 미국 사람들은 안 그랬다. 내가 목회하느라 바쁘다는 걸 알고 할머니 성도들은 내 아이들을 피아노 배우는 데며 운동시합하는 데며 다 데리고 다니고 밥도 챙겨주는 등 보살펴줬다. 내가 출장이라도 가면 남편 밥까지 챙겨줬던 분들이다.

 

이렇게 정이 듬뿍 들었는데 남편이 워싱턴으로 가니 헤어질 수밖에. 감리사님은 교인들에게 미리 말하지 말라며 자기가 와서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반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즈음에 "우리 목사 숨겨놓자. 연회에서 알면 큰 교회로 빼갈 거다"라고들 하는 중이었다.

 

감리사님이 와서 교인들에게 내가 남편 따라 워싱턴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자 교인들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우리 목사님도 거기 가면 목회합니까." "우리 목사님도 목회해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꼭 설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감리사님이 워싱턴 쪽 연회에 부탁하겠다고 했지만 교인들은 안심이 안 되는지 계속해서 내 목회 자리를 꼭 찾아 달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감리사님도 나도 너무 놀랐다. 내가 있으니 얘기를 진전하기가 더 어렵다며 감리사님은 나보고 집에 갈 것을 권유했다. 나는 집으로 갔고 결과를 기다렸다.

 

회의를 마친 감리사님은 "당신 교인들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원하는 목사를 보내주겠다고 말하니 한국 여자 목사를 구해 달라고 합니다"라고 결과를 말해주었다.

 

너무나 감사해서 혼자 방에 들어가 울었다. 사실 처음 목사됐을 때 얼마나 많은 비난을 감내해야 했던가. 시카고 지역 교역자회의에 갔을 때는 다른 목사님들의 쓴소리를 참아내야 했다. 안수받고 처음 한인 교역자회의에 갔을 때 다른 사모님들은 예배만 같이 드리고 모두 다른 방으로 가는데 나는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목사님들과 남아 있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0) 미국인 교회 영어 기도 준비로 힘든 나날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나보고 옆방으로 가라고 했다. 남자 목사는 안수받으면 교역자회에서 발표하고 함께 축하해 주고 즉시 목사라고 부르는데, 나에게는 "사모라는 호칭이 더 편하시지요?"란다. 뒤에 들리는 말로는 내가 안수를 받는 걸 보고 다른 사모님들이 따라 할까 겁난다고 하는 목사님들도 있었다고 한다.

 

남편 교회의 교인 중에 어떤 이는 나에게 자신이 꾼 꿈 얘기를 했다. 꿈에 하나님을 봤는데 너희 교회 사모는 왜 남편 자식 다 팽개치고 자기 할 일 하러 가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사모가 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위스콘신 케노샤에서 미국인 교회에 부임하기 직전 마지막 주일에 나는 남편에게 부탁해 남편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100년 전에 미국 사람들이 선교사로 한국에 갔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에 더 많은 문제와 아픔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더 잘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저를 미국인 교회에 선교사로 보낸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남편 교회 교인들은 그후 나를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미국 교회에 가서는 또 영어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지. 우선 영어로 기도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기도에 쓰이는 영어는 일상 영어가 아니었고, 기도하다 문법 틀렸다고 다시 할 수도 없는 노릇. 거기다 목사라고, 아무 때나 어떤 상황에서나 대표 기도를 해야 하니 정말 힘들었다.

 

부임한 첫해 성탄절이 다가왔다. 교회에 출석 못하시는 노인들을 양로원이나 집으로 방문하기로 마음 먹어 주일날 광고를 했다. 화요일에는 그분들 심방을 하려 하니, 혹시 내가 모르는 분들 있으면 알려 달라고. 그리고 나는 기도문을 하나 준비했다. 상황이 다 같으니 한 가지 기도면 될 것 같았고, 정신이 맑지 않은 분들이니 서로 목사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대조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화요일 아침 교회에 도착한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교인들이 함께 심방가겠다고 모여 있었던 것이다.

 

이 교인들 있는 데서 같은 기도를 여러 집에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와서 심방을 취소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일단 첫 집에 가서 준비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두번째 집 가는 동안 죽어라고 다른 기도를 준비했고, 계속 다음 집으로 가며 새 기도를 준비했다. 속 모르는 교인들은 차 속에서 자꾸 영어로 말을 시켜 내 작업(?)을 방해했다. 일곱번째 집 심방을 마쳤을 때는 나는 탈진 상태였다. 성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우리 목사님의 기도는 정말 은혜스러워. 기도가 설교 같아." 그러나 그 다음해부터는 광고 안하고 몰래 심방 갔다.

 

또 한번은 장례식 예배를 인도하게 됐다. 나는 당시 미국 장례식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갑작스레 닥친 장례식이라 제대로 준비할 수도 없었다. 교회에 들어섰더니 예배당이 조문객들로 꽉 차 있었다. 고인이 도시의 유지라서 사람들이 많기도 했지만, 아시아 여자 목사가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기 때문에 호기심도 작용한 것 같았다. 시작하는 예문을 읽다가 얼핏 눈을 들어 앞을 보고는 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1) 내 엉터리 영어 설교에 오히려 은혜

 

수백 개의 눈동자가 모두 순서지를 안 보고 나를 보고 있는 거였다. 호기심으로 확장된 낯선 사람들의 눈동자 사이에서 난 낯익은 교인들을 눈으로 찾았다. 그랬더니 우리 교인들의 눈은 걱정으로 더 커져 있었다.

 

"아시아 여자 목사, 백인 교회 목회하다 도망가다."

 

이런 기사가 신문에 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불안해하는 나에게 교인들이 다가오더니 이런 독창적인 장례식은 처음 보았다고 기뻐했다. 전통적인 장례식을 몰랐던 것이 '독창적'이었다는 칭찬을 듣게 만들었다. 몇몇 분은 자기네들이 죽으면 내가 어디 있든지 꼭 와서 집례를 해달라고 해 장례식 예약(?)을 받기도 했다. 하나님은 위기 때마다 살려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학교 외에서는 영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처음 미국 갈 때는 접시 닦으러 갔으니 영어 배울 필요없다 생각했고, 그후로 무료 강습을 받고 싶었지만 차가 없어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영어로 목회를 하게 되니 꼭 영어를 정식으로 배워 목회를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임원회 때 내가 근처에 있는 대학에 가서 영어를 좀 배우겠노라 했다.

 

성도들이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대였다. 내 엉터리 영어가 매력이니 그걸 잃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러며 덧붙이기를 내 영어 억양이 익숙지 않아 자기들이 졸지 않고 열심히 설교를 듣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있다고 했다. 결국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지 못하고 난 워싱턴으로 떠났다.

 

이제 워싱턴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 얘기로 다시 돌아가겠다.

 

위스콘신 주에 있을 때 게렛신학대에서 박사 과정 입학 허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게렛대는 그때까지도 나를 기다려주었다. 워싱턴으로 이사를 가면서 한편으로는 아깝고 아쉽기도 했다.

 

워싱턴에 가보니 내가 목회할 교회는 없고 그래서 공부를 해볼까 하고 신학교를 알아보았다. 철학박사 과정이 있는 곳은 가톨릭신학대뿐이어서 나는 감리교 신학대인 웨슬리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에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공부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어떤 학위든 배울 수 있으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그런데 이 무렵에도 나를 비난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 난리를 치고 안수 받았으면 목회를 해야지, 왜 남편 따라 가느라 목회를 접었느냐고."

 

내가 그리 쉽게 목회를 포기하면 앞으로 나올 여자 목사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내가 목회할 때는 남편 내조 제대로 안 한다고 비난하고, 이제 남편 목회를 위해 내 목회를 접고 이사 오니까 왜 자기 목회 안 하느냐고 비난하고….

 

그래도 게렛신학대학원 은사였던 로즈마리 켈러 교수님은 나에게 "네가 워싱턴으로 가는 것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하며 용기를 주셨다. 나는 어쨌든 다시 학생이 됐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목회하는 한인 교회 청년들을 지도했다.

 

청년부에는 웨슬리 석사 과정에 다니는 미국인 학생이 있었다. 중고등부 전도사로 우리 교회를 섬기던 학생이었다. 그 학생이 어느 날 내게 난데없이 웨슬리에서 '공동체 학장(Dean of Community Life)'을 뽑는 데 지원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2) 경험 쌓으려 지원서 냈다 신학교 학장 낙점

 

다음날 학교 점심시간에 박사과정 학생들과 담당 교수와 식사하는데 그 미국인 학생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아예 지원서를 내미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교수가 나보고 지원해 보라고 부추겼다. 이렇게 지원하고, 이력서 쓰고, 잘하면 인터뷰하고, 그런 것도 좋은 경험이 되어 다음에 도움이 된다고.

 

경험 쌓으려 지원서를 내고 몇 주 지나니 총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총장님이 만나자고 하신다고. 총장님은 자신이 두 통의 편지를 받고 나를 만나야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설명해 주셨다. 듣고 보니 한 통은 남편 교회 전도사인 학생이 보낸 편지였고, 다른 편지는 점심시간에 내 테이블에 앉아 있다 지원해 보라던 내 담당 교수가 보낸 거였다. 두 사람 모두 "신경림 이력은 형편없지만, 좋은 사람이니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게렛의 로즈마리 켈러 교수도 내가 박사과정 입학 때 웨슬리 총장님께 전화해서 신경림이라는 학생이 가는데 잘 키워 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던 것이 생각나더라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설명해 드렸다.

 

며칠 뒤 총장 비서가 전화했다. 90여개의 이력서를 받았고 3명을 최종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나라고. 난 박사과정 학생일 뿐이었다. 학장을 할 만한 이력이라곤 눈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나에게 비서는 1주일에 한 명씩 인터뷰하는데, 인터뷰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30분까지라고 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나의 대답은 "난 그렇게 오랫동안 말할 수 있는 영어가 안 되는데요." 비서는 웃으며 그럼 안 하겠느냐고 했다. '아니지, 이게 얼마나 좋은 경험이 될 텐데'라고 생각하며 나는 마지막 주로 정해진 인터뷰를 받아들였다.

 

첫 주가 지나니 순식간에 학내에 소문이 퍼졌다. 인터뷰한 교수가 다른 학교 교수인데 너무 훌륭하다는 얘기였다. 두번째 주엔 훌륭하긴 하지만 먼저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이 떠돌았다.

 

마지막 주 내 차례가 왔다. 하루종일 계속 다른 사람이 들어와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데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잃을 것도 없었기에.

 

총장님은 이틀 뒤에 연락을 주셔서는 2주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2주 후에 다시 전화를 하시더니 한번 보자고 하셨다. '만약 붙었다면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을 텐데.' 총장님께 찾아갔다.

 

"당신에게 두 주를 더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은 두 사람이 욕심나서 다 뽑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수회의와 이사회를 거쳐 한 명은 학장으로 다른 한 명은 부학장(Associate Dean)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럼 혹시 내가 부학장? 너무 좋아 정신을 못 차리는데 총장님은 나보고 학장을 하겠느냐고 하셨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두 명의 특성을 보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셨고, 인터뷰했던 다른 사람도 그렇게 동의했다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신학교 학장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3) 가족들 한마음 응원에 부총장직 수락

 

내게 처음 주어진 임무는 2박3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맡는 것이었다.

 

너무 난감했다. 나는 사실 미국에 와서 학교 두 군데를 '옆문'으로 들어간 사람 아닌가. 오리엔테이션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오리엔테이션위원회를 조직해 경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첫 임무를 감당했다.

 

학장 일을 하면서 나는 박사과정도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집에 가서는 밥하고 설거지하고 다시 학교 사무실로 가서 새벽 2∼3시까지 논문 쓰고 그러기를 매일같이 반복하다 보니 눈 깜짝할 새 졸업식이 다가왔다.

 

졸업식 날. 웨슬리에서는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를 때 박수를 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내 이름을 부르니 교수며 학생이 다같이 소리 지르며 기립박수를 쳤다. 손님들은 영문도 모르고 일어났다.

 

나도 놀랐지만 우리 남편이 더 놀랐다. 미국 사람들이 나를 그 정도로 응원해줄지 몰랐던 것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도 확신이 안 서는 가운데 4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날, 총장님은 나에게 부총장을 맡기고 싶다 하셨다.

 

부총장. 정말 엄청난 일이다.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닥치는 대로 일을 해왔다고 치지만 부총장직을 맡을 능력이 있는지는 신중히 생각해봐야 했다. 그리고 사실 난 그때 학장으로서의 생활이 익숙했다. 일상에 젖어들 무렵 또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니 기쁘기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에게도 충실하고 싶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그간 아이들에게 소홀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가 고민을 털어놨다. "학교에서 부총장 하라는데 엄마는 안 할까 싶다."

 

"엄마, 왜요?" 아들이 물었다.

 

"엄마가 너희들한테 너무 못해줘서 미안하고. 너희 과외활동할 때 엄마가 못 데려다준 것도 늘 마음에 걸렸고. 이제는 너희들한테 잘해주고 싶구나."

 

"엄마, 나 같으면 부총장 할 거예요." 뜻밖의 대답에 놀라 되물었다. "왜?" "엄마가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 같으면 할 텐데 왜 안 하세요?"

 

"내가 너희들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엄마, 이제 내가 운전할 나이가 다 됐어요. 동생은 제가 데려다주면 되죠. 엄마 그냥 부총장 한다고 하세요."

 

우리 딸 예지는 한술 더 떠 "엄마, 언제 총장 돼"라며 애교를 떨었다.

 

듣고 있던 남편은 "신경림 컸구만"이라며 애들의 말을 거들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남편은 "당신이 언제 준비돼서 일 시작한 적 있어? 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보내고 거기서 도와줘서 일한거지. 근데 이젠 준비가 됬는지 안 됐는지 스스로 결정하겠다고?"라고 말했다.

 

"그래 맞아. 여태껏 하나님이 일을 시키시고, 감당하게 하셨는데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결정하면 안되지…."

 

그렇게 해서 한국 여자로선 처음으로 미국에서 신학교 부총장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4) 남편이 일러준 싸움닭 교훈 차별 대응 방법에 전환점

 

남편은 감신대 출신으로 한국에서 안수받고 미국에서 미연합감리교회 목사로 봉직하고 있다. 교회는 워싱턴의 록빌 메릴랜드라는 곳에 있다. 내가 있는 학교와 35분 거리다. 집은 그 사이에 있다. 남편은 결정적인 순간 나에게 필요한 얘기를 해줬다.

 

위스콘신 주에서 미국교회 목회할 때 내 마음에 쌓인 게 너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이 나를 차별한다는 게 늘 억울하고 분했다. 사람들이 싫었고 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싸움닭 알아? 싸움닭을 만들기 위해 일반 닭을 훈련시키잖아. 어느 정도 훈련시킨 다음에 다른 닭이랑 대련시키지? 그때 막 먼저 공격하면 다시 데려다가 더 훈련시켜. 그런 후 다시 대련시켜 보고, 또 먼저 공격하면 더 훈련시키고.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는 줄 알아? 가서 먼저 공격하지 않을 때까지래."

 

생각해보니 모든 것에 불만이 많았다. 특히 성차별에 화가 났다. 나도 남자들과 똑같은 자격을 갖춰 목사가 됐는데 늘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게 억울했다. 차별은 불의이므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떠나갔다. 싸움닭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 사사건건 문제삼는 것은 현명하지 않아.' 그 다음부터 싸워야만 하는 일과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때가 아니면 뒤로 미루기도 하는 여유를 갖게 됐다. 사람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내 속의 다른 나를 발견하고 놀라워 했듯이 남편도 나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미국에 갔을 때 운전을 못했다. 미국에서 운전을 못한다는 것은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면허증이 없으면 수표도 쓸 수 없다. 남편은 목회를 하느라 바빠서 운전을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독학으로 면허시험을 준비했다. 교회 청년들에게 운전면허 관련 책자를 빌려 공부한 뒤 필기시험에는 붙었다. 실기가 문제였다. 두 달 안에 실기를 봐야 면허증이 나오는 데 독학은 무리였다. 남편은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저 동네를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다.

 

다음날 심방이 있었다. 집을 떠나며 나는 남편에게 내가 운전하겠노라고 했다.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그러라고 했고, 왕복 1시간이 되는 거리를 직접 운전해 다녀왔다. 남편은 놀랐다. 내가 12차선인 큰길로 나가면 무서워하며, 다시는 운전하지 않겠다고 할 것을 기대해 운전하라고 했는데 멀쩡하게 갔다 왔다는 것이다. 사실 난 무섭지 않았다. 옆에 지나가는 다른 차들을 쳐다 봤다면 무서웠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어 앞만 보고 운전했기 때문이다.

 

내가 신학교에서 한 과목을 청강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에 대해서도 같은 얘길 했다. 내가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다고, 끝까지 갈 줄은 몰랐다고…. 남편은 사실 나와 참 다르다. 충청도 사람인 남편은 여유로운 편이다. 사람답게 사는 걸 좋아하고 아등바등 사는 걸 내켜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아내가 있었는데 미국에 오니 아내는 없어지고 신학생이 생겼네." 내가 신학교 다니며 정신없이 살 때 남편이 한 말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이 따라주지 않아 힘들기도 했다는 남편이다. 남편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겠지만 이젠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준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5) 변호사·교사로… 주님이 키워주신 아이들

 

아이들에 대해서는 나는 늘 미안한 일뿐이다. "애들 어떻게 키웠어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우스갯소리로 "방목했어요"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키워주셨다.

 

아이들 때문에 벌벌 떠는 부모들을 보면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아이들의 삶을 책임질 순 없다고, 24시간 아이들의 삶을 지킬 수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고…. 단지 하나님께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 최선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은 자립심이 강하고 둘 다 리더십이 탁월하다.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큰아이인 상민(32)이는 조지 워싱턴 법대를 우수 학생으로 졸업하고 버지니아 주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상민이는 법대 2학년 때 로펌에서 인턴십을 했는데 인턴십을 마치자마자 졸업하면 같이 일하자는 '취업 보증수표'를 받았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예지(30)는 4년제 대학을 3년으로 앞당겨 조기 졸업했다. 또 풀타임 교사로 일하면서 대학원 과정도 마쳤다. 일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는 데도 1년6개월 만에 마쳤다.

 

아이들이 이렇게 잘하고 있지만 그래도 난 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예지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나는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잘하지 못했는데, 하나도 제대로 해준 것이 없는데 이제 결혼해 내 곁을 떠나니 이 일을 어쩌나. 미안해서 어쩌나.'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도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를 용서하지 마. 엄마가 너무 잘못했어.'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갔더니 내 옷을 하나 사주겠다고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다. 결혼식 전날 예행 연습 후 사돈댁 식구들, 들러리들과 함께하는 만찬에서 입으라고….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우리 집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아들이 아메리칸대에 다닐 적에 그 대학 학생이 나를 인터뷰하러 왔다. 리더십 관련 수업시간에 발표할 과제가 있는데 내 얘기를 발표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넌지시 우리 아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학생 하는 말이 이랬다. "그럼요, 상민이가 어머님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걸요."

 

그 학생의 말에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애교가 유독 많은 딸은 출장 떠나는 나를 가끔 공항에 데려다주면서 자기 사진 뒤에다 무언가를 써서 나게에 주곤 한다. "비행기에서 봐, 엄마"라고 말하면서. 그 사진 뒤를 보면 "엄마, 아프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내가 얼마나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몰라요. 엄마 하는 일 굉장히 중요하니까 그 일 잘하고 오세요"라고 적혀 있다.

 

나에게 자녀 교육의 비결을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나보다 더 잘 기르실 하나님께 맡기고, 부모는 그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책을 많이 읽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을 가까이하게 되는 것처럼.

 

두 아이가 네 아이가 되었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우리 사위, 너무나 예뻐 쳐다보기도 아까운 우리 며느리. 지난 설에 며느리가 세배 와서 음식 준비하는 내게 스스럼없이 말했다. "어머니, 우리 게임하고 놀아요."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역경의 열매] 신경림 (26) 바른 목회자로 자랄 학생 영입 입시 개혁

 

1994년쯤이다. 미국에서는 신학교들이 교회와 별 연계가 없었다. 하지만 웨슬리 신학교는 달랐다. 학교는 교회 중심의 신학교, 즉 교회를 돕고 살리고 이끄는 신학교가 돼야 한다고 결정하고 그 일을 나에게 맡겼다. 처음 맡아보는 일이라 먼저 이러한 일을 한 학교의 모델들을 연구하려고 했지만 케이스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막막했다. 그래도 '우리 학교가 이걸 잘 하면 모든 신학교가 교회를 돕는 신학교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힘이 솟구쳤다.

 

다른 신학교에서는 안 될 거라며 지레 겁을 줬다. 어찌됐건 나는 일단 해보기로 작정했다. 이럴 때는 오히려 나처럼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잘 모르는 사람이 낫다고 생각했다. 모르면 용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 중에 지원자를 학교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직접 찾아가는 선발 방식이 히트를 쳤다. 미 감리교에서는 일단 목사가 되면 목회지를 보장받는다. 좋은 점도 있지만 목회를 잘 못하는 목사들도 계속 교회를 맡을 수 있어 문제도 있다. 역량이 부족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해 교회를 계속해서 옮겨 다닌다. 그 과정에서 여러 교회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 당시 미 감리교내 핫이슈였다.

 

교회와 교단에서는 신학교에서 좋은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신학교가 좋은 학생들을 받아야 좋은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지, 자질이 없는 학생들을 받아 좋은 목회자로 졸업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럼 좋은 학생은 어디 있을까? 교회였다. 좋은 학생을 아는 사람들은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었다.

 

우리는 '웨슬리 주일'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교회 현장에 직접 찾아가 소명을 주제로 설교를 하며 '여러분 교회나 주위에서 누가 목회를 하면 가장 잘 할까'라는 질문지를 돌려 대상자들을 확보하는 일이다. 리스트를 받아 우리는 직접 연락을 해봤다. 앉아서 서류만으로 심사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좋은 학생들이 점점 늘어났다. 수준도 높고 소명의식이 있는 학생들이 기대 이상으로 많았다. 많은 학생들은 "예전에는 소명을 받았지만, 확신이 없어서 결단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분들이 나를 추천했다는 말을 들으니 용기가 나는군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정착됐고 타 학교들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학교가 나날이 발전하는 동안, 내 나이는 어느새 50세에 가까워져 갔다. 이젠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일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치 누가 나를 집어서 물 속에 던져 넣은 것처럼 빠져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느라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생각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일도 많았지만 남편 교회 목회도 너무 돕고 싶어 최선을 다해 참여하다 보니 다른 교수들이 생생하게 출근하는 월요일에 나는 파김치가 되어 학교로 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측과 의논을 했다. "나흘은 일하고 하루는 쉬고 싶다"고. 총장은 그런 나에게 "원하면 해줄 수는 있는데 아마 당신은 월급은 4일치 받고 일은 5일치 할 거다"라며 만류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7) 총장의 신학교 세계화 제안에 왜 또 저죠

 

나는 지금 총장과 이전부터 함께 일해왔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 현 총장이 총장 선거에 나가기 전 나에게 입후보 여부를 물었다. 나는 "안 하겠다"고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선거에 나가는 건 어떻겠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당신이라면 정말 잘할 거다. 내가 전적으로 지원하겠노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현 총장을 전임 총장 밑에서 20년 동안 훈련받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총장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총장이 됐을 때 나는 말했다. "당신을 잘 돕고 싶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부분을 내가 돕고 싶다. 당신이 원한다면, 남들이 총장에게 감히 못하는 말들을 내가 당신에게 직접 하겠다. 대신 당신도 나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솔직히 얘기해달라"고.

 

우리의 파트너십은 그렇게 맺어졌다. 그 언약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느 날 총장은 내게 "10년 후, 20년 후에도 우리 신학교가 리딩 신학교로 남아 있으려면 뭘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생각을 안해봤는데 총장님이 생각이 있으신 것 같으니 말씀해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신 부총장이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을 해보세요"라고 했고,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하라는 말씀인가요"라고 되물었다. "그건 나도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그걸 바로 부총장님이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지금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제부터 이 일에 전념해 주세요."

 

또 새로운 과제다. 당장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왜 또 저죠"였다. 총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당신이 거기에 특별한 소명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라고 신중하게 대답해줬다.

 

당시 세계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신학교는 거의 없었다.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왜 또 나일까요, 하나님?' 난 세계화도, 선교에 대해서도 관심 없었다. '아는 것도 없고, 이 일을 맡으면 세계 곳곳을 다녀야 할텐데 가족과 남편, 교회는 어찌 해야 하나요,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그때 어린 시절 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를 다닐 즈음, 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목사가 될 생각이 아니었으니 의료 선교를 생각했지 싶다. 의대를 갈까 했지만 시체 해부 얘길 듣고 무서워서 마음을 바꿨던 기억도 났다.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내 꿈을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안 잊어버리셨구나. 그간은 준비 과정이었구나.'

 

만일 한국에만 있었다면 목사 안수도 받지 못했을 나를 미국까지 와서 안수 받게 하시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하시더니 신학교에서는 공동체 학장직을 맡겨주셔서 다른 교수들과 신뢰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시고, 또 부총장이 되게 하시어 전국의 교회들과 관계를 맺게 하시더니, 이제는 세계로 내보내시려는구나.

 

이날이 11월11일, 한국에서는 11월12일, 내가 50세 되는 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일단 배워야 했다. 도대체 지구촌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미연합감리교 총회가 열리는 장소에도 갔다. 그곳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감독님들에게 우리 학교가 추진하려는 일의 취지를 밝히고,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8) 목회자 기근 남미 등에 신학교수 파송

 

아프리카 감독님들이 반색하며 답을 해줬다. "아프리카에는 목회자가 모자라 목사 한 명이 교회를 13∼15개씩 맡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목사들이 과로해 빨리 병에 걸리거나 빨리 죽고요. 거기다 제대로 된 신학교가 없어 목회자 수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을 미국 신학대에 보내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우리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습니다. 웨슬리신학교가 도와준다면 정말 큰 힘이 되겠습니다."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간은 '세계 선교를 교회도 아닌 신학교가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쪽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아무리 씨를 뿌려도 현지 목회자 양성이 안 되면 그 씨들이 자라고 열매 맺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 교육과 양성은 교회나 선교 단체가 하기 어렵고 꼭 신학교가 해야 할 부분이었다.

 

당시 필립 젠킨스가 쓴 '더 넥스트 크리스텐덤'이라는 책자에는 2025년이 되면 기독교인의 과반수가 적도 남쪽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의했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기독교 인구는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유럽은 줄어들고 있으며, 북미는 소폭의 증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 수급률은 전 세계 목회자의 3분의 2가 전 세계 기독교인의 3분의 1을 섬기고 있다고 했다. 기독교가 줄거나 늘지 않는 지역에는 너무나 많은 목회자가 있는 반면 기독교가 급증하는 곳에는 목회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선교지에서는 신학과 교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고 있어 과연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모를 형편이었다.

 

교수 회의 때 이 문제를 언급했다.

 

우리 교수들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세계를 다니기 시작했다. 현지에 직접 가서 목회자 양성이 시급한 곳을 찾아냈다. 그곳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고 교수들을 '파송'하면서 변화를 만들어나갔다.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얘기다. 백인 교수 한 명과 한국인 목사 2명과 함께 갔다. 카자흐스탄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기 때문에 인접 국가인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서 함께 교육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쓴다. 통역이 쉬는 시간에는 우리들끼리 앉아 러시아어, 한국어, 영어를 총동원해 대화를 나눴다. 공식적으로 예배가 금지되어 있기에 매번 예배 처소를 옮긴다는 우즈베키스탄 사람의 말을 우리 미국인 교수가 들었다.

 

"만약 걸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는 되물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고려인에게 러시아 말로, 고려인이 내게 다시 한국말로, 내가 우리 교수에게 마지막으로 영어로 전해준 답은 "걸리면 매 맞기를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통역이 잘못된 줄 알고 다시 묻는 우리에게 돌아온 대답은 "경찰한테 잡히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일자리를 잃게 되는데 어떤 때는 매를 때려 훈방하기 때문에 잡히면 매 맞기를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먹고 살아야 하니 감옥에 가느니 매를 맞더라도 훈방되는 게 낫다는 말이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29) 멕시코 신학대와 담판 오지에 분교 설립

 

미국인 교수가 생각이 많아졌는지 말이 없어졌다. 학생들은 하루 종일 강의를 듣고도 모자라 저녁식사 후에는 자기들끼리 모여 러시아 말로 두 시간씩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이후 그 교수는 매일 저녁 그 예배에 참여해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서도 은혜를 나누곤 했다. 그 교수는 나중에 우리 교수회의에서 자기의 경험을 나눴다. "아직도 세상에 이런 곳이 있습니다."

 

우리 교수들은 이렇게 현지 상황을 직접 접하면서 글로벌라이제이션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리고 내가 지구촌 어느 곳이든 가서 강의를 해달라고 하면 흔쾌히 짐을 꾸려 해당 국가로 이동했다.

 

사실 미국에서 강의하면 우리 교수들은 한 주일에 4000달러는 받는다. 그런데 전혀 사례비 없이, 샤워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 가서 기꺼이 가르치는 우리 교수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가 선교지를 위해 만들려고 하는 프로그램들은 미국 교수들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것들인데도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잘 따라준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과 17년간 좋은 관계를 맺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일을 위해서인 것 같다.

 

한 번은 멕시코 유카탄이라는 곳을 갔다. 마야 후손이 사는 지역이다. 마야 후손은 멕시코인들에게도 차별받는 소수민족이다. 이곳에 한국 선교사 한 분이 회중모임을 여러 곳에 만들어 놓았는데, 그들을 위한 지도자 교육이 시급해지자 미국의 한인 교회 목사님들에게 부탁해 1년에 두차례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지원자들에게 회중모임을 위한 지도자로서 교육을 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기존 교회 교단 목사로서 안수를 못 받기 때문에 목회가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목회를 그만둘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교육하던 동료 목회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안수를 줘 교단에 확실하게 소속시킬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멕시코에도 감리교가 있다. 그런데 그곳 감독은 현지 선교사가 부탁을 해도 유카탄 지역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감리교신학교 총장과 학장에게 연락해 멕시코 감독과 같이 만나자고 요청했다. 이런 때엔 내가 미국 신학교 부총장인 것이 유리했다.

 

교단 감독님에게 말했다. "지금 유카탄에 13개 교회가 생기고 13명이 목회자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들이 어떻게 안수를 받아 감리교단에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감독은 "정규 신학교를 나와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유카탄에서 멕시코시티에 있는 감리교 정규 신학교를 다니려면 차로 25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비행기는 너무 비싸 감독조차 타고 다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번엔 학장에게 물었다. "혹시 분교 만들 생각 없으세요?" 학장은 "분교는 만들 수 있지만 교수가 없어요. 풀타임 교수는 저 혼자뿐이고 나머지는 동네 목사님들이십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만약 우리 웨슬리에서 교수진을 보내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운영한다면 졸업장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학장은 쾌히 승락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카탄 분교 교수진은 전부 미국의 박사들이고 자기네 학교는 지금 그대로라면 누가 본원에 오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일리가 있다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본토에서 오는 학생은 안 받겠습니다." 새로운 비전이 보였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30) 中美 유카탄에 신학교 세우자 주님 살아계시다 감동

 

유카탄은 중앙아메리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지역이다. 온두라스 과테말라 등 가난하고 신학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한 중심에 있다. 이 신학교가 세워지면 유카탄 지역주민뿐 아니라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사람들까지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장의 "그렇다면 좋습니다. 해보지요"라는 말과 함께 유카탄 분원 설립이 추진됐다.

 

나는 학교로 돌아와 이사회를 조직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목회도 훌륭히 잘하며 신학자로서의 자격도 정규교수 못지않은 분들로 10명의 이사를 초빙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4년 동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에서 가장 바쁘게 선교 사역을 하는 분들이지만 모두 기꺼이 동참했다.

 

2006년 유카탄 감리교신학교가 세워졌다. 개교식날 우리 대학 총장과 멕시코시티 감리교신학교 학장, 멕시코감리교 감독이 유카탄 분교에 왔다.

 

우리 학교 총장님이 첫 강의를 맡았다. 리더십에 대한 강의였다. 다음 멕시코시티 감리교신학교 학장이 신약 입문을 가르쳤다. 개교식에 참여한 주민 한 분이 통역을 통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분명 살아계십니다. 아니면 어떻게 미국의 수도에 있는 신학교 총장과 부총장이 이곳까지 와서 우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벌써 4년여가 흘렀다. 오는 6월 유카탄 신학교 학생들이 학사모를 쓴다. 그리고 유카탄 신학교 이사회는 이제 그 지경을 넓히기로 해 중남미 웨슬리신학교 이사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다양한 형태의 현지인 목회자 양성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나는 요즘 대륙마다, 나라마다 다니며 현지 상황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있다.

 

처음엔 '현지인 목회자 양성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테러, 학살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와 관련된 분쟁임을 보게 되고, 국가와 민족 종교의 문제에도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방법으로 사역이 영향을 끼치는 경험을 하게 됐다. 이를 보며 다시 한번 느낀다. '계획은 내가 해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어릴 때 그렇게 약했던 내가 엄청난 여행을 소화해내고, 또 돌아오면 다음날로 사무실에 출근해 일하는 것을 보고 나를 잘 아는 주위 분들이 이렇게 놀린다.

 

"세계에 7대 불가사의가 있었는데, 여기 8대 불가사의가 있네요."

 

웨슬리 신학대학원 총장도 '일 중독'으로 알려진 분이고, 나보다 체격이 두 배나 큰데도 같이 여행하게 되면 제발 자신에 맞춰 '살살'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우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원해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 여러 의사 선생님들, 출장에서 돌아가면 몸에 좋다는 것 다 해 먹이는 워싱턴 감리교회 교인들, 우리 교회 중보기도팀을 비롯해 잊지 않고 기도해주시는 많은 분 덕분이다.

 

이들의 보살핌에 나는 밤 늦게까지 글을 쓰고도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긴 출장을 떠날 수 있다. 또 이러한 나에게 없어선 안될 분 가운데 나의 엄마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돌봐주시는 도고중앙교회 이건열 목사님 내외와 교인들이 있다. 이분들이 아니면 난 도저히 지금처럼 일할 수 없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신경림 (31·끝) 바위도 변화시키는 시냇물 힘 굳게 믿어

 

지난 가을 매우 소중한, 하나님의 보너스와 같은 은혜를 체험하게 됐다.

 

연세대학교로부터 한 학기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웨슬리 신학교 일도 있고, 가족도 있고, 남편 교회 일도 있어서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초청을 받고 보니 받아들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엄마 생각이 나서다. 지금 92세. 혼자 살고 계신다.

 

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으며, 아직도 내가 중요한 강의나 설교를 하는 시간에 꼭 깨어서 기도해주시는 엄마. 이젠 연로하셔서 언제 어떻게 되실지 몰라 늘 불안했다. 결혼 후 한 번도 곁에 살지 못해 한이 됐는데 만일 내가 이 초청을 받아들인다면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웨슬리 신학대학원에서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나의 한국행을 받아들였다. 남편 교회인 워싱턴 감리교회 교인들은 "어머님 때문이라면 우리가 양보해야지요"라고 이해해줬다. 아이들은 "우리가 아빠 돌볼게"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결혼한 뒤 한국에서도 살았지만, 한 번도 추석에 친정에 가지 못했다. 32년 만에 찾아갔을 때 엄마는 "내 평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라고 하시며, 기차역까지 굳이 따라 나오셨다. 극구 말리는 나와 택시기사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얘는 이 역에서 어떻게 기차 타는지 몰라요. 내가 태워줘야 돼요."

 

한국에서의 시간은 내게 정말 특별했다. 강화와 강릉 등 조국의 바닷가를 찾아가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었고, 내 조국을 맡아 줄 젊은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격려하고 도전하고 도전받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을 선물로 주신 연세대학교에 깊이 감사드린다. 모교인 감신대에서는 총여학생회가 '닮고 싶은 자랑스런 선배에게 주는 상'을 처음으로 만들어 나에게 줬다. 큰 감격과 책임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제발 좋은 선배가 돼 달라는 부탁일 테니까.

 

언젠가부터인지 나는 큰 장애물에 부딛히면 시냇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커다란 바위에 비해 시냇물은 한없이 약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바위에 시냇물은 맞서지 않고 조용히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흐르며 자기의 길을 가서 마침내 바다,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시냇물은 작은 힘이지만 결국은 바위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그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그러나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왜? 우리 엄마가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뒤 딸을 낳아 고민하다가 "자신은 어찌 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실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기로 했다"고 하셨던 것처럼…. 나도 하나님이 아실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상민이, 예지, 사위인 마이클과 며느리 코니,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걱정 하지마. 다 알지 못해도 괜찮아. 하나님이 아시니까."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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