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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128. [역경의 열매] 박수진 (1-13) "전 지구의 76% 바닷길 통해 복음을 전파하라"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8.29|조회수108 목록 댓글 0



***간증: 1128. [역경의 열매] 박수진 (1-13) "전 지구의 76% 바닷길 통해 복음을 전파하라"

 

'쾅, 쾅, 쾅.' 발칸포의 일종인 케리바공 소리가 바다를 뒤흔들었다. 해적들이었다. 이들은 비행기를 잡는다는 발칸포를 갖고 다니면서 지나는 배를 위협했다.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 곧이어 배의 곳곳에서 군화소리가 들렸다. 순간 해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차림새가 좀 이상했다. 총을 들고 있긴 했지만 멀쩡하고 깨끗했다. 좀 어색했다. 그들 중 하나가 총을 들이대며 물었다.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냐. 이 배는 무슨 배냐."

 

당시만 해도 우리는 선교하는 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서둘러 둘러댔다. "젊은 사람들을 태워서 교육하는 배예요."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곤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이 배에는 선원 말고도 여성과 어린 아이들도 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냐"며 캐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해적과 똑같이 변장한 말레이시아 해양경찰이었다. 자신들은 해적선을 쫓고 있는데 사흘 전부터 우리 배를 발견하고 미행했다고 한다. 배에 아이와 여성들도 많이 타고 있어서 수상쩍었다는 것이다. 경찰 책임자는 "당신들 이렇게 가면 큰일 난다. 그냥 가다간 해적의 밥이 된다"면서 자신들이 보호해 주겠노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선교선(船), 한나호는 말레이시아에서 필리핀 해역까지 경찰의 든든한 칸보이를 받으며 안전하게 도착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나는 그때 하나님이 반드시 돕는다고 확신했다.

 

1988년 시작된 아시아 최초의 선교선 한나호는 현재 순항 중이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팔라우 한국 등 6개국 출신 50여명의 선원과 단기선교사들이 탑승해 의료봉사와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사업가, 회사원, 학생, 신학생,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한 번 배에 오르면 2∼3년 동안 봉사활동을 펼친다.

 

각자의 전공과 경험을 되살려 기관실과 진료실, 학교, 세탁실, 취사실 등에 배치돼 '선상 공동체'를 이루면서 문화 전도사로 활약한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변화되고 있다.

 

길이 73.6m, 폭 12.6m, 순항속도 10노트인 한나호는 정박하는 곳마다 열매를 맺었다. 팔라우공화국에서는 6개월 동안 650명이 예수를 영접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40명의 현지 선교사를 양성해 파송했고,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얍 등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특히 지난 20년 동안 배를 탔던 1000여명의 봉사자들 중엔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 사람들이 많다.

 

현대 선교에서 배를 이용하는 것은 구식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의 76%가 바다로 구성돼 있고 지구촌의 4분의 3은 선박을 이용해 어디든 갈 수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배는 여전히 유용하다. 한나호는 단순히 의료선이나 선교선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 배는 기도와 예배가 있는 신앙훈련소이자 현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단체, 그리고 육체적 고통을 겪는 현지인을 위한 병원이다.

 

그동안 한나호는 수많은 일을 겪었다. 태풍과 해적의 위험, 공동생활로 인한 내부적 갈등, 지도력의 문제, 기관의 고장, 선원 선교사들의 부족 등으로 아픔과 상처를 겪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더 강인한 주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한 특수훈련 과정이었다.

 

다음 달이면 한나호가 한국에 입항한다. 그리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아프리카를 위한 항해를 시작하려고 한다. 주님의 도우심과 기도가 필요하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수진 (1) "전 지구의 76% 바닷길 통해 복음을 전파하라"

* [역경의 열매] 박수진 (2) 1989년 첫 출항… 선교사 30명 빨간 글씨 유언장을

* [역경의 열매] 박수진 (3) 첫 출항 11개월 준비… 시행착오로 연기만 다섯번

* [역경의 열매] 박수진 (4) 10일간의 첫 항해… 초보선원들 배멀미와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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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수진 (13·끝) "한나호와 선교지에서 삶을 마칠 수 있게 하소서"

 

◇박수진 대표 약력=1953년 서울 출생, 합동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 Div.), 미국 리버티신학교 신학석사(Th. M.), 국제오엠선교회 둘로스호 승선, 한나호 대표

 

***[역경의 열매] 박수진 (2) 1989년 첫 출항… 선교사 30명 빨간 글씨 유언장을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집회. 당시 나는 선교가 뭔지도 모른 채 선교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정확하게 4년 뒤 주님은 일대일 면담하듯 선교사로 부르시고 배를 타고 선교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이후 '임마누엘'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었고 여름과 겨울, 무교회 지역과 미자립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배 선교에 대한 기도제목을 계속 나눴다.

 

성경 공부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 그중에 '한나성경공부팀'으로 불렸던 6명의 권사님들은 말씀으로 삶이 변화됐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뜨거운 기도를 드렸고 나중엔 한나호의 기도 후원자가 되어 오늘까지 동남아의 수백명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한나호의 기도 어머니들이 됐다.

 

"만약 배를 주시면 배 이름을 한나호로 명명하겠습니다." 당시 한나성경공부팀의 기도였다. 기도로 얻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어머니 한나처럼 이분들은 배를 달라고 기도했던 나와 동료들의 기도를 함께 드렸다. 나는 84년을 기점으로 해외 선교에 참가했다. 국제오엠선교회의 둘로스호를 타게 됐고 4년간 선교활동의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88년 선교합창단으로 전환된 한나성경공부팀은 선교사 위문차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가게 됐다. 이때 몇몇 선교사들이 그곳에 모였고 배 사역의 비전을 나누게 됐다. 그런데 라스팔마스한인교회 성도였던 명두식 집사님이 선교선을 한 척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전남의 섬마을에서 자랐다는 명 집사는 만약 자신이 사업에 성공하면 섬 주민들을 돕는 배를 헌금하겠다고 옛날부터 서원했다는 것이다. 우리 얘기를 가만히 듣던 명 집사는 그 길로 일본으로 떠났고 얼마 후 30년 된 300t급 어선실습선을 구입했다. 10년 기도제목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배를 타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선원이 필요했다. 한나호에 형제들이 자원했는데 상당수가 선원선교회를 통해 훈련받은 고급 선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또 한번 실감했다. 또 중보기도의 후원자들도 만났는데 이로써 한나호의 최종 감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나호는 이렇게 해서 준비를 끝냈고 89년 6월 한나선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8월 10일 한국 선교사상 최초로 선박을 이용해 30명의 선교사가 부산항을 출발, 힘찬 뱃고동을 울렸다.

 

첫 출항 당시 배를 찾아오신 목사님들의 말씀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중 고신대 학장이었던 전호진 교수는 이런 말씀을 주셨다. "여러분은 감격스러운 세대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세대의 과업은 교회 설립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세계 선교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후진국형 인력 파송 중심의 선교에서 벗어나 한나호를 통해 인력과 기술, 장비와 팀워크로 선진국형 선교로 전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 저녁 30명의 선교사들은 첫 출항의 긴장과 긴 항해를 앞두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주님. 이번 첫 항해에서 사역을 못하고 죽을지라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감사함으로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의 정신이라도 살아서 한국교회에 계속 선교의 불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는 각자의 손으로 쓴 빨간 글씨의 유언장을 돌아가면서 낭독했다. 눈물바다였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우리의 후원자들을 잊어버리기로 작정하면서 죽음을 넘어선 감격을 체험했다. 그렇게 한나호는 기쁨 속에서 시작됐다.

 

이 유언장 작성은 그후 한나호의 전통이 됐다. 지금도 한나호에 승선하는 모든 봉사자들은 헌신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데 헌신서에는 '죽음을 넘어 순교할지라도 주님께 영광'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3) 첫 출항 11개월 준비… 시행착오로 연기만 다섯번

 

한나호는 출항에 앞서 부산 남항에서 11개월을 준비했다. 그때 무수한 실수를 만들어 냈는데 출항 연기만 다섯 번을 했다. 예상치 못한 기관 고장으로 연기됐고 법무부 출입국관리소는 한나호를 상선으로 오인해 선원 6명을 제외한 내국인 24명이 여권만 갖고 출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출항허가서를 내주지 않았다. 또 선장 기관사 항해사 등 법으로 규정된 선원 수를 채우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재정적인 이유로도 섣불리 출항할 수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선원 선교사가 부족해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는데 며칠 후 마지막 남은 기관사 형제 한 명이 자신은 다른 상선에 취직했다며 기도를 부탁해 왔다. 출항은 영영 못할 것 같았다. 낙심은 극에 달했지만 주야로 기도하면서 출항을 고대했다.

 

만약 누군가 선교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주님의 뜻을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이라고. 부산에서의 11개월은 '우리의 선교'가 아니라 '주님의 선교'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속히 보내소서' 기도했지만 주님은 문제만 던져주셨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기도 후원자를 만났고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을 받았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한나호에 승선했다. 주님은 큰 복을 주려고 인도하고 계셨는데 우리는 빨리 나가고 싶어 안달했다. 주님은 계속 문제를 던지면서 출항보다 더 중요한 기도와 훈련을 쌓도록 하셨다. 한나호의 핵심 선교 철학도 여기서 시작됐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계획해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사도바울도 선교 사역에서 철저히 주님과 교제했다. 그는 기도하는 장소를 찾으러 가던 중에 루디아를 만났고 기도하는 곳을 찾다가 귀신이 괴롭게 쫓아 왔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내었고 감옥에서도 기도했다.

 

선교사가 되기 이전에 먼저 기도자, 예배자, 찬양자가 되는 것. 이것이 한나호 선교사들에게 제일 먼저 도전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선교 사역의 최대 적은 사단이 아니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은 이미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완패했다. 상황이나 환경도 아니다. 어려운 상황과 혹독한 압제 밑에서도 복음의 역사는 왕성하게 퍼져나갔다.

 

기독교 최대의 적은 교회 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지적처럼 선교의 최대 적은 사단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지 못한 선교사 자신이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한나호는 개인전도를 강조한다. 사도행전 16장을 보자.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와 찬양을 드릴 때 주님은 기적을 베푸셨다.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문이 열렸고 죄인들의 쇠사슬이 벗겨졌다. 어쩌면 이때야말로 대중 집회의 최고 찬스인지도 모른다. 모든 죄인을 불러서 예수를 믿게 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날 밤 예수를 믿은 것은 간수 한 명이었다.

 

한나호 선교사들은 다수보다 소수, 소수보다 진리를 택하는 개인 전도자가 되기 위한 훈련에 매진한다. 현재 한나호 김윤기 선장은 연세가 팔순이 되셨는데 대만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팔라우 말레이시아에서 지난 4년간 2000여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나호는 현지 교회와 연합한다. 독자적 활동 대신 반드시 현지 교단과 목회자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야 효율적인 선교가 되기 때문이다. 현지의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부족한 곳에 힘을 쏟았다. 목회자가 없는 마을에 전도 집회를 열었고 교회당이 없는 곳에 교회를 세웠고 현지인 지도자가 없는 교회에 현지인을 훈련시켜 파송했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4) 10일간의 첫 항해… 초보선원들 배멀미와 전쟁을

 

싱가포르까지 열흘간의 첫 항해는 선교사 모두를 배 타는 재미에 빠지게 했다. 돌고래가 배와 헤엄쳤고 칠흑 같은 밤에 레이더에 의존해 항해하는 것이 신기했다. 망망대해에서 만난 상선을 무전기로 교신할 때는 즐거웠고 식당 봉사자 전원이 뱃멀미를 하는 통에 형제들이 급히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바다 위의 10일은 너무 길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해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전도팀을 파송했다. 배는 다시 인도네시아 바탐섬으로 기수를 돌렸다. 바탐섬에 도착하자 싱가포르 출신 두 자매와 말레이시아 출신 봉사자 5명이 배에 올라 한나호 공동체의 일원이 됐다. 그때부터 한나호의 공식 언어는 영어가 됐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 한나호가 도착할 때면 어김없이 종교경찰과 출입국관리소의 감시 대상이 됐다. 나는 아침마다 호출을 당했다. 그리고는 똑같은 질문을 들어야 했다. "뭐하는 배냐" "왜 들어온 거냐." 심지어 "당신은 선장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인사를 하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스트레스와 긴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하루 빨리 항구를 떠나고 싶었다.

 

하루는 존 라시라는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신문(?)을 당했다. 똑같은 질문에 싫증이 났던 나는 그의 이름을 듣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답만 하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 이름은 존이냐." 그는 약간 놀라더니 "증조부가 크리스천이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증조부를 기억하냐"고 물었고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다.

 

존에 따르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국립대 법대를 나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볼 만한 책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분위기도 훈훈해졌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와 샌드위치까지 직접 내놓았고 관심을 보였다. 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존, 한 마디 해도 되겠는가. 이 참에 확실한 무슬림이 되든지, 아니면 증조부처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어떨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좀 더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전도지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미화 1달러짜리가 나왔다.

 

지폐에 씌어진 'IN GOD WE TRUST'를 보여줬고 기독교와 복음을 설명했다. 얼마의 침묵이 이어졌다. 불안했다. 이러다 쫓겨나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존은 웃으며 일어났고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요청했다. 그리고는 30명 선원의 여권을 돌려주면서 "싱가포르까지 안전한 항해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힘껏 포옹했다.

 

바로 그날 존 라시는 다음 항구인 탄중피낭의 출입국관리소장에게 '한나호는 기독교 선교선이니 입항과 동시에 추방시키라'는 공식서한을 보냈다. 이후 존 라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한나호의 30명 형제자매는 수개월간 기도했다.

 

한나호는 탄중피낭으로 가지 않고 싱가포르를 거쳐 동말레이시아의 두 항구 도시로 향했다. 교회들을 찾아 간증과 선교집회를 열었고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순수 한국인들의 배였던 한나호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사람이 추가되면서 아시아의 선교선으로 변신했다.

 

한나호는 마닐라에서 교회 개척을 위해 활동하다 피나투보 화산 폭발의 충격으로 배가 뜨면서 부두에 부딪치는 바람에 우현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선박수리를 위해 한국으로 잠시 들어오게 됐다.

 

이후 사이판으로 재출항했고 전도가 가장 어렵다는 팔라우공화국으로 향했다. 팔라우공화국은 그동안 방문했던 나라들과는 환경이 판이했다. 너무 생소해 정말 선교지에 온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5) 팔라우서 선교영웅 대접… 그러나 갑자기 두통이

 

서태평양의 팔라우공화국은 인구 2만명에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나라다. 2차대전 당시 팔라우 섬 중의 하나인 페릴류는 일본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전투했던 장소로 수천 명이 죽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 노무자들이 만든 다리도 남아 있었다. 이 다리는 '아이고 브리지'라고 전해지는데 당시 팔라우 원주민들이 한국인으로부터 들었던 소리가 "아이고 아이고"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팔라우 현지 복음교단 찰스 목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주변의 많은 섬나라를 찾아갈 수 있었다. 얍, 이율리픽, 올레아이, 그리고 축섬 등이었다.

 

1993년 팔라우공화국에 한나호가 들어가자 팔라우 정부는 우리 배를 이용하자고 제안해 왔다. 선거를 앞두고 섬 전체를 둘러보자는 취지였다. 덕분에(?) 연료를 무상으로 공급받았고 팔라우의 섬들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의료와 구제, 복음전파 사역을 벌였다. 점차 팔라우 사역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대통령궁에도 초대받았고 필요하면 언제든 대지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대통령 비서실장과는 언제든 통화할 수 있었고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과는 아침식사도 했다. 정말 선교의 모든 꿈들이 이뤄져가고 있었다. 갑자기 선교의 영웅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는 허전했다. 다시 생각해봤다. 주님은 분명히 팔라우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싶으신데 무엇이 문제일까. 한나호에 승선한 게으른 형제들이 떠올랐다. 저들만 변화되면 한나호의 위상은 더 높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다. 주님은 나의 변화를 원하셨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예배를 인도하다 중단해야 했다. 갑자기 현기증과 두통이 몰려왔고 가슴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이윽고 내가 방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을 알았지만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순간 '이렇게 천국에 가는구나' 생각했다.

 

한나호 형제들에게 인사를 못한 게 아쉬웠다. 선장님과 기관장님 등에게도 미안했다. 다른 상선에 탔더라면 매달 수천 달러를 받으셨을 분들인데 한나호에서 고생만 하신 것 같아 죄송했다. 아내에게는 사랑 표현도 못하고 떠나는가 싶었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고 후회가 몰려왔다. 나의 뇌리에는 마치 10개 이상의 TV를 동시에 보는 것처럼 과거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청년 때의 방황과 부르심의 감격, 선교사로 헌신한 뒤 매일 기도하는 모습, 후원자들과 기도 동역자들, 그리고 홀어머님.

 

하지만 천군천사는 오지 않았다.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천국 가는 것도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적극적이어야 하는 줄 알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천군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의 장례식이 보였다. 신학교 동문들이 찾아와 "신학교 때부터 배, 배 하더니 배에서 죽었네, 박 선교사"하며 슬퍼했다. 후원자들이 와서 우셨고 큰형님과 어머니도 보였다.

 

그런데 장례식에는 한나호에서 온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 단장! 나는 당신을 대표로는 인정하지만 목사나 선교사로는 인정 못해. 당신은 사랑이 없는 선교사야."

 

나와 함께 생애를 걸고 선교사로 나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는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기도가 나왔다. "주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잘할게요." 애타는 절망 속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수진아, 천국은 말이야 사랑으로 한 것만 계산된단다."

 

"예? 사랑이요? 난 열심히 배를 가지고 죽기 살기로 했는데요." 그리곤 깨어났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6) 더 멀리 더 큰 선교 위해 1800t급 한나2호 출항

 

한나호 사역을 시작한 지 2년. 우리는 더 큰 배에 대한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선령(船齡) 30년이 넘은 배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엔진만 정비하면 10년은 더 쓸 수 있다고 했다. 1995년 한나호는 이를 받아들여 좌현 엔진 등을 교체하면서 새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큰 배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했다. 결국 5년 뒤 우리는 일본 기상청에 속한 1860t급의 4800마력 엔진을 장착한 지금의 한나2호를 맞이했다. 한나2호 구매를 위해 헌금한 수많은 후원자들의 열매이자 한국교회의 축복이었다.

 

한나2호는 통영에서 내부 수리를 거친 뒤 도쿄와 고베로 향했다. 60명의 선교사가 일본의 중심인 도쿄 하루미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당시 선교활동 중에 우리는 영화 '야쿠자의 아내들(JESUS IS MY BOSS)'로 알려진 나카시마 형제를 만났다.

 

한나호 선상에서 두 번이나 그의 영화를 상영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찾아왔고 영화 상영 후 그의 간증도 이어졌다. 나카시마 부인은 한국인으로 핍박 속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나카시마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나카시마교회는 한나호 사역자들을 초청해 간증집회를 열기도 했다.

 

한나호는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다. 고베에서는 지진으로 얼룩진 모습이 아직도 성도들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교회를 찾아다니며 한나호 사역을 알렸고 민족적 감정을 초월해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일본인들을 만났다.

 

고베에서 활동하는 한인 선교사들은 매일 아침 한나호를 방문해 사역현장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들이 묵상한 말씀을 나눴다. 일본인 목회자들도 말씀을 전하러 왔는데 그 기쁨은 컸다. 특히 다루미복음교회 마쓰시타 목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아침 경건회 때였다. 자신의 허름한 기타를 가져와 찬송을 부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기타는 성도 한 명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가져와 제게 선물한 것입니다. 제가 수리를 했는데 겉모양은 상처가 났지만 소리는 아름답게 됐습니다. 사실은 이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저는 고베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교회 건물이 다 훼손되어 6개월간 목회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낙심하고 도망갔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도님들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기타처럼 다시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간증 설교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일본 사역을 뒤로한 채 우리는 다시 남태평양 사역을 위해 사이판으로 항해했다. 사이판에서는 10일간 조선족을 위한 특별예배를 드렸다. 특별 집회에는 찬양 사역자 최인혁 전도사와 송정미 사모가 함께했다. 이들은 한나호가 사역하는 곳마다 찾아와 도왔다.

 

서울에서 날아온 최 전도사는 열정적으로 찬양을 인도했다. 찬양에는 꽹과리와 징, 북이 동원됐다. 또 현지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미국인 형제 하나가 매일매일 다른 악기를 가지고 협연까지 했다. 집회는 조선족 동포와 한족이 얼싸안고 하나가 되는 장면이 연출됐다. 송 사모는 콘서트처럼 우아함과 품위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서 열창하면서 배 위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이판에서는 조선족과 한족을 위한 한방 의료 사역을 펼쳤다. 아침부터 환자들이 줄을 이었고 저녁에는 찬양 집회가 계속됐다. 일과 후에는 조선족 근로 여성들이 몰리면서 한나호는 매일 북적였다.

 

사이판을 거쳐 우리는 얍에서 2주간 활동했다. 치과와 한방 사역을 했으며 많은 한족들을 만났다. 우리는 그들에게 선교 영화를 보여줬고 무료 진료를 통해 원주민들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7) 산호초에 좌초 침몰 위기… 기도·찬송에 배가 쏙∼

 

우리는 팔라우공화국으로 다시 향하면서 기대에 부풀었다. 팔라우는 네 번째 방문이었고 한나2호로는 첫 사역이었기 때문에 감사와 자부심이 넘쳤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팔라우 정부의 후원과 협조를 받았고 원주민 100명과 한나호 선교사 60명은 팔라우 남서쪽의 5개 섬 순회 사역에 나섰다.

 

2001년 10월 17일 우리는 주민 3명이 살고 있는 메릴이란 섬을 방문해 그들에게 생필품과 의약품을 전달했다. 그러던 오후 6시쯤 갑자기 한나호가 산호에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체 바닥은 산호에 올라와 있었고 배는 조금씩 기울어졌다.

 

배 뒷부분에 있던 원주민 중 몇 명은 바다에 빠지며 아우성이 선내에 요동쳤고 타이타닉호의 최후의 순간이 뇌리를 스쳤다. 선교(배)에 올라보니 선장과 항해사가 다급히 외쳤고 배는 좌현 엔진을 사용해 후진하려 했지만 프로펠러가 깨지는 굉음과 함께 기관이 정지됐다. 배는 더욱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우현 엔진을 사용해 배를 후진시켜보는 것이었다. 만약 우현쪽 프로펠러가 산호에 부딪치면 선장은 퇴선 명령을 내릴 것이다. 굳은 표정의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캐빈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긴 옷과 구명 재킷을 입히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예수님 믿지? 만일 배가 더 기울어져 퇴선명령이 떨어지면 물에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힘껏 헤엄을 쳐서 배에서 멀리 벗어나라. 만약 우리가 못 만나면 천국에서 보자."

 

아내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도했다. 선내의 모든 형제들은 이렇게 구명 재킷을 입고 혹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하며 두려움 속에서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배가 움직였다. 항해 당직자가 외쳤다. "2노트로 후진하고 있습니다. 이제 3노트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었다. 혹시 측면 바람이라도 불면 한나호는 다시 산호초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한나호는 계속 낮은 속력으로 후진을 계속했고 마침내 산호초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한나호는 최고의 여객선에나 장착되는 두 대의 엔진과 두 대의 프로펠러가 있는 선박이었다. 그 사실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불안함과 긴장 속에 한 대의 프로펠러로 나머지 3개 섬을 순방했고 선교 사역을 마치고 본토로 돌아왔다.

 

당시 프로펠러 고장으로 주 엔진도 수리를 해야 했다. 한나호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프로펠러 수리는 가능한지 그리고 수리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선장과 기관장이 없는 배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절망에 빠지게 했다. 이들은 사고 책임을 지고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 당시 팔라우에는 대우건설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중이었는데 수천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베트남 노동자 180명 중 20명이 예수를 영접하게 됐고 우린 의료팀을 보내 또 다른 국적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5개월을 전도해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 방글라데시인 인도인 조선족 중국인 등 600여명이 예수를 믿었다.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기적이 이어졌지만 나는 한나호를 보면서 '주님, 왜 그때 저를 살려주셨나요. 배가 가라앉았다면 모두들 천국에 가거나 고향으로 돌아갔을 텐데요'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2002년 신년 1주일은 신약성경 독파를 목표로 배에서 보냈다. 상륙 금지와 외부인 출입도 통제했다. 아침마다 선장과 기관장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도가 변해 있었다. "주님, 나를 고쳐주세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요." 프로펠러 고장으로 이름만 선교사로 남은 내 모습을 보게 했다. 한나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은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8) 60일 정박비 4만달러… 印尼 대통령 '면제' 특전을

 

한나호가 외국 항구에 입항하기 위해서는 사전조사를 거친다. 현지 항만청에 부두 상태를 확인해야 하고 교계의 반응과 협력도 모색해야 한다. 이를 통해 어떤 사역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체류 일정과 경비 등도 고려한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마나도는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향했다. 현지 목사님이 환영한다는 한 가지 이유로 말이다. 우리는 믿음 반, 모험 반으로 마나도로 향했다. 그런데 항구에 도착하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100명 이상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주하고 있었고 항구에는 한나호 입항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입항 환영식은 예배 자체였다. 60명의 선교사들은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마나도는 기독교 도시였다. 500m마다 교회가 있었고 시청 강당에는 예배당처럼 마태복음 5장 9절이 붙어 있었다. 마나도 시장은 우리들을 초청해 환영식을 했는데 예배 형식으로 진행했다.

 

마나도는 다른 인도네시아 지역과 달리 400년 전 네덜란드에서 복음을 받았다. 이후 핍박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이곳으로 건너왔다. 마나도는 인도네시아 33개 주 가운데 암본과 함께 기독교인이 주지사로 있는 특이한 도시다. 도시 전체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피난처요 산성인 셈이다. 한나호 외부 사역팀은 매일 교회를 다니면서 선교적 삶을 도전했고, 내부사역팀은 의료와 구제 등 선상 사역에 매진했다. 선내는 매일 방문객으로 넘쳐났고 매주 선상에서 열리는 찬양집회는 부흥회처럼 뜨거웠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했고 강대상 앞으로 나와 헌신을 다짐했다. 30명으로 구성된 각 교단의 지도 목사들은 '한나호 사역위원회'를 만들어 도왔다. 그중엔 북술라웨시의 주지사와 부인도 있었다.

 

현지 교회에서는 선교사로 살겠다고 서원하는 젊은이들이 속출했다. 이들은 마치 댐이 무너져 그 안에 모였던 물이 굉음을 내며 터져나오듯 했다. 이들 중 20명이 한나호에 승선해 선교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요한 마남피링이란 현지인 목사는 한나호 출항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 마나도 교회는 400년간 받기만 하는 교회였습니다. 이제 한나호를 통해 우리의 자녀들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인도네시아 기독교 역사가 이들을 통해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 교회도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보내는 교회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은 인도네시아 기독교의 자랑입니다. 향후 3년간 이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와 물질을 아끼지 말고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항에 앞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다. 마나도에서 60일을 정박했는데 정박비가 미화 4만 달러가 나온 것이다. 위원회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사 부인과 이브 포올라 현 시장 부인은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나 호소하기 위해 사흘간 금식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것도 33개 주 중 한 곳에서 발생한 조그마한 선박의 정박세 문제로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기도를 들어주셨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친서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다. 친서는 '한나호의 마나도 정박세를 완전히 면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모두들 긴장하며 기도하던 중 나의 휴대전화에는 이런 메시지가 떴다.

 

'Our God is so powerful! God answered our prayer!(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9) "한나호 쫓아내니 다음날 60년만의 큰 태풍이…"

 

지난 25년간 한나호는 동말레이시아 지역에 6번 입항해 케이케이, 산다칸, 타와우, 쿠닷항 등을 찾았다. 동말레이시아는 사바와 사라왁 2개 주로 구성돼 있고 성공회와 침례교, 감리교 등 여러 교단이 화합을 이루며 성장하고 있다.

 

25년 전 만났던 현지 목사님들은 각 교단 지도자들이 됐고 한나호가 입항할 때마다 찾아와 형제이자 동역자요 친구임을 확인한다. 이들 목회자는 대형교회를 일구어 영어와 중국어, 말레이어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하고 있다.

 

2009년 한나호가 다섯 번째 방문해 사역하던 어느 날, 우리는 성공회 교회의 기도회 초청을 받았다. 찬양과 간증 형식으로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사바주 케이케이 항구의 전 항만청장인 데이비드 리 장로가 간증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의 간증은 이랬다.

 

"한나호가 10년 전 이곳에 들어왔을 때 일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갑자기 고위층으로부터 한나호를 내보내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나호가 성탄절을 우리 항구에서 보낼 수 있도록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한나호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항구에는 큰 컨테이너선이 접안을 했는데 바로 다음날 60년 만에 큰 태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나무가 뽑히고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유실됐습니다. 그리고 큰 컨테이너선과 다른 한 척의 배가 태풍으로 육지에 올라와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의 섭리를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마치 독수리 날개로 한나호를 지키듯, 태풍 하루 전에 한나호와 선교사들을 피신시켜 주신 것을 말입니다. 쫓겨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한 항구로 피신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의 일들을 지켜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의 생생한 간증은 동말레이시아 성도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우리는 이 간증을 들으면서 한나호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전 항만청 고급관리로부터 잊어버린 하나님의 구원 손길을 다시 기억했다.

 

또 다른 축복 중 하나는 10년 전 산다칸에서 만난 중국인 화교 형제들이 장로가 되어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나호에 카페까지 만들어주었고, 사람들을 초청해 매일 저녁 그리스도인들과 찬양과 간증, 교제로 전도할 수 있었다.

 

당시 나와 아내는 이들 중 정 장로 부부를 만났다. 정 장로는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가 뭘 도와야 할까요.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기름 100t이 필요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고 우리가 항구를 떠나기 전까지 100t의 기름뿐 아니라 식품 창고에 음식을 가득 채워주었다. 한나호는 24시간 운행 시 7∼8t의 연료를 사용한다.

 

지난 4년간 한나호는 이곳 동말레이시아에서 대략 350t의 연료를 공급받았는데, 산다칸의 정 장로 부부의 헌신적인 모금과 성공회 목사님들의 헌금 덕택이었다.

 

한편 동말레이시아의 모든 항구 정박세가 주정부의 도움으로 면제가 됐다. 이슬람 국가에서 한나호에 정박세를 면제한다는 소식은 이곳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현지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정권에 억눌려 있었는데 한나호의 거침없는 기도와 봉사, 전도 활동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것을 목격하면서 도전을 받았다.

 

정박세의 완전 면제와 연료 공급은 한나호의 사역을 완전하게 축복하신, 그리고 이슬람권 국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었다. 우리는 주신 복을 기억하기 위해 동말레이시아에서 주님이 베푸신 복을 '사바에서 넘친 복(Sabah overflowing)'으로 명명하고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드렸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10) 한나호에 감동한 선박수리 업체… 1/4 가격에 "OK"

 

팔라우공화국에서 고장난 프로펠러 수리와 관련해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당시 수리는 필리핀에서 하게 됐는데 어느 날 드라이독(선박의 건조 또는 수리를 위해 선체를 독으로 끌어올리는 것) 업체의 한 사장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글렌이었다. 그는 우리 배에 잠시 머무는 동안 선원과 선교사들의 행동을 지켜봤다. 무료 치과진료 모습을 비롯해 환자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장면을 살폈고 갑판 뒤에서 봉사하는 형제들을 흥미롭게 봤다.

 

다음날 글렌은 견적서를 갖고 왔다. 점잖고 미남형인 그는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침 팔라우에서 오신 찰스 목사와 필리핀 장 장로 등 10여명이 함께 있었고 모두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한나호는 비영리 선박입니다."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지요." "모든 선원이 무보수이고 선교비를 내고 승선합니다." 찰스 목사님은 30년 전 한국교회에 유행하던 말씀까지 전했다. "나그네에게 물 한 모금을 대접하면 주님께서 외면치 않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한나호를 수리해주면 주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날 글렌이 갖고 온 견적서에는 8만 달러가 적혀 있었다. 나는 견적서를 두 손으로 잡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원래는 13만 달러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글렌은 다시 방문했다. 6만 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 욕심을 부려 물었다. "혹시 가격을 더 낮출 수는 없겠는가?" 글렌은 "내일 다시 오겠다"며 떠났다.

 

그날은 목요기도회가 있던 날. 우리는 글렌의 마음을 감동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다음 날 글렌은 5만 달러의 견적서를 갖고 찾아왔다. 우리는 정말 기뻤다. 드디어 한나호는 드라이독으로 옮겨졌다.

 

드라이독을 할 때마다 물탱크를 청소했다. 물탱크는 전체 400t 용량으로 10개 탱크로 나뉘어 있었다. 청소는 외부에 맡기지 않고 한나호 선교사들이 직접 했다. 탱크 내부에 들어가 녹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너를 바르고 페인트칠까지 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인체에 해가 될 수도 있었다.

 

글렌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물탱크 청소는 필리핀 하급 노동자도 회피하는 일이다. 호흡기에 문제가 올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30분 일한 뒤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바로 그때 아내와 다른 자매들이 온통 수건으로 뒤집어쓴 모습을 하면서 물탱크에서 나왔다. 우리는 그날 드라이독 청소 노동자 300명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열었고 전도 집회도 개최했다. 글렌도 와 있었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집회에서는 60명 정도의 근로자들이 예수를 믿기로 손을 들었다. 모두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3주 후 글렌 부부와 우리 부부는 저녁식사를 했다. 글렌은 "이것이 최종 견적서"라며 서류를 건넸다. 3만4000달러였다. 그는 "이 가격에서 한푼도 깎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글렌의 고백은 이랬다. "한나호 같은 선박 수리는 처음이었습니다. 선장들은 수리할 때 외부 호텔에서 잘 먹고 지내는데 한나호 선장님은 똑같이 노동자들과 일하며 지내더군요. 자매들이 물탱크 청소를 하는 것은 내 평생 처음 봤습니다. 수리하면서 조선소 근로자들을 위해 치과 진료를 하고 바비큐 파티를 열고 전도하는 배도 처음이었습니다."

 

글렌은 "선박 수리에는 선주 측과 본선의 기관·갑판 책임자들이 조선소 기술진과 인상 쓰며 싸우는 일이 태반인데 한나호에는 형제자매들이 웃어서 분위기가 밝아졌다"며 "지금은 형편상 가톨릭교회를 다니지만 나중엔 기독교회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11) 팔라우 얍섬 정글에 선원들 땀 배인 첫 교회를

 

팔라우공화국은 한국에 이어 한나호의 제2 모항이 됐다. 그곳에서 프로펠러 고장과 전도의 열매,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팔라우 성도들에게 고난 속에서도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다시 찾았다. 당시 우리는 얍에 교회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얍은 비교적 큰 섬인데 주변에는 작은 섬들이 많았다. 그런데 얍 사람들은 주변 섬 주민들을 차별했다. 작은 섬이라는 이유에서다. 주변 섬사람들이 얍으로 이주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주변 섬 출신 기독교인들도 얍의 교회에서 차별을 당했다. 그래서 얍 주변 섬 주민을 위한 교회가 필요했다. 우리는 이를 일찌감치 염두에 두고 있었고 교회 건축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을 들은 인도네시아 '미션 케어'라는 선교단체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왔다. "교회를 기증하겠습니다." 미션 케어는 서태평양의 여러 섬 지역에 조립식 교회를 세우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단체는 2층짜리 조립식 교회 건물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교회 부지도 마련됐다. 얍에 거주하는 팔라우 출신의 모세 집사라는 분이 선뜻 부지를 내놓은 것이다. 모세 집사도 주변 섬사람들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 건축에는 괌의 동서장로교회와 인천의 부평 강성교회의 헌금도 보태졌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얍의 정중앙 숲속에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 건축은 한나호 선교사들이 나서서 직접 지었다. 선교사들은 조립식 교회 부품이 도착하면 이를 설계도대로 맞췄다. 정글 속 교회는 특성상 동물 침입을 막기 위해 1층은 마당 등 빈 공간으로 둔다. 기둥을 세운 우리는 2층 예배당 꾸미기에 힘썼다. 우리는 이 교회를 '얍복음교회'로 명명했다.

 

한나호 사역자들이 교회 건축에 나선 것은 평소 해왔던 섬김의 정신에서 비롯됐다. 필리핀 세부항 드라이독 배 청소에도 한나호 선교사들이 팔을 걷어붙인 것처럼 한나호 형제자매들은 이를 즐겁게 감당했다. 한나호 선교사들의 섬김은 철저한 훈련에서 나온다. 한나호에 일단 승선하게 되면 1년 동안 무조건 갑판, 엔진, 식당에서 일해야 한다. 노동을 하면서 낮아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성 프란시스코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용했던 방법은 한나호 사역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던진다. 프란시스코는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10명에게 꽃을 주면서 거꾸로 심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9명의 후보들은 꽃을 거꾸로 꽂으면 죽는다고 생각해 똑바로 심었고 나머지 한 명만 프란시스코의 말대로 거꾸로 심었다. 성 프란시스코는 9명을 돌려보냈고 무모한 지시에 순종한 1명만 제자로 받았다.

 

이외로 선교 현장에서 순종하는 것에 실패하는 사람이 문화 적응이나 언어 적응에 실패하는 것보다 더 많다. 선교지가 순교지가 되도록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사역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마태복음 20장 26∼28절은 여전히 변함없는 한나호의 주요 성구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주려고 왔다."(새 번역)

 

얍에 교회를 세울 때 우리는 기도했다. 이곳 원주민들에게 바른 신앙을 세워주시길. 우리도 좋은 선교사로 만들어주시길. 또 교회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증거되기를 말이다.

 

얍 원주민들은 토플리스 차림의 원시부족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매우 폐쇄적이었고 전도활동을 해도 열매가 없었다. 앞서 간 다른 선교사들도 고난을 많이 당했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12) 1만명 회심 한나호, 하나님 도움에 리모델링을

 

2009년은 한나호에 큰 변화가 있었던 해다. 당시 한나호는 새로운 사역을 향한 긴장과 재정적 압박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나선교회 신미현 이사가 기도후원자와 함께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그 자리에서 한나호의 리모델링을 제안했다. 청사진에는 현대식 예배당을 비롯해 캐빈과 식당, 화장실이 호텔급으로 변해 있었다.

 

나를 비롯한 한나호 선교사들에게 리모델링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선교하다 죽겠다고 결심한 마당에 배를 치장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역자들이 완패했고 이사들과 기도후원자들이 승리했다. 그들은 한나호 선교사들이 궁상맞고 불쌍하게 산다면 어떻게 선교지 주민들에게 선한 충격을 주겠느냐며 설득했다. 워낙 강한 입장을 보여 우리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호는 원래 선교 용도가 아닌 일본 해양기상청 선박이라 60명의 단원이 그동안 불편을 겪어 왔던 건 사실이다. 리모델링은 한나호를 한번 다녀간 단기팀과 후원자들에겐 숙원사업이었다. 겨울이면 냉기 속에서 예배를 드렸고 선실이나 식당 등도 40년 전 건조된 방식을 그대로 이용했으니 불편했을 것이다.

 

본격적인 리모델링 공사는 2009년 6월 초 시작됐다. 리모델링은 사역용 선박의 특성을 최대한 살렸다. 침침하고 냉기가 흐르던 분위기를 밝고 따뜻하게 바꿨고 세미나용 책상과 접이식 의자, 대형 TV도 설치해 다용도로 활용토록 했다.

 

예배실 이름도 '메인 라운지'로 바꿔 선교지에서 주민들을 초청해 영화를 상영하고 민속문화와 댄스 공연 등 소규모 집회나 활동도 가능하도록 했다. 또 기존에는 없던 VIP룸도 만들어 현지 목회자나 지도자 등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맨바닥뿐이었던 선실에는 2층침대와 옷장을 설치했다. 식당도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 한나호는 이렇게 향후 사역을 위해 재탄생되고 있었다.

 

한나선교회는 이전부터 한나3호를 위한 모금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적인 리모델링으로 새로운 선박 구입은 필요없게 됐다.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브라질의 상파울루연합교회 김요환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목사는 한나3호를 위한 모금에 힘써왔다. 나는 한나3호에 대한 모금을 리모델링으로 전환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고 김 목사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주님 은혜는 계속 넘쳤다. 부산에서 출항을 앞두고 있을 때 스톤커피 사장인 정홍식 장로가 한나호를 방문했다. 그런데 정 장로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아내가 생전에 10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다"면서 "한나호는 선교사가 60명이 넘으니 아내의 유언에 따라 한나호에 스톤커피 장비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정 장로의 아내는 5년 전 암으로 천국에 가셨고 그동안 혼자 사시며 아내의 유언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정 장로는 한나호가 출항하기 전까지 직원들과 함께 여섯 번이나 방문해 바리스타 교육을 시켜주었고 우리를 힐링푸드 전도사로 만들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나호 선교사들은 지난 4년간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수만 잔의 커피를 만들어 현지인들에게 대접했다. 그중엔 대통령부터 도지사, 시장들도 있었다. 우리는 커피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만들었고 현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이로써 한나호는 무료 의료와 커피라는 두 날개의 사역 수단으로 선교선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됐다.

 

한나호는 2009년 겨울, 부산의 해양대 부두에서 출항해 5개국 13개 항구도시를 다녔다. 그동안 현지 그리스도인 1000명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1만명이 회심했다. 1만5000명은 무료의료 혜택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박수진 (13·끝) "한나호와 선교지에서 삶을 마칠 수 있게 하소서"

 

한나호는 지금 동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에 머물고 있다. 오는 26일이면 말레이시아를 떠나 다음달 3일 부산 다대포항에 도착할 것이다. 이번 방문은 중요하다. 한나호 사역 지역이 아프리카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한나호는 그동안 아시아에서만 활동했다.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몇 차례씩 현지를 방문하면서 점차 익숙해졌다. 현지 항만청과 관계자들은 이제 친한 사이가 됐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어디서든 환영받게 됐다. 도전지대가 안전지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활동 지역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 핍박과 미지의 세계로 말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한나호 선교사들과 후원자, 기도의 동역자들이 아프리카를 향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됐다.

 

사도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쳤을 때 로마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확인해 주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행 23:11, 새번역) 한나호는 바울의 로마행을 향한 열정을 보면서 기도해왔다. '우리의 로마는 어디입니까.'

 

지난달 26일 경기도 용인시 상현동 수지새소망교회에서 한나호 후원 음악회가 개최됐다. 아프리카 의료 사역을 위한 후원 축제였다. 나는 그때 이런 인사말을 했다.

 

"선교지에서 생애를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아프리카 이외의 다른 지역은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육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처럼 모두 내어주고 싶습니다. 한나호까지 말입니다."

 

한나호는 마다가스카르를 시작으로 모잠비크, 앙골라 등 해안 국가들을 향해 파도를 가를 것이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도움과 기도가 필요하다. 특히 아프리카 각국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의 조언이 시급하다. 의료선교사와 의약품, 각종 생필품 등도 필요하다. 후원자들의 기도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30년간 한국교회는 폭발적 성장과 부흥을 경험했다.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은 많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다. 최근 한국교회는 침체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기회이자 전환의 시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가운데 교회의 선교 열정이 여전히 뜨거운 것은 다행스럽다. 한나호는 계속 전진할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배 사역의 강점은 너무 많다.

 

한나호 사역 25년은 이 강점을 누린 기간이었다. 신앙 훈련소로서 최적의 장소다. 다국적 선원과 선교사로 구성된 한나호에 오면 누구든 버려야 한다. 첫 3개월은 자신을 부인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육지에 비해 선상생활은 엄격하다. 한나호는 떠다니는 수도원이다. 기도회와 경건회, 노동, 성경공부, 언어훈련을 통해 감사와 자족,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배운다.

 

한나호는 또 선교 지역 연구를 위한 역할도 하고 있다. 현지 교회의 규모나 미전도 지역 파악을 비롯해 해당 국가의 정치·경제 상황, 타종교 분포 등을 자세히 알게 될 기회가 생긴다.

 

무엇보다 현지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켜 아시아 각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지난 12년간 한나호를 통해 5000명이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4만여명이 의료혜택을 받았고 3000명이 한나호를 거쳐 갔다. 이들은 12개국 출신으로 이중 625명은 목사나 선교사가 됐다.

 

다음 달 한나호가 한국에 도착하면 1년 정도 머물 예정이다. 60명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방문해 간증집회를 열게 된다. 한나호에서는 선상 수련회와 영어전도학교 등도 열린다. 지금까지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031-781-6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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