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129. [역경의 열매] 하태림 (1-12) 스물다섯에 닥친 1급 지체장애 “주여 왜 나를?”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8.30|조회수36 목록 댓글 0



***간증: 1129. [역경의 열매] 하태림 (1-12) 스물다섯에 닥친 1급 지체장애 주여 왜 나를?

 

지난달 28일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2013년 서울시 봉사상 시상식. 대상 수상자로 내 이름이 호명됐다. 하태림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 십수년간 봉사활동을 하며 1000여명의 환자를 돌봤고, 지역아동센터를 세워 어려운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상을 받게 되셨습니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가 마이크를 타고 행사장 내에 울렸다. 그중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절뚝거리며 단상을 오르는 내 모습에 시선이 쏠렸다. 나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기온이 내려갈수록 걷는 것은 물론 서 있는 것조차 버겁다. 차가운 날씨에 수축된 근육이 어긋나 있는 척추를 누르기 때문이다. 의사는 지금도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리기만 해도 척추가 무너져내릴 수 있다며 척추 뒤에 철판을 대는 수술을 하자고 제안한다. 장애는 척추뿐이 아니다. 왼손은 제대로 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다. 남들은 날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장애를 입은 초기에는 장애인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확산되기 이전이라 날 조롱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난 평생 장애를 안고 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삶조차 하나님께 간구함 끝에 기적같이 허락받았기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건강했던 모습이 언제였는지 아스라하지만 나는 선천적 장애인은 아니다. 나는 1964년 전남 진도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진도에서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고, 일상은 무료할 지경이었다. 잔잔한 호수 같던 우리 집에 돌이 던져진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큰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당시 형은 20대 중반이었다. 자살의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를 교회로 이끌었다. 당시 인천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사촌누나가 내려와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했다. 위로가 필요했던 어머니는 교회로 향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어머니는 아픔에서 점차 회복됐다. 어머니는 가족 모두가 교회에 나가기를 바랐다.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기 싫어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하지만 억지로 나간 터라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일을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사촌누나가 있는 인천 부평으로 올라와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고등학교 후배였던 여성과 연애를 시작했고, 1985년 우리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를 하고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둘, 아내는 스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월급을 조금씩 모아가며 내집 마련을 꿈꾸는 삶이 행복했다. 다음해 태어난 딸은 우리 부부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평범했던 삶의 궤적이 180도 바뀐 것은 88년 가을이다. 단풍구경도 할 겸 친구들과 동네 산으로 놀러갔다가 어둑해질 무렵 내려왔다. 어느 정도 술에 취한 상태였다. 친구들과 헤어진 뒤 소변이 마려워 외진 곳을 찾아 도로가로 갔다. 그 순간 발밑이 푹 꺼졌다. 소리와 함께 5m 아래로 떨어졌다. 누군가 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깊게 파 놓은 것. 시간은 늦었고,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발견 당시 내 얼굴과 머리는 피투성이였고 경추와 중추, 요추는 부서져 있었다. 인생에 암흑이 찾아왔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 [역경의 열매] 하태림 (1) 스물다섯에 닥친 1급 지체장애 "주여 왜 나를?"

* [역경의 열매] 하태림 (2) 사고 20일 만에 눈뜨자 "평생 전신마비" 사형선고

* [역경의 열매] 하태림 (3) "만약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무슨 일을 할겁니까"

* [역경의 열매] 하태림 (4) 눈물의 기도·재활 1년… 두 발로 다시 서는 기적이

* [역경의 열매] 하태림 (5) "받은대로 갚겠다" 목발 짚고 병원 복도서 찬양을

* [역경의 열매] 하태림 (6) 내가 살아가는 이유 '봉사' 위해서 신학대 입학

* [역경의 열매] 하태림 (7) 임신 어렵다던 의사 보란듯 4남매 출산 '기적'

* [역경의 열매] 하태림 (8) 병상서 열심히 기도해준 청년, 신천지 변신 충격

* [역경의 열매] 하태림 (9) "교회 못 팔겠다" 하루 전 계약취소 통보받고…

* [역경의 열매] 하태림 (10) 동행하시는 하나님, 낮은 곳 봉사 때마다 은총을

* [역경의 열매] 하태림 (11) 지역아동센터를 이끈 힘은 기도와 기부천사들

* [역경의 열매] 하태림 (12·끝) "전신마비 된 나를 들어 쓰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태림 목사 약력=1964년 전남 진도 출생, 진도실업고등학교 졸업, 총회신학교·대학원 졸업(예장 합동 보수), 고려대 안암병원 원목, 이레지역아동센터 대표, 2013년 서울시 봉사상 대상 수상

 

***[역경의 열매] 하태림 (2) 사고 20일 만에 눈뜨자 평생 전신마비 사형선고

 

사고 다음날 아침 공사장 인부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인근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조그만 동네의원인지라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조차 없어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가장 먼저 달려온 아내와 여동생은 처참한 내 모습에 주저앉았다. 우선 떨어지면서 찢긴 머리와 얼굴의 상처를 대강 꿰맸다. 가족들은 수소문 끝에 나를 CT가 있는 부평의 큰 병원으로 옮겼다.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검사가 진행됐다. 머리와 얼굴의 찰과상이 매우 심했고, 두개골이 일부 골절되면서 뇌에 피멍이 들었다. 양팔과 다리는 모두 부러졌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추(목뼈)와 흉추(등뼈) 요추(허리뼈)가 다 부러진 것이었다. 사고 후 약 20일 만에 눈을 떴다. 온몸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신에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식을 찾았으니 치료받고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진도에서 올라오신 어머니는 눈물을 자주 보이셨다. 아내가 물었다. 여보, 당신 몸이 어디까지 회복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 말이 둔기처럼 내 머리를 때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전 8시 회진을 도는 신경외과 과장에게 내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을지 물었다. 과장은 열심히 치료하고 있으니 좋아질 것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다음날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답은 같았다. 1주일째 물어보자 과장은 결심한 듯 들을 준비가 됐느냐고 물었다. 심호흡을 했다.

 

하태림씨는 현재 전신마비 상태이고, 척추가 다 손상돼 회복이 돼도 걷지는 못할 겁니다. 휠체어도 타지 못하고, 누워서 생활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돌아눕기도 어려울 겁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며칠 밤을 새며 고민하다 삶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아내는 23살. 뱃속에는 8개월 된 태아가 자라고 있었다. 두 살배기 첫째아이는 대구에 사는 작은형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뱃속의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내에게 내 몸이 회복돼도 걷지도 서지도 못할 텐데 아이 하나 키우기도 버겁다. 아이를 낳으면 입양시키자고 했다.

 

아내는 펄쩍 뛰었다. 부모님과 형제들도 모두 반대했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아들인지 딸인지 묻지도 않았다. 다시 강력하게 입양을 주장했다. 아내와 가족들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아이는 나와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하고 입양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부모 만나서 잘 살도록 빌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내게 가장 큰 아픔이다. 지역아동센터를 세워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자고 결심한 데는 그 아이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담겨 있다.

 

아이를 입양 보낸 후에는 아내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내 곁에 남는다면 평생 병수발 들면서 힘겹게 살아야 해. 아이는 나와 내 가족이 키울 테니 좋은 사람 만나서 새 인생을 살아. 아내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온갖 욕설과 고함을 내뱉었다. 보다 못한 장인과 처남이 아내를 데려갔다. 그러나 아내는 사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제발 가달라고 했다. 한동안 실랑이가 반복됐다. 지친 아내는 결국 내 곁을 떠났다. 막상 현실이 되자 아내에 대한 미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에서 아내를 붙잡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3) 만약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무슨 일을 할겁니까

 

아내가 떠나고 여동생은 내 병간호를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동생은 뱃속에 손가락을 넣어 돌같이 굳은 대변을 빼내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짜증도 받아줬다. 너무 힘들 때면 화장실에서 울고 나와 마음을 추스르고는 날 보고 다시 웃었다. 천사 같은 아이였다.

 

병원비 때문에 어머니는 매달 땅을 팔아야 했다. 돈이 필요해 급하게 내놓은 땅은 제값을 받기 어려웠다.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어머니는 물에다 밥을 말아 드시고 밤마다 교회로 가셨다. 밤새 내 아들 살려 달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시고는 새벽에 돌아와 또 밥 한술 물 말아 드시고 밭으로 나가셨다. 매일 그렇게 나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기를 반복하셨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 민폐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입양 보냈고, 아내도 떠났으니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라고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은 혀를 깨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두 살배기 딸, 형제들이 마음에 걸려 망설이게 됐다. 혓바닥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힘들게 했다. 밤마다 베개는 축축이 젖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뺨이 쓰라릴 정도였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중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흘러오는 노랫소리를 듣게 됐다.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병원에 봉사활동을 나온 인근 교회 청년들이 부르는 찬양이었다. 동생에게 병실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삭막하던 일상에서 들은 찬양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평안을 줬다. 문이 열린 걸 보고 청년들이 병실로 찾아왔다. 회복을 위한 기도와 함께 꽃을 선물로 주고 갔다. 그 후 청년들은 1주일에 한 번씩 내 병실을 찾아와 찬양을 불러주고 격려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만약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물었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울렸다. 간절한 마음에 주님의 증인이 되겠다고 했다.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어머니가 믿는 그 하나님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아주 작지만 혹시나하는 희망이 생겼다. 당시 병원에서는 주일마다 환자들을 위해 병원 지하식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양 팔과 다리에는 깁스를 하고, 척추뼈가 자리를 잡도록 몸에 추를 달아 놓은 상태라 혼자서는 예배당에 갈 수 없었다. 동생에게 침대째 끌어 예배당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간호사들이 쫓아왔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다. 그들에게 내 몸 상태가 나빠져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겠느냐. 그냥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예배당에 도착했지만 일어날 수 없었기에 천장만 바라봤다. 하지만 하늘에서 하나님이 날 보실까 간절한 마음에 기도했다. 오른손만이라도 낫게 해주십시오. 절뚝거려도 좋으니 걷게만 해주십시오.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때까지만 해도 믿음만으로는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담배가 잠시나마 근심을 덜어줬다. 당시 환자 중 나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내 상황을 안쓰러워했던 병원 측은 이런 일탈을 눈감아줬다. 한날도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청년 찬양팀이 들어왔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다. 지나가다 생각이 나서 들렀다고 했다. 그중 한 여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하루도 안 빠지고 형제님이 회복하기를 기도했다건강해지면 주의 증인된 삶을 산다더니 몸에 안 좋은 담배를 피우면 어쩌느냐고 꾸짖었다. 그날 이후 10년 가까이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본격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4) 눈물의 기도·재활 1년… 두 발로 다시 서는 기적이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로 했다. 책을 손으로 넘길 수 없기에 동생에게 성경 구절이 녹음돼 있는 테이프를 사달라고 했다. 동생은 잠언과 전도서, 시편, 신약 전체가 녹음돼 있는 테이프를 사다 줬다. 하루 종일 말씀을 들었다. 어느 날 유난히 귀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장 2절 말씀이었다.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다. 하나님은 내게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제 처지에 어떻게 기뻐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했다. 입장을 바꿔보라며 따져 물었다. 이미 하나님은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기쁘게 감당하셨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지만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다. 울며 며칠을 기도했다.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하나님은 잠언 17장 22절을 답으로 주셨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근심이 질병의 근원이라 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으니 근심하지 말고, 기쁘게 견디라고 하셨다.

 

깨달음이 든 순간 회개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작은 거짓말에 대한 회개까지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한 번 더 살아갈 기회를 주세요.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겠습니다. 만약 제가 어긋난 삶을 산다면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주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나님 연약한 제게 힘을 주십시오.

 

눈물로 기도를 이어가고 있던 그때 조금씩 기적이 움트기 시작했다. 1989년 1월, 사고 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왼손을 시작으로 다리에도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느낄 수 없었던 통증도 서서히 느껴졌다. 마치 온 몸을 수만 마리 벌레가 물어뜯는 것 같았다. 그래도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살아나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의사에게 진통제를 맞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혹 통증이 완화됐다가 또다시 느끼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가 너무 커 환자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불같이 일었다. 영양주사를 끊고, 동생에게 물에다 밥을 말아서 입에 넣어 달라고 했다. 한번 목 뒤로 넘기는데 100번을 씹어야 했지만 기어코 한 공기를 먹었다. 기도도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포도나무, 우리를 가지라 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실 것이라 하셨다. 열매는 곧 전도를 뜻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전도를 할까 고민했다. 믿지 않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주일에 병문안 오면 내 침대를 밀어서 예배당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내 처지가 딱했던지 그들은 불평 없이 들어줬다.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가 막힌 전도 방법이었다.

 

재활훈련도 꾸준히 했다. 동생에게 수시로 발과 팔을 들었다 놔 달라고 했다. 침대를 세워 허공에서 걸음마 연습도 했다. 걸음마에 점차 힘이 붙기 시작했다. 수개월 재활 끝에 입원 약 1년 만에 드디어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었다. 한두 걸음씩이나마 걸을 수도 있게 됐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신경외과 과장은 하태림씨가 몸을 움직이고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그렇게 열심히 찾던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는 한가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5) 받은대로 갚겠다 목발 짚고 병원 복도서 찬양을

 

사고 후 1년이 지난 1989년 11월, 부평 병원에서 퇴원해 고향 근처로 내려가 요양키로 했다. 인천에 계속 머무르면 여동생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진도로 가자고 하셨지만 고향사람들에게 내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해남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병간호는 남동생 2명과 어머니가 맡았다. 두 발로 서는 것은 가능해졌지만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목발을 짚고도 겨우 몇 발짝뿐이었다. 병원에서 하는 것 외에도 동생들과 매일같이 재활훈련을 했다. 두 명의 동생들은 각각 내 양쪽 어깨를 받치고 함께 걸었다. 중학생이었던 막내동생은 작은 몸집으로 낑낑대며 도왔다. 수백 번은 넘어진 것 같다. 그래도 같이 넘어지고, 격려해주는 동생들 덕에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을 꼬박 노력한 끝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었다. 온전치 않아도 걷게만 해달라던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이다. 몸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증인이 되겠다고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가 잘 알고,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야 했다. 부평의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들었던 청년들의 찬양이 생각했다. 삭막하던 일상에 그들의 찬양은 힘이 됐었다. 가끔 꽃을 들고 찾아와 건네던 말은 위로였다. 1990년 7월 당시 혜화동에 있던 고려대병원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복도에서 찬양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매주 토요일 병원을 찾아갔다.

 

서울에 머물 곳이 필요했다. 결국 여동생의 신세를 지게 됐다. 여동생은 주중에는 일을 하며 내 생계를 책임졌고, 토요일에는 병원 사역을 함께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시고, 너무 힘들 때는 피할 길도 주신다. 여동생은 나에게 피할 길이었다. 함께할 동역자가 더 필요했지만 사람을 모을 방법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았다. 무작정 기도했다.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혼자서는 너무 힘듭니다. 부디 저와 함께할 이들을 세워주십시오.

 

지하철과 기도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기도와 행동을 같이 하니 응답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기도원에 다녀온 다음 주, 병원 인근 교회 청년 3∼4명이 소문을 듣고 왔다며 함께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매주 반복되더니 몇 달 만에 인원이 50여명으로 늘었다. 단체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의미로 사랑의 선교회로 정했다.

 

사람이 늘어나니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도 넓어졌다. 단순히 찬양을 불러주는 것 외에 환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들어주는 일도 병행했다. 퇴원 후 오갈 곳이 없는 환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한번은 퇴원 후 가족에게 버림받아 갈 곳 없던 80대 할머니를 서울 상봉동 비닐하우스 교회로 모시기도 했다. 한 환자의 형님이 개척한 교회였다. 선교회를 통해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그 교회에서 할머니를 맡아주기로 했다. 소망교회 여전도회에서도 그 소식을 듣고 한 달에 10만원씩 후원을 해줬다.

 

조금 더 체계적인 행사도 기획했다. 바로 음악회였다. 서울 불광동에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카페를 빌려 일일찻집 형식으로 제1회 음악회를 진행했다. 많은 관객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음악회는 이후 유명 복음성가 사역자들과 수천 명의 관객이 참여한 음악회들의 시발점이 됐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6) 내가 살아가는 이유 봉사 위해서 신학대 입학

 

병원 봉사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매주 토요일 찬양을 하는 것 외에 주중에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도 했다. 원목실에 소속돼 일하다 보니 환자들로부터 신앙적인 질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전문적 교육을 받아야겠다고 느꼈다. 내 믿음은 확실했고,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신학적 지식을 기초로 한 조언을 해주기에는 부족했다. 기도 끝에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1992년 서울 냉천동 총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병원에서 사역을 해야 했기에 야간 과정으로 학교에 다녔다. 학장 박병진 목사님을 비롯해 훌륭한 선생님들과의 만남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교회법의 권위자인 박 목사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도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기에,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도를 따라야 하며 이것을 떠나는 순간부터 엄격한 의미에서 그 집단은 벌써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배움은 즐거웠다. 대학 진학 대신 직장을 택했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항상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이렇게 채워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필요를 채워주셨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했고, 나는 삶을 같이 살아줄 반려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1급 지체장애인에 애까지 있는 홀아비를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사람의 기준으로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셨다. 사랑의 선교회에 동참한 봉사자들 가운데 지금의 아내 강명옥 사모가 있었다.

 

당시 22세 대학생이었던 아내는 불광동 다윗과 요나단 카페에서 열렸던 1회 음악회에 봉사자로 처음 참여했다. 관심을 먼저 보인 것은 아내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픔을 이겨내고 주님과 약속을 지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나와 결혼을 한다면 이 사회 구석에서라도 조그만 빛을 발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아내는 봉사자로 묵묵히 5년간 나를 지켜본 뒤 마음을 고백했다. 딸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하기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하루는 아내의 오빠가 나를 찾아왔다. 긴말 필요 없고, 내 동생 만나지 마시오.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위축되지 않았다.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던 나를 하나님은 살려 주셨고, 동행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는 두려울 게 없었다. 아내의 오빠에게 나도 힘드니 나에게 관심 갖지 말라고 동생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아내의 오빠는 황당해서 말을 못 이었다. 아내에게는 난 장인 장모님께 가서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장인 장모님의 반대는 거셌다. 아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을 시작했다. 열흘 가까이 금식 끝에 두 분은 두 손을 드시고 결혼을 승낙하셨다.

 

나는 장인 장모님이 결혼식장에 확실히 오셔야 결혼을 한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배짱이냐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난 항상 담대했다. 다행히 장인·장모님은 오셨다. 결혼식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올렸다. 주례는 박병진 목사님이 해주셨다. 박 목사님은 주례를 시작하자마자 이 결혼을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성사가 안 된다. 반대한다면 지금 당장 의사를 표하라고 하셨다. 혹시나 반대하는 이들이 있을까봐 속으로 움찔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7) 임신 어렵다던 의사 보란듯 4남매 출산 기적

 

결혼 전, 병원에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출산이라는 여성 고유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상황임에도 아내는 의연했다. 딸 스진이를 마음으로 키우면 된다고 했다. 아내는 딸이 하나 있으니, 아들을 하나 입양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내의 말대로 하려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내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머릿속에 성경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를 주실 것이라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과 동침해 이스마엘을 낳은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결국 약속을 지켜 이삭을 주시지 않았던가. 아내에게 급하게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 후 1년 지나면서 하나님이 성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셨다. 병원에 갔더니, 그래도 임신을 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판단일 뿐이었다. 아내는 기적과 같이 임신했다. 그 아들이 지금 16살인 성진이다. 이왕 주신 것 한 명만 더 달라고 기도했다.

 

2년 후 영진(14)이가 태어났다. 딸아이도 한 명 더 갖고 싶었다. 다음해 딸 유진(13)이가 태어났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진이 출생 후 12년이 지난 지난해 늦둥이 막내아들 원진(20개월)이까지 주셨다. 사고 후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던 내게 무려 네 명의 천사를 보내주셨다. 오남매는 내게 가장 귀한 보물이다. 맏딸 스진이는 네 명의 동생들을 잘 돌봤고, 나와 아내에게 큰 힘이 됐다. 스진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사랑의선교회 병원 봉사활동에 따라 나와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동참했다. 현재는 두 아이의 엄마다.

 

병원에서 사역할 때 하나님은 내 상처를 사용하셨다. 사고 후 재활을 통해 전신 마비를 극복한 것과 지체장애 1급의 장애인이지만 기쁘게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이 환자들에게는 희망이었다. 환자들은 나와 이야기하다가 나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예전의 나처럼 침대에 누운 채로 병원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0년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에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병원 복도에서 찬양을 시작한 1991년부터 2008년까지 18년간 1000명이 훨씬 넘는 환자들과 만났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는 10년 전쯤 급성 백혈병으로 입원했던 대학생이다. 어느 날 이 학생의 어머니가 원목실로 찾아왔다. 믿음이 없는 아들을 한 번만 만나서 기도해 달라고 했다. 병실로 찾아갔다. 스무 살 나이에 백혈병을 앓고 있는 현실이 원망스러운 듯 적대적이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읽어주고, 성경을 읽어 볼 것을 권했다. 거의 매일 찾아가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느 날 이 학생이 예배에 참석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 학생을 들어 쓰셨다. 병을 완치시키셨다.

 

이 학생은 학부 졸업 후 신대원에 진학해 현재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만두 공장에 다니고 계신 학생의 어머니는 내가 병원에서 나와 교회를 개척할 때, 지역아동센터를 세웠을 때, 지금도 가장 든든한 후원자 중 한 명이다. 때마다 보내주시는 만두는 역촌동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귀한 먹거리가 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8) 병상서 열심히 기도해준 청년, 신천지 변신 충격

 

병원에서 만났던 환자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부주의로 건물 3층 창문 밖으로 떨어져 몸 한쪽이 마비된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 개척교회의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 고생하며 반감이 생긴 듯했다. 병원 복도에서 만난 청년의 어머니는 내게 심방 와 줄 것을 청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침대에 똑바로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내 모습 같았다.

 

그는 아버지는 본인이 하고 싶어 목회를 하지만 나와 엄마는 목사의 가족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교회라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매일같이 그의 병실로 갔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나약해진다. 자연히 의지할 곳을 찾게 된다. 스물여섯에 반신불수 판정을 받은 이 청년도 병원 예배에 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처럼 침대에 누운 채로 이끌려 나왔다.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제 병을 고쳐 주신 것처럼 저 청년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부어 주십시오. 청년을 두고 매일 기도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청년은 예수를 영접했다. 그의 몸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청년은 의지를 갖고 재활을 시작했다. 마비된 다리에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나님께 더 매달리라고 권면했다. 청년은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한 중년남성이 내 손을 잡으며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청년의 아버지였다. 아들이 예수를 믿게 도움을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청년은 마침내 온전히 회복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셨으니 하나님 영광을 위해 일하겠다고 했다. 돌아가면 아버지 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라고 당부했다.

 

1년쯤 지나 청년이 생각나 전화했다. 서울 온누리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아버지 교회는 어떻게 하고 거기로 갔느냐 했더니 교회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아버지가 목회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택시운전을 한다고 했다. 마음이 안 좋았다.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고 싶었지만 당시 나도 병원을 나와 교회를 개척해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어느 날 청년의 아버지가 택시운전을 하다가 쓰러졌다. 간암말기였다. 가족에게 죄스러워 숨겼다고 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우리 교회로 초대해 설교를 부탁했다. 그간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전하고 싶었을까 생각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설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뒀다. 2009년쯤의 일이다. 가슴이 아팠지만 천국에 가서 편히 쉬실 것임을 알기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던 그 청년에게서 1년 전쯤 연락이 와 찾아뵙고 싶다고 했다. 만나서 요즘 어디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녀석이 조금 이상했다. 좋은 사람들 만나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간 잘 몰랐던 성경에 대해 알게 돼 재미있다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혹시 신천지에 빠졌니? 청년은 매우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내가 펄펄 뛰자 이만희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목사님이 잘못 알고 계신 것이라며 따졌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그의 어머니도 신천지에 빠졌다는 것이다. 혼내기도 하고 어르고 달래도 봤지만 청년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신천지 집회에 나와 보라고 권했다. 지금 얼마나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거기서 나오기 전까지는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마라. 결국 모진 말을 뱉고 말았다. 그 청년은 지금도 내 주요 기도제목 중 하나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9) 교회 못 팔겠다 하루 전 계약취소 통보받고…

 

2008년 고려대 병원을 그만 두기로 결정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 가서도 사랑을 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결정하기까지 망설임이 컸다. 병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이 되겠다고 한 약속을 처음으로 실천한 곳이다. 1991년부터 햇수로 18년을 몸담았던 곳이다. 그간 만났던 1000명이 훨씬 넘는 환자들, 병원 직원들 모두 가족 같았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다 보면 그만두지 못할 것 같았다. 결심을 굳혔다. 뚜렷한 계획을 세우기 전이었지만 우선 병원에 사직서를 냈다. 그 길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내겐 기도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빠르게 응답하지 않으셨다. 다급한 마음에 보챘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몇 개월이 지나서야 응답이 왔다. 교회를 개척해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섬기라고 하셨다. 당장 수중에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에 교회를 개척해야 할지 몰랐다. 지인들에게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며 무작정 도움을 요청했다. 한 지인이 인터넷에서 보니 인천 송도에 좋은 매물이 나왔다고 했다. 7층 건물에 교회는 5층에 위치해 있었다. 신축건물이라 깨끗했다. 음향장비와 강대상 등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었다. 목사님은 개인사정으로 목회를 그만 둔다마침 좋은 뜻으로 목회를 한다고 하니 시설물을 포함해서 원래 매입 가격의 절반에 팔겠다고 했다.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병원에서 알게 됐던 사람들, 지인들, 가족들이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까지 도움을 줘서 자금도 마련했다.

 

그런데 계약 하루 전날 전화가 왔다.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교회를 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당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원래 그 교회에 다녔던 성도 3명이 그 목사님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팔수가 있느냐며 만약 교회를 판다면 다시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했단다. 내 만족을 위해 3명의 신앙을 잃게 만들 수는 없었다. 계약을 포기했다. 하나님이 왜 계약을 하지 못하게 하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교회를 세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어려운 이웃에 대한 건 생각지도 않았다. 깨끗한 건물과 좋은 시설에 마음이 혹해 본질을 놓쳤던 것이다. 기도했다. 내가 섬겨야 할 어려운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만났던 어린 아이들, 청소년들이 생각났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입양 보냈던 아이가 생각이 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돌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도 내 뜻에 동의했다.

 

다시 마땅한 지역을 찾았다. 고민 끝에 서울 역촌동으로 결정했다. 2009년 5월 4층 건물 2층에 교회를 먼저 개척했다. 건물이 낡고 오래돼 공사에 손이 많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다 생각해 놓으셨다. 1988년 부평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났던 분이 내 사정을 알게 됐다. 그 분은 인천 주안장로교회에 개척교회를 돕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움을 청하셨다. 얼마 후 인천 주안장로교회에서 다섯분이 오셔서 3일 만에 교회 공사를 깨끗하게 해주셨다. 실로 감사한 일이다.

 

2010년 3층에 지역아동센터를 열었다. 이름을 이레지역아동센터로 지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여호와이레에서 따왔다.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 가정 아이들의 방과 후 학습활동과 병원 진료부터 일상생활까지 책임지는 부모의 역할을 하기로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10) 동행하시는 하나님, 낮은 곳 봉사 때마다 은총을

 

지역아동센터를 열기 전 많은 고민을 했다. 단지 아이들을 보살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교육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다. 잘못하면 아이들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우선 지역아동센터에 오는 아이들의 특징을 파악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혹은 차상위계층에 속해 있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하교 후에 와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와 책상, 책이 필요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하나님은 내게 인복을 주셨다. 여기저기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돈뿐 아니라 쌀을 보내주시는 분, 직접 담근 된장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감사함을 잊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 더욱 헌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로 감싸안는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2010년 11월 아동센터의 문을 열었다.

 

소문을 듣고 인근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나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그들에게는 아동센터로 오는 것 자체가 용기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점차 아동센터로 오는 것에 익숙해져갔다. 자신들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기쁜 듯 보였다.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고, 친구와 수다를 떨 수 있는 자유. 그 나이에 당연히 누려야 할 특권임에도 본인들의 탓이 아닌 가난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사회복지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영어와 수학 등 교과목을 가르쳤다. 공부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아이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기에 부족했다. 고민했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전신마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삭막하던 내 일상에 기쁨을 준 것은 병원을 방문한 청년들의 찬양이었다. 고려대병원에서 사랑의선교회 활동을 하면서 중점을 뒀던 것도 환자들에게 찬양을 들려준 것이었다. 그 찬양은 병마와 싸우며 심신이 지친 환자들은 물론 찬양을 부르는 사랑의선교회 회원들에게도 힘이 됐다. 당장 건물 지하에 음악실을 만들었다. 후원해주시는 분들의 도움으로 드럼과 기타, 키보드, 통기타 등을 구했다. 일단 일은 벌였는데 음악을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었다. 그러나 걱정은 안 됐다. 하나님은 내가 그의 일을 할 때 항상 필요를 채우셨다.

 

사랑의선교회 활동을 하던 1994년,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한 성금을 모을 목적으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강당을 빌려 찬양 음악회를 한 적이 있다. 기획 당시 선교회 회원들은 두 손을 들고 말렸다. 누가 출연하고, 몇 명이나 보러 오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나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실 것을 알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음악회는 대성공이었다. 복음성가 가수 빛과소금과 김덕현 집사가 흔쾌히 출연을 허락했다. 에클레시아중창단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무팀, 샤론발레단도 동참했다. 2000여명의 관객도 함께했다. 이렇게 때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아이들을 위한 음악 선생님을 구할 좋은 방법도 알게 하셨다. 바로 서울특별시 동행 프로젝트다. 대학생 봉사자들이 각자의 재능을 기부하는 프로그램이다. 전자기타와 키보드 등 악기를 가르쳐줄 대학생 봉사자들은 쉽게 구해졌다. 악기를 처음 손에 잡은 아이들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11) 지역아동센터를 이끈 힘은 기도와 기부천사들

 

지역아동센터를 시작하며 한부모가정이나 조손가정 아이들의 방과 후 학습 활동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책임지는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기로 했다. 공부를 가르치거나 악기를 가르쳐주는 것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아이들의 건강을 지키는 문제였다.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돈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센터에는 시력이 나쁜데도 돈이 없어 안경을 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압축렌즈로 만들어진 안경은 2만원에서 2만5000원이다. 큰 금액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력도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렌즈를 바꿔줘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한두명이 아니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가장 먼저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어린 아이들의 눈을 밝혀줄 방법을 알려주세요.

 

얼마 후 한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 노원구에 한 안경점이 있는데 주인이 좋은 일을 많이 하기로 소문났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무작정 찾아갔다. 안경점에는 인상 좋은 아저씨 한 분이 앉아계셨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희 아이들에게 안경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데 제가 도움이 된다면 영광이죠. 알고 보니 그분은 교회의 장로님이셨다. 그 장로님은 2년 가까이 돈을 한 푼도 안 받으시고 아이들의 안경을 맞춰주고 계신다. 얼마 전에도 아이들은 새 안경을 갖게 됐다. 도움을 받은 건 뿐이 아니다.

 

역촌동에는 우리 센터와 자매결연을 맺은 치과가 있다. 이곳 역시 지인의 소개로 알게 돼 찾아간 곳이다. 우리의 사정을 들은 치과 원장님 등은 흔쾌히 자매결연을 맺고 무료 진료를 해주겠다고 했다. 25명의 아이들이 치료를 받았다. 이 치과는 치료뿐 아니라 센터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경제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다.

 

하루는 신학교 동기이자 친구인 목사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힘들 때마다 적절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셔서 위기를 이기게 하신다. 참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도 그랬다네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1997년도쯤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이 친구를 만났는데 얼굴빛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자꾸 야위어갔다. 병원에 가라 해도 말을 안 들었다. 쓸데없이 돈낭비하기 싫다고 했다. 야, 마침 내가 지금 병원에서 일하잖아. 원무과에 이야기해놨으니까 와서 검사받자. 친구를 고대병원으로 끌고 왔다.

 

다행히 병원에서는 무료로 검사를 해줬다. 검사 결과 폐결핵이었다. 증상이 심해 약물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잘못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했다. 수술 시킬 돈이 없었던 친구의 아내는 절망했다. 이들은 경제적 형편 때문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친구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는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결혼할 때 받았던 패물과 아이들 돌반지를 모두 꺼내왔다. 친구 수술비에 보태라고 했다. 친구는 무사히 수술받고, 2년여 만에 완전히 회복됐다.

 

***[역경의 열매] 하태림 (12·끝) 전신마비 된 나를 들어 쓰신 주님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미희(가명)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센터로 온다. 가방을 던져 놓고는 책을 읽는다. 중학생 현일(가명)이는 센터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몇몇 아이들은 아내와 같이 간식을 만든다. 아이들은 센터를 제 집 안방 같이 생각한다. 참 감사하다. 내가 꿈꿨던 장면이다. 처음 병원에서 나왔을 때 불안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오산리기도원에서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개척해 어려운 이웃을 섬기라 이야기하셨지만 막막했었다. 교회를 세우고 아동센터 문을 열고나서도 아이들이 얼마나 올 것인지, 잘 교육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항상 그랬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나약한 믿음을 꾸짖으시듯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로 함께하셨다.

 

센터에 음악실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더 맛봤다. 아이들은 악기 연주를 빠르게 배워갔다. 마치 스펀지 같았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들도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쳐줬다.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웃음도 자주 지었다.

 

5∼6개월쯤 지나자 무난하게 기타와 건반, 드럼 등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됐다. 단순히 악기를 배우는 데서 멈춰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예전 병원선교 활동을 하며 음악회를 열었던 게 생각났다. 아이들로 밴드를 구성했다. 이름은 더 조이(The Joy)로 지었다. 하나님의 기쁨, 세상의 기쁨이 되라는 뜻에서다. 은평문화예술회관을 빌려 2011년 겨울 첫 콘서트를 열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은 설레면서도 불안해했다. 목사님, 저희가 공연하면 사람들이 별로 안 올 것 같아요. 비웃으면 어떡하죠? 아이들의 불안을 이해했다. 함께 공연에 서며 아이들을 도와줄 이들이 필요했다. 병원선교를 하며 연을 맺었던 복음성가 사역자 최인혁씨와 김명식씨를 찾아갔다. 대중음악 그룹인 신촌블루스에게도 부탁했다. 전에도 말했듯 하나님은 내게 인복을 주셨다. 그들은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첫 콘서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이들의 부모와 역촌동 지역주민 등 많은 관객이 찾았다. 관객들 얼굴에서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콘서트 후 한 아이는 내가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며 소감을 말했다. 아이들 얼굴에서 자신감을 볼 수 있었다.

 

지난해부터는 매년 두 번, 여름과 겨울 콘서트를 열고 있다. 지난해 여름 콘서트 때는 뉴사운드교회 천관웅 목사님이 오셨다. 오는 16일에도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겨울 콘서트를 연다. 이번에는 더조이밴드를 비롯해 대중가수 낭만유랑악단 등 12개 팀이 출연한다.

 

이레지역아동센터는 오늘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한 걸음씩 잘 걸어가고 있다. 3년째 아이들의 학업을 책임지고 있는 연세대 학생들. 이들은 월·화·금요일에 많게는 19명이 와서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1대 1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성적이 바닥이던 아이들이 1년 만에 큰 폭으로 올랐다. 아이들 음악을 가르칠 수 있게 도와준 서울시 동행프로젝트, 물질적·인적 후원을 해주고 있는 은평구 관계자 분들 모두 감사하다.

 

여전히 나는 지체장애 1급의 장애인이다. 지역아동센터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만 늘 재정이 부족해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하나님은 추락사고 후 전신이 마비된, 회복불능의 나를 들어 쓰셨다.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게 하셨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라고 확실히 명하셨다. 때에 맞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이들을 붙이셨다.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한 남은 생애에 장애물은 없다(02-355-8680).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평안의 나날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