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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136. [역경의 열매] 이홍렬 (1-13) 60년전 영월군 주천면에 핀 ‘믿음의 씨앗’ 한 톨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9.04|조회수69 목록 댓글 0



***간증: 1136. [역경의 열매] 이홍렬 (1-13) 60년전 영월군 주천면에 핀 믿음의 씨앗 한 톨

 

사족인줄 알지만 너스레를 조금 떨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고장난 벽시계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이다. 목회 현장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잠깐 짬을 내어 뒤돌아보니 이 노랫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만한 나이가 됐다.

 

아직도 마음은 20대 신학생인데 무심한 세월은 필자를 환갑의 나이까지 데려다놨다. 요즘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으니 환갑은 젊은 축에 낀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 가서 나이 이야기가 나오면 머쓱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아직은 인생과 신앙에 대해 간증을 하기에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또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삶을 살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내세울 것 없는 부족한 삶이 어떤 감흥을 주겠는가,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귀한 기회가 주어졌으니 인생과 믿음의 후배들에게 진솔하게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니겠느냐 무언가 드라마틱하고 반전이 있는 유명하고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보다 늘 옆에 있는 것 같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실감나고 진솔하게 다가갈지 모르는 일 아니냐는 끈질긴 설득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 시골 동네가 있다. 면소재지치고는 제법 큰 마을이다. 지금은 다하누촌이라고 해서 한우를 파는 곳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다. 또 꼴뚜국수라는 메밀국수를 파는 집이 있어서 멀리 서울에서도 그 맛을 보러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꼴뚜국수는 가난한 시절 하도 많이 해 먹어서 꼴도 보기 싫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화전민의 그 음식이 지금은 각종 매체에 보도되면서 유명세를 탄 것이다. 추억으로 한 그릇, 맛으로 한 그릇,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러 맛을 보시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필자가 태어난 곳이 바로 그 주천면 신일리 금산 밑이다. 여기서 각각 13세, 16세이던 이원영씨와 정석순씨가 결혼해 아들, 딸을 번갈아 낳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두 분이 60년 전 낳으신 7번째 사내아이가 바로 필자다.

 

내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폭격 때 파편에 맞아 돌아가셨다. 위로 형제 셋이 난리통에 홍역을 앓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불행한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중학생이던 필자 바로 위의 형은 주천강에서 멱을 감다 익사했다.

 

잠수부를 동원해 30리를 떠내려간 시신을 수습해 마당으로 옮겨 거적을 덮어놨던 가슴 아픈 장면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이 자식 앞세우는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생때같은 아들이 한낮에 집을 나가 저녁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으니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아버지는 술로, 어머니는 한숨으로 세월을 삭이며 사셨다.

 

그러나 헤어날 수 없어 보이던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믿음의 싹을 틔워주셨다. 그 믿음 덕분에 우리 가족의 삶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 60년전 영월군 주천면에 핀 '믿음의 씨앗' 한 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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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연세대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루터신학원 졸업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 △CBS기독교방송 이사 △대한성서공회 이사 △국제루터교평의회(ILC) 실행위원 △현 기독교한국루터회 한국베델성서연구원 원장, 한국찬송가공회 이사

 

* [역경의 열매] 이홍렬 (2) 평생의 확신 "우리집은 예수 영접하고 복터진 집안"

 

자식을 잃은 슬픔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새벽에 꿈을 꾸셨다.

 

생전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꿈속에서 어머니는 오른쪽에 시퍼런 강물이 흐르는 낭떠러지 길을 따라 가고 계셨다. 길 가운데에는 성황당 같은 집이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흰 도포자락에 하얀 수염을 흩날리는 멋진 도사 한분이 어머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성냥을 주면서 그 성황당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어머니가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했더니 그 도사가 대신 불을 붙였다. 이윽고 잿더미로 변한 그 집의 흔적까지 낭떠러지 밑으로 쓸어버리라고 도사는 말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따랐더니 그 길이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고 마음까지 아주 시원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깊은 잠에서 깨셨을 때 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멀리서 뎅그렁 뎅그렁 들려왔다. 평소에도 울렸건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던 그 교회 종소리가 그날 새벽에는 어머니를 향해 어서 오라. 어서 내게 오라는 간절한 외침으로 들려왔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셨다. 정확히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주천감리교회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그날 밤 꿈속에 나타난 도사는 하나님이셨을 거야. 불에 타버린 성황당 건물은 아마도 내가 섬기던 모든 우상과 가슴 아픈 과거의 일들이 아닐까.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 집안에 이렇게 찾아오셨다. 어머니는 권사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셨고 형님은 장로님이셨다. 어머니의 자녀 중 목사가 두 사람이나 나왔다. 딸, 며느리, 사위들도 모두 직분을 갖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 손자 손녀들까지 집사가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필자는 가족이 모이면 늘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집안은 예수님 영접하고 복이 터졌다고. 그렇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안에 계시니 집안이 평안하고 화목하다. 지금까지 가족 간에 큰소리 한번 나온 적 없다. 가족들이 서로 화목하고 아끼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모두 예수님 덕분이다. 가난했지만 예수님 덕분에 화목했고 험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예수님 덕분에 모든 형제가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참 고마우신 우리 하나님이다.

 

주천면에서 교회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로 부모님은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지만 일찍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과 고통을 쉽게 이겨내지 못하셨다. 이런 이유로 자식을 강물에 묻은 주천면을 떠나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고향땅으로 돌아가기로 하셨다. 필자가 세 살 때였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당시의 충북 중원군 살미면 세성동이다. 별을 씻는다는 의미를 가진,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우리 가족의 살림살이는 피폐해져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농촌에서 밥술을 제대로 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자식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가족을 돌볼 여력도 없어 보이셨다.

 

떡국도 얻어먹던 시절이었다. 비교적 잘산다는 양조장집에서 설날에 떡국을 끓여 동네에 한 그릇씩 돌리면, 그 1년에 한 번 먹게 되는 떡국이 어찌나 맛있던지. 산나물, 밀가루 쑥떡, 고구마, 송홧가루, 보리죽 같은 것으로 근근이 풀칠을 하며 살았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조금씩 돈을 모아 세성동 주막거리에 어머니께서 구멍가게를 여셨다. 당연히 소주도 진열하고 팔았다. 다섯 살 때 나는 손님이 남겨둔 소주를 마시다가 들통나 호되게 회초리를 맞곤 했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3) 어머니, 비녀 꽂은 머리칼 잘라 팔아 참고서를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땅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가난함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식들을 철저하게 가르치시느라 무던히도 애쓰셨다. 매를 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가정을 일일이 돌보실 수 없어 가정마다 하나님의 대리자를 세우셨는데 그 존재가 어머니라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어머니는 그만큼 큰 존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께서 어느 참고서를 사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책을 살 돈이 없었다. 어머니께 돈을 달라고 말씀드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공교롭게도 얼마 뒤 시험을 봤는데 그 참고서에 실린 문제가 그대로 출제됐다. 책을 사서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은 100점이었으나 나는 95점이었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던지 집에 와서 울면서 떼를 썼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한숨을 쉬시며 돈을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은 비녀를 꽂은 어머니의 머리칼을 잘라 가발장수에게 팔고 받으신 것이었다.

 

중학생 때에는 참고서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돈이 없다는 답을 듣고 부아가 났다. 어머니께 대들었다. 일꾼에게 일을 시키려면 연장을 줘야지 연장도 안 주고 일을 시키면 어떡해라며 막 덤벼들었다. 안방에 벌러덩 누워 시위를 하다 그만 잠이 들었다.

 

갑자기 얼굴에 불이 확 나 눈을 떴다. 어머니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셨다. 더 맞지 않으려고 집을 뛰쳐나갔다. 충북 충주의 남산 밑에 조그만 저수지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까지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라 계모처럼 여겨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참고서도 안 사주고 아들을 이렇게 매 자국이 나도록 때리실 리 없었다. 저수지에 뛰어들 몹쓸 생각까지 했지만 손을 물에 담가보니 너무 차가웠다. 죽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해가 넘어가서야 집에 들어갔다. 웬일인지 어머니의 얼굴이 부드러워 보였다. 홍렬아! 밥 먹어라고 하시면서 평소처럼 상을 차려주셨다. 밥을 먹고 피곤했는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때 얼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내 얼굴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고 계셨다.

 

하나님,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참고서도 사주지 못하면서 매질까지 했습니다. 제가 능력이 없어 더 잘 가르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나는 짐짓 모른 체하며 잠자는 시늉을 했다. 어머니는 93세로 하늘로 떠나셨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뵈면 그때의 철없던 행동을 회개하고 눈물로 용서를 빌겠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머니 속을 썩인 건 일곱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별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어머니가 42세에 늦둥이를 막 낳으신 때였다. 내 증상이 더 심해지자 출산 후 3일도 안 된 몸으로 어머니는 나를 등에 둘러업고 20리 길을 걸어 충주 도립병원을 찾아가셨다.

 

당시 병원을 지키던 젊은 의사가 보기에 나는 귀찮고 성가신 환자였던 것 같았다. 그는 이 아이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으니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이나 해 먹이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 하나를 강물에 보낸 어머니인데 아들 또 하나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에게 매달리셨다. 그는 알약 몇 개를 처방해줬다고 한다. 도립병원 정문을 나온 뒤 어머니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계속 흘리셨다. 너마저 보낼 수는 없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다시 나를 업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4) 내 소중한 유년의 추억 개울 건너 작은 시골교회

 

어머니는 눈물을 계속 흘리시며 일곱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곧장 제중의원이라는 병원을 찾아가셨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누가 이 아이가 죽는다고 했느냐? 절대 죽지 않는다며 안절부절못하던 어머니를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한 달간 치료를 받은 나는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 무슨 병이었는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중에 어머니는 그때를 떠올리시며 목사가 된 아들에게 설교하시곤 했다. 사람이 말 한마디에 살고 말 한마디에 죽는다. 더구나 너는 목사이니 목사의 설교 한마디에 죽을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맞는 말씀이다. 내가 위로, 용기, 생명, 부활, 은총, 용서, 긍정, 소망 같은 것을 설교 주제로 삼아 평생 말씀을 전한 까닭이다. 목회를 하면서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던져주면 시들어 가던 영혼 안에서 생기가 솟아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어린 시절 나는 주로 형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개울 건너에 조그만 시골교회가 있었는데 살미순복음교회라고 불렸다. 반사 선생님은 소아마비장애를 가진 처녀였다. 당시에는 교회학교 교사를 반사라고 불렀다. 그 선생님은 컴퓨터나 복사기는 물론 주일학교 공과 책 한 권도 없던 시절에 유일한 교재인 성경책으로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누런 16절지 종이를 8번 접으셨다. 그리고 침을 발라가며 연필로 성경말씀을 8차례 반복해 적으셨다. 가위로 그것을 오린 뒤 꼬리표 같이 만드셨다. 주일 아침 어린이들이 교회에 나오면 성경 이야기를 하나씩 해준 뒤 꼬리표 성경말씀을 나눠주며 다음 주일까지 외워 오라고 하셨다.

 

외워 오는 어린이가 거의 없자 선생님은 숙제를 해 오면 눈깔사탕을 하나씩 나눠주신다고 했다. 그래도 숙제를 하는 어린이들은 별로 없었다. 필자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매주 성경요절 말씀을 꼬박꼬박 외워 갔다.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시작해서 무수히 많은 성경말씀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것이 당시 교회학교 교육의 거의 전부였다.

 

당연히 눈깔사탕은 내 몫이었다. 사탕을 먹고 싶은 친구들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자랑스럽게 친구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딱 한 번씩만 혀를 돌려 빨아먹게 했다. 혀를 두 번 돌리면 반칙이었다. 반칙을 하면 다음 차례에서 제외시켰다. 물론 사탕을 우지끈 깨물어 자근자근 씹어 먹는 영광은 내 차지였다.

 

어느 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성탄축하 예배, 떡국 파티 등으로 온 교회가 분주했다. 성탄절 전날이면 항상 어른들과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모여 성탄축하 발표회를 열었다. 교회에서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성도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합창했다.

 

동물 모양의 탈을 쓰고 나와 아기 예수님께 절을 하고 대사를 했던 연극 발표회가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덩치가 크고 뚱뚱했던 필자는 돼지 역할을 맡았다. 무엇인가 대사를 해야 했는데 예수님께 드릴 말씀이 마땅치 않았다. 궁리 끝에 이런 말씀을 드렸다.

 

아기 예수님, 저는 돼지예요. 사람들은 저보고 더럽다고 해요. 욕심꾸러기라고 해요. 살만 뒤룩뒤룩 쪘다고 흉을 봐요. 아기 예수님 저는 제 몸밖에 드릴 것이 없어서 이 몸을 몽땅 드립니다. 제 몸을 바치니 삼겹살 맛있게 구워 드세요. 제 족발도 맛있다고 하네요.

 

교회는 한바탕 웃음으로 뒤집어졌다. 돌이켜보면 특별한 재주도 없고 그저 우직하게 몸 바쳐 주의 일을 하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돼지의 삶을 살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 감사하게도 그 돼지의 삶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5) 어머니, 새우젓 장사 어려움 속에도 십일조 체득시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 충주 시내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생 때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등록금을 제때 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두 동생을 형수님께 맡기고 나와 함께 지냈다. 엄마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순열, 금열 두 동생에게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머니는 새우젓 장사를 시작하셨다. 새우젓 통을 들고 온 동네를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셨다. 장사 경험이 없는 어머니의 새우젓이 팔릴 리 없었다. 찾아가는 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한 사발도 팔지 못한 어머니는 해거름에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장사가 잘 되도록 해 주세요라고 무작정 기도했다고 하셨다.

 

번번이 허탕을 치던 어머니는 판매 전략을 바꾸셨다. 어차피 집에 남겨 가 봤자 별 쓸 일도 없는 새우젓이니 막 퍼주시기로 한 것이다. 인심이 후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새우젓 한 통을 30분 만에 다 팔 정도로 새우젓 장사는 번창했다.

 

집에 돌아오시면 항상 어머니는 나를 부르신 뒤 전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동전과 지폐를 나눠 놓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전부 얼마나 될까? 4600원이요. 새우젓 사는 데 3000원이 들었으니까 얼마가 남지? 1600원. 1600원의 10분의 1은? 160원이죠.

 

그러면 어머니는 160원을 가장 깨끗한 돈으로 따로 떼어서 옆으로 제쳐놓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160원을 봉투에 넣어 주신 뒤 주일에 꼭 교회 헌금함에 집어넣도록 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신 것이다.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가지셨던 어머니의 이런 교육은 나중에 아들과 딸이 목사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는 서울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등록금에다 하숙비와 용돈을 감당할 만한 사정이 못 됐다. 고민을 하던 때 중학교 선생님께서 현재 철도전문대학의 전신인 철도고등학교로 진학해 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국비로 교육받고 취직까지 문제없으니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부모님 허락을 받아 철도고등학교에 응시했다. 꼭 그 학교에 가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시 열차사고가 크게 났는데 그 시신들을 전부 철도고등학교 운동장에 안치했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다니면서 그 시신들을 본 것이다. 시험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때 철도고교 학생이 됐다면 지금쯤 멋진 기관사가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입학금이었다. 지금 돈으로 12만원 정도 되는 입학금 6000원을 마련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애지중지하던 재봉틀을 전당포에 맡겨 마감 마지막 날에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다. 아버지께 그 돈을 전해 주면서 오늘 저녁 5시 안으로 우체국에 가서 꼭 송금해 주세요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런데 아뿔싸, 내 아버지여…. 아버지는 그 돈을 속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다가 친구를 만나 한잔 하신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우체국에 도착하셨으나 마감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 있었다. 어머니는 다음 날이라도 그 입학금을 들고 철도고등학교로 가서 사정을 해 보자고 하셨다.

 

웬일인지 나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루 이틀 미적거리는 사이에 미등록 입학취소가 됐다. 철도고교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친구들이 대부분 고교 진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낙심했다. 그러다 검정고시에 대해 알게 됐다. 잘만 하면 고교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바로 대학에 가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희망이 다시 생겨났다.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서울 응봉동에 있는 판잣집에서 살면서 장충동, 동대문을 거쳐 종로2가까지 걸어서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6) 고교시절 과외하며 10의 5조… 주님은 더 큰 선물을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영어와 수학 때문에 애를 먹었다. 여러 시험과목 가운데 하나라도 기준 점수에 미달하면 불합격이었는데 두 과목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2년간 도전하다 실패하고 충주로 다시 내려갔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큰누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동창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문을 두드릴 때 나는 다시 머리를 박박 깎고 두세 살 어린 후배들과 충주고등학교를 다녔다.

 

2년간 선행학습을 한 덕분에 나는 고교 1학년 때 전교 1등을 하는 쾌거(?)를 이뤘다. 공부를 곧잘 한다는 소문이 나자 교회의 한 집사님으로부터 과외교습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동안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며 돈을 벌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미국의 워너메이커백화점 설립자인 존 워너메이커를 예로 들며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워너메이커는 십일조 이상을 하며 살았는데도 막대한 부를 누리며 살았다는 말씀이었다. 워너메이커처럼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것으로서의 한 예를 드신 것이다.

 

아, 십일조라는 게 그런 것이구나라고 나는 되뇌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1만5000원 정도를 받았고 10의 9조를 드리려고 했는데 교통비가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께 양해를 구하고 10의 5조만 드리기로 했다. 나름대로 정말 큰 결심이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하나님께 드리느냐고 묻지는 마시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고는 있다. 큰돈은 아니지만 내가 세상을 떠난 뒤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좋은 일에 쓰도록 하겠다는 약정서를 얼마 전 총회에 제출했다. 스스로 밝히기는 낯 뜨거운 얘기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리고 싶은 내 평생의 진심을 담아 약정서를 썼다.

 

아무튼 고교 2학년 때 과외교사를 그만뒀다. 이후 사례금의 절반을 헌금으로 드린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린 학생의 그 10의 5조를 잊지 않으셨던 것 같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필자를 부르셨다. 고교 3학년생들을 위한 학습지를 나눠주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몇 명이 구독할지 파악해 학습지를 만드는 회사에 알려주고 구독료를 걷어 보내주는 일이었다.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대박이었다. 고3 학생 200여명뿐 아니라 다른 학년 학생들까지 신청해 구독자는 400명 정도 됐다. 가정교사와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이 생겼다. 수업료를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 루터신학원 등 10년의 신학수업 과정 대부분을 장학금으로 공부하게 해주셨다. 어떤 때는 두 곳에서 장학금을 받아 막내 동생의 대학등록금에 보태고도 돈이 남아 스테레오라디오를 사서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또 부임 당시 1000만원의 빚이 있던 교회에서 시무했는데 떠날 때에는 6000만원을 남겨놓을 수 있었다. 총회장이 됐을 때에는 IMF 외환위기 직후였기 때문에 총회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면 돈이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임기를 마쳤을 때에는 12억원의 헌금을 후임 총회장에게 전해드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늘 축복으로 필자를 인도해주신 것 같다. 세상에서는 십일조를 헌금을 거두려는 얄팍한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필자의 생각이 전혀 다른 것은 이런 경험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7) 성직자의 길 권유받고 40일 동안 철야기도를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을 때 담임목사님이 조심스레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홍렬 선생한테 다른 뜻이 있으신 것 같아. 신학을 해서 성직자의 길을 가보는 건 어떨까. 과연 부족한 내가 성직자의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이 커졌다. 40일 동안 철야기도를 했다.

 

38일째 새벽기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래, 그 길로 가자라는 결심이 생겼다. 내 능력에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는데도 그런 용기가 뜨겁게 솟아올랐다.

 

다만 평범한 부모님들처럼 성실히 공부해서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셨던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다. 두 분 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지만 목회자가 되겠다는 아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 마음은 그러나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부모님께는 말씀을 드리지 않고 밤낮없이 공부를 해 연세대 신과대학에 합격했다. 부모님은 적잖이 실망하시는 눈치였으나 결국 내 뜻을 존중해 주셨다. 기왕에 목회자가 되기로 한 이상 바르고 참된 주의 종이 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1975년에 대학생이 된 뒤 채 한 달도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을 때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부랴부랴 휴학을 하고 입대해 강원도 홍천의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졸병이었지만 신학생 신분임을 감안해 주일에는 모든 근무와 작업에서 열외를 시켜주었다. 제대를 1년쯤 앞뒀을 때에는 병사 신우회 회장도 됐다. 사단교회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1년치 봉급을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이 소문이 사단장에게도 알려져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됐다.

 

검정고시를 본다고 늦어진 데다 군 복무까지 마치고 대학에 돌아오니 신입생들보다 여섯 살 정도 많은 나이가 돼 있었다. 이모 댁에서 신세를 지고 살던 대학생 때에도 생활비 문제로 고생을 했다. 버스 토큰은 한두 달치를 미리 사둬서 문제가 없었지만 점심이 문제였다. 도시락을 싸 달라고 할 염치가 없었다. 300원짜리 자장면이나 600원짜리 밥은 사치였다.

 

매점에서 50원짜리 단팥빵을 하나 사서 주머니에 넣고는 조금씩 아껴서 먹었다. 그때 점심시간은 왜 그리 길던지, 아무리 빵을 나눠 먹어도 시간은 지나가지 않았다. 배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연세대 신과대학 건물인 한경관 지하의 화장실로 내려가서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공복감을 누그러뜨렸다.

 

하루는 캠퍼스 뒷동산에 올라가 빵을 먹으며 하나님께 푸념을 했다. 하나님, 사람을 불러 일을 시켜도 밥은 먹이는데 주의 종을 만드시려면 배는 고프지 않게 해 주셔야죠라며 하소연을 했다. 하나님은 배고프냐? 배고파라. 그리고 배고픈 양떼의 심정을 헤아려라. 네가 진정 배고파보지 않고 어떻게 배고픈 양떼를 위해 설교하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여름방학 때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북 경주시 안강읍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공장을 짓는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그 일을 함께 했다. 허름한 막사에서 지내면서 리어카로 시멘트와 모래, 자갈 등을 한 곳에 모아놓고 콘크리트 반죽을 만들어 나르는 일이었다.

 

한 달 정도 일을 한 뒤 서울로 올라가기 전 아버지는 막사 한 구석으로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의 품삯을 모두 내게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이 아비가 못나서 막노동 고생까지 시키는구나. 아비를 용서해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한때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흙 묻은 돈 봉투를 내미시는 모습에 뭉클했다. 믿음 안에서 아버지의 지난 세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8) 학비·잠자리 없어 神學 포기 순간 루터교회서…

 

공사 현장에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이모 댁에서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종사촌이 곧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갈 곳이 없어 난감했다. 교회 사무실 바닥이라도 좋으니 잠만 재워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면서 교파를 가리지 않고 여러 교회를 찾아가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다시 충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그때 신과대학을 함께 다닌 전대환이라는 친구가 솔깃한 말을 해줬다. 루터교회가 연세대 신과대학과 위탁교육협정을 맺고 있어서 루터교에 가면 등록금이나 기숙사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했다.

 

망설일 겨를도 없었다. 당시 루터신학원장이던 메이날드 도로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사정을 말씀드렸고 다음에 다시 찾아뵙고 정식 절차를 밟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교파였다. 당시 감리교회에 다니던 필자는 부끄럽게도 루터교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생소하고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루터교회로 가지 않고 장로교나 감리교, 순복음교회로 가려고 계속 숙소를 알아보고 다녔다.

 

그러다 도로 목사님과 약속한 날짜를 넘겨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며 약속 날짜를 좀 미루자고 말씀드렸으면 됐을 텐데 고지식하게도 그런 임기응변을 하지 못했다.

 

결국 숙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약속도 지키지 않는 신학생이라는 꾸지람을 들을 각오를 하고 도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허락하신다면 찾아뵙겠습니다고 말씀드렸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도로 목사님께서 감사하게도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루터신학원(Lutheran Theological Academy)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연세대에서, 밤에는 루터신학원에서 공부했다. 연세대 등록금은 루터교에서 지급해줬다. 루터신학원에서는 돈을 들이지 않고 기숙사에서 지내며 공부할 수 있었다.

 

그때 루터신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의 얼굴이 새삼 떠오른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루터교단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김철환 박일영 윤병상 한영복 목사 등이다. 김 목사는 현재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이다. 박 목사는 루터대 총장을 지냈으며 한 목사는 현재 부총회장이다. 윤 목사를 비롯한 다른 많은 친구들도 각자 진로를 따라서 학계 또는 목회 현장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

 

루터교단 덕분에 걱정 없는 신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대조동루터교회, 중앙루터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목회 실습을 하며 행복한 신학생 시절을 보냈다. 생활이 안정되자 공부에도 능률이 올랐다. 신과대학 4년 과정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어느 날 연세대 신과대학장이던 존경하는 박준서 박사께서 필자를 불렀다. 구약학을 전공해 신학자의 길을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주셨다. 외국으로 유학갈 수도 있고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터교회를 배신할 수 없었다. 또 학교보다는 목회 현장에서 일하겠다고 결심을 한 터라 정중히 거절했다. 박 교수님께는 지금도 죄송스러운 마음뿐이다.

 

루터교회는 필자에게 신학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줬을 뿐 아니라 목사가 되게 해줬다. 설사 루터교회가 나를 쫓아내는 일이 있다고 해도 나는 내 어머니 같은 루터교단을 배신할 수 없다.

 

만약 루터교단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조동루터교회에서 전도사 실습을 할 때 아내를 만났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9) 다툼 있던 교회로 첫 부임… 신혼의 꿈은 주님 몫으로

 

1982년 4월 서울 대조동루터교회에서 전도사 실습을 하던 때 만난 아내와 결혼했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전도사 실습을 하면서 한동안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서울 중앙루터교회에서 전도사 실습을 할 때 담임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뜻밖의 소식을 알려주셨다. 오늘 저녁부터 이홍렬 전도사는 총회 결정에 따라 남부루터교회의 담임전도사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한마디 귀띔도 없이 이런 중요한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아찔했다. 단독 목회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발령을 받다니…. 뭐라고 항의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주의 종이라는 사람이 황량한 아골 골짜기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발령을 받은 날, 곧장 저녁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울 동작구 등용로에 있는 남부루터교회를 찾아갔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싸늘했다. 교회 제직들과 목회자 사이에 깊은 갈등이 생겨 전임자가 목회지를 옮기게 됐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지 4개월 된 신학원생 신분으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교회였다. 교회는 한마디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어르신들은 담임목회자를 내쫓다시피 해서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청년들은 그를 옹호했다. 회의 때마다 고성이 오갔다. 예배 시간은 썰렁했고 주일예배 때마다 교인 수는 줄어들었다. 한 분뿐인 권사님은 이꼴 저꼴 보기 싫다면서 한숨을 쉬셨다.

 

교인들이 나를 담임목회자로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어르신 성도들은 마땅치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초짜 목회자를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교단 총회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던 필자는 하나님께서 척박한 환경에서 단련시키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며 정말 열심히 사역했다. 연세대 신학대학원과 루터신학원에서 공부하며 심방을 다니고 설교를 준비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별 소득은 없었다. 설상가상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경기도 가평으로 수련회를 갔다가 경찰 조사를 받는 일도 벌어졌다. 한밤중에 개울가에서 기타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다 그 지역 주민들과 다툼이 벌어졌다고 했다.

 

교회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는 교회가 풍요로울 수는 없었다. 교회에 빚도 많았다. 부임 전 교회에서 온풍기를 할부로 들여놨는데 한 달 치만 할부금을 납부한 상황이었다. 교회 승합차도 갚아야 할 할부금이 산더미 같았고 총회에서 진 빚도 고스란히 후임 목회자의 몫이었다.

 

사례비로 받은 20만원은 난방비 등 교회 운영비로 쓰면 남는 게 없었다. 감사하게도 당시 재정을 맡은 곽일남 집사님을 비롯해 여러 성도들께서 도움을 주셨다.

 

나는 어떻게든 교회를 회복시키겠다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서울 용산의 미군부대에 들어가 한국인 군인들을 위해 베델성서연구 교재를 놓고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당시 부대 측으로부터 한 달에 120달러의 수고비를 받아 교회 재정으로 충당했다. 교인들에게는 교단법에 의해 받게 돼 있는 퇴직금도 사양하겠다고 선언했다.

 

목회자야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커녕 팍팍한 생활에 시달리던 아내의 까맣게 타들어가던 속마음은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살림을 꾸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느 날 아내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조용히 불렀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0) 교회 살림 어려움에 아내 아이 분유값만이라도

 

힘겹게 살림을 꾸려가던 아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군부대에서 받는 사례금을 조금만 떼어서 생활비에 보태면 안 될까. 애기 분유값은 있어야지…. 십일조를 해도 빠듯한 살림에 그보다 훨씬 많은 것까지 희생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아내에게는 몹시 미안했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 목사는 교회 곳간을 채우는 일을 먼저 할 수밖에 없으니까. 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인 줄 잘 알잖아. 나는 한술 더 떠서 백일이나 돌 때 들어온 금붙이와 아내의 패물을 팔아 교회 재정에 보탰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나로서도 힘든 선택을 한 것이다.

 

하루는 아내가 눈물을 쏟으며 하소연했다. 이렇게 힘들게 목회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왜 이 고생을 사서 해요. 당신 적성은 신학을 가르치는 쪽에 조금 더 맞지 않느냐.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교회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도 흔들렸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여쭙기로 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목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데 괜한 고집을 피우고 있지는 않은지, 기도를 하며 답을 찾기로 했다.

 

교회 사무실의 콘크리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 밤낮없이 기도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40일이 거의 다 됐을 때다. 신학의 길을 가야 할지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와 비슷한 뜨거운 무언가가 다시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눈물이 나면서도 황홀한 그 감동은 어느 논리적인 말씀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르침을 주시는 듯했다. 40년 이상 목회를 할 놈이 고작 1년 좀 넘게 고생했다고 어디를 도망치려 하느냐. 호된 꾸지람을 들은 것 같았다. 나는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가슴 한편에 시나브로 싸두었던 보따리를 당장 풀고 교회로 돌아가 더 열정적으로 일해야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제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찹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위태로웠던 우리 교회와 가정을 붙들어주셨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20년 동안 겪을 어려움을 2년간 압축해서 겪게 해주신 것 같다. 교회의 분쟁과 갈등은 차츰 회복됐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던 교인들이 돌아왔고 꾸준히 새 교인들이 찾아왔다. 어느새 성도 수는 120여명으로 늘어 있었다.

 

예산도 늘기 시작했다. 빚만 1000만원이 넘던 교회 재정은 6000여만원을 선교 및 장학 기금으로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롭게 됐다.

 

교회가 안정되면서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을 열 수 있었다. 베델성서연구를 토대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작은 교회인데도 여러 차례 3000여명을 초청한 가운데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유명 목회자들을 초청해 2년에 한 번 전도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막도 옥토로 변한다. 문을 닫을 뻔했던 교회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짜릿한 감동을 느낀다. 성도님들은 참으로 열과 성을 다해 부족한 목사를 따라주었다. 한 집사님은 목사 사택을 짓는 동안 자신의 안방을 쓰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그분들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남부루터교회 동창회를 만들겠다고 기도했다.

 

하나님 은혜로 남부루터교회에서 19년8개월 동안 목회했다. 목회 초기의 어려움은 평생 목회의 자양분이 됐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사랑과 위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1) 청춘 바친 남부루터교회… 성도들 얼굴 가슴에 남아

 

남부루터교회에서 목회하며 참으로 감사한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필자의 가슴 속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성도분들의 이름과 얼굴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부족하기만 한 주의 종을 따르겠다며 교회 사역에 헌신해준 이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목회자가 된 뒤 처음 받은 선물은 3㎏짜리 설탕이다. 고이경 집사님이 주셨다. 그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설탕 봉지를 뜯어보지 않고 6개월간 보관만 했다. 용달차를 몰던 김경택 장로님은 하루에 1000원씩 모아 필자에게 뷔페 식사를 사주셨다. 김 장로님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정성을 모아 식사 대접을 한 번 해드리고 싶었다며 멋쩍게 웃으셨다.

 

목사님께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면서 여러 번 넥타이를 선물해주신 임옥진 권사님, 자녀들에게 받은 용돈을 목회자에게 슬며시 쥐어주시던 손옥순 권사님도 생각난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정순동 집사님과 형제분들,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주셨던 홍성대 장로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다른 교인들의 기쁨과 슬픔도 늘 자기 것처럼 함께 나누었던 유희경 유소선 전용완 유선이 김선자 권사님….

 

필자가 중매를 해 결혼하신 박광선 선생님도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박 선생님은 임신을 했는데 병원에 가기 전에 목사님의 기도를 꼭 받고 싶다면서 교회에 찾아왔다. 나는 요청받은 대로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출산이 임박했을 무렵 기도를 또 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기도제목이 조금 바뀌었다. 순산하게 해주시되 반드시 월요일 아니면 화요일에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날짜를 정해놓고 태어나는 아기는 없다. 목사가 출산 날짜를 맞춰 달라는 기도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세상적 필요만을 충족시키거나 무속신앙에서나 받드는 좋은 날에 출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러나 차근차근 사정을 들어보니 그런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입원 및 산후조리 기간을 감안하면 수요일 이후에 낳았을 경우 주일예배를 세 차례나 빠지게 된다고 했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낳으면 주일예배를 두 번만 빠질 수 있다는 것. 박 선생님은 한 번이라도 더 주일성수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성도님의 그 아름다운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했고 은혜롭게도 출산 후 두 번만 주일예배를 빠질 수 있었다.

 

30대 후반의 한 여성은 교회에서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심방을 가보니 집안 분위기도 썰렁했다. 거실 한쪽의 수족관에서 노니는 열대어들을 제외하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성도의 남편은 열대어를 기르는 데 취미를 붙여 자식 없는 슬픔을 달랜다고 했다. 부부 모두 건강한데 결혼 이후 7년간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나에게 기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기도했고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할 것을 권면했다. 몇 주 후에 그 성도는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교회에 찾아와 인사를 했다. 목사님, 기도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드디어 아기를 갖게 됐어요. 열 달 후 건강하게 태어난 사내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믿음의 선수가 되기를 기도하며 김선수라고 지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준수하고 건장한 청년 크리스천이 돼 있으리라.

 

늘 가까이에서 함께 웃고 눈물을 흘려준 교인들과 지낼 수 있었기에 내 청춘을 다 바친 남부루터교회에서의 목회는 은혜로웠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음에 틀림없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2) 48세에 총회장 당선… 365일 중 120여일 출장을

 

남부루터교회에서 보람을 느끼며 목회를 하던 때 교단 본부에서 법과 원칙을 어기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다른 의견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었겠지만 필자에게는 이론의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입바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귀중한 지면을 빌려 그때 견해를 달리 하셨던 분들과 필자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셨을 분들에게 용서를 빈다.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교단 정치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이런저런 지적을 계속 하다 보니 정치 목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바에야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도 발동했다.

 

총회장에 출마했다. 3차 투표 끝에 한 표 차이로 기독교한국루터회 4대 총회장에 당선됐다. 2001년 10월, 필자 나이 48세 때 총회장이 된 것이다. 교단에 50, 60대 어르신들이 계신데 새파란 놈이 총회장에 당선됐으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이 꽤 있으셨을 것 같다.

 

총회장으로서 교단 내에서, 교단 밖의 연합 사업에서, 국제단체 및 회의 등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기독교방송과 성서공회, 찬송가공회의 사역에다 우리 교단의 대외적인 섬김 사역인 베델성서연구원 일까지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루터교회와 선교 교류 협정을 맺는 등 1년 365일 가운데 120여일은 출장 일정이었다.

 

CEO와 비슷한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가 많은 총회장 직무는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한 때가 많았다. 소심한 성격 탓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목회 현장에서 느끼던 기쁨이나 감동을 잘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특히 총회장 직무상 여러 청원을 받게 되는데 대부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정당한 거절이었지만 섭섭함을 느끼셨을 분의 모습을 떠올리며 괴로웠다. 또 목회자로서 영성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목회 현장에 있던 때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밀려오곤 했다.

 

총회장 시절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손가락과 다리가 저렸고 걸음을 걸어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느낌이었다. 증상은 점차 심해졌다. 목과 허리, 다리의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아갔다. 담당의사는 경추관협착증이라고 진단하면서 잘못하면 하체마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8시간30분이 걸린 큰 수술을 받았다. 30여일 입원을 하면서 총회장 직무는 계속했다. 본부 직원들이 결재서류를 병원으로 가지고 왔다. 자기 건강도 잘 못 챙긴 총회장을 돕느라 고생해준 본부 직원뿐 아니라 몸집이 큰 남편을 간병해준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수술 후 첫 주일예배를 병원에 있는 교회에서 드렸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필자는 세 가지를 기도했다. 첫째는 컴퓨터 타이핑을 할 수 있게 해주시고, 둘째는 운전을 할 수 있게 해주시고, 셋째는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수술이 끝난 뒤 후유증으로 5급 장애 판정을 받게 됐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내 생명을 지켜주셨을 뿐 아니라 세 가지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현금 3만원과 함께 메모를 남겼다. 내 곁에서 고생한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내용의 메모였다. 이후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면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는 습관이 생겼지만 아직까지 그런 메모를 남기지 못해 미안하다. 별 탈 없이 4년간의 총회장 임기를 마쳤고 재선에 도전했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3·끝) 평생 부족한 종과 함께 한 하나님 감사합니다

 

총회장을 맡기 전 담임목사직을 사임했고 임기를 마친 뒤에는 어떤 역할도 약속된 게 없었다.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총회장 선거에 다시 나선 것이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내게 잘 어울리지 않은 무거운 직무를 모두 벗어버렸다는 홀가분함도 있었지만 생계가 문제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총회장을 지냈기 때문에 정년까지 19년이나 남아있었다. 담임목사 청빙 이야기도 오갔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다. 고향 마을까지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충북 제천으로 내려가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필자가 시무했던 남부루터교회를 다니던 최해련 윤영은 권사님, 지영일 장로님 내외분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찾아와 눈물을 글썽이며 배웅해주셨다.

 

2006년 1월 1일 아내와 단둘이 예배를 드리고 교회 개척을 준비했다. 작은 교단의 개척교회가 살아남기는 어려운 환경이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불면증까지 왔다.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이대로 포기할지 고민하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반대하고 나섰다. 훨씬 더 힘들 때도 잘 이겨냈는데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아내가 잠든 뒤 거실 벽에 붙여 놓은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젠 더 이상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습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나님께선 부족한 종의 눈물을 안타깝게 보신 듯했다. 얼마 뒤 동생인 이금렬 권사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됐다. 다른 가족과 성도들도 교회 개척에 힘을 보탰고 총회 본부의 도움을 받아 제천시 세명로의 세명대학교 정문 앞에 푸른하늘루터교회를 개척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망을 품고 있는 교회가 되자는 뜻에서 교회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역 이외에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희망과 용기를 주제로 설교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복음 전파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목회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대학생뿐 아니라 대학 교수, 다른 지역에 사는 주민들도 출석하기 시작하는 등 교회는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언제나 푸른 하늘이라는 선교 책자를 만들어 제천 시내 곳곳에서 나눠드렸다. 8년이 지난 뒤 교회는 완전히 자립했다. 안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한 목회가 또 어디에 있을까.

 

지난해 12월 총회 실행위원회는 필자를 다시 서울로 올라오도록 했다. 아끼는 동료이자 친구인 김철환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이 한국베델성서연구원을 맡아달라며 원장 임명장을 준 것이다. 지난 1월 10여년 만에 총회 사무실로 출근해 보니 유영탁, 손경애, 최태훈 등 반가운 사람들이 여전히 총회 업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필자는 지금 한국베델성서연구원 사무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곳이 은퇴 전 마지막 사역지가 될 것 같다. 양떼들을 섬기던 그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고 있다. 물론 평생을 부족한 종과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긴 이야기를 마칠 때다. 목회 여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를 끝까지 인내하며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어머니 같은, 나의 사랑하는 교단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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