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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328. [역경의 열매] 정수영 (1-13) 전쟁터 같은 수술실이 내겐 특별한 예배처소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9.13|조회수73 목록 댓글 0



***간증: 1328. [역경의 열매] 정수영 (1-13) 전쟁터 같은 수술실이 내겐 특별한 예배처소

 

1949년 태어나자마자 6·25 아픔이… 아버지와 형 일찍 잃고 의과대 진학

 

최근 일시 귀국한 정수영 박사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지난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수술대 위에는 의식이 없는 환자가 누워 있다. 푸른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마취제가 혈관을 타고 들어가면 메스를 잡은 의사는 촌각을 다투며 환자의 가슴을 연다. 날카로운 메스를 든 의사의 눈과 손은 사람의 손 같지 않다. 죽어가는 한 영혼의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 환부를 자르며 도려내고 꿰맨다.

 

TV드라마에서 종종 연출되는 심장 수술실 풍경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실제 수술실은 칼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긴장감과 공포감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 재봉틀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심장외과 의사다.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 오칼라심장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에게 수술실은 특별한 예배장소이다. 매순간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수술실에는 긴박함 속에서도 고요와 평화가 흐른다.

 

1949년 대구시 두산동에서 4남 3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시라고는 하지만 시골이나 다름없는 변두리였다. 6·25한국전쟁은 금수강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우리들 전후세대들의 마음에 남기고 간 절망과 이별, 상실의 아픔은 강산이 메마른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한 때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동네 친구의 절반이 학업을 중단했다. 친구 중 대학을 간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경험했다. 하늘같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의사도 무슨 병인지 모른다고 했다.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님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큰형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아, 인생은 참, 슬프고 쓸쓸한 것이구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아버님과 먼저 떠나보낸 아들을 생각하며 통곡하셨다. 나는 책가방을 던져놓고 뒷산에 올라가 대구 수성 들판을 내려다보고 수심에 젖어들었다. 어머님에게 이렇게 큰 슬픔을 안긴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 진로 문제를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겨울 아침 등굣길에 타고 가던 버스가 신호등에 서 있는 동안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리어카에 솜이불을 덮어쓴 환자와 보호자가 병원 문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의료 혜택도 못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이 생각이 나서였다. 내가 의사라면 좋겠는데…. 그날 등굣길의 풍경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전쟁 직후의 시대 상황과 슬픈 가족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의과대에 입학했지만 기독교를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빠져들었다. 신촌 거리를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카뮈, 사르트르, 니체의 철학을 탐구하며 수없는 날을 방황하면서 보냈다. 문학을 한답시고 문우들과 술통을 끼고 살았다.

 

3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1978년 10월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 5년간 수련 과정을 잘 마친 뒤 모교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리라는 청운의 꿈에 부풀었다. 주머니엔 단돈 700달러와 미국 의사자격증밖에 없었지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의기양양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수영 (1) 전쟁터 같은 수술실이 내겐 특별한 예배처소

* [역경의 열매] 정수영 (2) 낯선 미국서의 혼돈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역경의 열매] 정수영 (3) 첫 성경공부 다음날 "세상이 왜 이리 아름답지?"

* [역경의 열매] 정수영 (4) "주님, 당신이 행한 기적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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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9년 대구 출생.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세계누가선교회 회장, 컴패션 얼라이언스 이사장 역임. 현재 미주한인의료선교협회(KAMHC) 회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에비슨 인터내셔널 스칼라십 이사, 한국심장재단 북한위원회 이사. 자마(JAMA)와 코스타(KOSTA) 강사.

 

***[역경의 열매] 정수영 (2) 낯선 미국서의 혼돈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미국 온 지 한 달 만에 외과 조수 취업… 귀국 기회 놓치자 정체성 혼란 몰려와

 

심장수술에 들어가기 전 직원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의술을 펼치고 있는 정수영 박사(왼쪽).

 

미국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외과 조수 자리를 구했다. 어렵사리 구한 외과 조수 자리였지만 막상 병원에서 조수가 되고 보니 생각보다 대우가 형편없었다. 특히 닥터 정이 아닌 미스터 정이라고 부르는데 몹시 실망했다. 더군다나 병원 규정상 조수는 의사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나는 내년에 수련의 과정에 들어가기까지 잠시 조수로 일할 뿐입니다. 누가 묻지 않은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들이 귀 기울일 만큼 말을 잘하지도 못했다.

 

외롭고 서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뉴욕에서 시작한 일반외과 수련을 마치고 텍사스 심장센터의 혈관외과 수련을 받으러 휴스턴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그린 미래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서 마냥 들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이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일반외과 수련을 받고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모교의 과장 선생님을 만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그의 권유로 혈관외과 훈련을 받으러 텍사스 심장센터로 온 것인데, 그 사이 모교의 과장 선생님이 바뀌는 바람에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것이었다. 하루 빨리 이 외로운 미국생활을 창산하기를 손꼽던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영어도 겨우 먹고사는 데 지장없을 정도만 배운 터였다.

 

한 번 엽전은 평생 엽전이란 말처럼 나는 한국에서 30년을 살면서 입맛도, 생각도 굳을 대로 굳어진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 아닌가. 미국인으로 살기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국의 사회적인 이슈들에 감 놔라 배 놔라 메아리도 없는 훈수를 두며 분노하고 감격하던 나였다. 심지어 고국의 고추 값, 배추 값까지 꿰차고 있을 만큼 나는 내가 떠나온 고향에 관심이 많았고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그리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니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울 만큼 낙심이 컸다. 나는 대학 시절 똘배문학회를 만들어 토요일 오후면 친구들과 술집에 모여 앉아 문학을 얘기하고 사회 정치를 논하곤 했다. 술을 무척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혼자 술을 먹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선 상처받은 자존심을 부여안고 혼자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더니 도무지 이 질문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닥터 정으로 살다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이 무인도 같은 곳에 버려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그 무렵 아내는 옆집에 사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서울에 있을 때 가끔 교회나 성당에 들른 적은 있지만 믿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아내가 같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학창시절 기독교는 집단 정신질환의 한 현상인가?라는 제목으로 열띤 토론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겠는가. 대신 자동차를 구입하고부터는 운전을 해서 아내를 교회까지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려오곤 했다.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가 번거롭기도 하고, 아내의 간청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교회에 들어가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이방인의 나라 미국보다 더 낯설고 이절적인 기분이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 부르짖는 모습은 정말이지 집단 정신병자들 같았다. 교인들은 없는 신을 있다고 우기며 예배하는 나약하고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 문득 만일 신이 있다면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순간 내 모습에 깜짝 놀라고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예배당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3) 첫 성경공부 다음날 세상이 왜 이리 아름답지?

 

아내 동창 모임 갔다가 우연히 참가… 성령의 초자연적인 임재하심 체험해

 

상에 성경공부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 간호사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정수영 박사.

 

여보, 고등학교 동창이 성경공부 모임에 초대했는데 같이 가시면 좋겠는데요.

 

아내의 이번 제안에도 고개를 돌리며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이미 손에는 자동차 키가 들려 있었다. 아내를 그 집에 데려다주러 나섰고 도착하니 30여명이 모였는데 식사를 하는지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내에게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하고 집을 나왔는데 다시 우리 집에 갔다가 돌아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구멍가게가 보여서 캔맥주와 담배를 사서 그 집 마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아내를 기다렸다. 밤 10시쯤 모임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을 배웅하러 나온 주인이 나를 보고는 잠깐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세요라고 하기에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냥 들어갔다.

 

그는 정말 달변이었다. 성경의 이런 저런 내용들을 설명하더니 다니엘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예언서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인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것들이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새벽 4시가 넘도록 성경 얘기는 계속됐다. 그는 성경의 여기저기를 찾으며 설명해 나가더니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5장 25절을 같이 읽자고 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내가 그를 따라 이 말씀을 읽자 그는 뜻을 해석해 주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오늘 내가 전한 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글쎄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같은데요.

 

그러면 저와 함께 기도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그를 따라 기도한 후 그 집을 나서는데 어쩐지 내가 그 집에 들어올 때와는 달라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안개가 자욱한 뉴욕의 새벽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운전대를 잡은 내 손이 떨렸다. 어쩌면 이것이 그동안 내가 말한 철학적인 구원이니 시적인 구원이니 하는 것들의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 밤에 생각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뉴욕 자마이카라는 동네는 아주 험악한 곳이었다. 공원에는 늘 주정뱅이와 홈리스들, 마약에 찌든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매우 위험해 보였기 때문에 한 번도 밖을 돌아다닌 적이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아침, 밤새 성경 말씀을 들은 뒤 집에 돌아와 두 시간 눈을 붙이고 병원에 출근하려고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그 공원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나무들이 살아서 춤을 추는 것 같았고 공원을 이고 있는 하늘도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갑자기 딴 세상에 온 거처럼 어리둥절했다. 그 순간 어젯밤 그 집에서 읽었던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 순간 눈이 축축해지면서 지금까지 내 눈을 새롭게 뜨게 하시고 내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는 분이 있구나하는 깨달음과 더불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내 메마른 가슴에 스며들었다.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초자연적으로 임재하심을 체험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집 앞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니! 내가 거듭난 생명이 되다니! 내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그 옛날 어릴 적 기대던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함과 평안함이 넘쳐났다.

 

나는 그날 아침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기에 지금까지 아버지 사랑이란 걸 모르던 내가 아니던가.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며 내 삶의 근원에는 죄가 있는 것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4) 주님, 당신이 행한 기적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30여년 살아온 가치관·세계관에 반복된 임재 체험에도 혼란 계속돼

 

지난 1월 제주도에서 열린 북미주예수대학성운동(JAMA) 세계지도자개발학교(GIDI) 강연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정수영 박사(앞줄 맨오른쪽).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30여년을 살아온 나의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이 나의 내면세계를 붙잡고 쉽게 놓으려 하지 않아서 말씀을 접할 때마다 엄청난 혼란이 계속됐다. 그럴수록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매달렸다.

 

성경을 읽을 때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에서 수긍할 수 없는 내용들을 만나면 일단 판단을 보류했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네 속에 아직 사탄이 있어서 그러니 쫓아내라고 했지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주님을 만난 것도 확실하고 생각과 삶이 변한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온 그 무언가가 때를 따라 믿음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다.

 

기적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주님을 만났는데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더욱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당시 나의 신앙생활을 인도해 준 장로님이 있는데, 그는 혈관외과 의사였다. 차를 팔아 교회 건축헌금을 낸 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병원에 출퇴근하실 정도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나는 장로님을 찾아가 성경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따져 물었다. 장로님은 내 질문에 언제나 성심껏 답해 주셨다. 하지만 어떤 것은 시원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요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교회에 갔는데, 예배를 인도하시던 전도사님이 설교를 마친 뒤 다 같이 기도하자고 하셨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들고 주여∼를 세 번 외친 뒤 합심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자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이 귀가 어두운 것도 아닌데 왜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까짓, 해보자 싶어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주여를 외쳤다.

 

그런데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려서 눈을 뜨고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팔을 올리고 크게 소리 질러서 어깨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나 하며 다시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이번에는 누군가 나의 올린 팔을 잡고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넘쳤다. 내 몸이 솜처럼 가벼워져 하늘을 오르는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아 이것이 천국이구나 하는 순간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짧은 순간이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것이다. 예배 후 목사님을 찾아가 방금 내가 경험한 것을 얘기했더니 목사님은 그저 좋은 것이야, 좋은 것이야 하셨다.

 

나는 삶의 고비가 생길 때면 이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곤 한다.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기류 변화로 기체가 몹시 흔들려 당황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날의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놀랍게도 그토록 믿어지지 않던 성경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말씀을 믿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이날 성령께서 만지신 것이다. 이제는 도리어 내가 이 말씀을 왜 믿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됐다. 말씀이 믿어지니 성경 읽기가 더 재미있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말씀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갈 길이 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나님을 알기 전 몸에 익힌 죄 된 습성들이 순간순간 깨어났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릇된 생각과 습관, 논리들이 우글거렸다. 초자연적인 체험들을 하게 하셔서 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변화시키셨건만 나는 때때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며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한탄했다. 이 죄의 뿌리는 도대체 어디서 끝이란 말인가?

 

***[역경의 열매] 정수영 (5) 눈 감은 죄인, 주님 말씀으로 눈 뜬 죄인이 되다

 

30여년 아집을 깨준 강해설교 테이프…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남 체험

 

연세대의과대 재학시절 무의촌 의료 봉사활동을 마친 뒤 감사장을 받는 정수영 박사.

 

나는 때로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처럼 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죄 된 습성을 보게 하였고 그것을 고치는 능력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 감은 죄인이던 나를 눈 뜬 죄인이 되게 해줬다. 성경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구축해 온 경험과 교육, 관습과 생각이 한탄과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웠다. 그리고 먼저 나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는 한 나는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30여년을 같이한 그것은 여리고성처럼 단단했다.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과 골수를 쪼개며 담을 헐기 시작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의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이 말씀이 내 삶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 내 속에 있는 죄는 어떤 관념이나 지식이 아니라 능력을 가진 생물처럼 나를 요동케 했다. 더구나 그것을 다스리는 배후가 있음도 알았다. 나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배후의 정체가 드러나고 무너지고 깨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우선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말씀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다. 나는 사탄이 놓아 둔 세상과 연결된 다리를 과감히 자르고 가던 길을 돌아서야 주님 앞에 이를 것이다. 1주일에 두 번 교회에 나가 말씀을 듣는 것으로는 나의 갈급함을 해소할 수 없었다. 이제 경우 말씀이 믿어졌으면서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하루 속히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성경은 누구를 위해 어떤 주제로 씌어진 것인지 알고 싶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설교 테이프 묶음을 내게 주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강해설교 테이프였다. 나는 그것을 받자마다 단숨에 다 들었고 이후 소위 한국 교계의 40대 기수라고 일컬어지는 목사님들의 강해설교를 구해 들었다. 몇 개월 동안 집중해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했더니 마침내 성경을 보는 눈이 생겼다.

 

성경의 주제는 의외로 간단했다. 바로 예수님이었다. 성경 어디를 보나 가리키는 한 곳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재림에 관한 얘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죽음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상은 성경을 도덕책으로 끌어내리고는 크리스천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면 뭐 하나. 죽은 자인 것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일단 살고 봐야 도덕성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피하기 위해 도덕성을 들고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도덕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독교만큼 높은 도덕적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가 있을까? 세상의 어떤 종교가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일흔 번을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는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죽은 자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세상에는 걸어다니는 죽은 자가 많다는 의미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어떤 인간도 의인이 아니며,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의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를 철저하게 훈련하셨다. 그리고 이 훈련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역경의 열매] 정수영 (6) 하나님 섭리를 깨우쳐 준 고난의 수련의 11년

 

처음 미국 왔을 때 영어 때문에 고통… 순종과 들음으로 광야의 시험 깨달아

 

2009년 미국 아이오와주 먼로 병원에서 열린 닭 꿰매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정수영 박사(왼쪽)가 부상으로 닭 모양의 인형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큐티 관련 책을 보면 오른쪽 페이지가 빈 칸으로 남겨져 있다. 거기엔 매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크리스천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가는 여정이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는 것도 선교를 하는 것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첫 번째 목표여야 한다.

 

어느 날 아침 딸한테 다급한 전화가 왔다. 등굣길 차를 몰고 나간 딸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친 데는 없고? 어디야?

 

딸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단숨에 달려갔다. 나는 딸을 꼭 껴안고 위로했다.

 

이 차는 새로 사면 되지만 너는 내게 하나뿐인 딸이잖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딸은 아버지인 나를 너무나 잘 안다. 전화해서 울기만 해도 내가 무슨 일인지 알고 열일 제쳐두고 달려올 줄 안다. 이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믿음의 기초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귀중품을 맡길 수 없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믿음의 크기는 예수님을 아는 크기와 비례한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자주 이런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거나 할 말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갖고 있든 어떤 활동을 하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기도할 때도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아도 단지 주여… 하는 한마디에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의 음성을 듣고 달려오신다. 자녀가 왜 아버지를 부르는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 하나님이 언제 화내고, 기뻐하며,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면 아무리 좋아도 멈출 줄 알고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나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대답해 준다. 아침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지금 당장 결정할 일이 있는데 말씀공부를 하라고요?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가 살면서 갖게 되는 모든 질문에 단 한가지로 응답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 낼 수 있다. 나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영어 때문에 무진 애를 먹었다. 특히 간호사가 전화에 대고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일단 병동의 위치를 확인하고 달려가 천천히 말해 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환자가 열이 난다고요 하면 타이레놀을 주세요하고 당직실로 돌아오곤 했다.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실수를 하지 않아서 감사했다. 알아듣지 못하고 실수해서 사고가 나면 큰일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서 주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처럼 1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련의 과정을 거친 의사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긴 시간을 훈련받으며 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섭리를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결코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법을 배웠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7) 난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목마른 사슴이었다

 

나와 아내, 기도·찬양 중 방언 터져… 텍사스심장센터에서 합격통지서가

 

미국 텍사스심장센터 레지던트 시절 휴스턴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부인과 함께 한 정수영 박사.나는 외과 훈련을 시작한 12명의 수련의 중 가장 똑똑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3명의 외과 수련의로 남게 됐다.

 

모두가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분별이 생긴 덕분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 순간 걷거나 생각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말하는 중에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지혜를 의지하려고 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오. 새벽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져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자주 금식기도를 하곤 했다. 하나님을 만나고도 지난날의 잘못된 습관이 나타날 때마다, 어려운 레지던트의 고비를 넘을 때도 금식하며 주님께 매달렸다.

 

때로는 육신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문득 살아나는 이 죄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는 자신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육신이 하자는 대로 삼시 세끼 밥을 다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잘 순 없어하면서 말이다.

 

하루는 대학 동창과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 얘기를 했더니 동창이 어이, 술이나 마시지라고 해 그날로부터 술을 끊었다. 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는 말씀을 읽고는 담배를 끊자고 마음을 먹었다. 내 몸이 성전이라는데 독한 연기를 뿜어 넣을 수 없어서였다. 담배만큼은 금주했을 때처럼 한 번에 되지 않았지만 결국 금연을 위한 3일 금식을 하고 났더니 담배와 영원히 이별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일반외과 수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혈관외과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텍사스심장센터 합격통지서를 받고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가까이 지내는 두 가정과 기회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가정과 찬양하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내 혀가 돌아가며 기대하지도 않던 방언이 터졌다. 아내도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다 방언이 터진 뒤 밤이면 아이들을 재운 다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오랫동안 방언하고 통변하는 은사를 체험하곤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하며 영적으로 충만한 때에 당신이 휴스턴으로 가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인지 그 말을 듣고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은사를 사용하는 중에 때로 사탄의 궤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집 밖에서는 일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런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가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차례를 따라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26∼33)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영적인 분별과 안목이 생겼다. 사람들은 부흥회 때 안수받기를 바랐지만 나는 함부로 머리를 내밀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런 훈련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셨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목이 마른 사슴 같았고, 언제든지 하나님과 만나기를 소망하며 간구했다. 이것은 주님의 생명이 내 맘 속에 있다는 증거였다.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날부터 성령님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들와와 계셨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역경의 열매] 정수영 (8) 최전선 소대장 같은 복음 전하는 일꾼이 돼라

 

서울행 접고 오칼라에 보금자리 마련… 기도·영적 회진에 중환자 치유 기적이

 

세계적인 심장외과 의사 쿨리(왼쪽)로부터 수련을 받고 있을 때 그의 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쿨리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 박사와 부인 이명숙 여사, 딸 진아, 막내아들 진걸.

 

텍사스 심장센터는 내 인생의 지표를 확실하게 해줬다. 고민 끝에 휴스턴으로 이사 온 뒤 한인교회에 처음 출석한 날 목사님의 설교 주제는 복음 전하는 일꾼이 돼라였다. 그날 나는 내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전도 폭발 전국 지도자 훈련에 참여했다.

 

나는 휴스턴에 있는 동안 마치 최전선에서 싸우는 소대장처럼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했고 그때마다 담대함이 생겼다. 아무리 인간 재봉틀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순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복음이 아니고서야 이 세상에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젊은 청년들은 내게 자주 상담을 요청했다. 그들 대부분은 남한테 받은 상처 때문에 아파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이 받은 상처는 한 번 받은 것으로 족하니 두 번 다시 이 상처가 당신을 괴롭게 하지 못하게 하라고 조언해줬다. 나는 전도폭발 훈련자로서 휴스턴을 떠날 때까지 의술과 함께 복음 전하는 일을 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나는 그 말을 듣고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반드시 그 증거를 보여주셨다.

 

아칸소대 메디컬센터 수련 과정이 끝날 무렵 어느 날, 수술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데 병원 사무장이 찾아와 당신이야말로 복의 근원이라고 했다. 며칠 후엔 플로리다주 오칼라 심장센터의 닥터 카마이클한테서 인터뷰를 하러 오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지도를 보니 오칼라는 올랜도에서 북쪽으로 약 10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 가족은 뉴욕에서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으나 휴스턴, 댈러스, 그 다음엔 아칸소주 리틀록으로 이사했다. 아내의 말처럼 이러다간 이름 없는 시골로 가야 할 판이었다. 예전에 한때 의사를 포기하고 신학교에 갈 생각을 했으나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심장외과 의사가 됐다. 인간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반드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미국에 온 지 13년 만에 모든 훈련 과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나님은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신 32:11) 나를 훈련시키셨다. 오칼라로 가기로 결정하고 아칸소대 메디컬센터 과장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서울 가는 것은 어쩌고?

 

일단 오칼라에 가기로 했습니다.

 

계약서좀 가져와봐.

 

계약서는 쓰지 않았는데요.

 

자네 정말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오칼라로 가라고 하셔서 가는 것이니 계약서는 필요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일세. 쯧쯧!

 

나는 카마이클은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1991년 7월 나는 드디어 오칼라로 와서 병원 일을 시작했다. 나는 매일 일찍 출근하고 제일 나중에 퇴근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은 내가 먼저 하자는 각오로 일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아침 7시에 모여 기도회를 열었다. 우리의 기도는 기적을 낳기도 했다. 일과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영적 회진을 돌았는데, 수술 합병증으로 호스피스 병원에 보내기로 결정한 환자가 걸어서 퇴원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9) 복음 전하는 영적 회진… 환자들도 큰 호응

 

환자들 주님 알기 위해 병 얻어 고백 유대인 환자 퇴원하면 꼭 성경 읽겠다

 

진료가 일찍 끝나는 날에는 영적 진료를 돈다는 정수영 박사(왼쪽 두 번째)가 수술 후 회복 중인 환자를 찾아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심장병은 대개 도둑과 같이 찾아오는 병이다. 우연히 검진 갔다가, 길을 걷다가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는가 하면 심하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경우도 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심장병을 앓는 환자들은 죽음도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때서야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인생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지난 세월 왜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지, 그렇게 달리는 동안 잃어버리거나 간과한 것은 무엇인지, 죽음 다음의 생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그런 환자들의 손을 잡고 수술 전에 기도해주면 얼마나 감격해하는지 모른다. 내 책상서랍에는 그동안 환자들이 보내준 편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어떤 환자는 2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수술 기념일에 카드를 보내오고 있다.

 

나는 영적 회진을 돌기 전 성령님께 먼저 기도한다. 오늘 복음을 나눌 환자를 인도해 달라고 하면 어떤 환자가 마음에 떠오른다. 내가 환자 방에 들어가 침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굳게 닫은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 무장해제된다. 치료가 아닌 이유로 자기를 찾아온 줄 알면 감격해하면서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러면 나는 그의 얘기에 끝까지 귀 기울인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어느 순간 자기만 떠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 얘기만 해서 미안해요, 말씀하세요라며 내게 말할 기회를 준다. 이때가 내게 찾아온 황금시간이다.

 

나는 먼저 두 가지 질문으로 상대방의 영적 상태를 진단한다.

 

교회 다니세요?

 

얼마나 자주 다녀요?

 

이 두 가지 질문만 하면 그가 자신을 그저 문화적인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지, 습관에 따라 교회를 다니는지, 주님을 제대로 만났는지를 대충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고 있고 스스로도 크리스천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만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내가 만난 사람 대부분이 복음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나는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 동안 복음을 전하는데,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심장병을 얻은 것은 모두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심장병보다 더 큰 병을 고쳤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모세가 버렸던 지팡이를 다시 집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듯 신학교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의사의 길을 걸었을 때 내게 의사라는 직업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가 됐다.

 

어느 환자의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어떻게 왔어요?

 

환자는 내게 자기 속내를 내보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아는 예수님에 대해 얘기하러 왔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의외로 한번 해봐요라고 했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심장수술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를 나는 안다고 말해줬다.

 

당신이 나의 문제와 그 답을 알고 있다고?

 

그는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나의 가는 길을 돌려세워 주님이 만나주신 얘기부터 시작해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이해가 되세요?

 

마침내 이야기를 마치고 그에게 묻자 그는 아까와 달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얘기가 재미있어서 내가 유대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해 미안해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얘기를 해줘서 재미있었어요. 내가 병원을 나가면 꼭 성경을 읽어볼게요.

 

***[역경의 열매] 정수영 (10) 믿음의 심장수술로 중국 선교의 문을 두드리다

 

동료 의사와 교대로 1년에 두번 방문, 수술 환자 위급… 기도하자 완치 기적이

 

수술 후 합병증으로 중풍을 앓았던 환자가 온전히 깨어난 모습(가운데). 왼쪽은 기도를 제안한 간호사 조이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1979년 중국이 서방을 향해 문호를 개방하면서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뉴욕에서도 수많은 교회들이 선교병원 건립 등을 위해 기도했지만 만리장성은 하루아침에 열리지 않았다.

 

빗장은 12년 만에 풀렸다. 91년 카마이클이 먼저 난징에 들어갔고 이듬해 내가 가게 되면서 우리는 교대로 1년에 두 번씩 심장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난징의 의료 환경은 그야말로 열악했다. 에어컨이 없어 창문을 열어놓고 수술해야 했는데 파리가 들락거릴 정도였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수술이 제대로 될까 걱정도 됐지만 첫 환자 수술을 무사히 마치자 자심감이 생겼다. 두 번째 환자는 50대 중반으로 관상동맥 수술을 했는데 결과가 아주 좋았다. 저녁 식사 후 10시쯤 병원에 들렀더니 인공호흡기도 떼고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 말을 잘하고 팔다리를 움직이며 미음도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밤 12시쯤 잠이 들려는데 전화가 왔다. 환자가 위험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돼 8층 중환자실까지 뛰어 올라갔다. 환자의 심장은 정상이었으나 중증중풍 증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오른쪽 팔다리에 미동이 있을 뿐 전신이 마비됐다. 불과 2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환자가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몇 가지 지시를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전장에 나갔다 돌아온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하나님 이름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 제자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중환자실 주임의사가 비웃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수술을 한 그 환자는 3일째 누워 있었다. 그때 우리와 같이 간 간호사 조이스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

 

오칼라에서 당신이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할 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했어요. 이 환자에게도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나는 속으로 3일을 하나님과 씨름했는데 지금 기도한다고 무슨 소용일까? 머뭇거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간호사에게 미안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하고 환자의 가족들을 불렀다. 용기를 내어 환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그 순간 여기서 더 이상 하나님을 창피하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짧게 기도했다.

 

이 환자가 만약 살게 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무엇보다 가족들을 잘 돌보아 주소서.

 

기도는 이렇게 아주 싱겁게 끝났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호텔로 돌아와 비록 이 환자는 이렇게 되었지만 남은 일정 동안 나머지 환자들을 무사히 수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튿날 수술을 위해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 두 분이 병원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맞으며 우리 손을 끌고 중환자실로 급히 올라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 환자 앞에 섰는데 놀랍게도 환자가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더니 멀쩡히 신문을 보고 있고 사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밤 사이 중환자실은 초상집에서 잔칫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참 말을 잃고 섰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아,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이 하셨구나!하는 깨달음이 내 멍한 의식을 깨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 55:8)

 

지난 사흘은 마치 지옥에 다녀온 것처럼 끔찍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겨자씨만도 못한 믿음을 가지고 얼마나 교만을 떨었단 말인가! 나는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11) 환경 열악에도 중국서 심장수술 성공률 '최고'

 

6년간 300건 수술중 사망자는 단 2명… 하나님의 은혜에 심장병원 설립까지

 

네이멍구 바오터우에서 80대 노인의 심장을 수술한 정수영 박사(왼쪽)가 기력을 되찾은 환자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칼라 심장센터는 점점 다른 나라와 도시로 시야를 넓혀 나갔다. 나와 카마이클은 중국으로 갔고, 어떤 이는 인도와 케냐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심장수술 사역을 했다.

 

난징 사역은 우리에겐 도전이자 축복이었다. 우리는 중국 의료선교에서 두 가지 방향에 주력했다. 첫째, 매년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해 수술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 의사들을 오칼라에 초청해 훈련하는 것이다. 외과의사 첸 형제와 마취과의사 바오 자매는 오칼라에 와서 훈련받은 첫 번째 수련생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낮에는 병원에서 수련하고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했다.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성경을 본 적도 없던 그들이 얼마 후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6개월 후 그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땐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교회도 없고 성경을 가르칠 교사도 없으며 신앙을 나눌 공동체도 없는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제 갓난아기 같은 두 신앙인이 어떻게 세상의 거센 폭풍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돼 마음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듬해 난징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하나님이 이 귀한 생명의 아들과 딸을 강건하게 지키시고 돌보셨기 때문이다.

 

병원 측에서는 이들에게 집요하게 공산당원이 되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공산당 입당 원서에는 모든 종교를 부정하고 종교인이 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돼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산당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믿음을 지킨 채 이듬해 난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년 뒤 병원 측은 이들을 다시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공산당 입당을 강권하지도 않았다.

 

외과의사인 첸 형제는 남다른 재능을 가진 훌륭한 의사로 성장했다. 짧은 기간 내에 난징 오칼라 심장센터를 중국 5대 심장센터 중 하나로 만들었다. 지금은 1년에 1200건의 심장수술을 하는 병원이 됐다. 그는 또 공산당원이 아니면서도 매년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난징시를 대표하는 8명의 대의원 중 한 명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갔을 때는 후진타오 당시 주석과 원탁테이블에 앉아 토론하는 사진을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난징 사역을 한 후 수많은 중국인 의사와 간호사가 미국 오칼라를 다녀갔다. 난징에 왕래한 지 6년째 됐을 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한 수술의 통계를 내보았다. 중국에는 미국보다 중증환자가 더 많았다. 지금까지 300명의 환자를 수술했는데 합병증이 생긴 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망자 수는 단 2명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이런 결과를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모든 것을 갖춘 미국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온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난징에 가기 시작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우리가 한 일이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우리를 초청했다. 푸젠성과 옌볜, 네이멍구 바오터우 등에서 초청했다.

 

우리가 난징에서 심장병원을 설립하고 사역하고 있을 때 옌볜의과대학병원에서 초청이 왔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동족들을 만나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민족의 역사 속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그들의 삶도 알게 되었고, 가까운 북한의 실정도 귀동냥으로 듣게 되었다.

 

옌볜에서 심장수술을 시작하게 되면서 의사 세 명을 미국 오칼라로 초청했다. 우리가 현지에서 여러 번 보여주는 것보다 오칼라에 초청해 직접 경험하고 훈련하는 것이 더 도움됐기 때문이다. 셋은 모두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났다. 옌볜의과대학 사역은 병원장이 바뀌면서 중단되기도 했지만 수년 전 다시 임용된 병원장이 우리를 찾아와 간곡히 부탁해서 다시 재개됐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12) 평양서의 첫 수술 성공… 민족 복음화 첫 발을

 

4∼5시간 걸릴 수술을 45분만에 마쳐

 

매년 두 번씩 북한을 방문해 심장병 환자들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해주는 정수영 박사(가운데).

 

나는 지금도 13년 전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1999년 뉴욕에 있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평양 적십자병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가지 못하다가 2001년 4월에야 평양 방문이 성사됐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 땅을 밟기 전에 여려가지 난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비자가 없다고 하더니 이번엔 자리가 없다고 했다.

 

평양은 왜 가시나요? 심장수술 하러 갑니다. 진작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

 

일행은 모두 6명이었다. 항공사 직원은 현장에서 탑승권 5장을 주며 나에겐 선생은 동포시니까 미안하지만 승무원 자리에 앉아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정도 불편쯤이야 참아야겠지만 어쩐지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평양시내로 들어갈 때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어릴 때 저런 논길을 따라 학교 다니던 기억이 났다. 대부분의 여인네들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평양은 깨끗한 도시였지만 차는 거의 없었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 주일에 봉수교회를 다녀온 뒤 오후에 첫 수술을 하기로 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30대 초반의 승포판협착증이 심한 환자인데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내일 있을 수술에 대해 설명한 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수술을 위해,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시죠.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려는 순간 갑자기 목이 메었다. 지난 세월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 일을 준비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에 환자를 옮긴 후 마취를 했다. 환자의 심장 상태가 나쁜 줄은 알았지만 막상 마취를 하고 스완-간도관(swan ganz)을 넣었더니 오른쪽 폐압이 왼쪽 혈관과 똑같아진 중증이었다. 그런데 마취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느라 2시간이나 흘렀고 환자의 상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또 믿음 없는 불평을 하나님께 하기 시작했다.

 

첫 환자 수술도 못하고…. 이 환자가 잘못되면 다시는 여기 올 수도 없을 텐데요.

 

그때 같이 간 마취과 의사가 말했다. 내가 약물로 최선을 다할 테니 가능한 한 빨리 수술을 하세요. 수술은 시작됐고 준비해 간 인공판막으로 승모관을 갈았다. 나는 온 정신을 쏟아 수술을 끝냈다. 그런데 끝내고 보니 방 안 가득 들어와 참관하고 있던 의사들이 너무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55분 걸렸습니다. 아니 45분 걸렸습니다.

 

지금껏 소련에서 배운 방식대로 수술을 하면 적어도 4∼5시간 걸리는 수술을 1시간 내에 했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환자를 통해 우리를 높이셨다. 이 일로 그들은 심장수술을 우리한테 배우고 싶으니 앞으로 꼭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수술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꼭 다른 세상을 다녀온 것 같았지만 하나님 음성을 듣고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북한에서 우리가 수술해야 할 환자는 대부분 중증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심장수술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 의사들도 중국 의사들처럼 오칼라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병원 지도자들이 와서 우리 병원의 시스템을 알아야 같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평양심장센터를 잘 수립할 것 같아 병원장과 병원 간부들을 초청했다. 첫해에 병원 간부 3명과 장기적으로 훈련받을 의사 3명을 초청했다.

 

중국 의사들과는 저녁식사 후 성경 공부를 했지만 이들과는 다른 일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우리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1년에 두 번씩 평양을 방문한다.

 

***[역경의 열매] 정수영 (13·끝) 가슴으로는 하나님 음성을, 몸으론 영적 수술을

 

같은 병명의 두 환자를 같은 날 수술… 생사의 차이엔 주님의 오묘한 설계가

 

지난해 11월 말 미국 플로리다 자택에서 심장이 뛴다(두란노) 출간 자축회를 열고 딸 진아씨, 부인 이명숙씨(오른쪽)와 함께 기뻐하는 정수영 박사.

 

미국 플로리다에도 2015년 새해가 밝았다. 오늘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날 때부터 훌륭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셨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결점 투성이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신 기록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제까지 넘어지고 나태하고 불성실하고 깊이를 모를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인내와 능력으로 나의 삶을 인도해주셨다.

 

구원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그분이 우리 삶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가짜다. 우리 삶에 매일 세례식이 일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성을 매일 십자가 앞에 못 박고 부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행위 외에 주님이 내 삶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것을 증거할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은 그 어떤 일에 나를 부르시기 전 말씀을 통해 나의 깊은 죄성을 보게 하시고, 회개를 통해 치유하시고 회복하셨다. 하나님은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사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영적 눈을 뜨게 하시고, 죄를 회개함으로 하늘의 평안을 주시고, 그리고 청년과 대학생을 위한 사역으로 인도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내 삶은 이 말씀에 대한 증거다. 어느 날, 같은 병명을 가진 환자 두 명을 같은 날 수술하게 됐다. 한 환자는 상태가 양호해서 수술 후 경과가 좋을 것으로 예상했고, 다른 환자는 심장 기능이 너무 나빠서 과연 잘될까 걱정하며 수술했다. 그런데 예상과 반대였다. 심장 기능이 나빠서 걱정한 환자는 무사히 회복되었는데 경과가 좋을 것으로 기대한 환자는 정말 안타깝게도 사흘 만에 운명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수많은 의사들이 모여 의논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류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질문은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너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오랫동안 큐티와 기도 생활을 해 왔고, 성경도 가르치고 해외 선교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환자로 인해 시작된 질문으로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에 다시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너는 내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고 있니?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한 것이 언제였니? 나에 대한 첫 사랑은? 네 속을 다시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살펴봐라.

 

나는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난 4년 동안 이사로 섬기던 미주한인의료선교협회(KAMHC)에서 생각지도 않은 요청을 해왔다. 차기 회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뜻 수용할 수 없었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 않아서였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는데 너는 무엇을 희생할래? 나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이 일을 맡기로 했다. 하나님은 다음 구절의 말씀으로 내가 앞으로 이 단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KAMHC는 지금까지 이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을 중심으로 사역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문을 활짝 열고 다른 문화권의 차세대까지 포용할 계획이다. 미국 전역의 도시마다 지부를 설립하고 각 대학 캠퍼스에 의료선교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가슴으로 듣는 하나님의 음성 얘기에 귀 기울여준 국민일보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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