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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신앙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5가지 원리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9.16|조회수13 목록 댓글 0

 신앙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5가지 원리

 

김도일교수/기독교교육학

글을 시작하며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닥친 위기를 생각해 보자.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것처럼, 이 사회는 '더 편하게 잘 살기 위해'를 외치며 전진하고 있다. 그 사회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이에게 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미 삶의 굴레에 지친 사람들은 오늘도 발버둥을 친다. 이런 지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기독신앙인들은 오직 신앙만이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신앙인들 조차 다 타버린 재가 되어버린 이들도 많은 듯 하다. 병들고 지친 세상에 더 이상 신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많은 것이다. 갤럽조사에 의하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원천인 성경책 조차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 35.5%만의 신앙인들만이 매일 성경을 읽으며, 35.8%가 일 주에 겨우 세 번만 성경을 펴며, 나머지 30% 정도의 신앙인들은 한 달에 한 두 번만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신앙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얘기하기 조차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는 성인들조차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 83회 교단총회보고서에 의하면 총회교육부에서 개발한 42가지의 '말씀과 삶'이라는 교재 중 단 한가지만이 장년들을 위한 성경공부교재라고 한다. 왜 그렇게 교재를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장년성경공부 교재는 만들어봐야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동부 교재는 4만 2천부나 팔리는 반면에 장년부 교재는 단 천 5백부만이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겨우 3.6%에 불과한 수치이다. 장년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가 어떻게 될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신앙교육을 담당해야 할 장본인들이 막상 자신의 신앙교육에는 등한히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의 장년이 병들었다. 장년들이 영양실조에 빠져있다. 이것이 위기이다.
이 글은 신앙교육을 염려하는 이들을 위해 쓴 것이다. 그러면 신앙교육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우리 가정과 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예를 들어,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과연 신앙은 가르칠 수 있는가? 또한 신앙교육의 장은 어디인가? 와 같은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차근히 한 걸음씩 내딛으며 함께 생각해 보자.

첫째, 신앙교육의 시작은 나부터 하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신앙은 우리가 애써 획득하는 것인가? 아니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인가? 신앙이란 믿음과 유사한 단어이며 영어로는 faith, 헬라어로는 pistis 라틴어로는 fides로 음역되는데,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사전은 "사람을 지고의 신이나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시키는 인간의 내적 태도나 신념 혹은 신뢰."로써 신앙을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인간의 반응이 중요시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신뢰와 신념인 신앙은 우리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신앙은 교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글은 애당초 쓸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말했듯이 "비록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수단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가르침이라는 수단을 사용케 하셨다." 이 말은 우리는 동료 인간이 신앙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음 밭을 기경하는 것이 신앙교육이다. 그러므로 감히 신앙을 심어준다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신앙의 씨앗이 심어져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마음의 밭을 갈고, 비료를 주고, 물을 주는 일이다.

 


그러면 이 신앙교육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신앙교육은 나 자신부터 하자. 교육을 담당하는 사역자들은 자신을 추스리는 일에 먼저 신경을 쓸 일이다. 자신은 신앙교육의 토대인 성경말씀을 묵상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힘을 주어 '묵상하라'고 강조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신앙교육의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신앙교육은 어떤 커리큘럼을 통하여서만 하는 교육이 아니다. 신앙교육은 가르치는 자의 삶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피교육자로 하여금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케 할 수도,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전혀 반응하지 않케도 할 수도 있다. 기독교교육의 거장 랜돌프 C. 밀러가 말한 것 처럼 신앙교육이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내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그 분과의 깊은 관계를 갖을 때 만이 내가 관계하는 피교육자들의 삶에 잔잔한 감동을 끼칠 수 있다. 교회교육을 하다가 만난 이들 중에 과거에 교회를 멀리 떠나 살던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자신을 지도하던 분들에게서 실망했기에 방황하였노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사역자나 교사된 우리는 하나님과 피교육자들 사이의 연결고리 내지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교사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피교육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앙교육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함을 기억하자.

 


신앙교육이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자. 물론 이 말은 나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너무도 부각된 나머지 신앙교육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현자가 교사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바퀴 살이 모여서 바퀴를 이룬다.
그러나 수레를 움직이는 것은 바퀴 복판에 있는 구멍이다.
질흙으로 항아리를 빚어 만든다.
그러나 항아리를 쓸모있게 하는 것은 텅 빈 속이다.
학교 건물을 이루는 것은 건축자재들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은
교실의 빈 공간이다.
학생들은 틀과 구조물을 가지고 공부한다.
그러나 (교사의) 비어있음과 침묵 또한 배우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신앙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원리 #1은 가르치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지 않고 온전히 전하는 것이다. 마치 구멍이 뻥뚫린 파이프처럼 우리는 자신을 깨끗이 비우고 순결하게 가꾸어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앙이라는 최상의 선물을 학습자가 잘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신앙교육의 일차적인 장은 가정이다

신앙교육을 하기 원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정에 하나님을 믿고 앙모하는 모습이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가정신앙교육에 관해 좋은 글을 많이 수록한 옥한흠목사의 글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요즘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부부 40쌍 가운데 한 가정 정도가 이혼과 같은 사고를 치는 것이 보통인데, 가정에서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경우와 비교 해 본 결과 약 400쌍 중의 한 가정 정도가 이혼과 같은 어려움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가정은 신앙을 배양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신앙을 선물로 주시면 가정에서는 그 신앙을 키워나가고, 아직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한 자녀가 있으면 가정의 분위기를 통하여 신앙을 선물을 받을 마음밭의 준비를 하는 곳이 가정이다.


종교교육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호레이스 부쉬넬은 가정을 신앙교육의 일차적인 장이라는 생각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적 양육이라는 책에서 19세기 당시 신앙인들의 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던 부흥의 시기여서 많은 이들이 신앙을 얻던 시기였다. 회개와 각성의 바람이 불어 몰아치던 그 시기에 아무도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 신앙은 회개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등식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던 때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신앙은 어른들만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아직 회개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고로 그 아이들이 더 자랄 때 까지 그냥 두어야 된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자신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죄가운데서 살았으니,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사는 것이어서 그런지, 자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룩한 양육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쉬넬은 당시의 부모들을 '타조부모'라고 불렀다. 이 말은 타조와 같이 사막의 구덩이에 알을 낳고서는 그저 운에 맡기고 떠나버리는 모습과 흡사하게 자녀를 죄가운데에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3) 사실 그의 이 타조에 관한 관찰은 과학적으로 틀린 것임이 후일 판명되었으나, 그의 신앙가정교육에 관한 견해는 옳은 것이었다.

 


신앙인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그 자신을 크리스천이 아닌 다른 존재로 알아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말은 아직도 기독교교육학에 금언처럼 남아있다. 즉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어느 순간 비칠 때 급작스런 회개와 회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매일매일의 성결한 삶과 예배, 그리고 기독교적 양육을 통하여 서서히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신앙을 이미 받은 많은 부모들은 이 간단명료한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가정에 교회가 있는가? 가정에 예배가 살아있는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다면 그 가정에는 신앙교육이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이미 드리지 않고 실패한 예배와 신앙교육을 일주일에 단 몇 시간 드리는 교회에서의 예배와 성경공부에서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뿌리가 내린 식물은 기르기 쉽다.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은 자녀는 마치 양분을 잘 섭취한 식물과 같아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그를 비취는 날이면 그야말로 하나님을 향해 활짝 웃으며 꽃을 피울 것이다.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 한 가지. 자녀를 율법주의자처럼 규율과 법으로 얽어매지 말자. 가능하면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겸손한 신앙인으로 교육하자. 이렇게 하려면 부모가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녀들이 알아들을 때 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아무리 좋은 신앙교육을 하더라도 '무서움'이 배움의 장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공포를 조장하는 가운데 배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놀면서 신앙교육을 해보자. 예를 들어, 끝말잇기를 성경의 내용으로 한 번 시도해 보자. 인터넷을 함께 하며 현대복음성가가 녹음된 사이트를 찾아가서 같이 음악을 들으며 즐겨보자.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배운다. 그러나 어른들은 배우려고 논다. 가정이 즐거움과 자유가 넘치며 거룩함과 경건함이 잔잔히 흐르는 곳이 될 때 비로소 신앙교육의 일차적인 장이 된다.

셋째, 삶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신앙교육을 추구하자

교회의 신앙교육을 생각할 때마다, 지도자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신앙인들의 삶에서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다. 교회의 신앙교육이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가르쳐야 그러한 변화를 야기할까? 신앙교육은 실제적이어야 한다. 오늘 배운 것이 내일 삶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신앙교육이 진실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과 거리가 멀다면 어쩌면 기본부터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된다.

 

 

『교회사역의 초점 다듬기』라는 역작의 저자 진 겟츠는 교회의 신앙교육을 위한 전략수립에 관해 언급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를 차례로 다루었다. 신앙교육을 위한 전략은 올바른 사역철학이 먼저 수립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역철학이 꼭 포함해야 할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그 세 요소는 영원과 과거와 현재를 포함하는 전(全) 역사적인 것으로써 성경(eternal)과 역사(past)와 문화(present)이다. 이 세요소가 잘 조화되고 연구될 때 그 속에서부터 사역철학이 양산되고, 이 사역철학 위에 오늘 우리가 응용할 수 있는 사역전략이 수립된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의 신앙교육의 목표가 전도와 세움이라고 주장하면서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근거하여 가서-제자를 삼아-세례를 주고-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요약하면 바로 앞서 말한 전도와 세움 즉 evangelism과 edification이라는 두 가지 사역이 된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신앙교육을 수행해야 바람직한 신앙교육이 되어야 신앙인들의 삶에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까? '좋은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조쉬 헌트와 래리 메이스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좋은 가르침이란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고 학습자의 생활에 도전을 주는 교수이다. 결국 좋은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일에 배운 말씀에 도전을 받아 월요일에 다른 삶을 살도록 도와 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좋은 신앙교육은 방법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추구하는 삶에 대한 것이다. 앞서 소개한 저자는 제자들(disciples)라는 영문의 앞 자를 기초로 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교육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1. D(Discipline)
매일의 삶에서의 훈련을 권장하자.
"소원을 깨닫고 지속적으로 행하게"(빌 2:13)

2. I(Intimate Friendship)
다른 이들과의 친밀한 사귐을 장려하자.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게"(벧전 1:22)

3. S(Self-Esteem)
자존심과 다른 건강한 자존감의 형성을 돕자.
"주께 사랑을 받은 성도로 자신있게"(롬 1:1, 7)

4. C(Corporate Worship)
공동예배에 기쁨으로 참여할 것을 가르치자.
그러나 우리의 기호를 맞추는 예배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예배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참여자"(요 4:24)

5. I(Intimate Family Life)
친밀한 가정에서의 삶을 이루도록 지도하자.
항상 하나님을 첫 자리에, 가정은 그 다음에, 그리고 다른 문제는 그
다음에 하게 하자.

6. P(Passion for God)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우리 모두가 필요한 아드레날린과 같은 활력소임을
가르치자.
"악한 정욕을 이기는 비결은 선한 열망을 갖는 것"(롬 12:21)

7. L (Lay Ministry)
평신도들로 하여금 사역에의 참여케 장려하자.
미국의 평범한 평신도 축구코치가 시작한 프라미스 키퍼스
(Promise Keepers)와 같은 예를 보라.
"첫 제자들도 평신도였다!"(마 4:19)

8. E(Evangelistic Interest)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갖게 교육하자.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도를 전하게"(벧전 3:15)

9. S(Sacrificial Giving)
아낌없이 주는 삶에 진정한 기쁨이 있음을 강조하자.

많이 가르치기 보다는 제대로 가르치자. 교회에 너무 오래 있게 하기 보다는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과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의 균형을 이루자. 가르친 내용에 대한 실천의 삶이 이루어지도록 기회가 되는대로 자주 대화의 시간을 갖자. 교회에서의 가르침을 공동으로 실천해보는 기회를 만들자. 예를 들면 구제 헌금만 드리고 말 것이 아니라, 교회가 돕는 장애인 시설 같은 곳을 함께 가서 돕고 그들을 형편을 보고 와서 느낀 점을 함께 나누자. 위에 나열한 9가지 내용을 조화롭게 포함하여 균형 잡힌 신앙교육, 즉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교육을 하자.

넷째, 말씀묵상을 위한 신앙교육과 직업과 소명을 통합하는 신앙교육을 강화하자

현대 교인들은 말씀의 홍수 가운데 살아간다. 유명한 설교자의 녹음테프가 곳곳에 돌아다니며, 인터넷에도 최고의 설교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마치 물 속에서 갈증을 느끼는 물고기처럼, 풍성한 중에서 말씀의 고갈을 느끼는 것이 현대 신앙인들의 삶이다. 말씀은 내 말씀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교제하여 받는 말씀, 내가 부딛쳐서 도전받은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킨다. 남이 이미 요리하여 전해 주는 말씀도 때로는 도움이 되지만 매일의 삶에서 자신이 씨름하여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와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교회의 신앙교육을 통해 전해진 많은 진리의 소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진다. 말씀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라 말씀은 많은데 나에게 스며든 말씀이 없기 때문에 기근이다. 말씀묵상이 결여된 성경지식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병이된다. 마치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 사람에게 칼을 쥐여주는 것과 같다. 말씀묵상을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줏어들은 말씀이 많은 사람이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묵상이 없는 신앙교육은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고전 8:1) 주위에서 만난 이들 중에 신앙생활을 몇 대 째 한 사람들을 나는 무서워한다. 그들은 실로 많은 지식과 경험의 칼을 가진 사람들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사람이 부드러워지고 대하기 편해야 할 텐데,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오히려 교회에 오래 다니지 않은 이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대화가 잘 된다. 왜 그럴까? 많이 고민해 보았지만 일단 나와 같이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고 가르친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자성의 외침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은 아무래도 우리의 신앙교육에 잘못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말씀을 소화하지 않은 채로 그냥 삼키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의 귀한 말씀의 교훈이 우리의 삶에 젖어들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기보다는 배우는 것 때로, 사는 것 때로의 삶의 형태가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교육은 말씀의 사실과 의미를 잘 전달해 주어야 한다. 말씀묵상도 여러 단계를 거쳐야 된다. 로렌스 리차드는 다음과 같이 학습의 단계를 설명하였다. 먼저 교사와 학생은 사실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암기단계와 인식단계에 적당히 시간을 할애하여 교수와 학습에 임해야 한다. 암기단계는 학생이 아직 말씀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와 이해가 없는 단계로서 기계적인 수용의 단계이다. 인식단계는 그 다음 단계로서 성경의 개념들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전 단계보다는 조금 더 깊은 단계이나 아직 부족하며 여전히 사실을 다루는 과정이다. 여기에 성경적 세계관을 연결시키는 반복단계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사상체계에 나오는 여러 개념들을 연관시켜보는 단계이다.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되지 않고 반복단계에서 접촉단계와 실현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접촉단계에서는 성경적인 진리를 생활과 관계를 맺으며 적절한 반응을 모색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단계이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경의 말씀의 자기의 것으로 되며 개인적인 체험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현단계를 거치게 되면 실제 행동하는 신앙교육의 최종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묵상과 성경연구의 과정이 완결되게 된다. 학습의 효과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참여하게 될 때 극대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행함으로 배운다."고 역설하였고, 이 경험주의의 이론에 기초하여 존 듀이는 "최대의 참여는 최대의 학습효과를 양산해낸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묵상훈련을 위한 교육도 처음에는 교사의 인도가 눈에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학생자신이 말씀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케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문득 생각해보면 이런 종류의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임재는 교회에서 성직에 관련된 일을 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전에 함께 로버트 프로스트의 짧은 시를 묵상하여 보자.

그러나 누가 그 분열에 굴복할까
내가 가진 삶의 진정한 목표는
나의 직업과 소명을 결합시키는 것
나의 두 눈이 하나가 되어 바라보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나의 직업의 종류와는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지 니콜라스 헐먼(Nicholas Herman of Lorraine)과 같은 삶을 산다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청년은 후일 로렌스로 불려지게 되었던 로렌스형제가 그랬듯이 그 일을 수행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교육은 우리의 삶과 소명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로렌스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추운 늦가을에 앙상한 나무가지 밑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하여 원장에게 사정하였다. 학문의 바탕이 없고 공동체 생활에 약했던 그는 급기야 수도원의 허드렛 일을 도맡아서 하는 식당에 묻히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먹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식당의 위생상태도 형편없었다. 아무도 식당찾기에 즐거움을 부여하지 않던 시대에, 그는 결단하였다. 자신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보다 더 향기롭고 기쁜 생은 세상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그도 역시 처음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부엌의 더러운 구석에서 음식 찌꺼기가 묻은 그릇만이 반겨주는 그 곳에 로렌스는 불쌍하게도 자신의 존재를 한탄해 봅니다. 아무도 오기를 원치 않는 이 곳에 나만 혼자 남았구나. 그 당시 식당은 그저 허기진 배만 채우러 오는 곳이었다. 더러운 식탁과 겨우 음식 찌꺼기만 제거한 그릇들, 이 모든 것이 구역질을 나게 하는 것이었다. 로렌스는 한참 동안 괴로워 하다가 아주 평범하면서도 거룩한 진리를 발견했다. 하나님은 이런 그릇들의 주님도 되신다는 것이었다. 후일 그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기게 되었다. 영역된 프랑스어 시는 다음과 같이 읽힌다.

모든 그릇과 (후라이) 팬들의 주님이시여...
나를 그릇을 온전히 닦고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성자로 만들어 주소서!

모든 수도승들은 놀랄 지경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려고 오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살기위해 먹던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식당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윤기나는 그릇과 구석구석 잘 청소되고 정리된 식당은 오히려 예배실의 그것보다도 더 향내나기에 오래 있고 싶어지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로렌스는 이제 모든 이들에게 로렌스 형제라 불리우며 존경받는 식당의 종이 된 것이다. 아니 종이 아니라 "Kitchen Saint" 즉 "부엌의 성자"가 된 것이다. 그는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던 그 곳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신앙교육을 건강하고 조화롭게 하려면 신앙교육을 받는 이들에게 바른 직업관과 소명관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본다. 누구나 다 신학교에 와서도 곤란한 것이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에서 주어진 그 일이 하나님의 소명과 일치하도록 최선을 추구하는 삶이 귀중한 것이다. 이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한 파커 팔머는 소명을 영적인 삶 즉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으로, 직업을 교육 즉 지식과 삶의 수단을 강구하는 삶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온전한 시각의 화복을 촉구하였다. 이 온전한 시각은 현실, 즉 실재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자세이다.

다섯째, 개혁신학의 내용과 정신을 바로 교육하자

축구를 잘 하려면 축구의 규칙을 잘 알아야하고, 야구를 재미있게 관전하려면 야구의 기본적인 규칙을 알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혁신학의 토대 위에 서있는 개신교 신앙교육자들은 개혁신학의 기본 룰을 잘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혁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신앙교육에 임할 때, 유념해야 할 몇 가지 개념에 대해서 로버트 파즈미뇨는 이렇게 얘기한다. 기독교교육자는 (1) 창조 언약(the covenant of creation), (2) 타락(the fall), 그리고 구속의 약속(the covenant of redemption)과 같은 개념을 피교육자들에게 잘 교육해야 한다.

 

 첫째, 창조 언약에 관한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피교육자들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잘 이행하여서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한다고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로서 자유의지와 자율성(autonomy)을 부여받았지만 그 권리를 오용하여 하나님께 대항하였으며 순종가운데서 살기를 거부하였기에 죄 가운데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적 입장을 가진 기독교교육자는 피교육자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기준을 가질 것과 하나님을 거부하고 살 때의 비참한 죄의 결과에 대해서 확실히 경고해야 한다.

 

셋째, 구속의 약속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약속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소망이다. 이 재창조와 갱생(recreation & renewal)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멋대로 살던 죄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고백하고 회개하여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하나님의 소망의 약속으로 인해서 인간은 교회와 사회와 자연에서 조화를 이루어 살아야 할 책임과 권리를 다시금 부여받는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문화적 임무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그러므로 개혁신학적 견해를 수용한 기독교교육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서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시며, 교회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함축적인 의미에 대해서 더욱 크고 깊으며 넓은 이해를 얻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개혁신학적인 이해는 신학이 종교개혁 당시에 세워진 것에 머무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가운데서 '계속 개혁하여 나가는'(reforming) 지속적인 임무(ongoing task)를 갖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병은 개인주의이다. 기실 건강한 개인주의 즉 개인의 삶과 공적인 삶이 적당히 어우러진 사회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에는 왜곡되고 병든 개인주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왜곡된 개인주의를 극복시키는 교육을 행해야 한다. 교육에 있어서 개인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개인은 교육의 대상이며 동시에 교육의 주체이기에 개인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그런데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왜곡된 개인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개인주의가 조금 더 심화되면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빠지게 되는데 우리는 개인주의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벨라는 개인이 자신을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만(사적인 영역; private realm)을 강조하고, 자신의 사회에서의 위치(공적인 영역; public realm)를 덜 강조할 때, 개인주의는 사회의 조화를 망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정보화 시대는 모든 초점이 개인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개인만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삶을 무시하는 개인주의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즉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분리를 초래했고 분리의 문화를 양산했다. 더욱이 오늘날은 정보화의 무분별한 추구로 인해 병든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됨으로 인해 모두가 분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분리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기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야기라고 하는 전달 매체를 교육에 끌어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를 통해서 기억을 공유하게 하고 개인주의를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각 개인에게 전달해 주는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경험이다. 즉 신앙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경험을 이야기로 전달해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의 공동체, 공유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왜곡된 개인주의를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며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꼭 필요한 신앙교육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개신교가 토대로 삼고 있는 개혁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를 선택할 때도 이런 개혁신앙을 반영하는 가운데에 쓰여진 교재를 사용하자.

참고도서:

Gene A. Getz, Sharpening the Focus of the Church (Moody Press).
Horace Bushnell, Christian Nurture (Baker Book House).
Richard R. Osmer, Teaching for Faith (Westminster/John Knox Press).
김도일, 『교육인가 신앙공동체인가』 (한국장로교출판사).
노자, 『교사와 학생이 교실에서 읽는 노자의 도덕경』(민들레교회).
리차드 오스머, 박봉수 역 『교육목회의 회복』 (한국장로교출판사).
옥한흠, 『예수믿는 가정 무엇이 다른가?』 (두란노).
조쉬 헌트, 래리 메이스, 최일희 역, 『왜 내게 배우는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가?』 (디모데).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
로렌스 리차드, 권혁봉 역 『창조적인 성서교수법』 (생명의 말씀사).
파커 팔머, 이종태 역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IVP).
Robert W. Pazmi o, Foundational Issues in Christian Education (Baker).

*이 글은 『신앙이란 무엇인가』(한국장로교출판사)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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