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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348. [역경의 열매] 장욱조 (1-14) ‘고목나무’가 ‘생명나무’로… 내 노래처럼 바뀐 인생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09.28|조회수111 목록 댓글 0



***간증: 1348. [역경의 열매] 장욱조 (1-14) ‘고목나무’가 ‘생명나무’로… 내 노래처럼 바뀐 인생


톱스타였지만 빚더미에 시련 통해 회심… 부유했던 어린 날, 6·25로 집안 풍비박산


 장욱조 목사(가운데)가 올해 3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기독교계 쎄시봉’이라 불리는 1세대 찬양사역자 김석균 목사(왼쪽), 김민식 전도사와 나란히 서서 웃고 있다. 국민일보DB나는 40년 동안 예수를 모르고 살던 ‘딴따라’였다. 조용필의 ‘상처’, 최진희의 ‘꼬마인형’, 태진아의 ‘두 여인’, 박정식의 ‘천년바위’,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 유미리의 ‘젊음의노트’…. 내가 작곡한 노래만 1000곡이 넘는다. 1980년대 직접 부른 ‘고목나무’ ‘낙엽 위에 바이올린’ ‘왜몰랐을까’라는 노래로 ‘오빠 부대’를 이끌기도 했지만 후속곡들의 음반 실패로 큰 빚을 지게 됐다. 


아내가 지인들에게 빚을 얻으러 다니다 전도를 받았다. 그 아내의 손에 이끌려 1986년 3월 31일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다. 예수님과는 무관할 줄 알았던 나의 교만이 십자가 사랑으로 녹아내렸다. 탕자처럼 살았던 삶을 끝내고 내 삶의 주권, 소유권, 생존권을 예수님께 맡기기로 했다. 주님 주신 은혜의 감격으로 ‘생명나무’라는 찬송을 작곡했다. 


대중가수로서 부른 고목나무와 복음가수로서 부른 생명나무라는 두 곡은 내 인생의 기원전(B.C)과 기원후(A.D)를 상징한다. 아마도 두 나무의 이야기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내 입술의 간증이 될 것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인도해 주셨다. 나에게 특별히 음악적인 재능을 주셔서 수많은 노래로 하나님이 나를 훈련 시켜 주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나 같은 죄인에게 ‘할 수 있다 하신이는’과 같은 곡을 쓰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난날 나처럼 고목나무와 같은 사람들에게 찬송이 울려 퍼져 그들에게도 생명의 잎새가 돋아나길 기도한다. 


나는 해방 이태 뒤인 1947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현 목포)에서 장효식과 정연순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49년 이름을 올렸다. 그땐 홍역으로 숨지는 아이가 많았다. 본래 우리 형제는 9남매였는데 내 위로 내 아래로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목포경찰서 경찰관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면장이었다. 어린 시절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놀 정도로 우리 집은 부유했다. 땅도 제법 있었다. 1950년 6·25, 북한의 남침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다.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던 우리 집안의 불행도 참담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증손자까지 4대 15명이 함께 살다가 어머니와 우리 3남매 형님, 누나, 나만 목숨을 부지했다. 아버지는 부산의 낙동강 전투에 참여하느라 부산에 계셨고 목숨을 지키셨다. 나머지 식구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북한군이 목포를 접수했을 무렵이다. 북한 편이 된 사람들, 소위 치안대는 정부 관리이거나 국군을 도운 이들의 집에 쳐들어갔다. “씨를 말려야 한다”며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남자는 모조리 잡아갔다. 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우리 집에도 그들이 닥쳤다. 나는 광에 있는 항아리에 들어갔다. 검고 커다란 항아리에 머리를 내밀었다. 문살에 모기장이 쳐져 있었다. 그 모기장으로 바깥이 보였다. 빨간 완장을 찬 청년 두세 사람이 어렴풋이 보였다. 장대를 들고 있었다. “애 새끼 어디 갔어?” 가슴이 쿵쾅거렸다. 다섯 살 무렵인데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정리=강주화 기자 


* [역경의 열매] 장욱조 (1) '고목나무'가 '생명나무'로… 내 노래처럼 바뀐 인생

* [역경의 열매] 장욱조 (2) 부친 "예수 믿느니 내 주먹 믿겠다" 전도 비웃어

* [역경의 열매] 장욱조 (3) 음악학원 다니던 중 '가수협회증' 발급 유혹에…

* [역경의 열매] 장욱조 (4) 하나님 주신 '작곡 달란트' 살리니 잘나가기 시작

* [역경의 열매] 장욱조 (5) 여자친구의 부친 "'딴따라'와는 결혼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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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전남 목포 출생, 지구레코드 전속 작곡가, ‘장욱조와 고인돌’ 대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목회대학원 석사, 현 한국복음성가협회 회장, 한소망교회 선교목사와 세계로교회 협동목사


***[역경의 열매] 장욱조 (2) 부친 “예수 믿느니 내 주먹 믿겠다” 전도 비웃어


가수 꿈 키우며 풍금·기타·트럼펫 섭렵, 음표 머리에서 춤추는 듯… 고1 때 첫 작곡


 6·25 전쟁 전후 장욱조 목사가 읍내 사진관에서 그의 부모, 누나와 가족사진을 찍었다. 4대 15명이 살던 그의 집안은 전쟁 중 대부분 목숨을 잃고, 부모와 그를 포함한 삼남매 5명만 살아남았다.어머니와 우리 삼남매가 피신한 곳은 전남 무안군 일로면 산정리에 있는 외가였다. 좌익 청년들이 창을 들고 와 아버지 행방을 캐묻고 우리 가족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어머니는 지서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네 남편 장효식이 있는 곳을 대라!” 며칠 감금된 채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머니께서는 “나는 모른다”고 버텼다.


공산군 앞잡이들은 “남편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고 어머니를 겁박했다. 어머니는 “죄가 있으면 내가 죽고, 죄가 없으면 내가 산다”고 담담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따, 이년 하는 소리 좀 들어보소. 통 크네”라며 혀를 찼다. 그들은 어린 나도 데려갔다. 나를 보면서 “저런 경찰관 새끼는 때려 죽여야 한다”며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나는 기절을 했던 모양이다. 치안대원 중 김재수라는 분이 우리 집안과 친했다. 그분이 다른 사람들 몰래 나를 외할머니에게 빼돌려줘 나는 살게 됐다. 어머니는 미국 전투기 B-29가 공중에 나타나 공산군과 좌익분자들이 지하 벙커로 숨은 틈을 타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신 것을 생각하면 다윗의 시편이 떠오른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전쟁 후에도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발령지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셨다.


아버지는 목포의 대표적 야당 인사인 민주당 후보 김문옥씨와 친척이었다. 김씨는 가수 남진(본명 김남진)의 부친이다. 김씨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아버지는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 자유당 정권에 밉보인 거다. 결국 옷을 벗었다. 아버지는 퇴직 후 술로 마음을 달랬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어머니와의 다툼도 잦아졌다.


우리 가족이 복음을 듣게 된 것은 막내 이모를 통해서다. 이모는 집에 오실 때 마다 항상 기도하셨다. 막내이모는 아버지에게 자주 “형부,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왜 구원만 주냐. 100원이나 1000원을 주지”라며 흘려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반대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어린 시절, 마을 한 가운데 달린 스피커로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오동추야’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등등. 나는 그런 노래를 들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가수를 꿈꿨다. 박수도 받고 인기도 얻고 돈도 벌 수 있는 가장 멋진 직업 같았다. 나는 임성초등학교 저학년 때 독학으로 풍금을 쳤다. 학예회 때는 ‘푸른 하늘 은하수’와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연극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교 조례 때 학교 단상 위에 올라가 지휘를 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기차로 통학했다. 임성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목포역을 지나 목포역에서 내렸다. 유달중을 다녔다. 동광고(현 홍일고)에 진학한 뒤 동네 형에게 기타를 배웠다. 고1 때 처음 작곡을 시작했다. 주로 동요였다. 가요를 만든 건 66년 고3때다. 첫 곡은 ‘님이여’였다. ‘가시는/길에/살며시/웃어주오/이별이란/서러운 것’이 가사였다.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율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 마치 내 머릿속에 음표들이 제각각 돌아다니다 춤추듯 자리를 잡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에 감사한다. 고등학교 때 밴드부 ‘고슴도치’를 조직했다. 마을 언덕에 올라가 트럼펫을 불었다. 우리 밴드는 마을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주최했다. 1등상은 양은냄비였다. 정리=강주화 기자 


***[역경의 열매] 장욱조 (3) 음악학원 다니던 중 ‘가수협회증’ 발급 유혹에…


대입서 작곡과 지망했지만 떨어진 뒤 신문배달·과외하며 가수의 꿈 키워


 장욱조 목사는 고교 시절 고슴도치라는 이름의 밴드를 만들었고 마을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다. 장 목사(왼쪽 네 번째)는 밴드부 활동을 할 때 항상 기타를 들었다.마을 노래자랑대회가 끝나면 이장이 잔치를 열어줬다. 닭죽을 끓여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나눠먹었다. 마을 아가씨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내가 만든 곡 ‘님이여’를 기타를 치며 부르기도 했다. 동창들은 지금도 그때 자작곡을 부르던 내 모습을 얘기한다. 부모님은 내가 음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너 하고 싶은 것 하라”며 격려해주셨다. 


나는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 한 형이 있었다.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학교 가서 공부할 수 있어!” 그 형의 얘기를 듣고 진학할 학교를 알아봤다. 내겐 밴드부가 우선순위였다. 당시 서울 중동고에 밴드부가 있었다. 중동고 야간 과정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목포 동광고를 계속 다녔다. 


고3 동광고 밴드부를 담당하던 음악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넌 노래 만드는 실력이 출중하다. 작곡과에 진학해라.” 당시 나운영 연세대 음대 교수가 서울역 근처 동자동에 살았다. 나 교수에게 한 차례 레슨을 받았다. 전기에는 연세대, 후기엔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만약 고3 때 내가 대학에 입학했다면 무엇을 했을까. 아마 고교 음악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고 1, 2학년 때 여러 음악 콩쿠르에서 ‘오 솔레미오’ 등 이탈리아 민요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하나님은 내가 성악가의 길로 가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나는 대학 낙방으로 대중가요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67년 서울로 왔다. 이종사촌형이 종로에서 작은 양철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내가 배달한 산업경제신문은 1954년 창간돼 73년 폐간된 일간 경제신문이다. 형의 가게 옆에는 대포집 ‘송씨네’가 있었다. 대포집 주인의 아들은 넷이었다. 그중 초등학생과 중학생 과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고된 시간이었다. 오로지 가수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나의 재능을 믿었다. 어머니는 막내이모의 전도로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교회 다니는 것들은 조상도 몰라보는 상것”이라며 교회 다니는 이들을 비난했다. 반면 어머니는 제사상을 차릴 때마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 효도해야지 돌아가시고 나서 상 차리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푸념하셨다.


어머니는 한여름 마을회관에 단기선교 오는 대학생들의 기타 소리를 좋아했다. “밭 맬 때 회관에서 찬송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참 좋더구나.” 어머니는 그런 말씀도 하셨다. “우리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마을엔 교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사모했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잠 8:17)는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기타 학원 주변을 배회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로 시작되는 노래 ‘노래가락 차차차’의 작곡가 김성근의 제자라는 친구를 만나게 됐다. 그는 김성근이 운영하는 기타학원 학원생에 불과했다.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좋은 기회가 있다며 이런 제안을 했다. “자네 가수 되고 싶지? 가수 되려면 가수협회 회원이 되겠나?”


그는 협회증만 있으면 가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신문 배달, 가정교사로 가수 될 날만 꿈꾸던 내게 솔깃한 얘기였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그는 협회증을 만드는 데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소 한 마리 값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어렵게 모은 돈을 그에게 내밀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곧 가수가 되는 건가?’  


***[역경의 열매] 장욱조 (4) 하나님 주신 ‘작곡 달란트’ 살리니 잘나가기 시작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 즉석 작곡… 국도극장 앞에 ‘장욱조 음악실’ 열어


 친구 김상만과 장욱조 목사(오른쪽)가 개나리가 만발한 남산공원으로 놀러 갔을 때의 모습이다. 장 목사는 여성 듀오 비퀸즈 ‘속삭여주세요’ 작곡으로 데뷔했다.당시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은 3만∼5만원 사이였다. 소 한 마리 가격은 4만원 전후였다. 소 한 마리를 팔아 한 학기 등록금을 내 우골탑(牛骨塔)이란 말이 나온 시절이다. 그 돈이면 처녀가 시집갈 때 웬만한 혼수를 준비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돈을 건네고 노심초사 가수협회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친구는 기타학원 주변에서 종적을 감췄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마련한 돈인데…. 이 나쁜 자식 잡히기만 해봐라.” 나는 눈물을 머금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나는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것이다. 협회증 하나로 가수가 되는 줄 알 만큼 순진했다.


친구 최하우의 소개로 경북 선산 출신의 친구 김상만을 만났다. 나랑 죽이 잘 맞았다. 형제처럼 서로 도와주고 배려했다. 나는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상만은 나를 전오승 음악학원 교수이신 작곡가 이성길 선생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성길 선생은 친구 상만의 요청으로 나의 음반 제작을 도와주려 했다.


나는 이 선생에게 녹음비를 지불했다. 그런데 상만이는 나를 말렸다. “가수는 하지 마라. 넌 작곡을 잘하지 않느냐. 왜 가수가 되려고 하느냐. 넌 작곡만으로 충분히 유명해질 수 있어!”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친구의 조언이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난 노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선생에게 음반 준비를 그만둔다고 했다. 


이 선생은 상만이가 말린 걸 알고 그를 나무랐다. “너는 왜 장욱조 노래를 못하게 하느냐? 자기가 하고 싶다는데….” 결국 나는 이성길 선생 밑에서 사보를 해주며 편곡 기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사보(寫譜)는 노래가 한 곡 있으면 그 노래에 필요한 모든 악기별 악보를 따로 쓰는 것이다. 나는 약 1년 동안 사보를 하면서 편곡 기법과 요령을 배울 수 있었다. 편곡으로 돈을 조금 벌기도 했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다. 철도청 홍익회 판매원으로 일하던 큰형이 나를 도와줬다. 그러다 작사가 이성길 선생과 짝을 이뤄 처음 작곡 데뷔를 했다. 1969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나온 여성 듀오 비퀸즈 ‘속삭여주세요’란 곡이다. 


‘당신을 영원토록 사랑할 내 마음 속삭여주세요’라는 노랫말의 트로트였다. 노래가 꽤 인기를 얻었지만 이 듀오는 가수생활을 하다 결혼한 뒤 활동을 중단했다.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게 됐다. 내가 속해 있던 오아시스레코드사는 내게 피아노가 있는 레슨 룸을 하나 내줬다. ‘아 드디어 나도 작곡가로 인정받는구나.’


그때부터 기성 가수의 편곡과 작곡도 할 기회가 생겼다. 을지로 국도극장 앞 건물 맨 위층인 4층엔 초원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에서 작사가 박건호가 준 메모를 받았다. 나는 한쪽 다리로 박자를 맞추고 연필을 든 손으로 박자를 맞췄다. ‘따따다다 따다다∼따따다다 따다다∼.’ 한 시절을 풍미한 1973년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란 노래를 만들었다. 


메모를 보고 다방에서 즉석으로 만든 것이다. 작곡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로 여겨진다. 노랫말을 보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장르, 템포, 선율이 자유자재로 만난다. 블루스, 발라드, 디스코, 민요…. 빠르게 느리게 보통…. 소스가 들어가면 곡이 나온다. 나는 약 6년 동안 생활을 위해 노래 레슨도 하고 작곡 수업도 했다.


친구 상만의 말대로 내가 가장 잘하고, 자신 있는 분야는 작곡이었다. 나는 상만과 콤비를 이루게 됐다. 상만은 작사자, 나는 작곡자로 여러 가지 대중가요를 만들었다. 작곡자로 어느 정도 유명해진 74년, 내 이름을 딴 음악실을 내게 됐다. ‘장욱조 음악실’. 서울 을지로 국도극장 앞에 있었다. 레슨 룸과 내 개인 작업실이 별도로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5) 여자친구의 부친 “‘딴따라’와는 결혼 안된다”


만드는 노래마다 히트로 이름 뜰 때 조흥은행 다니던 고향 동생 소개받아


 장욱조 목사가 어느 해 여름 태진아(오른쪽)와 물놀이 갔을 때의 모습이다. 장 목사는 태진아를 비롯해 조용필 이미자 윤시내 주현미 박정식 하춘화 등 수많은 가수를 위해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했다.내가 당시 속했던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를 부른 가수 장미화가 있었다. 장미화의 소개로 가수 조경수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아니야’란 곡을 만들어줬다. 조경수가 부른 ‘아니야’는 대히트를 쳤다. 이어 ‘돌려줄 수 없나요?’를 작곡해줬다. 조경수는 이 노래로 1978∼7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무대에 섰다.


그 당시 MBC가 매년 12월 31일 방송하는 10대 가수 가요제는 가수들에게 아주 큰 행사였다. 이 프로그램에 누가 출연하고, 또 누가 1등인 가수왕이 되는지가 큰 관심사였다. 나는 작곡자로서 인기에 힘입어 진미령 정윤선과 같은 유명 여가수에게 노래 레슨을 했다. 진미령에게 줬던 곡 ‘아쉬움’이 후일 김미성이 리메이크를 해 히트를 쳤고 ‘먼훗날’로 또다시 큰 인기를 누렸다. 


내가 작곡한 노래는 수많은 대중가수들이 불렀다. 조용필이 노래한 ‘상처’, 유미리가 부른 ‘젊음의 노트’, 최진희의 ‘꼬마인형’, 태진아의 ‘두 여인’, 박정식의 ‘천년바위’, 이미자가 부른 ‘내 영혼 노래가 되어’, 하춘화의 ‘그 누가 당신을’, 주현미가 노래한 ‘뜻밖의 이별’, 윤시내의 ‘하얀 밤’…. 이외에도 발표한 곡들이 1000곡이 넘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몰랐으므로 내 삶의 가치는 ‘인기’와 ‘부’였던 것 같다. 아내를 만난 건 내가 작곡가로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74년 여름 무렵이다. 고교 선배가 종로1가 한 건물 2층의 종다방으로 나를 불렀다. 그 선배는 나를 아내와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서경숙. 너보다 일곱 살 아래 고향 동생이네.” 


그 선배는 나를 작곡가라고 소개했다. 경숙은 그때 조흥은행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었다. 현모양처의 이미지였다. 예뻤다. 주변에서는 영화배우 최은희와 유지인을 닮았다는 칭찬을 듣는 수준이었다. 나는 경숙에게 호감이 갔지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는 않았다. 제자들도 있고, 여자 친구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향 사람으로 가끔 만났을 뿐이었다. 


경숙은 당시 대중가요 작곡자를 만난다는 호기심이 컸다고 한다. 연예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유명한 가수 ‘아니야’를 부른 조경수 등이 있었다. 경숙이는 나오라고 할 때마다 혼자 나오지 않고 자기와 친한 선배 언니와 함께 왔다. 아마 혼자 연예인을 만나는 게 부담이 됐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을 했다. 내 나이가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랑과평화의 리더 김명곤, 가수 조경수 한동일 등이 나를 부추겼다. “경숙이 놓치지 말고 꼭 결혼하세요. 착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프러포즈를 마음먹었다. 장소는 77년 명보극장 건너편 지하에 있던 돌다방이었다.


나는 경숙에게 이제 정식으로 교제하길 원한다고 고백했다. 경숙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좋다, 싫다’는 말을 바로 하지는 않았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경숙은 “부모님께 여쭤볼게요. 허락을 받아야 해요”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교제를 하기 전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교제가 대개 결혼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숙의 부모는 나와의 교제를 반대했다. 경숙의 아버지는 목포에서 라이온스 클럽 총재와 숙박업을 하는 지방 유지셨다. 그 즈음 혼기가 찬 경숙에게는 서울 유명 사립학교재단 이사장, 판검사 등 법조인 집안 등에서 선이 들어왔다. 부친은 경숙에게 “네가 그런 ‘딴따라’와 결혼하는 꼴을 보느니 내가 차라리 죽겠다”고까지 했다. 경숙의 집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원불교 집안이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6) 유행하던 그룹사운드에 합류 밤마다 호텔서 노래


처가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결혼 성공… 아내 뒷바라지 속에 대중가수 꿈 무럭


 장욱조 목사는 고향 후배인 서경숙과 1978년 10월 31일 서울 중구 충무로 세종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인과 장모는 그의 재력과 학력을 탐탁지 않게 여겨 처음엔 결혼을 반대했다.고향 후배 서경숙은 5남매 중 셋째였다. 부모의 반대로 매우 힘들었다. 그녀는 나와 결혼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한 장면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경숙과 나, 나의 한 남자 선배 셋이 서울 중구 스카라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을 때다. 영화가 다 끝나기 전에 내가 일어섰다. 나는 그때 “녹음실 가서 마쳐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경숙은 ‘저 남자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구나. 책임감 있네.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단다. 경숙의 언니도 그녀에게 힘이 됐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꼭 결혼해라. 그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과 결혼해라. 부모님이 너 대신 네 인생을 사는 거 아니다.” 


하지만 경숙의 부모님은 “가진 것도 없고, 배움도 없는 남자 만나 무슨 고생하려고 그러느냐”며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마음을 돌리지 않자 경숙의 부모님은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하셨다. 우리 집은 결혼 문제를 나의 의사에 맡겼다. 결국 우리는 1978년 10월 31일 서울 중구 충무로 세종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이자 연극배우인 김동원 선생이 해주셨다. 사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처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위였다. 내가 그런 남자라는 게 아내에게 미안했다.


작곡가로서 이름이 알려졌지만 처가가 원하는 부, 명예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장인 장모의 말대로 ‘가진 것도 없고, 배움도 없는 남자’에 불과했다. 나는 상경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남영동 후암동 등의 셋집을 전전하는 처지였다. 결혼 후 갈 곳이 없었다. 옛말에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는 안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 부부는 장인 소유의 서울 서대문구 문화촌 집으로 들어갔다.


70년대 중후반 나는 ‘사랑과평화’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고(故) 김명곤과 친하게 지냈다. 당시는 그룹사운드 결성이 유행이었다. 사랑과평화는 이장희의 도움으로 1집 ‘한동안 뜸했었지’를 발표, 히트시켰다. 최고가의 악기와 24채널 레코딩 기술로 시대를 앞서 갔다. 77년 어느 날 김명곤이 내게 말했다. “형님도 그룹사운드 한번 결성해봐요.” 난 주춤했다.


나는 가수가 되려다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난 안돼. 난 이제 30대야. 너무 늦었어.” 처음엔 이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다. ‘꿈을 이루기에 늦은 나이는 없는 거야. 난 가수가 되길 늘 꿈꿔왔잖아.’ 나는 작곡자로서 얻은 자신감을 발판 삼아 그룹 결성을 준비했다. 함께할 다른 멤버를 찾으러 다녔다. 서울 무교동 클럽에서 연주하는 5인조 팀을 찾았다.


당시 아내와 교제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부터 아내는 내 뒷바라지를 했다. 시장에서 옷감을 사와 멤버들의 옷을 손수 지었다. 팀 이름은 ‘장욱조와 고인돌’로 정했다. 아내와 제주도로 여행 갔을 때 본 박물관의 고인돌 이미지가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고인돌을 이름으로 정했던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고인돌이 무엇인가. 지석묘라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무덤 양식이다. 시신을 안치한 뒤 지상 4면을 돌로 막은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영혼이 죽어 있었다. 팀을 결성하고 여러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밤마다 여러 호텔을 전전했다. 가든호텔, 백남(현 프레지던트호텔), 영동, 풍전…. 주로 팝송을 불렀다.


우리 팀이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출연료가 많지 않았다. 멤버들이 나에게 제안했다. “형님, 우리 방송에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러 히트를 해야 여기저기에서 불러주고 출연료도 팍팍 올라가지요.” 나는 드디어 내가 대중가수로서 꿈을 이룰 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7) 어머니 예수 영접 권유에 “여든 살 되면 믿겠다”


아내, 음반 나올 때마다 적극 홍보… ‘가요 톱10’서 7주 연속 1위 차지


 ‘장욱조와 고인돌’ 밴드의 앨범 재킷. 장욱조(가운데)는 1979년 발표한 ‘고목나무’로 KBS 프로그램 ‘가요 톱10’에서 7주 연속 1위를 했다.나는 1979년 내가 작곡한 ‘고목나무’를 타이틀로 첫 앨범을 냈다. ‘저 산 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가사는 조규철이 작사했다. 고목나무는 진미령이 75년 ‘아쉬움’으로 데뷔할 때 낸 음반의 뒷면에 내가 녹음해 옴니버스 형식으로 넣기도 했던 곡이다. 요즘 홍보는 인터넷으로 많이 하지만 당시 홍보는 발품을 팔았다. 


아내 서경숙은 음반을 들고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그 가을에도 다방에서는 유행가가 여전히 흘러나왔다. 아내는 역전이나 번화가 다방을 찾아갔다. “장욱조씨가 이번에 낸 음반이에요. 한번 틀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마담’이라 불리는 다방 주인에게 음반을 건넸다. 음반만 건네는 게 아니라 요구르트, 사이다 등 음료수도 건넸다. 


각 지역 유선방송국을 찾아갔다. 디제이를 만났다. 여성일 경우엔 스타킹, 남성일 경우엔 양말이나 넥타이 선물을 했다. “제 남편이 낸 음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방 도시를 갈 때마다 전화번호부를 펴놓고 엽서를 썼다. 그 지역 주소로 라디오 방송국에 신청곡을 써보내는 것이다. ‘장욱조와 고인돌의 고목나무 들려주세요.’


낮에는 다방, 방송국 등 큰 건물을 다니고 밤엔 여관에서 신청곡을 썼다. 서울 구로공단의 각 공장도 열심히 다녔다. 공장 수위들이 문전박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 놓고 가요. 나중에 내가 방송실 가져다 줄 테니….” 그러면 아내는 사정했다. “좋은 노래예요. 직접 전해드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경비원들은 소리치기 일쑤였다. “아, 거기 두고 가래도!” 


그 경비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루떡을 이고 공장에 가기도 했다. 내가 호텔 나이트 공연을 마치고 가면 아내는 집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이곳저곳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보,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이 많아.” 음반 홍보를 하는 동안 아내는 코피를 여러 차례 쏟았다.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던 장인 장모도 나를 위해 애썼다. 


동양화가셨던 장인 서한익(91년 작고)은 내게 그림을 여러 점 표구해주셨다. 그러면서 도움 줄 만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라고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동네 선술집에서 “우리 아들은 유명한 작곡자”라고 자랑하길 좋아했다. 아버지는 재정 보증을 잘못 섰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실의에 빠지셨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후유증으로 50대 중반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홀로 된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예수님을 영접하고 고향에서 동네 어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다. 자녀들 중에도 객지에 나와 있는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 너의 모든 삶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80세 되면 예수 믿을 테니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만 열심히 해주세요” 라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형님과 누나, 여동생들 모든 가족이 어머니와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는 신앙생활을 미뤘다. 오직 나는 아내와 함께 노래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아내와 장모님의 정성 어린 홍보와 어머니의 기도 덕일까?


내 노래는 80년 초반부터 라디오방송에서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해 봄 내 노래는 매주 대중가요를 순위대로 노래를 들려주는 KBS TV 프로그램 ‘가요 톱10’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아! 내가 꿈을 이뤘구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7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왜 몰랐을까’란 노래까지 10위권에 진입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였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8) ‘고목나무’로 최고가수 올랐지만 빚은 점점 쌓여


고가 음향장비 구입·음반 홍보비 늘고 ‘왜 몰랐을까’ 방송금지곡 지정까지


 장욱조 목사가 1981년 피아노를 치며 ‘낙엽 위의 바이올린’을 부르는 모습을 한 방송사에서 촬영하고 있다. 이 노래는 ‘금주의 인기가요’라는 프로그램에서 2위까지 올라갔다.전남 광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광주MBC 방송국이 불탔고, 방송국의 모든 예능프로그램이 중단됐다. 그해 여름 광주는 숨죽인 분노에 차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같은 계절 부산 해운대 극동호텔 앞 모래사장에서 ‘고인돌’을 불렀다. 여학생, 아가씨들이 내 뒤를 따라왔다. “오빠!” “오빠!” “오빠!” 여성 팬들이 악을 쓰며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남진’과 ‘나훈아’가 된 것 같았다. 그때까지 그들은 나의 우상이었다. ‘목포에서 올라온 촌놈이 고생 끝에 이제 인기가수가 됐구나.’ 여성 팬들의 환호와 아우성이 마치 환영처럼 들렸다. 내가 고목나무라는 노래로 최고의 인기가수가 된 것이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 “여보 그동안 정말 수고했네”라고 말하며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러나 내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가왕 조용필이 돌아왔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름을 알린 그는 대마초 파동으로 4년 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1980년 가을 정규 1집 ‘창밖의 여자’를 들고 나타났다. 이어 부른 ‘한 오백년’이란 노래는 암울한 시대를 탄식하는 한스러움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외 ‘고추잠자리’(81) ‘못찾겠다 꾀꼬리’(82) ‘친구여’(83) ‘여행을 떠나요’(85) ‘허공’(85)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87) ‘서울서울서울’(88) 등으로 가요계를 휩쓸었다. 조용필은 80년대 MBC 10대가수가요제 가수왕 6차례, KBS 가요대상 최고인기가수상을 4차례 수상했다. 다른 가수들은 들러리였다. 나도 다시 1위를 하지 못했다.


나는 81년 오아시스에서 지구레코드 전속 작곡가로 옮겼다. 당시는 두 곳이 지금의 SM과 YG엔터테인먼트와 같은 양대 음반기획사였다. 나는 그때 ‘낙엽 위의 바이올린’이란 노래를 지구레코드 전속기념 음반으로 발표했는데 금주의 인기가요 2위까지 올라갔다. 1위는 조용필이었다. 나는 그때 전속계약금으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 3000만원쯤 됐다. 


우리 부부는 80년과 81년 아들 희웅과 딸 지연을 연이어 얻었다. 나는 작곡가로, 가수로, 장욱조와 고인돌의 리더로 바쁜 날을 보냈다. 아내는 두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어했지만 나는 가정을 돌볼 새가 없었다. 나이트클럽 공연은 대개 오후 7시에 시작돼 다음날 새벽 4시쯤 끝났다. 당시 그룹사운드들은 장비 경쟁을 많이 했다.


나이트에서 음악 소리가 크고 음질이 좋아야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나이트는 하루에 두 팀에 일을 맡겼다. ‘장욱조와 고인돌’은 다른 그룹과 번갈아 한 호텔 나이트에서 공연했다. 우리 팀의 음향이 다른 팀보다 떨어지면 우리는 그 나이트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연료는 3개월에서 6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았다. 


현금이 없으면 이 어음을 미리 팔아야 했다. 리더는 팀원들 급여, 장비 구입, 공연 무대 섭외까지 했다. 나는 공연료를 6분의 1로 나눠 팀원들과 똑같은 돈을 수입으로 가져갔다. “형님이 단 얼마라도 돈을 더 많이 가져가야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팀원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들게 그룹사운드 생활을 하는 팀원들에 대한 배려였다. 


나는 빚을 얻어 고가의 장비를 샀고, 팀원들의 월급을 챙겨야 했다. 음반 홍보비도 많이 들었다. 빚이 쌓여갔다. 내가 부른 ‘왜 몰랐을까’가 방송심의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당시 심의는 사실상 안전기획부(현재 국가정보원)에서 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성을 써 여성 목소리를 낸 것이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은폐된 5·18 민주화운동을 풍자하는 노래란 얘기도 돌았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9) 한 번만 같이 가자는 아내 따라 연예인교회에


고은아 권사에 붙들려 다음주 또 출석… 서수남 장로 등 권유로 성가대 서기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일할 때 동료 작곡가들과 함께한 모습. 장욱조 목사(앞줄 가운데)는 1981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리더 신중현과 같은 전속계약금을 받고 지구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됐다.나는 영국의 유명 그룹 비지스의 스타일을 모방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항변할 기회도 없이 ‘왜 몰랐을까’는 금지곡이 되었다. MBC는 1981년 창사 기념으로 한국가요 60년사에서 1000곡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0곡 이상의 히트곡을 낸 작곡자는 18명이 있었다. 가장 많은 히트곡 작곡자는 박춘석(57곡) 박시춘(49곡) 길옥윤(34곡)이었다. 


나는 12곡의 히트곡을 발표한 작곡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때는 저작권료 지불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격이었다. 나는 가난한 작곡가 겸 가수에 불과했다. 앙드레김 패션쇼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앙드레김은 그때에도 당대 최고의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을 모델로 세우길 좋아했다.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나는 점점 빚에 쪼들렸다. 


처음엔 처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아내는 여기저기 빚을 얻으러 다녔다. 어느 날 아내가 친구 김명지 집사의 집에 돈을 빌리러 갔다 왔다. “여보, 오늘 돈을 만들어준 친구가 제게 교회에 나가보라고 하네요. 이번 주일 교회에 같이 가볼래요?” 아내가 처음 교회에 가자고 한 그 날짜를 잊지 못한다. ‘1986년 3월 22일 토요일.’


원불교 집안에서 자란 아내가 먼저 교회에 가자고 했을 때 문득 고은아 권사가 떠올랐다. 80년 KBS 방송국에서 녹화를 마친 뒤 고 권사를 마주쳤을 때 내게 전도를 했다. 나는 나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 교회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였다. 그래서 나는 “이왕이면 연예인교회로 가지. 데려다줄게”라고 했다. 


다음날인 23일 아내를 교회 앞에 데려다주고 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그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설교 말씀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그 다음 주일을 앞두고 아내가 내게 한 번만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인들이 내게 교회에 가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여든까지 노래 부르는 ‘딴따라’로 살다가 노래 부를 힘 없어지면 그때 교회 갈 거예요. 예수 믿고 천국은 갈 거니까 걱정 마십시오.” 연예인은 생활이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주일 예배 참석 등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아내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교회에 가기로 했다. 대신 단서를 달았다. “오늘 한 번만 갈 거야. 난 여든에 갈 거니까 당신만 애들 데리고 다녀!” 


나는 아내가 교회에 가는 건 좋다고 생각했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자주 봤다. 대개는 배우자에게 정서적으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 주일인 3월 30일,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연예인교회에 나갔다. 고은아 권사님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날 고 권사님은 예배 후 나를 새신자로 소개하며 6년 전 내가 바람맞힌 일을 얘기했다. “제가 장욱조씨를 교회 문 밖에서 40분 동안 기다렸어요.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예배당으로 들어와 하나님께 장욱조씨를 우리 교회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6년 만에 응답이 됐네요”라고 하자 성도들이 크게 박수를 쳐 주었다. 고 권사님은 우리 부부에게 점심을 대접하시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했다. 그 다음 주일엔 ‘밥까지 얻어먹었는데 한번은 더 가야지’라며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이번엔 성가대원인 가수 서수남 장로와 탤런트 이영후 장로에게 붙들렸다. “하나님은 찬양 들으시는 것을 가장 기뻐하세요. 찬양하면 하나님이 앞길을 열어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결국 나는 성가대 테너 파트를 맡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10) ‘나 같은 죄인…’ 부를 때 갑자기 쏟아진 성령세례


예수님 십자가 사건 등 의심 씻기고 매일 새벽 4시 기도로 하루를 시작


 장욱조 목사(왼쪽)는 아내의 권유로 1986년 3월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다. 장 목사가 연예인교회에서 뮤지컬 ‘지져스 지져스’를 공연할 때 예수의 제자로 분장한 모습.나는 성가대 테너 파트를 맡게 되었다. 가수 김민식 임희숙 윤희정 등이 모두 성가대였다. 그날 교회에 다녀온 뒤 한 유흥주점에서 연락이 왔다. 솔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 일자리가 없는 때였다. 나는 속으로 ‘아, 성가대를 하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건가. 먹고살라고 일자리를 주시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주엔 교회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일자리도 생기고 해서 한 번 더 교회에 갔다. 


그 주엔 3곳에서 노래를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교회에 올걸.’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는 아내와 매주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최성욱 전도사의 권유로 성경 공부를 하게 됐다. ‘제자훈련’ 과정이었다. ‘하나님이 말씀이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갔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앞에서 멈췄다. 그 사건이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성경 이곳저곳에 의심이 생겼다. ‘도대체 오병이어의 기적이 말이 되는가. 작은 떡과 물고기로 5000명을 먹였다니. 사람이 물 위를 어떻게 걷는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제일 답답한 건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는 부분이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예인교회에는 연예인선교단이 있었다. 구봉서 신영균 고은아 김희자 서수남 이영후 등 연예인들이 모두 이 선교단 소속으로 연합 전도집회를 다녔다. 나는 1987년 충남 태안에서 열린 전도 집회에서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혼자 부르게 됐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 짧은 시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온몸이 떨렸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흘린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고 나에게 일어나야 할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령이 임재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모시게 됐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이 내 마음밭에 심어진 듯 믿어졌다. 의심이 사라졌다.


구원은 내게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성령의 역사요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분명했다. 성령의 임재는 나의 바람과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날이 내가 거듭난 날, 성령세례를 받은 날이다. 머리에 들어온 말씀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성령은 곧 열매 맺는 삶으로 나타난다. 내 삶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하루를 새벽기도로 시작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교회로 갔다. 내가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사찰 집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예배당 문 열쇠를 복사하고 싶습니다. 일찍 나와서 기도를 드리고 싶어서요.” 나는 사찰 집사에게 열쇠를 얻어 복사를 했다.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 기도를 했다. 뜨거운 마음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많은 가수 중에 ‘나훈아’도 ‘조용필’도 아닌 나를 택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은혜 베푸신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지난 40년 세월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이었다면 앞으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했고, 주일에는 교회 성가대에 섰다. 성가대에 서면서 복음성가라는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여 이 죄인이’가 교회에서 한창 인기였다. ‘나도 명색이 작곡가인데…. 이제 하나님 믿게 됐으니 복음성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같은 교회 이영후 장로에게 작사를 부탁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11) 찬양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교회 부흥회 주제가로 큰 인기


직접 부른 10곡 모아 첫 찬양음반 내… 교회 나간 뒤 수입 늘어 빚 모두 청산


 장욱조 목사(뒷줄 왼쪽 세 번째)가 1992년 1세대 찬양 사역자인 전용대 목사(같은 줄 첫 번째), 김석균 목사(앞줄 맨 오른쪽) 등을 비롯한 한국복음성가협회 임원들과 함께했다.   



이영후 장로님이 어느 날 늦은 밤 전화로 두 편의 가사를 불러주셨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를 걸으라 하시네∼’라는 가사였다. 가요만 만들던 습관 때문에 트로트풍의 단조곡이 나왔다. 찬송가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다시 밝고 힘찬 장조로 곡을 만들었다. 우리 교회 최성찬 지휘자에게 곡을 들려줬다. 


대중성이 있어 널리 불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전용대에게 줬지만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나는 같은 해 ‘할 수 있다 하신 이는’과 ‘주님 예수 나의 동산’을 비롯해 10곡을 내 목소리로 담아 처음으로 찬양 음반을 냈다. ‘고목나무’ 가수가 그야말로 ‘생명나무’ 가수가 된 것이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QR코드)는 부흥 강사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오산리기도원을 비롯해 전국 기도원에서 뿐만 아니라 각 교회 부흥회 주제가로 많이 불렸다. 어느 날 서울 명성교회에 출석하던 하덕규 집사가 내게 악보를 부탁했다. “김삼환 목사님이 이 곡을 참 좋아하셔서 매주 예배 후 폐회 찬양으로 온 성도들과 함께 부른답니다.” 1988∼89년 이 노래가 삽시간에 전국 교회에 널리 퍼졌다. 


처음엔 빠르지 않게 작곡됐지만 실제 교회에서는 아주 빠르게 불렸다. 교회 건축 붐 속에 ‘건축 주제가’ 부흥회 주제가로 펴져나갔다. 또 삶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찬양이 되었다. 믿음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애썼다. 여러 곳에서 무대 제안도 있고, 노래주점 열풍으로 내가 작곡한 노래의 저작권료가 조금씩 들어왔다. 


교회를 다닌 지 1년6개월이 될 무렵 우리는 모든 빚을 청산했다. 기적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축복은 말씀에 순종할 때 열매로 나타남을 깨닫게 되었다. 빚을 청산한 뒤 주택청약부금을 넣었다. 빚 때문에 집을 팔고 다시 처가에 살던 때였다. 경기도 성남 분당에 신도시가 들어설 무렵이다. 수많은 사람이 분당 시범단지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구경하고 청약을 신청했다. 


우리도 신청했다. 경쟁률이 116대 1이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89년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첨됐다. “형님, 축하합니다. 나도 넣었는데 난 떨어졌어요.” 같은 교회 김민식 전도사가 부러워했다. 계약금은 처가에서 도와줬다. 석 달에 한 번씩 불입금을 내야 했다. 첫 불입금을 낼 날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보, 어떡해요? 불입금 내야 하는데….”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실 거야. 당첨되게 해주셨으니까 불입금도 나오게 하실 거요.” 아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현실은 현실인데요”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입금 납입일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일본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일본 가수 오카와 에이사쿠에게 준 곡의 저작권료였다.


6년 전 내가 작곡가 고봉산 선생님 소개로 그 가수에게 곡을 준 적이 있었다. 그후 까마득히 잊고 있던 노래였다. 그 금액은 첫 회 불입금을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두세 번 낼 금액이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나머지도 주실 거야.” 결과적으론 이 한 곡의 저작권료만으로 아파트 불입금을 모두 냈다. 


181㎡(55평)로 분양가가 1억원에 가까웠다. 다시 우리 집을 갖게 됐다. 주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이었다. 얼마 후 딸이 서울 중구 예원학교에 진학했다. “교회 옆으로 이사 가자.” 신앙생활은 교회가 가까울수록 유익하다. 특히 새벽기도 다니기가 좋다. 늘 교회 가까이 이사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교회 근처 부암동의 한 빌라로 이사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12) 중국 교회서 찬양집회 중 잠입한 공안에 적발


“한국 가서 中공안 무례 방송하겠다” 김석균 배포와 재치로 무사히 넘겨


 장욱조 목사가 1995년 중국 한 교회의 집회를 하고 있을 때 교회 관계자가 김석균 목사(맨 왼쪽 안경 쓴 사람)가 쓴 쪽지를 장 목사에게 건네고 있다. 내용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라는 것이었다.선교사는 무당을 우리 공연에 초대했다. 그 무당은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중에 눈물을 흘렸다. 통곡의 눈물이 아니라 은혜의 눈물이었다. 무당도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다. 선교지에서는 그런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한번은 일본 선교에 힘쓰시는 예선교회 황바울 목사님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 간 적 있다. 신주쿠 술집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종업원을 대상으로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찬양간증집회를 인도했다. 종업원들은 제법 인기가수였던 내 얼굴을 알아보고 매우 반가워했다. 모인 자매 중에는 옛날 내가 일하던 룸살롱에서 만난 이도 있었다. 국내 교도소 집회도 기억에 남는다. 전남 광주에 사시는 허부경 권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간증과 찬양 요청이었다. 


나는 은혜 가운데 집회를 마치고 허 권사님과 특별면회실로 갔다. 사형수 4명을 만났다. 나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했다. 그 중 정○○ 형제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나에게 간절히 기도를 부탁했다. 기도 제목은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기수로 남아 교도소에서 전도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돌아와서도 기도했다. 3개월 뒤 그 형제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기도대로 무기형으로 감형 됐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권 국가에 대한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94년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중국을 통한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서 기독교 선교가 금지된 국가였다. 95년 김석균이 나에게 제안을 했다. “형님, 이번엔 중국 가서 찬양 집회 해보실래요?” 나는 같이 갔다. 중국 각처 한인 크리스천들이 A교회에 모였다. 참석자는 50∼60명이었다. 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기뻤다.


우리가 세미나를 인도하는 중에 중국 공안경찰이 교회에 잠입했던 모양이다. 공안 2명이 김석균에게 조사할 것이 있다며 면담을 요구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강단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 입국할 때는 관광하러 왔다더니 왜 교회에 와 있냐? 우리나라에선 기독교 선교가 금지돼 있는 것 모르냐. 선교를 하면 처벌을 받는다.” 공안은 김석균에게 겁을 줬다. 


김석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방송국의 아나운서이고 지금 무대에 있는 사람은 유명한 가수이다. 우리는 관광차 왔다 여기 들러 잠시 동포들에게 한국 노래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김석균은 한발 더 나가 공안에게 겁을 줬다. “당신들 말이야. 우리가 순수하게 관광하고, 노래하는데 이렇게 괴롭히면 한국 가서 중국 공안이 무례하고 무법하다고 방송할 거다.” 


눈을 부라리며 힘을 줘 말했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배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중엔 김석균의 기세에 공안이 오히려 겁을 먹었다고 한다. 김석균은 나오자마자 다른 사람을 통해 내게 쪽지를 건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르시오.’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그 쪽지를 받자마자 이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교회 맨 뒷좌석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내가 한 때 날리던 트로트 가수가 아닌가? 나는 신나게 트로트를 불렀다. 둘은 내 노래가 다 끝나자 일어서더니 ‘앙코르’를 외쳤다. 진짜 대중공연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복음 가수가 된 뒤에도 내가 트로트 가수였다는 게 행운이라고 느낀 순간은 많았다. 한번은 한 대형교회 경로대학 어르신 초청 예배에 갔다. 긴 설교가 이어지자 꾸벅꾸벅 조는 어른들이 많이 보였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13) 요한복음 뽕짝으로 부르자 성도들 반응 폭발적


뇌출혈로 쓰러진 자매 위해 기도하다 복음성가 ‘내가 주를 향하여’ 만들어


 장욱조 목사(첫줄 가운 입은 사람)는 총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2000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장 목사 왼쪽이 아내 서경숙, 오른쪽이 어머니 정연순이다.나는 집회 중 조는 어르신들을 어떻게 집중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기도를 했다. 그 순간 응답이 왔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에 4:14). 하나님이 ‘내가 이때 쓰려고 널 대중가수 시킨 거다’라고 하셨다. 고민 끝에 즉석에서 그날 설교 본문인 요한복음(3:16∼17)을 트로트 선율로 만들어 불렀다. 전주가 시작되자 한분씩 눈을 떴다. 노래가 끝날 땐 앙코르가 나왔다. ‘뽕짝’ 찬양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선교 여행 중 노래를 만든 기억도 생생하다. 미국 애틀란타 훼이트빌침례교회(김상민목사) 부흥회에 초청받았을 때다. 그 교회 한 자매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이 됐다. 병원 의사는 의식 회복 가능성은 2%라고 했다. 김상민 담임목사와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 이 자매를 회복시켜 주소서.’ 


나는 숙소로 돌아와 말씀을 읽고 기도를 했다. 그날 내가 읽은 본문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와 시편 121장 중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사 43:2)였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그 말씀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내가 주를 향하여’와 ‘우리가 고난의 바다를 지날 때’란 복음성가이다. 3일 동안 예배 때마다 온 성도들과 함께 찬양 하며 합심하여 기도 했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고자매는 집회가 끝난 후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나는 하나님이 간절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든 복음 찬양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미국 캘리포니아 황영진 목사가 담임하는 스탁톤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일이다. 부흥회 중 박길순이란 자매가 저녁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그가 식사 중 간증을 했다. “내가 자살을 할 마음을 먹은 뒤 친구에게 장례를 부탁했어요. 그 친구가 ‘죽으려거든 이 카셋트 테이프를 들은 후에 죽으라고 해서 듣다가 자살을 포기했어요. 그 테이프가 장욱조의 간증찬양이었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다윗이 수금을 타며 찬양할 때 악신이 떠나듯이 찬양은 놀라운 능력이 있다. 나는 막상 연예계를 떠났지만 먹고 살기가 쉽진 않았다. 90년대 초반 두 자녀가 대학 공부를 하고 미국 유학을 하던 때이다. 학비는 비싸고 고정된 수입은 없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한국저작권협회에 가입했지만 저작권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찬양 집회를 하면 사례비를 고스란히 유학 중인 딸에게 쥐어주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간증이나 찬양 집회 사례비를 흥정하는 것은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다. 찬송을 팔아먹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례비를 받았을 때다. 화장실에 가서 봉투를 열어봤다. 두근거렸다. 단돈 5000원이 들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해가지고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어떤 땐 1만, 2만원이었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곤 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기는 짐승을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말씀에 기댔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했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들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자문하곤 했다. 


***[역경의 열매] 장욱조 (14·끝) 내 노래·간증 통해 모든 사람들이 주님 만났으면


사역 중 말씀에 갈증, 신학대에 진학… 음악 선교목사로 쉼없이 집회 다녀


 장욱조 목사가 아내 서경숙, 아들 희웅, 딸 지연과 가족사진을 찍었다. 장 목사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세 가지 만남은 어머니, 아내,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한다.예수님은 사례를 흥정하지도, 생계를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이렇게 부족함 없이 살게 하시고 계속 사역할 수 있도록 일을 주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종은 절대 걸식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각각의 형편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교회 사역을 하면서 조금씩 말씀의 갈증을 느꼈다. 하나님 주시는 말씀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지만 평신도이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도, 축복권도 없었다. 나는 자주 동역하는 김석균, 노문환 목사와 김민식 전도사와 의논했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을 할 거라면 신학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네 사람은 함께 신학교에 가기로 결의했다. 


여러 집회에서 목회자 신분인 부흥사들로부터 받은 모욕감도 작용했다. 나는 그런 경우가 있었다. 고향 목포에서 집회가 있다고 했다. 고향에서 집회가 있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으로 집회 장소로 갔다. 그런데 나를 맞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행사 중 찬양을 마치고 돌아갈 때였다. 밤 9시였다. 마침 부흥회 주강사와 마주쳤다. 그는 날 보더니 주머니에서 구겨진 돈을 주섬주섬 꺼내줬다. ‘내가 빌어먹는 거지도 아닌데….’ 화가 치밀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김석균이나 김민식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은 이가 그렇지 않은 사역자를 홀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신학대학에 가는 것을 아내들은 모두 반대했다.


나의 아내는 “평신도로서 찬양하면 되지, 왜 꼭 신학교를 가야 해요?”라고 했다. 나는 기도하면서 3년 동안 아내를 설득했다. 하나님 은혜로 신학교에 입학했고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2000년 안수를 받았다. 나는 안수를 받은 뒤 음악 선교목사로 쉼 없이 집회를 다니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 한소망교회(유영모 목사) 선교목사와 경기도 남양주 세계로교회(김명호 목사) 협동목사로 섬긴다. 한국복음성가협회장으로서 협회 사무와 행사를 챙긴다. 나의 사역과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영적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내 삶의 최고 응원단장인 아내 서경숙과 아들 희웅(35), 딸 지연(34)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아내는 원래 손재주가 많다. 10년 전부터 닥종이 인형을 만든다. 취미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닥종이 인형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아들 희웅은 연기자이자 프로 볼러이다. 딸 지연은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친다. 아들은 한국체대에서 체육교사 과정까지 이수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진로를 바꿨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아들은 드라마 ‘주몽’ ‘이산’ ‘선덕여왕’ 등에 출연했다. 아들은 한 교회 간증에서 “나는 연기자로 유명해진 뒤 아버지처럼 하나님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미 버클리 음대 실용음악과와 이화여대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딸은 서경대 뮤지컬학과 강사로 일한다. 아들과 딸 모두 미혼이다. 두 자녀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매일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나는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만남 세 가지를 이렇게 꼽는다. 첫째 내 어머니와의 만남.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내가 꿈을 이룰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아내와의 만남.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내가 가수로 성장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셋째 하나님과의 만남. 이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의 종으로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 됐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내 노래와 간증이 쓰이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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