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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367. [역경의 열매] 배영만 <1-12> “주님 향한 내 마음이 뜨거운 거… 맞다고요”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10.10|조회수113 목록 댓글 0



***간증: 1367. [역경의 열매] 배영만 <1-12> 주님 향한 내 마음이 뜨거운 거… 맞다고요

 

오랜 기도 끝 힐링센터 올 초 설립… 개그맨이니 늘 기뻐하며 복음 전도

 

 배영만 전도사가 1일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서 자신의 유행어 맞다고요 알았다고요 아니라고요를 외치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연재 섭외가 들어왔을 때 잠시 멈칫 했다. 내게 역경이 있는지 되돌아봐야했기 때문이다. 또 열매는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기도 끝에 역경의 열매 코너를 맡기로 했다. 죄가 많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줄 믿는다.

 

내 이야기는 올 초 설립한 힐링센터 이야기부터 하려 한다. 기도 및 치유처소인 힐링센터 설립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 오랜 기도제목이 이루어졌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나는 지난 2월 경기 고양시에 주님의 힐링센터를 설립했다. 설립예배 때 나는 개그맨 출신이니만큼 늘 기뻐하며 예수 복음만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센터는 15년째 살고 있는 우리 집 지하에 마련했다. 원래 이 공간은 아이들이 노는 공간이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 곰팡이가 낀 이 공간을 깔끔하게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힐링센터로 만들었다.

 

우리 집은 12년 전부터 팔려고 내놓은 집이다. 부동산중개업소는 팔려고 내놓은 가격에 500만원을 깎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힐링센터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수 억 원을 호가하는 이 집을 500만원이 아까워 팔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사실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다. 밥 먹을 때 기도하고,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정도다. 또 연예인으로서 체험을 전하는 강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4년 9월, 영국교회를 탐방하면서 많이 변했다. 특별히 술집과 박물관으로 변한 교회를 보고 주님을 증거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됐다. 존 웨슬리 성전의 기둥을 붙잡고 뜨겁게 기도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귀국 후 매일 두 시간 이상 기도했다.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재미있었다. 성경말씀을 읽는 것이 꿀맛 같았다.

 

같은 해 11월 20일 오전 11시, 이날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데 온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성령님이 들어 와 주신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5대양 6대주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겠다.

 

은밀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감격해서 엉엉 울었다. 잠시 뒤 마음이 평온해졌다. 평생 처음 느껴본 평안함이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허상을 봤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이 지금 정말 뜨겁다는 것이다. 나도 내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 싶다. 자랑할 게 예수님밖에 없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도 돼 있다.

 

정리·사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배영만 <1> "주님 향한 내 마음이 뜨거운 거… 맞다고요"

* [역경의 열매] 배영만 <2> 학교서 돌아오니 무당 어머니 "덩더쿵∼" 굿판

* [역경의 열매] 배영만 <3> 北 삐라에 내 얼굴이 '굶주린 남한병사' 모델로

* [역경의 열매] 배영만 <4> 방송사고로 얼떨결에 외친 '맞다고요' 빵 터져

* [역경의 열매] 배영만 <5> 밤업소 정신없이 뛰었지만 '남는 것 없는 장사'

* [역경의 열매] 배영만 <6> 교통사고에 노름빚에… "차라리 죽자, 예수 믿고"

* [역경의 열매] 배영만 <7> 카드 도박에 중독… 한밤중 아내 깨워 패 돌리기도

* [역경의 열매] 배영만 <8> 일찍 하늘나라 간 둘째딸 생각하면 가슴 미어져

* [역경의 열매] 배영만 <9> 후두암 말기 진단 받고 "15년만 더 살려달라" 기도

* [역경의 열매] 배영만 <10> 커닝으로 받아온 성적표… 주님 믿고 나니 후회

 

* [역경의 열매] 배영만 <11> 개척교회 간증 가니 성도 한 명뿐 … "내가 연예인인데"

* [역경의 열매] 배영만 <12·끝> 연예인 생활 34년, 모두가 하나님 은혜

 

◇약력=1959년 충북 청주 출생. 1983년 MBC 개그콘테스트 입상으로 데뷔. 웃으면 복이와요 일요일밤의 대행진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등 출연. 충주공업전문대 토목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대학원(M.Div),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대(ACTS) 목회연구원 졸업. 주님의힐링센터 설립

 

***[역경의 열매] 배영만 <2> 학교서 돌아오니 무당 어머니 덩더쿵∼ 굿판

 

아들 여덟-딸 셋 중 여섯째로 태어나 대식구 이사 때마다 집주인과 한바탕

 

 개그맨 배영만(앞줄 할머니 왼쪽)의 어린시절 어머니(뒷줄 오른쪽), 할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나무를 팔아 생계를 잇는 아버지는 이날 사진을 찍지 못했다.나는 195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형제가 11명, 아들 여덟 딸 셋. 내 위로 쌍둥이 내 밑으로 쌍둥이, 나는 여섯째였다.

 

어머니 곁에는 항상 사인펜이 있었다. 누구에게 젖을 먹였는지 기록해놔야 헷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젖을 준 뒤 사인펜으로 적고 다시 음식을 만들곤 하셨다.

 

한번은 물난리가 났다. 집 안에 물이 가득 찼는데, 가발이 떠내려가기에 냉큼 주웠더니 내 여동생이었다. 깜짝 놀랐다. 식구가 모두 13명이라 어디 멀리 함께 놀러 간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잘라 파셨다. 한두 달에 한번 정도 집에 들어오셨다. 집안 사정이 그렇다보니 어머니는 혼자 자식을 키우셨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늘 원망하면서도 아버지만 집에 들어오시면 아유, 여보 오셨어요라며 반가워했다. 부부는 참 가깝고도 먼 사이구나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됐다.

 

전셋집을 전전하다보니 부모님은 전세계약을 할 때 자식이 많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누가 13명 식구에게 선뜻 방을 내주겠는가.

 

이삿날이면 주인집과 한바탕 싸움이 났다. 주인집에서 못 들어오게 막은 것이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주인어르신, 11명 애들을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흑흑….

 

우리도 아저씨 아줌마의 바지잡고 치마잡고 살려주세요라고 울어댔다. 그러면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던지 같이 살자고 말하고 들어가 살았던 기억이 난다.

 

전셋집에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었다. 주인집 아저씨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30분이 걸렸다. 우리 식구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불편한(?) 동거였다. 한 달쯤 있으니 주인집 식구들이 따로 전세를 얻어 나갔다. 같이 고생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하시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오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가 싶다.

 

어머니는 무속인이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덩덩 덩더쿵∼ 굿이 한바탕 진행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뛰고 또 뛰었다. 자세히 보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제사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돼지머리와 시루떡, 생선, 사과, 배, 사탕 등. 형들은 먹을 것보다 돼지머리에 꽂힌 돈에 눈을 떼지 못했다. 굿이 진행되는 동안 돼지머리에 있던 돈은 전부 사라졌다. 이후 어머니는 돼지머리 주위에서 굿을 해야 했다. 돈이 없어질까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무속인 어머니가 싫었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동네사람들이 영만이 엄마는 무당이니 함께 놀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데 희한한 게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자랐다. 집 바로 앞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 목사님은 우리를 잘 돌봐주셨다. 점심과 저녁도 주셨다. 지금은 원로목사님이 되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고맙다.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감리교회 집사로 2003년 하늘나라에 가셨다. 아버지도 권사 직분을 받고 2011년 소천하셨다. 우리 가족 13명 모두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배영만 <3> 北 삐라에 내 얼굴이 굶주린 남한병사 모델로

 

덕분에 철책선에서 후방으로 전출… 열풍 불던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

 

 개그맨 배영만 전도사가 군 복무할 때 북한에서 날아온 전단(삐라)을 실제 내용대로 복원했다. 배영만 전도사 제공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 6월 군(軍)에 갔다. 당시 33개월 복무,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였지만 나는 신체검사를 겨우 통과했다. 내 몸무게는 47㎏이었고 2㎏만 더 빠졌더라면 면제될 뻔했다.

 

철모를 쓰니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작아 철모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군복이나 신발도 맞는 것이 거의 없었다. 허리 26인치에 신발사이즈 230㎝인 내게 군대 훈련은 너무 힘에 부쳤다.

 

자대배치를 받자 완전군장을 한 채 10㎞ 행군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우리 중대가 완주하지 못했다. 내가 낙오병이 된 것이다. 이후 내무반에서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 하루는 100㎞ 공지 작전(공군과 지상군인 육군이 함께하는 작전) 행군을 했는데 20㎞ 지점에서 또 낙오됐다. 화가 난 고참이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때리면 더 못 가는데. 억울하고 눈이 뒤집혔다. 제대를 며칠 앞둔 고참에게 같이 죽자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고참이 나를 업고 행군을 계속했다. 

 

그래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고참의 뒤통수에 음식물을 토했다. 잠시 후 똥냄새가 자욱했다. 배 속에 있던 똥물이 입으로 역류한 것이다. 그리고는 기절했다. 3일 만에 눈을 떠보니 의무대였다. 링거를 맞고 한 달간 요양했다. 부대 복귀를 하니 우리 부대는 최전방으로 이동명령이 났다.

 

휴전선 철책 근무를 서니 북한군이 저 멀리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군이 남쪽으로 뿌린 전단(일명 삐라)을 보고 기겁했다. 거기에 떡하니 내 얼굴이 실려 있었다. 삐라에는 못 먹고 굶주린 남조선 병사라고 쓰여 있었다. 부대 내 윗분들은 국가적인 망신이라며 수군거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후방 신병교육대로 전출을 가게 됐다. 해프닝도 이런 해프닝이 없었다. 

 

신병교육대에서는 중대장 당번병(비서)으로 근무했다. 또 에어로빅 조교로도 일했다. 에어로빅 조교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던 것이다. 당시 전군에 에어로빅 보급 열풍이 불었다.

 

2박3일 특별휴가 기간에 국민대 체육과 여학생에게 에어로빅을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곧잘 춤을 잘 추었기 때문에 에어로빅 수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후 사단 에어로빅 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에어로빅 강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군 장교 사모와 신병들에게 에어로빅을 가르쳤다. 나는 모든 훈련과 사역에서 열외였다. 혼날 일도 혼나지 않았다. 한 번은 신병과 함께 건빵을 몰래 끓여 먹다가 대대장에게 들켰는데 중대장이 혼났다. 중대장은 대대장이 던진 재떨이에 맞았다. 하지만 대대장은 배영만은 혼내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사단 에어로빅 대회에 곧 출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대 내 보컬그룹과 문화선전대도 조직했다. 덕분에 포상휴가를 많이 갔다. 10번 정도, 군대생활 중 총 6개월가량 휴가를 간 것 같다. 

 

어머니는 나의 잦은 휴가를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없는 살림에 왜 이렇게 휴가를 자주 오느냐. 그놈의 군대는 나라는 안 지키고 병사들을 왜 이리 집에 자주 보내는지. 차라리 방위병으로 가지 그랬냐.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더니. 나의 국방부 시계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배영만 <4> 방송사고로 얼떨결에 외친 맞다고요 빵 터져

 

잇단 유행어로 연기대상 신인상 수상…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 소감

 

 1990년 5월 태국에 동료 선후배 개그맨들과 코미디언실 연수 갔을 때.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 앞줄 오른쪽 세 번째 구봉서 선배님이 보인다.1983년 MBC 개그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며 개그맨이 됐다. 담배 피우는 표정연기를 하니 배꼽을 잡고 웃는 사람이 많았다. 나같이 못생긴 사람도 개그맨이 될 수 있었다. 정말 기뻤다.

 

한창 카드 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을 때다. 개그맨 선배 김병조 형은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출연료의 10%를 떼어 노름빚을 갚아주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고 계셨다.

 

병조 형은 MBC 일요일밤의 대행진에 함께 출연하자고 했다. 담당 PD에게 배영만이가 빚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출연 좀 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또 인간 복사기 최병서 선배가 PD들에게 내 흉내를 자주 낸 것도 캐스팅에 한몫했다. 선배들 덕분에 파이팅 황순경이라는 시트콤에 출연할 수 있었다.

 

병조 형과 방범대원 역을 맡았다. 6개월간 대사 한 마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사 한 마디를 받았다. 병조 형이 꿈속에서 데모를 하는데, 방범대원들이 방범도 인간이다. 방범비를 보장하라고 외치면 내가 보장하라는 대사를 해야 했다. 그러면 경찰들이 방범들을 진압하는 신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방송사고가 났다. 생방송 프로그램인데 경찰 역을 맡은 후배 개그맨이 내가 대사를 하기도 전에 뭘 보장해라는 대사를 먼저 해버린 것이다. 

 

현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처럼 대사를 받았는데 그것도 못 찾아먹는다는 핀잔을 들을 판이었다. 또 쓸데없는 애드리브를 하면 힘들어질 게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이었다.

 

순간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나도 모르게 그 후배의 입을 막고 맞다고요. 보장하라고요라고 얼떨결에 소리쳤다. 근데 이게 터졌다. 나중에 카메라감독이 배꼽 빠져 죽을 뻔했다고 했다. 이렇게 유행어 맞다고요는 탄생했다. 이후 방송 때마다 맞다고요를 외치고 또 외쳤다. 

 

맞다고요를 시작으로 참 나 왜 그러냐고요 아니라고요 알았다고요 등 여러 유행어로 스타덤에 올랐다. 1989년 MBC 연기대상 코미디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수상 후보 5명 중 내가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 받는 것도 모르고 낡은 청바지와 티를 입고 시상식에 갔다. 

 

이날 사회를 본 변웅전 아나운서는 수상자는 맞다고요 배영만이라고 발표했다. 갑자기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꽃다발도 안겨졌다. 변 아나운서는 수상 소감을 청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얼떨결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담당 PD가 힐끔 눈치를 줬다. 

 

아차, 실수했구나. 집사람과 가족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수상 소감을 잘못 말했다고 후회하고 있는데, 이날 대상을 받은 배우 김혜자 권사님이 내게 불쑥 다가오더니 어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네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저, 잘못 얘기한 거예요?

 

아니에요. 믿음이 있으니 얘기하셨겠죠.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은 배영만씨와 나밖에 없어요….

 

나는 자리에서 도망쳤다. 이날 나는 수상자 단체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지금 나를 신앙을 고백하는 간증자로 쓰고 계신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배영만 <5> 밤업소 정신없이 뛰었지만 남는 것 없는 장사

 

도박 탕진, 술·담배에 찌든 생활… 진상 팬 등 별의별 사람 다 겪어

 

 개그맨들이 하나로 뭉친 제1회 코미디 화합 대축제가 1999년 5월 21일 경기도 이천 OB맥주 공장에서 펼쳐졌다. MBC개그맨 축구단의 김상호(맨왼쪽) 배영만(맨 오른쪽) 등이 SBS개그맨 축구단과의 경기에 앞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국민일보DB맞다고요 참 나 왜 그러냐고요 등 잇단 유행어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행사 섭외가 줄을 이었다. 대우는 좋았다. 골든타임에 나를 DJ로 고용하는 나이트클럽도 있었다.

 

나이트클럽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술을 먹고 춤만 추는 곳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남녀간에 만남, 즉 부킹이 만연했다. 하지만 내겐 먼나라 얘기였다. 나와 부킹하자는 여자는 없었다. 못생기고 깡마른 남자는 싫었던 모양이다. 씁쓸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밤업소를 자그마치 7군데나 다녔다. 정신없이 다녔지만 남는 것은 없었다. 카드 도박에 번 돈을 탕진하고 술과 담배에 찌들었기 때문이다. 매니저와 기사 월급을 주고나면 빛 좋은 개살구였다.

 

밤업소 생활에 에피소드가 많다. 한번은 술 취한 손님이 내 뒤로 와 나의 주요 부분을 세게 잡아 당겼다. 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잡아당긴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니 열혈 팬이란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거기가 무척 아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날, 나이트클럽에서 DJ를 보는데 한 손님이 내게 10원짜리 동전을 세게 던졌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DJ 보조가 동전에 맞았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이 출동했고 나는 증인으로 파출소에 갔다. 경찰이 그 손님에게 왜 동전을 던졌느냐고 물었다. 그 손님은 배영만 얼굴이 너무 작아 동전으로 맞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참 나 인생 별난 놈 다 있구나 생각했다. 

 

밤무대에 계속 출연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이름이 어느 정도 있으니 다행이지, 이름 없는 무명 연예인들은 대접이 형편없었다. 특히 무명의 여자 연예인들은 술자리 손님이 부르면 가야 했다. 가지 않으려 버티다 해고되는 경우도 있었다. 밤업소 관리자들은 무명의 여자 연예인이 술자리에 가지 않으면 욕을 해댔다.

 

너도 연예인이냐. 꼴값 하네. 우리가 돈 많이 주잖아…. 

 

협박과 회유가 난무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팠다. 팁을 받고 울고 있는 무명의 여자 연예인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밤업소 등에서 번 돈으로 집사람에게 비디오가게를 차려줬다. 집사람은 무척이나 알뜰했다. 옷도 잘 안 사 입었다. 돈을 갖다 주면 꼬박꼬박 적금을 붓는 그런 여자였다. 덕분에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어느 날 집사람에게 급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더니 이곳의 땅을 파라고 해 삽으로 땅을 팠다. 그런데 그곳에 녹슨 동전 3400만원이 비닐로 싸여 있었다. 이건 뭐지? 나한테 시집 와서 지금까지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동전이란다. 

 

은행에 동전을 들고 갔더니 은행 직원이 물로 씻어 오라고 했다. 집에서 동전을 깨끗이 씻으며 울었다. 집사람에게 고생만 시켰다는 자책감이었다. 

 

집사람은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 반면 나는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집사람의 말을 무시할 때가 많았다. 집사람이 경기도 파주 땅을 사자고 했을 때도 만류했다. 나는 건물을 짓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이후 파주 땅값은 크게 올랐다. 아마 그때 집사람의 말을 잘 들었다면 지금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준 부자는 되어 있으리라.

 

***[역경의 열매] 배영만 <6> 교통사고에 노름빚에… "차라리 죽자, 예수 믿고"

 

중환자실서 깨어나 병실서 또 도박… 목사가 나타나 구원 열차 타실 분

 

 2013년 경기도 부천에서 남성 2인조 그룹 소리새와 함께 찬양하는 배영만 전도사(왼쪽).도박에 빠져 있으니, 하나님이 벌을 주셨다. 참다 참다 사랑의 매를 드신 것이다.

 

사고가 난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집에 차타고 오는데 경기도 광주 곤지암 근처에서 앞차를 들이받았다. 비상깜박이를 켤 틈도 없었다. 잠시 뒤 8t 트럭이 내 차를 쾅하고 들이받았다. 내 차는 때굴때굴 구르며 전복됐다. 

 

앞차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돼 살려주세요 소리쳤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곧바로 기절했다. 앰뷸런스가 와서 나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정신을 차리니, 내 몸에 주사바늘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왼쪽 뇌에 피가 몰려 있다고 했다. 터지면 죽을 수도 있었다.

 

수술동의서를 받아든 집사람은 의사에게 물었다. 

 

남편의 머리를 수술하면 정상일 때와 어떻게 다른가요?

 

좀 머리가 나빠질 수 있습니다. 또 말을 더듬을 수도 있고 정상 때보다 좀 모자랄 수 있습니다.

 

집사람은 남편의 머리가 아직 터지지 않았으니 약물치료를 하자고 했다. 반면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서로 우기다 결국 집사람이 이겼다. 독일 약을 수입해 3개월간 중환자실에서 먹고 쾌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머리 수술후 헤롱 헤롱하고 다녔으면 어찌할 뻔 했는지. 하나님은 능히 감당할 시험만 주시는 것 같다.

 

중환자실이라 건달들 면회도 안됐다. 도박 빚 2500만원에 그동안 이자 2250만원이 불어났다. 일반병실로 옮기니 건달들이 다시 찾아왔다.

 

당신 3개월 동안 밀린 이자가 2250만원이오. 원금까지 4750만원을 모두 갚지 않으면 어부로 만들어주겠소. 방송국에 전화해 출연료도 압류시키겠소. 무서웠다. 또 집사람이 내가 노름빚까지 많이 진 것을 모두 알게 됐다. 

 

아이구 내가 못살아.

 

집사람은 대성통곡을 했다. 갓 돌이 지난 아들까지 두고 집을 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노름을 했다. 돈 따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근데 아들을 보니 너무 불쌍했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 시도했다.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가방을 든 사람이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실 분 없습니까? 두 번 남았습니다. 예수 믿으실 분? 자 마지막 구원열차입니다. 삼세번입니다. 예수 믿으실 분? 

 

나는 웃었다. 처음엔 책장사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전도를 다니는 목사였다.

 

목사는 혹시 연예인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고 했다.

 

저 사람이 내가 죽을 것을 어떻게 알았지

 

천국은 어떻게 가는 건가요?

 

예수를 믿어야 갈 수 있습니다.

 

기왕 죽을 거, 믿고 죽으면 천국 갈 것 같았다. 그래서 믿으면 되잖아요라고 말했다. 목사는 내게 영접기도를 해 주었다. 그리고 약을 뺏어 갔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했다. 함께 기도했다.

 

8일 뒤 집사람이 돌아왔다. 9일 뒤엔 교통사고 합의금 25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노름빚을 해결했다. 이후 그 목사의 교회를 다니게 됐다.

 

***[역경의 열매] 배영만 <7> 카드 도박에 중독… 한밤중 아내 깨워 패 돌리기도

 

거액 잃고 집엔 생활비도 못 갖다줘… 꽁지 돈 빌려썼다가 이혼 직전까지

 

 MBC 코미디언실 회원들과 1996년 태국에 연수 갔을 때 피곤해 잠이 들었다. 왼쪽은 동료 개그맨 김명덕.유행어 맞다고요가 뜨면서 행사가 많아지고 TV광고도 들어왔다. ○○약품 위장약 선전이었다. 개그맨 김병조 선배가 술을 많이 먹고 속쓰리고 위 아플 땐 ○○○○ 아니냐고요? (둘이 마주 보고)맞다고요 ○○○○이라고 말하는 내용이었다. 위장약 광고 출연료로 1억원을 받는 등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한참 잘 나갔지만, 그만 도박에 손대면서 내 인생은 곤두박질쳤다. 밤업소 직원들과 호기심에 카드를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교통사고가 난 뒤 교회에 나갔지만 도박을 끊지는 못했다. 주일날에만 간혹 교회에 나가는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다. 카드 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개그 아이디어에 시달리고 배역을 못 받았을 때의 공허함과 외로움, 불안한 마음이 도박판으로 점점 빠져 들게 했다. 누군가 도박은 쉽게 끊지 못한다고 했던가. 정말 그랬다. 온 세상이 카드로 보였다. 새벽에 일어나 집사람을 깨워 카드 패를 돌릴 정도였다.

 

나는 도박 중독자였다. 도박생활은 5년 이상 계속됐다. 일을 마치면 도박판(하우스)으로 향했다. 그동안 번 돈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소위 꽁지(전문적으로 도박자금을 대여하고 높은 이자를 받아 챙기는 사람의 속어)들은 판돈을 빌려줬다. 도박 빚을 갚지 않으면 건달들에게 감시를 당했다. 녹화가 끝나면 으슥한 곳에 끌려가 협박을 당했다. 매를 맞기도 했다. 

 

도박에 빠져 있는 동안 집안은 엉망진창이 됐다. 견디다 못한 집사람이 하우스로 찾아왔다. 나는 얼른 커튼 뒤에 숨었다. 

 

나 여기 안 왔다고 해.

 

카드 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빨리 본전을 찾아야 하는데…. 빨리 돈을 따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도박으로 3억원 정도 잃은 것 같다. 집에 생활비를 갖다 주지 못했다. 집사람은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집사람이 생활비를 더 달라고 하면 손찌검까지 했다. 그러자 집사람은 이혼하자며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결국 가정법원 앞까지 갔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노라고 빌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도박장으로 또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인간도 아니었다. 지금도 집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도박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장모님이 타짜(도박전문가)를 데려왔다. 그 타짜는 내게 카드를 섞으라고 했다. 그리고 속이는 카드가 무엇인지 상세히 알려줬다. 내가 아무리 여러 번 섞어도 원하는 카드를 내밀었다.

 

하나님 맙소사. 이럴 수가. 그동안 내가 타짜들에게 속았구나. 

 

이후 카드 도박을 완전히 끊게 됐다. 돈을 딸 수 있다는 기대와 환상이 깨진 것이다. 대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하나님이 장모님을 통해 도박을 끊게 하셨다. 도박 끊기가 정말 힘들다고들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지면을 빌어 하나님과 장모님께 감사드린다. 오늘날 이렇게 간증자로 쓰시려고 하나님이 연단을 주신 것은 아닌지. 도박을 하시는 분들께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도박이 지금 재미있습니까? 사기입니다. 타짜들에게 돈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박은 가정을 파탄시키는 원흉일 뿐입니다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배영만 <8> 일찍 하늘나라 간 둘째딸 생각하면 가슴 미어져

 

예수님의 영광 뜻으로 지은 예영이… 병명도 모른 채 하나님이 데려가셔

 

 2013년 여름 충남 홍성교도소를 방문해 간증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 다섯 번째가 필자.요즘 얼굴색이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예수님을 믿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생각하곤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선택하시어 건강을 주신 것만 해도 감사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다. 죄 많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예수 십자가를 증거하며 간증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98년 하늘나라에 간 사랑하는 둘째 딸 예영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정말 예뻤다. 예쁜 엄마를 많이 닮았다.

 

예영이란 이름은 예수님의 영광이란 뜻이다. 나중에 신학공부를 하면서 느꼈는데, 예영이는 우리 집안의 순교자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건처럼 어머니의 우상숭배, 28년간 무속생활에 대한 순교인 것이다.

 

돌을 지난 예영이가 돌연사했다. 호흡곤란일 뿐 병명도 없었다. 경기도 동두천에서 행사 사회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사람이 병원 응급실에서 쓰러졌으니 빨리 오라는 내용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집사람은 기절해 있었고 딸은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딸이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화장을 해 경기도 파주 인근에 뿌렸다. 지금도 파주 근처를 지나갈 때면 차를 세워놓고 울면서 기도하곤 한다. 예영이가 지금 천국에 있을 줄로 믿는다.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예영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 못다한 부녀간의 사랑을 마음껏 나눌 것이다.

 

나는 현재 두 아들과 딸을 두고 있다. 큰아들은 현재 청주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연기를 곧잘 한다. 얼마 전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 햄릿에 출연했다. 키 186㎝, 키 작은 아빠 다리에서 어떻게 이런 아들이 나왔나 싶다. 

 

아마 170㎝에 가까운 엄마 키를 닮은 것 같다. 최근 TV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출연하지 않고 있다. 못난 아빠랑 같이 나오는 것이 싫은가보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이 내가 밤업소에 다니지 않고 교회로 복음증거를 하러 다니니 자식들을 이렇게 잘 키워주신 것 같다. 

 

막내아들은 공부를 지질이도 못한다. 꼴찌에 가깝다. 국어 영어 수학 등 학원을 보내는데도 아빠를 닮아 그런 것 같다. 성적이 오르지 않아 학원 공부를 그만두게 했다. 대신 학원비를 김종균(아브라함) 터키 선교사에게 보냈다. 1년간 선교비를 보내다 돈이 부족해 못 보냈는데 다시 선교비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머리가 그 머리지. 48등이나 46등이나. 몇 등 오르면 뭐할 거야. 이럴 바에야 학원비를 영혼 구원하는 데 쓰는 게 더 낫다.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이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행동해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딸은 나를 많이 닮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쌍꺼풀 수술을 해 달라고 졸라댔다. 집사람과 짜고 스카치테이프를 딸의 눈에 붙여봤다. 딸은 거울을 보더니 쌍꺼풀 수술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예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는 잘 안 하지만 못난 아빠처럼 하나님이 우리 딸을 들어 쓰실 줄 믿고 있다.

 

***[역경의 열매] 배영만 <9> 후두암 말기 진단 받고 15년만 더 살려달라 기도

 

후두암 명의 찾아 무작정 특진 신청, 울면서 호소하자 당일 진료 들어줘

 

 2004년 겨울 후두암 수술을 받은 뒤 동해안에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손들고 기도하고 있는 배영만 전도사.2004년 겨울이었다. 말을 못할 정도로 목이 아팠다. 집 앞에 있는 동네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했다. 의사는 검사 사진을 꼼꼼히 보더니 후두암 말기인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소견서를 써 주며 말이다.

 

의사의 말을 듣고 바지에 찔끔 오줌을 쌌다. 너무 무섭고 놀랐기 때문이다.

 

내가 암이라니…. 후두암이 뭐지? 말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술과 담배를 많이 해서 그런가?

 

아내와 자식 얼굴이 떠올랐다.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더 이상 나쁜 짓하지 않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서원기도를 드렸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큰 병원에서 다시 내시경 검사를 했다. 그 병원 의사는 이 증상하고 똑같은 환자가 8층에서 오늘 내일하고 있다. 암이라도 임파선까지만 안 번졌으면 후두만 확 도려내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하나님, 후두를 확 도려낸다고…. 

 

의사의 말이 무서웠다. 집에 돌아와 엉엉 울었다. 아내와 자식이 보고 있는데도 창피한 줄도 몰랐다. 정신을 겨우 차려 수술할 병원을 수소문했다. 평소 알고 지낸 의사에게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후두암 명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거기 신촌세브란스 입니까?

 

네, 신촌세브란스 이비인후과 간호사 ○○○입니다.

 

개그맨 배영만인데요. 제가 후두암이래요. 최은창 박사님이 후두암 명의시라던데 오늘 진료 받을 수 있나요?

 

아뇨. 특진으로 진찰 받으시려면 한 달 후에나 가능합니다.

 

아이고, 저는 A형이라 소심해서 신경 쓰다가 죽습니다. 지금 너무 두려워요. 오늘 진료 좀 받게 해 주세요.

 

간호사는 울면서 말하는 나의 딱한 사정을 차분히 들어 주었다. 잠시 뒤, 간호사는 최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당일 진료를 받게 해 주었다. 최 박사님은 이날 비번이었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최 박사는 콧구멍을 통해 검사를 해 보더니 모양은 말기 암이지만 이걸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 하세요라고 말하고 수술날짜를 잡아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집사람과 함께 뜨겁게 기도했다. 

 

하나님, 성경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처럼 15년만 수명을 연장해 주세요.

 

사실 15년이 지나면 15년 더 연장해 달라고 기도할 작정이었다. 출애굽기 33장 모세의 삼세판 기도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하나님께 응석부리는 교인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3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마취를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수술 도구가 입을 들락거렸다. 암 조직을 떼어냈다. 그리고 수술 한 달여 뒤, 새살이 나오면서 암 덩어리 모양이 다시 보였다. 암 모양이 더 자라면 또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암 모양은 더 커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그 모양 그대로이다.

 

기독교 신자인 최 박사님은 하나님 은혜라고 했다. 아마 내가 만난 의사 선생님 중에 가장 좋은 분이고, 환자를 안심시켜 주시는 분이시리라. 나는 이후 많은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후두암 수술 전 서원기도대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널리 전하고 전도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배영만 <10> 커닝으로 받아온 성적표… 주님 믿고 나니 후회

 

눈 좋은 덕분에 중학교 때부터 커닝… 강도사시험은 내 실력으로 재도전

 

 2004년 2월 우여곡절 끝에 서울 서대문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목회연구원을 졸업한 필자.이번 역경의 열매 연재를 통해 고백하고 회개할 게 있다. 나는 학창시절에 커닝을 잘했다.

 

주위 친구들도 커닝을 많이 해 별 죄책감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그것은 분명 죄라고 생각한다. 

 

커닝 버릇은 중학교 때 시작됐다. 머리가 좋지 않은 데다 놀기를 좋아해 학교 성적이 바닥을 맴돌았다. 생각해낸 게 커닝이었다. 시력이 좋아 가능했던 일이다. 커닝 덕분(?)에 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예비고사 시험은 잘 보지 못했다. 커닝을 할 수 없는 책상 배열이었다.

 

예비고사 성적이 나온 날, 아버지는 C대학 원서를 사가지고 오셨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 아버지, 저 공부 못해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니다. 너는 날 닮아서 머리가 비상하고 좋다. 집안 형편은 비록 어렵지만 너를 꼭 대학 공부를 시키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아이구 맙소사. 그렇게 나를 믿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차마 커닝으로 학교 성적을 유지해 왔다고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응시한 학과는 25명 정원에 5대 1의 경쟁률이었다. 어떻게 합격하지? 실력이 안 되는데….

 

그런데 정말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시험을 보는데, 내 책상 줄이 집단커닝 줄이었던 것이다. 앞사람이 매시간 뒤로 커닝 페이퍼를 건넸다. 나는 그 커닝 페이퍼를 보고 답안을 작성했고 합격했다.

 

사필귀정일까. 재학 내내 성적은 좋지 않았다. 나중에 옛 선배를 찾는 TV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했을 때 대학교 직원이 배영만의 성적은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성적표를 손으로 가린 해프닝도 있었다.

 

정작 문제는 졸업하고 터졌다. 나를 채용한 토목회사가 건설한 터널이 부실공사 시비에 휘말렸다. 지방자치단체의 감사가 시작됐고, 나는 2급 토목기사 자격증을 박탈당했다. 

 

커닝으로 살아온 대가였다. 그나마 다행히 대학 졸업장은 개그맨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MBC 개그콘테스트 참가 자격이 전문대 졸업 이상이었던 것이다. 

 

커닝 버릇은 사회에 나가서도 계속됐다.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도 커닝 아닌 커닝을 했다. 앞 사람이 푼 시험지의 답 표시를 감독들이 다 지웠는데, 내 시험지에는 답안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강도사 시험에는 네 번이나 낙방했다. 다섯 번째 시험 감독관이 내가 불쌍하고 힘들어 보였던지 참고하라며 쪽지를 건넸다. 나는 그걸 참조해 강도사 시험에 겨우 합격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같이 못난 사람도 이렇게 쓰시는구나.

 

하지만 이내 양심에 찔렸다. 회개기도를 드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도사(준목)고시 합격증이 2003년 겨울 나왔지만 나는 지금도 강도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목사안수도 받지 않았다. 그냥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나중에 진짜 내 실력으로 강도사 시험을 다시 치를 것이다. 최근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목회연구원은 진짜 내 실력으로 졸업했다. 이제 내 사전에 커닝은 없다. 하늘을 우러러 정직하게 살고 싶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배영만 <11> 개척교회 간증 가니 성도 한 명뿐 … 내가 연예인인데

 

간절한 요청받고 간증 후 함께 울어… 소고기 전도하자 50명 교회 출석

 

 지난해 경기도 안산 예정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치유성회에서 간증하는 모습.인천지역 교회에 간증을 하러 갔다. 동네어귀에 도착하니 간증집회를 알리는 10여개의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큰 교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약속한 교회에 도착해보니 참석자가 70대 여성목사님뿐이었다.

 

개척교회인데 아직 성도가 저 한 명뿐이랍니다. 

 

나는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고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노(老) 목사님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이왕 오신 김에 간증해 주세요. 저라도 은혜 받게요. 

 

간증하기 싫었다. 그래도 명색이 연예인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목사님의 간절한 부탁에 간증을 시작했다. 두 시간 뒤 간증이 끝나자,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목사님은 이날 은혜 많이 받았다며 사례비로 10만원을 주셨다. 나는 그 돈을 다시 감사헌금 봉투에 넣어 교회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넣고 왔다. 

 

힘내세요, 목사님.

 

홀로 사역하실 할머니 목사님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전도라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집에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달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1만명이 모이는 큰 교회에서 간증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큰 교회에 가서 성도가 한 명인 할머니 목사님을 간증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

 

집창촌에도 전도를 나갔다. 그런데 그곳 여성이 사인해 주세요. 팬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얼굴이 빨개진 내가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권하자, 그 여성은 예수 믿을테니 한번만 자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후회했다. 끝까지 그 여성을 전도할 걸….

 

얼마 뒤 정육점 개업 행사에 갔는데 문득 좋은 전도방법이 떠올랐다. 소고기 한 근을 사서 동네 사람에게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개그맨 배영만입니다. 정육점 행사에 가서 고기 좀 가져왔는데 맛 좀 보셔요.

 

교회 나가라는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가정에 한 해 12근을 전달했다. 마지막 달에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게 마지막 한 근입니다. 전도대상자가 이 소고기 한 근을 받고 교회 가자고 말하면 꼭 교회 나가게 해 주세요.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소고기를 받은 전도대상자 50명이 모두 교회에 출석했다. 할렐루야. 문득 주는 자가 복 되도다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후배 개그우먼 서춘화씨를 전도했다. 서씨가 십일조 헌금을 모았는데, 분장실에서 분실했다. 서씨가 나한테 오더니 오빠 어떡해요라고 울어댔다. 나도 모르게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네가 헌금봉투에 돈을 넣는 순간 하나님은 이미 받으셨다. 그 돈을 가져간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러자 그 후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빠 정말 그러네요.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를 나도 모른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보다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생각한다.

 

가는 곳마다 전도를 했다. 노상 전도에 나갔다가 술 취한 사람에게 얻어 맞은 적도 있다. 한 무신론자는 내 이름을 은혜롭게 풀이해 주었다. 배영만=성령 두배 충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이름 하나는 잘 지어 주신 것 같다. 

 

***[역경의 열매] 배영만 <12·끝> 연예인 생활 34년, 모두가 하나님 은혜

 

국내외서 수십 차례 집회 인도, 아픈 성도 기도하자 치유 기적… 주님의 복음전파 위해 죽을 각오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서 13일 국내외 교회를 돌며 치유와 간증집회를 함께 개최하는 기독문화선교회 서정형 대표(오른쪽)와 함께 했다.최근 내 간증사역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험한 삶을 살고 죄가 많아서 그런지 은혜도 많은 것 같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됐듯, 나도 그렇게 주님을 증거하길 원한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연재가 시작되고 40대 여성이 연락도 없이 나의 집 주님의 힐링센터를 찾아왔다. 가만히 보니 혼자였다. 그래서 나는 여성 한 분과 한 방에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분과 함께 오셔요라고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자 다음날 그 여성은 다른 여성들과 함께 왔다. 그 여성은 척추가 휘어 간과 폐가 망가지고 있다며 기도를 부탁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한 시간 반쯤 흘렀을까. 그 여성의 몸에서 나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20일 전 70대 사업가는 눈이 점점 안 보인다며 찾아왔다. 두 시간씩 3일간이나 뜨겁게 기도를 해 드렸다. 아픈 눈에다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니 난데없이 그 사업가의 배가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무슨 현상일까. 나는 눈을 아프게 한 질병의 영이 빠져 나갔다고 생각한다. 그 사업가는 이후 연락이 없다. 몸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3년 5월부터 기독문화선교회(kimun.or.kr·대표 서정형)와 함께 사역하고 있다. 국내·외 교회에서 치유 및 간증집회를 수 십 차례 인도하면서 은혜와 감동의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나의 치유사역이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분들이 나를 찾는다. 하지만 이 치유사역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 피곤할 때도 많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례비도 절대 받지 않는다. 

 

나는 주님의 복음전파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을 주시는 것 같다. 믿지 않는 영혼에게 많이 전도하라고 말이다. 

 

지난 해 6월 부산 반여장로교회 집회에 갔는데, 그 지역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보통 국회의원은 인사만 하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하게 그 국회의원은 이날 내 간증을 끝까지 들었다. 옆에 있던 보좌관이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계속 다음 스케줄이 있다고 신호를 보내도 그 국회의원은 무시했다. 내 간증이 그렇게 재미있나? 간증집회를 마치자,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올해가 연예인 생활 34년째다. 맞다고요 유행어가 뜨고 밤업소와 도박생활, 교통사고, 둘째딸의 사망, 후두암 발병 등 내 인생의 사건·사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이런 고통과 연단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 같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의 종이기에 좀더 영적이고 주님을 닮아 낮아지는 삶을 살고 싶다.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영성의 힘은 더욱 더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잘 것 없는 제 간증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간증집회 문의:031-905-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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