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간증: 1412.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15> 선교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 그래도 北 위해 기도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3.12.07|조회수18 목록 댓글 0



***간증: 1412.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15> 선교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 그래도 北 위해 기도

 

석방 6일 만에 숨진 웜비어 안타까워… 거대한 감옥에 사는 北 주민 기억해야

 

케네스 배 서빙라이프 공동대표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무실에서 북한에 억류됐던 시간을 회고하고 있다. 신현가 인턴기자나는 6·25전쟁 이후 가장 오랫동안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이다. 2014년 11월 8일 735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북한은 단 한명의 인질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6월 13일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억류 17개월 만에 석방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혼수상태였던 웜비어는 석방 6일 만에 숨졌다.

 

웜비어 사망 후 국내외 매체들은 그의 사인에 대해 많은 추측을 했다. 내게 언론들은 웜비어의 사인이 고문과 폭력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나 역시 추측만 할 뿐이다. 나의 경우 억류생활 중 구타행위는 없었지만 정신적·언어적 폭력으로 극심한 공포를 경험했다. 신체에 위협을 가하는 제스처, 목을 잘라 파묻어 버리겠다는 등 거침없는 위협은 공포 자체였다. 아마도 웜비어는 심문 과정에서 언어폭력과 위협에 시달렸을 것이고, 공황장애와 외상후스트레스로 불안감이 극심했을 것이다.

 

스물 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재판을 받고 교화소로 보내졌을 때 웜비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의 가족의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한 청년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북한에 억류된 외국인 전원의 석방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거대한 감옥 같은 곳에 사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나는 2010년부터 중국 단둥(丹東)에서 북한관광 전문여행사를 운영했다. 세계 각국의 기독교인 관광객을 인솔해 17차례 방북했다. 그러던 2012년 11월 3일 18번째 북한을 방문하면서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생겼다. 북한을 방문할 때는 컴퓨터 외장하드를 반입하지 않겠다는 철칙을 실수로 어긴 것이다. 북한은 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는 죄목으로 나를 심문하고 기소했다. 무려 15년이라는 형량을 선고 받아 강제노역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북한 노동교화소의 기록에 따르면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곧 북한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다. 담당 검사는 6·25전쟁으로 한반도가 분단된 후 체포된 미국인 범죄자 중 내가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했기에 위험한 존재란 말인가. 나는 선교사다. 북한정부의 관점에서 선교는 곧 테러다. 그들은 복음을 극도로 위험하게 본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퍼지면 정부는 물론이고 나라 자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나는 여전히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따라서 여전히 그들에게 난 위험인물일 것이다. 난 북한 주민들을 사랑하며 언젠가 그 땅에 다시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억류 중에도 난 하나님이 왜 나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하셨을까 내가 경험한 억류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억류 3일째 되던 날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내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너의 모든 염려 공포를 맡기라.내가 구원자가 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2400만명의 북한동포를 잊지 않고 계신다. 내가 북한에 억류된 동안 주님은 내가 너를 잊지 않았듯이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나는 탈북자 정착 및 탈북 자녀지원을 위한 북한 인권운동 단체 서빙라이프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갇힌 자, 억눌린 자, 잊혀진 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 선교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 그래도 北 위해 기도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2> "주님, 제가 중국에 가겠습니다" 서원 까맣게 잊어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3> 압록강서 뱃머리 북한 땅 쪽 대니 총든 군인 나와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4> 中 다롄에 'J하우스 사역센터' 열고 선교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5> 실수로 北에 가져간 외장하드엔 각종 선교자료가…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6> 北 심문 앞두고 "주님, 어디 계신가요" 기도 매달려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7> "공화국 헌법 60조를 어긴 죄, 당신은 사형이야"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8> 하루 15시간씩 4주 심문… 北 억지 논리에 자포자기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9> "요동치 않겠습니다" 기도로 불안 이겨내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0> "反공화국 쿠데타 계획, 15년 형 선고한다"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1> 노동하며 찬송… 간수 "죄수가 행복한가" 겁박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2> "아들아, 주가 너를 구하지 아니할지라도 감사하자"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3> 억류 2년 다가오자 낙심과 분노가…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4> 각국서 "함께 기도합니다" 편지 300여통… 큰 위로

*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5·끝> 북한 향한 주님 마음은 탕자 기다리는 애통함일 것

 

약력=△1968년 서울 출생 △미국 오리건대학 졸업 △ 미국 커버넌트 신학대학원 졸업 △네이션스 투어스 설립 △ 현재 서빙라이프 공동대표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2> 주님, 제가 중국에 가겠습니다 서원 까맣게 잊어

 

서약 몇년 후 가정불화로 괴로워할 때 내게 순종하지 않는구나 음성 들려

 

2014년 북한에서 풀려난 후 첫 추수감사절에 온 가족이 함께 모였다. 앞줄 중앙이 배 선교사의 부모, 뒷줄 오른쪽 끝이 케네스 배 선교사 부부. 케네스 배 선교사 제공내가 열여섯 살이던 1985년, 부모님은 나와 여동생의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이민을 준비할 무렵 아버지는 프로야구 빙그레 이글스 창단 감독 제의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미국에 온지 2주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이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셨다. 아버지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빙그레 이글스와 MBC 청룡 감독을 지낸 배성서 감독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몇 차례 있었으나, 나는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시도 나를 잊지 않으셨다.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까지 남서울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여름수련회 때 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님이 설교를 통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말했을 때 나는 간절히 기도했고, 목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다른 말들은 들리지 않고 오직 목자라는 말만 들렸다. 나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목회의 길로 부르고 계신다고 확신했다.

 

88년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제대학생선교회(CCC) 여름수련회에서 나의 소명은 좀 더 분명해지는 듯했다. CCC의 창립자 빌 브라이트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중국을 품으라고 촉구했다. 이어서 중국선교사로 헌신할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이 나를 중국으로 부르신다고 확신해 참석한 500여명 중 제일 먼저 강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예, 주님! 당신을 위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뜨거웠던 소명은 대학의 첫 학기가 시작된 지 두 주가 지났을 때 한 여학생을 사귀면서 서서히 식어갔고 1년 뒤에 결혼하면서 중국에 관한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돼있었다.

 

96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커버넌트 신학대학원에 다니기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했다. 가족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 돈이라곤 호주머니에 있는 50달러가 전부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막막하기만 했다.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학교 우편함에서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케네스, 당신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당신이 졸업할 때까지 매달 50달러씩 당신에게 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매달 50달러를 보내겠습니다. 누가 보낸건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주님은 나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증표를 보여주는 듯했다.

 

2003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에 몇 교회에서 다양한 직분을 맡았다. 하지만 1년 반 뒤에 가정이 무너지면서 사임했다. 내게 그 일은 마치 하늘에서 큰 바위 덩이가 떨어져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가정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시애틀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루는 지독한 무력감에 하염없이 우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아내의 마음은 구하면서 내 마음은 구하지 않고 있느냐? 먼저 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해 주겠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내가 오래전에 했던 서약을 새롭게 기억나게 하셨다. 나는 너를 중국으로 불렀고 너는 기꺼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태 가지 않았구나. 계속해서 내게 순종하지 않고 있구나.

 

내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하와이 예수전도단(YWAM) 코나 캠퍼스의 제자훈련에 참여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3> 압록강서 뱃머리 북한 땅 쪽 대니 총든 군인 나와

 

돈 대신 간식 든 자루 하나 건넬 때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예수 음성

 

2012년 여름, 북한 라진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했다. 뒷줄 오른쪽 끝이 케네스 배 선교사.2005년 미국 하와이 코나에서 YWAM사역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한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L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중국 단둥으로 갔다. 그곳에서 한 달 전 방문비자로 단둥에 온 한 북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L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했다. 내가 만났을 때 예수님을 믿은 지 3주가 지나고 있었다. 원래 이 여인은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을 위해 중국에 돈을 벌려고 왔다. 하지만 그녀는 돈 대신 예수님을 얻었다며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전부라고 말했다.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나는 기도를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네다. 저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마시라요. 저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잖습네까. 대신 조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라요. 그들도 진짜 하나님을 알아야 하잖습네까.

 

가슴이 뭉클했다. L선교사는 또다른 북한 사람을 소개시켜 줬다. 50대 중반의 남자는 두 아이와 아내를 북한에 두고 일거리를 찾아 중국에 왔지만 건강문제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역시 L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전에는 소망이 없었는데 이제는 살 소망이 생겼습네다. 이제는 하루하루를 기대감으로 살고 있습네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아내와 자식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자신도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저런 고백을 할 수 있다니. 예수님을 만난 후 전에 없던 소망이 생긴 것이다. 이들의 놀라운 이야기에 흠뻑 취해 있는데, 불쑥 L선교사가 북한을 가까이서 보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답했다.

 

이튿날 해가 진 후 몇몇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압록강으로 합류되는 13∼14m 폭의 작은 시내를 건넜다. 중국인 안내인은 약 10분간 강가를 따라 배를 몰다가 뱃머리를 북한 땅 쪽으로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아주 앳된 북한 병사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깡마른 몸이었지만 키가 꽤 컸다. 그는 우리에게 기관총을 겨눴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국어로 말했다. 그러자 병사는 돈 좀 있습네까라고 물었다. 기관총을 겨눈 사람이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돈은 없습니다. 대신 이걸 좀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간식이 든 자루 하나를 건넸다. 병사는 자루 안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고맙습네다라고 말한 후 이내 자루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병사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하나님의 음성이 종소리처럼 내 안에 퍼졌다.

 

저 어린 병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담배도 아니다. 바로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가 필요하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내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다.

 

주님 북한을 외부 세상과 연결시키는 다리로 저를 사용하길 원하신다면 저를 사용해주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2006년 문화교류업체를 세우기 위해 중국 다롄으로 갔다. 나중에는 압록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단둥으로 회사를 이전했고 호텔업과 여행업을 겸하는 네이션스투어스를 세워 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2009년 단둥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현재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4> 中 다롄에 J하우스 사역센터 열고 선교

 

커피숍 영어교실 통해 사역 기반… 성경공부·스포츠 사역으로 확장

 

서울 서대문구 서빙라이프 사무실을 방문한 싱가포르 대학생들과 함께한 케네스 배 선교사(가운데). 서빙라이프는 북한 인권운동 단체다.2006년 내가 중국 다롄에 도착해 처음 한 일은 팀원들과 J하우스 사역센터를 여는 것이었다. J는 예수님(Jesus)을 의미한다. J하우스는 다양한 아웃리치팀이 정부의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마음껏 머물면서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팀원들에게 무조건 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 커피숍에서 영어교실을 열었는데 전 세계에서 찾아온 자원자들이 교실을 통해 중국학생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중국에 온 이유를 있는 그대로 말해줬고, 그들이 하나님에 관해 물으면 그분에 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교실은 영어 성경공부, 가정세미나, 스포츠 사역으로 확장됐다. 동시에 나는 문화교류 업체를 설립했다. 덕분에 사업비자로 중국에 머물 수 있었다.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J하우스로 사용할 공간을 알아볼 당시 내게 있던 돈은 300달러가 전부였다. 그런데 여러 선교팀이 거하려면 큰 공간이 필요했다. 방 8개에 화장실 4개짜리 집을 찾았다. 그 정도면 최소한 30명이 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임대료였다. 1년에 18만 위안, 즉 2만4000달러였다. 게다가 1년치를 한꺼번에 내야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이 집이 당신의 집이고 당신의 뜻이라면 당신이 돈을 지불해주십시오.

 

주인에게 임대료를 15만 위안으로 낮춰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1년치 임대료를 미리 낼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은 두달치만 내고 석달마다 한번씩 내면 어떻겠습니까. 주인은 단번에 거절했다.

 

우리팀은 일주일간 매일 그 집을 돌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돌았던 것처럼 말이다. 일곱째 날 주인이 전화로 임대료를 15만 위안으로 낮추고 3개월마다 임대료를 내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두달치만 미리 내는 조건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첫 임대료를 낼 날이 되기 직전에 두 군데서 기부금을 보내왔다. 하나님은 3000달러가 아니라 무려 6000달러를 보내주셨다. 그 돈이면 모든 간사들이 거주할 다른 두 아파트의 임대료까지 내기에 충분했다.

 

J하우스는 중국에서의 사역을 위한 발판이 됐다. 나는 다롄에 있을 때 찾아오는 모든 선교팀들에게 북한을 보고 싶은지 물었다. 대부분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들을 4시간 거리에 있는 단둥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배를 타고 압록강 반대편에서 북한을 바라보았다. 북한 땅에는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강가 근처에 머물며 북한과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다롄에서의 사역은 나날이 성장해 갔다.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중국학생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2007년 1월에는 내가 하와이 코나에서 참여했던 과정과 비슷한 미니 DTS(제자훈련 프로그램)를 개설했다. 26명의 학생이 찾아왔는데 버스나 기차로 24시간 이상을 달려온 학생도 있었다. 2008년 하나님은 우리의 첫 정식 DTS를 위해 18명의 학생들을 J하우스로 보내주셨다. 7명은 한국말을 사용하는 조선족이었고 6명은 한(漢)족 학생들이었다. 거기에 한국인 4명과 송이라는 북한여성 한명이 있었다.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보통 큰 모험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에 들키면 추방당할 수도 있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5> 실수로 北에 가져간 외장하드엔 각종 선교자료가…

 

 

2010년 중국서 북한관광 전문회사 열어, 18번째 방북서 사달… 불온한 자료 추궁

 

지난 3월 서빙라이프 공동대표 취임식에서 이사진과 포옹하고 있는 케네스 배 선교사(오른쪽 두 번째). 서빙라이프 제공2009년 운영본부를 중국 다롄에서 단둥으로 옮겼다. 다롄에서 기적적으로 선교훈련 장소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은 단둥에서 훨씬 더 큰 기적을 보여주셨다. 이번엔 집이 아니라 아예 호텔 전체를 DTS (Discipleship Training School : 예수제자훈련학교) 장소로 주셨다.

 

내가 처음 나진에 갔을 때가 2010년 9월말이었다. 그때 마침 외국인들을 위한 특별관광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 중국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은 있었지만, 서방 사람들을 위한 관광은 없었다. 서방 사람들을 북한 땅에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막 열린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그 일을 하게 됐다. 대한민국 여권을 제외한 모든 여권을 가진 사람들은 다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북한과 세상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문화교류관광을 위해 2010년에 세운 네이션스 투어스를 통해 300명의 관광객에게 북한의 아름다운 자연과 독특한 문화, 아울러 북한주민들의 안타까운 실상을 보여 주었다. 23번 정도 우리 단체를 통해 사람들이 북한을 들어가고 나가고 했다. 그 중에 내가 18번을 직접 인솔했다.

 

2012년 11월 3일 18번째 방북이었다. 나를 포함해 일행 6명은 단둥에서 열차로 옌지(延吉)까지 갔고, 다음 날 새벽 6시 버스를 타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오전 10시쯤 북한의 나진·선봉 세관을 통과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새 노트북을 장만하면서 이전 컴퓨터 자료를 옮기려고 가지고 갔던 컴퓨터 외장하드 드라이브를 실수로 반입한 것이 문제가 됐다. 새벽에 서두르면서 노트북은 호텔에 맡겼는데 외장하드는 그냥 잊은 채 서류가방에 들어있는 상태로 국경을 넘은 것이다. 그 안에는 서방 언론에서 만든 북한 취재 동영상 다큐멘터리들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사역했던 모든 보고서, 선교편지, 사진, 동영상들이 있었다.

 

당신이 배 선생이요? 차에 타시오.

 

호텔 앞에 멈춘 검은색 승용차에서 내린 50대 남자가 내 앞을 가로 막고 물었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정해진 나흘간의 방문 일정이 끝나기 전에 정부 관리가 찾아올 것은 예감하고 있었다.

 

나를 태운 자동차는 해안 근처 산비탈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는 비파 호텔 주차장에 들어섰다. 3개동으로 이루어진 그곳은 호텔보다 기숙사에 더 가까웠다. 한 객실로 안내됐다. 안내인은 바지를 벗으시오라고 말했다. 방안은 냉동고 안에 들어온 것처럼 추웠다. 바지를 내리고 방 한가운데 서서 오들오들 떨었다. 진짜 추위 때문이었는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잘 몰랐다.

 

선생처럼 조선에 여러 번 초대를 받은 사람이 왜 그런 불온한 자료들을 갖고 왔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뭘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설명하기 전까지는 우리와 함께 있어야겠소.

 

관리인이 말한 불온한 자료들이란 내가 실수로 갖고 들어온 외장하드를 지칭했다. 세관원들은 내 외장하드의 파일을 열어 6년간의 중국 사역과 2년간의 북한 사역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발견했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영어로 돼있어서 내용을 금방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중국과 북한에서 활동하는 다른 선교사들의 사진을 포함해 8000개 이상의 사진과 동영상 클립이 들어 있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6> 北 심문 앞두고 주님, 어디 계신가요 기도 매달려

 

억류 3일째, 추위로 떨던 몸에 온기가… 너는 혼자가 아니다 음성 듣고 용기

 

지난 3월 지구촌교회에서 열린 원코리아연합기도회에서 간증하는 케네스 배 선교사. 케네스 배 제공부장으로 불리는 사내는 내일부터 심문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춥기도 했지만 중국인 비서 스트림과 내가 인솔해 온 4명의 관광객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나의 어리석은 실수 때문에 여기 갇혀 있진 않을까. 또 아이들과 아내가 생각났다. 가족들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텐데…. 내 번민은 기도로 변했다.

 

주님! 도와주세요. 언제나 저를 도와주셨던 주님. 지난 6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하는 내내 저를 보호해 주셨던 주님, 이 길을 걷는 제 발걸음 하나하나를 인도하셨던 주님, 지금은 어디 계신가요.

 

억류 3일째였다. 추위에 벌벌 떠는데 갑자기 왼손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금가루 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그러더니 온기가 왼팔 전체로 퍼져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느 순간 주님의 음성이 똑똑히 들렸다.

 

성령이 너의 손을 붙잡고 계신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성령이 네 옆에 서서 네 손을 붙잡고 계신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를 통해 말할 것이다.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아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진실만을 말해라.

 

하나님의 영이 나의 영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나의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도 잊어버리시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난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그분의 팔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4일째 심문을 하러 온 조사관 미스터 박은 그날 아침 내가 이끌던 여행팀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제 다른 사람들 걱정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됐다.

 

저는 선교사이자 목사입니다. 제가 관광객을 이 나라에 데려온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조선 인민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저희 여행사는 제 선교 사역의 전초기지입니다. 이것이 제 정체이고 제가 해온 일의 실체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나.

 

한때는 이 조선 전체가 주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신자들을 데려와 이 땅에서 다시 한 번 기도하고 예배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공화국 인민이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일을 비밀리에 추진해 왔다. 이런 방식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는 내가 처음도 아니고 유일하지도 않다. 빵집이나 국수공장, 봉제공장 같은 합법적인 사업체를 운영한다. 이런 회사들은 북한 주민에게 부족한 일용품과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행동을 통해 복음을 보여준다. 내가 선교사라고 말하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미스터 박은 걸려들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북한정부 입장에선 선교사는 곧 테러리스트요, 다른 나라에 침투해 사회를 분열시키는 CIA(미 중앙정보국)의 공작원이다. 선교사가 임무를 마치면 CIA가 합법 정부를 전복시키고 미국이 통제하는 꼭두각시로 세운다는 것이 북한정부의 논리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7> 공화국 헌법 60조를 어긴 죄, 당신은 사형이야

 

여리고성처럼 조선 무너뜨리려는 것 北 조사관, 성경 속 이야기 알고 격분

 

케네스 배 선교사가 지난 3월 서울 양재동 횃불선교센터에서 열린 북한선교 박람회에서 관람객들과 대화하고 있다. 서빙라이프 제공그들은 내가 국가전복 음모를 꾀했다고 했다. 어떻게 선교사인 내가 국가전복 음모를 꾀했을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기도와 예배를 통해 우리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고 했다.

 

나는 아니, 하나님도 안 믿으시는데 어떻게 기도의 힘을 믿으십니까. 우리 믿는 사람보다 더 믿음이 좋으십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들이 잘 되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망하라고 기도했을 테니 결국 국가전복 행위에 해당된다고 했다.

 

북한사람 한 명이 1년간 선교팀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선교학교, 성경학교에 참여했다. 이 사람이 북한에 돌아가 고아원을 세우려고 했는데, 그 일도 국가전복 음모와 상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고아원을 세워 시간이 지나면 열 명의 아이들이 믿을 것이고, 이후 열명 백명 만명이 돼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될 거라는 억지였다.

 

박 조사관이 나간 후 또 다른 관리인이 내게 물었다. 한 가지 묻겠어. 하나님이란 말은 들은 적이 있는데 예수란 사람은 처음 듣소. 말해 보라. 예수는 어느 마을에 사나. 조선에 사는가, 중국에 사는가.

 

농담인가 싶어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이 어디에 살고 내가 무엇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 관해 전하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했다. 내가 막 답을 하려는 찰라 박 조사관이 돌아왔다.

 

그는 종이를 던지듯 놓고 진실을 쓰란 말이야, 진실을. 어서 쓰라고 윽박질렀다. 똑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며칠 내내 나는 하나님에 관해 썼고 그때마다 그는 누가 나를 중국과 북한으로 보냈는지 말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리고가 뭐야.

 

어느 날 아침, 그가 내 방으로 들이닥쳐 물었다. 외장하드가 내 서류가방에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올까 두려워했는데 결국 오고야 말았다.

 

여리고는 성경에 나오는 도시입니다.

 

이 성경책을 보면서 그 이야기를 정확히 써. 여리고성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직접 읽어봐야겠어.

 

체포된 후 내 성경책을 처음 봤다. 여호수아 6장을 펼쳐 처음 스무 절을 써내려갔다. 쓰기를 마치자 그는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난생 처음 성경을 읽었을 것이다. 그의 분노 수치가 올라가는 게 분명해 보였다. 마지막에는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유리 재떨이를 집어 나의 얼굴에 던지려 했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실제로 재떨이가 날아오지는 않았다.

 

우리 조선을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게 아닌가. 네 계획은 라선시를 정복하는 거지. 그다음은 뭐야 당연히 이 나라 전체를 차지하려는 거겠지.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오해에요. 여호수아서가 고대의 전쟁을 묘사한 것은 맞지만 저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처럼 기도할 거라는 뜻에서 이름만 빌려왔을 뿐입니다.

 

그는 내 외장하드에 있는 문서를 읽었기에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 헌법 60조를 어겼소. 이건 아주 중대한 범죄야. 아마도 이 나라에서 가장 중죄일 거야. 헌법 60조를 어긴 벌이 뭔지 아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이 돌아왔다. 사형이야.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8> 하루 15시간씩 4주 심문… 北 억지 논리에 자포자기

 

오바마와 CIA가 당신 배후 우겨… 사형 협박에 순교는 영예 응수

 

북한에서 석방된 케네스 배 선교사가 미국 수도 워싱턴DC 루이스-맥코드 합동기지에 도착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 선교사 동서인 앤드류 정, 어머니 배명희, 여동생 테리 정, 배 선교사. 케네스 배 제공당신이 소속된 YWAM의 창립자 로렌 커닝햄 위에 오바마 대통령이 있지? 바로 오바마가 이 나라를 위협하고 전복시키려고 당신을 보낸 자야. 당신은 사실상 CIA를 위해 일하는 거겠지. 오바마와 CIA가 이 일의 배후야.

 

너무도 이상한 논리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은 죽어 마땅한 짓이야. 당신은 반입한 자료로 우리 위대한 수령님 이름을 모독했어.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해. 당신은 여리고작전으로 조선인민의 마음을 왜곡시킨 뒤 우리를 공격할 선교사로 우리 공화국에 들어왔어. 당신은 기도와 예배 그리고 끌어들인 외부인들을 통해 우리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단 말이야.

 

맘대로 생각하세요.

 

나의 외마디 말에 박 조사관은 더 흥분했다.

 

용감한 척하려는 게 아니었다. 나도 이제 지쳤다. 이 코미디 같은 짓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미스터 박의 심문에 4주 동안 시달렸다.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이젠 죽이려면 죽이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뭐라고 죽어도 상관없단 말인가. 우린 재판도 거치치 않고 네깟 놈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냐. 우리가 맘만 먹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놈 목을 잘라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을 수도 있어. 이곳에서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해.

 

제 생명은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저를 죽일 수도 있다고 하셨죠. 그러면 제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아시나요. 순교는 모든 선교사가 원하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미스터 박은 할 말을 잃었는지 눈만 껌벅였다. 내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으니 어리둥절할만했다. 분노의 공격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침묵으로 반응하다 나가버렸다. 그런데 그는 저녁에 돌아와 좋은 소식이 있다. 평양에 가게 됐다. 거기서 조사를 받고 귀가하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몇 시간 전 만해도 내 머리를 베어버리겠다던 그가 이제 내가 곧 귀가할 거라고 말했다. 나에게 그동안 한 일을 빠짐없이 자백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정부가 자비를 베풀 거라며 종이에 사죄문을 쓰라고 했다. 단 그들이 쓴 자백서를 보고 그대로 베껴 쓰라고 했다. 그동안 공식 사죄문을 쓰라고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죄문을 썼다. 새로운 사죄문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쓰지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나 케네스 준호 배는 기도와 예배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을 어겼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10개 조항을 사죄한다고 썼다.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시라도 이 악몽을 끝내고 싶었다.

 

이튿날 나를 태운 자동차는 평양 시내에 들어와 식당 뒤편의 좁은 샛길을 지나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평범한 2층 건물이었다. 평양에서의 넷째 날,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내 이름은 리철이다. 최고검찰소에서 나왔다.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아서 당신을 만나러 오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어. 배준호 당신은 오늘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범죄 사실로 인해 공식적으로 기소됐음을 알린다. 미국정부에도 이 사실을 통보했다. 오늘부터 당신에 대한 예심 과정이 시작된다.

 

재판이요?

 

예심과정이 끝나면 재판에 회부될 것이야.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9> 요동치 않겠습니다 기도로 불안 이겨내

 

낮엔 검사 만나고 오후엔 TV로 사상교육… 北, 위성 발사 계기로 美와 협상 나선 듯

 

지난 5월 북한선교를 위한 느헤미야 기도회에서 케네스 배 선교사가 기도하고 있다. 서빙라이프 제공2012년 12월 중순부터 2013년 4월말까지 4개월 반 동안의 예심은 북한 검찰의 사전심의 절차를 밟는 기간이었다. 검사 질문에 답변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후 5시부터 밤 10시30분 방송이 끝날 때까지 TV 시청을 해야 했다. 그것 자체가 사상교육이었다.

 

2012년 12월 12일. 어느 때보다 방송이 일찍 시작됐다. 분홍색 전통 한복을 입은 한 여자 아나운서가 극도로 흥분한 듯 몸을 흔들면서 보도를 시작했다. 은하 3호 로켓으로 광명성 3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다.

 

북한 방송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만약 북한이 위성을 궤도에 올렸다면 이제 미국 서해안에 핵폭탄을 투하할 능력을 갖춘 셈이다. 평양은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미국을 미워하고 자신들의 고통이 미국 탓이라고 하는 나라에 홀로 억류돼 이런 소식을 들으니 우울함이 밀려왔다.

 

그때까지 가족에게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고, 미국 정부가 나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한없이 맥이 빠졌다. 시편 91편 14∼15절 말씀을 묵상했다. 케네스야 내가 너를 건지리라. 내가 너를 높이리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 환난 당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우울함이 멀리 사라지고 기쁨이 나를 온통 감쌌다.

 

문득 내 죄목을 생각했다. 북한 정부가 내게 붙인 죄목 중 하나는 내가 평양에 기도의 집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런 고소를 당했으니 정말로 기도의 집을 세워보자. 하나님 이곳은 바로 당신의 집입니다. 이 거룩한 땅 위에 제가 서 있습니다. 요동치 않겠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당신과 함께 서겠습니다. 방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기도했다. 보초는 힐긋 보고 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는 표정이었다.

 

리철 검사가 내 사건의 주된 예심원 검사였다. 내가 쓴 300페이지 진술서를 매일 읽으며 확인하는 일이 반복됐다.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리철 검사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면 전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 정부에 석방을 위해 호소해 달라고 적어라고 했다.

 

12월 21일 리철 검사가 나를 양각도 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방에 서양인 두 명이 들어왔다. 저는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인 칼 울라프 안더손입니다. 여기는 부대사 욘 스벤손입니다. 저희는 미국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선생님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들의 편지를 전해줬다. 아내의 편지를 읽는 동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보내준 편지도 눈물 속에서 읽었다.

 

리철 검사는 자신들이 범죄자를 얼마나 인도주의적으로 대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가족들과 통화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단 내가 헌법 60조를 어겨 법정 최고형을 받게 생겼다고 말해야 하며 써 놓은 원고대로 말하라고 했다. 아내와 통화하는데 와락 눈물이 쏟아져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는 흐느꼈다.

 

걱정마 다 잘될거야. 내가 아무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어.

 

워싱턴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과도 통화하고 다시 억류시설로 돌아왔다.

 

나중에 나는 12월 11일 미국 국무부가 나의 억류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성 발사와 날짜가 겹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시 북한의 정치 전략의 일부였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0> 反공화국 쿠데타 계획, 15년 형 선고한다

 

예심기간 기도·성경 읽기로 보내… 교회 학생들 응원 메시지에 힘 내

 

2013년 4월 30일 북한에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강제노동교화소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케네스 배 선교사. 서빙라이프 제공2013년 2월 12일,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나의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북한의 세 번째 핵실험이었다. 유엔은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면서 많은 제재를 가했다. 뉴스에선 미국과의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보도했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질문을 퍼부었고 협박을 하는 심문으로 심신이 지쳐갔다. 어느 날은 잠자다 어떤 손이 내 목을 조이는 것같이 느껴졌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누군가 나를 깔고 앉은 것처럼 일어날 수도 없었다. 고통스러워 숨을 헐떡였다가 한참 만에 눈을 떴다. 예수님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나를 억누르던 힘이 스르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럽고 사악한 영아 나가라. 그 순간 방안에 가득했던 압제와 영적 전쟁의 기운이 가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 찼다.

 

예심 기간 동안 규칙적인 생활, 검사가 방에 없을 땐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찬송을 불렀다. 예배와 기도, 성경읽기, 운동을 세 시간씩 했다. 방의 너비는 5m. 그 방을 나중엔 하루에 500번씩 나중엔 1000번을 왕복하고, 팔 굽혀 펴기와 여타 체조를 병행했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이 사방에서 가해 오는 압박을 견뎌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압박의 강도가 점점 심해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곤 했다.

 

3월 말, 리철 검사가 말했다. 당신이 재판을 받아야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법을 우습게 여기지 않을 거야. 당신을 재판하지 않으면 붙잡혀도 기껏해야 추방될 뿐이란 안일한 생각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로 몰려올 거야. 그래서 당신을 본보기로 삼기로 이미 결정된 거야.

 

스웨덴 대사는 가족의 편지를 소포 몇 개와 함께 전해줬다. 가족들의 편지 무더기 속에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 보였다. 내 선교사역에 재정적 도움을 줬던 한 교회 학생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모아서 보내온 것이다. 하나님은 목사님을 잊지 않으셨어요. 지금 하나님이 목사님을 밤낮으로 지켜보고 계세요. 아이들의 응원 메시지를 읽으니 내 영이 급속도로 재충전됐다.

 

4월 30일. 재판은 한 시간 반가량 소요됐다. 아내가 법정에서 입으라고 보내준 양복을 입었다. 몸이 10㎏ 이상 빠져 아이가 아버지의 옷을 입은 모양새였다. 판사는 법정에 앉았고 양쪽에 두 명의 판사가 더 앉았다. 두 판사는 재판이 법대로 진행되는지 감시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다. 검사가 공소장을 읽으면서 재판이 시작됐다.

 

미국인 범죄자 배준호를 국가범죄로 기소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소한다. YWAM 선교 조직에서 일하고 미국과 남조선교회에 공화국 정부를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파괴된 성경 속 도시 이름을 딴 여리고 작전이라는 반 공화국 종교 쿠데타를 계획했다.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한다.

 

결국 북한은 자기들의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15년의 형량을 선고했다. 5월 14일 노동교화소에 입소했다. 그곳은 단층 건물 하나와 5층짜리 건물 하나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건물 옆에 언덕까지 드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103번이란 수감번호가 붙여진 죄수복을 입었다. 소장은 탈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 탈출하면 무조건 총살이라고 했다.

 

죄수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외국인들이 머무는 교화시설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방이 9개 정도에 사무실과 샤워시설이 있는 정도였다. 방에는 침대, 화장실이 딸려 있고 TV도 있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1> 노동하며 찬송… 간수 죄수가 행복한가 겁박

 

영적 에너지 고갈 막으려 성경도 암송… 영양실조·과로로 20㎏ 빠져 병원 이송

 

케네스 배 선교사 재판(2013년 4월 30일)이 열린 다음날, 여동생 테리 정이 CNN 앤더슨 쿠퍼 360도에 출연해 오빠의 석방을 호소하고 있다. CNN 화면 캡처노동교화소에서 매주 6일 동안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노동을 했다. 노동을 안 하던 사람이 농사나 땅 파기, 돌 나르기, 석탄가루 만들기 등등의 중노동을 했다. 아침·저녁으로는 현미밥, 국, 나물 몇 가지가 나왔고, 점심은 밥 대신 강냉이국수 같은 간단한 식사가 나왔다. 겨울철에는 나물 대신 짠지 한두 개 정도였다.

 

노동을 하는 동안 육체가 쇠약해지니 영적인 에너지도 고갈되는 듯했다. 몸도 아팠지만 영혼은 더 아팠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땅을 파는 동안 에베소서 6장 13∼17절을 암송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상상을 했다.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가 나를 감싸는 것을 상상하고 느끼려 했다. 일하면서 더 자주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고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찬양에 흠뻑 빠질 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날씨는 무덥고, 등은 욱신거리고 무릎은 쑤셨지만 내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쁨을 누렸다.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불렀다. 정말로 주 예수님이 동행하시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니겠습니까. 3절에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가 나온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대신에 감옥이나 병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바꿔 불렀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고 약속하셨고, 그곳에 주님의 임재가 가득한 것이 느껴졌을 때 더 이상 불안하고 힘들지 않았다. 한 간수가 소리를 질렀다. 103번 당신은 죄수인데도 행복하나. 그만하지 못해. 사람들이 나를 감시하고 지키고 있지만 밖에는 천군천사가 나를 위해 포진하고 있는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내게 15년형을 구형한 검사가 두 달 후 찾아와 이러다가는 7∼8년 후에도 못 나갈 것 같다. 왜 너희 정부에서는 반응이 없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북·미 협상카드로 잡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억류 기간 동안 처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재판이 열린 다음날 여동생은 CNN의 앤더슨 쿠퍼 360도에 처음 출연해 양국의 지도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오빠를 단지 양국 싸움의 한복판에 갇힌 가엾은 희생자로 봐주세요. 오빠는 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어서 집으로 보내주세요라고 호소했다.

 

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여동생뿐만 아니었다. 온 가족이 나의 귀환을 위한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 아들 조나단은 Change. org에 나의 석방을 북한에 요청하는 탄원서를 올렸다. 그 탄원서에 총 17만 7552명이 서명했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미국의 여기자 유나 리와 로라 링은 북한에 구금됐던 넉달 반 동안 편지가 큰 힘이 됐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케네스 배에게 편지를이란 캠페인을 벌였다. 수십만 명이 나를 위해, 북한을 위해 기도했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물론 나는 고국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2013년 8월 3일, 체중이 20㎏이 빠져서 그런지 많이 어지러웠다. 군의관은 영양실조와 과로로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나를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병원에선 다행히 환자로 대우해 줬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2> 아들아, 주가 너를 구하지 아니할지라도 감사하자

 

어머니 편지에 귀국 꿈 내려놓겠다 기도… 열흘 뒤 어머니 방북… 이틀간 네시간 면회

 

케네스 배 선교사의 어머니 손명희씨가 2013년 10월 북한 평양을 찾아 그를 면회하고 돌아온 뒤 CNN방송과 인터뷰하고 있다. CNN 화면 캡처병원에 온 지 한 달 쯤 지났을 때 리철 검사가 찾아왔다. 그는 북한에 억류돼 있는 동안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유일한 북한 관리였다. 준비해. 당신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어. 훤칠하게 생긴 미국인 두 명이 들어왔다. 백악관에서 왔습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선생님이 잘 있는지 확인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들이 너무 반가워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를 집에 데리고 가려고 왔구나.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의 석방이 우리 정부의 최우선 사항이란 사실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지금 상황이 매우 복잡합니다. 한숨이 나왔다. 백악관 관리가 겨우 5분간 비밀리에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나의 석방이 미국 정부에 중요하다는 뜻이었지만, 곧 풀려나리란 희망은 산산이 깨졌다.

 

미국 관리들이 돌아간 후 어머니의 편지와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두 가지 문서가 내게 전달됐다. 문서 중 하나는 북한이 내 석방을 협상하기 위해 로버트 킹 미국 인권담당 특사의 방북을 허락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서대로라면 특사는 2013년 8월30일 평양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9월 중순에 이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직 특사를 보지도 그에 관한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

 

두 번째 문서에 그 이유가 설명돼 있었다. 특사가 일본에서 북한으로 가기 전 날 북한 정부가 돌연 그의 방북을 거절했다. 특사가 군용기를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이 심기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게다가 8월28일 미군이 남한과 합동군사훈련 일환으로 괌에 배치된 B-52 폭격기를 남한으로 보냈다. 북한은 이 일을 큰 위협으로 여겼다.

 

국무부 문서를 읽고 어머니의 편지를 읽었다. 아들아 너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 앞에서 품었던 믿음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히 구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감사하자.

 

문득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심한 낙심과 약한 낙심 사이를 널뛰기했다. 2013년 9월24일 마침내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제 마음 아시지요. 하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집에 가고 싶지만 당신이 머물라 하면 머물겠습니다. 집에 갈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제 모든 뜻을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 순간 내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떨어져 가는 듯 평안이 찾아왔다. 마음이 편해진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 리철 검사가 찾아왔다.

 

우리 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당신 어머니의 방문을 허락했어. 지금 당신 어머니가 평양에 와 있어. 우리는 서구 언론이 매도하는 것처럼 지독한 사람들이 아니다.

 

리철 검사가 나간 지 40분가량이 지난 후 문밖에서 간수가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넣어 돌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내 눈앞에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가 나타났다. 벌떡 일어나 달려가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방엔 촬영팀과 몇몇 북한관리가 함께 들어왔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몸은 괜찮냐며 쉴 새 없이 물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마카다미아를 넣은 하와이언 초콜릿, 육포, 견과류, 프로틴 바, 비타민 등을 한 아름 꺼냈다. 어머니와 하루 두 시간씩 이틀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3> 억류 2년 다가오자 낙심과 분노가…

 

건강 악화로 병원-교화소 오가기 반복… 성경조차 펼 수 없는 영적 침체기 맞아

 

케네스 배 선교사가 2014년 2월 북한 노동교화소에서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빙라이프 제공어머니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평양의 유명식당 옥류관에서 냉면을 사다 주셨다. 병원 직원과 간수들까지 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사와 나눠주셨다. 어머니는 북한 관리들에게 화를 내는 대신 친절을 베푸셨다. 어머니의 행동은 내가 나중에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어머니와 작별의 포옹을 했다. 마지못해 걸어가시던 어머니가 뒤돌아 나를 바라볼 때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체포돼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직접 평양에 와서 보니 가슴이 미어지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품으라 했지만, 어머니에게 그런 믿음이 더 필요해 보였다. 건강하셔야 해요. 어머니.

 

병원 치료를 받고 다시 노동교화소에서 계속 노동을 해야 했다. 하수관을 새로 설치할거니 도랑을 파라고 했다. 8시간 동안 곡괭이로 땅을 찍은 뒤 평평한 부분으로 흙을 긁어내려고 애를 썼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땀이 비오듯 흘렀다. 손은 심하게 저려왔고 허리는 부러질 듯 아팠다. 내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일어나면 살이 쑥쑥 빠져 있었다. 치통이 심해 고통스러웠다.

 

2014년 3월 27일 나는 병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촬영결과 폐에서 반점이 발견됐다. 노동교화소로 돌아간 지 두 달 반 만에 15㎏이 빠졌다. 병원에 입원해 그저 그곳에 오래 머물기만 바랐다.

 

2014년 7월 말, 북한은 미국 정부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또다시 언론과 인터뷰를 시켰다. 해야 할 말을 정해줬다. 난 카메라를 보고 미국 정부로부터 남겨진 것처럼 느껴집니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다시 노동교화소로 이송됐다.

 

교화소 마당 한쪽 마른 개울바닥에 지름 15㎝ 안팎의 둥근 돌들을 파내 약 140m 떨어진 도로로 옮기는 일을 시켰다. 정오의 온도가 영상 38도에 육박하고 습도까지 엄청 높았다. 오후엔 40도가 넘었다. 하루에 물 7ℓ를 족히 마셨는데 종일 소변도 마렵지 않았다. 땡볕 아래서 나는 종일 찬양을 불렀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하러 나갈 준비할 때도 찬양, 일하면서도 찬양, 저녁에는 거의 매일 발생하는 정전을 틈타 찬양했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찬송가를 불렀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몸이 피곤하고 삭신이 쑤시는 가운데도 하루를 견디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간수들은 분명 내 찬양을 듣고 있었다. 간수들은 도대체 비결이 뭐야. 어떻게 이토록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나. 그 소망은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2년 후에 돌아갈 거라는 걸 알았다면 못 버텼을지 모른다. 그런데 다음 주면, 늦어도 다음 달이면…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력을 만들어 하루씩 지웠다. 다음 달 달력이 만들어지기 전에 집에 보내주십시오 하고 매일 기도했다.

 

몸은 또 쇠약해져 2014년 9월 다시 병원으로 이송됐다. 10월은 극심한 영적 정체기였다. 성경도 좀처럼 펴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2년 동안 성경을 17번이나 통독했지만 그땐 잘 읽지 않았다. 너무 지쳤다. 낙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억류된 지 2주년이 코앞에 다가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더는 못 견디겠습니다.

 

극심한 실망감에 사로잡혔던 마지막 한 달은 억류됐던 첫 한 달과 함께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4> 각국서 함께 기도합니다 편지 300여통… 큰 위로

 

내가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스바냐서 읽은 닷새 뒤 마침내 석방

 

2014년 11월 8일 북한 억류 735일 만에 석방된 케네스 배 선교사의 사면식 장면. 서빙라이프 제공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아.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아. 당신은 집에 돌아갈 수 없어. 나를 심문했던 검사는 늘 희망을 꺾는 말을 했다. 마음을 잡기 위해 전 세계에서 날아온 300통 이상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낸 편지에 적힌 당신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합니다 함께 합니다 함께 서있습니다란 말이 큰 위로가 됐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너는 선교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으니 부정적인 말에 용기를 잃을 게 아니라 주님의 음성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독백했다.

 

기도하고 편지를 읽을수록 하나님의 음성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시련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아침.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정신이 맑았다. 그때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 성경책을 펴서 스바냐 3장 20절을 보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느껴졌다. 자 때가 됐다. 이제 내가 너를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흘 뒤 7일 금요일 밤 9시. 내게 늘 부정적인 말을 했던 검사가 찾아왔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온 건 처음이었다. 내일 아침 다시 인터뷰를 할거야. 이번엔 미국에 도움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공화국 정부가 잘 대해 준 것에 감사하고 당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죄하는 자리야. 아마 이것이 당신이 집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일거야.

 

나를 태운 차는 고려호텔에 멈췄다. 2층 회의실로 갔다.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군복을 완벽히 갖춰 입은 노동교화소 소장이었다. 소장이 내게 다가와 한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03번, 이 소식을 전하게 돼 기쁘기 그지없소.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김정은 원수님의 배려로 인해 특별사면을 받게 됐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려 2년을 기다려 온 말이었다. 잠시 후 북한 대표단이 회의실로 들어와 커다란 책상에 앉았다. 몇 분 뒤 8명의 미국인이 들어왔다. 사절단 대표는 장관급에 해당되는 국가정보국 국장 제임스 클래퍼였다. 이어 대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나중에 그가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사형을 주도한 실권자였다. 그는 양피지처럼 보이는 문서를 펼쳐들고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서를 읽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의 명령으로 미국인 범죄자 배준호를 특별사면 한다…. 나는 죄수복을 벗고 공식적으로 미국 사절단에게 인도됐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한 여성이 내게 몸은 괜찮은지 물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한반도담당 보좌관 앨리슨 후커였다. 비행기는 평양을 떠난 지 21시간 만에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의 루이스맥코드 합동 기지에 착륙했다. 비행기에 내리자 어머니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뒤에 여동생이 달려왔다. 가족들을 만나면서 마침내 내가 자유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5·끝> 북한 향한 주님 마음은 탕자 기다리는 애통함일 것

 

석방 후 北 인권 신장·탈북민 지원 나서… 더 많은 분들이 北 위해 기도하길 소망

 

지난 6월 5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콘퍼런스에서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케네스 배 선교사. 서빙라이프 제공2014년 11월 8일, 억류된 지 735일 만에 마침내 북한을 떠났다. 북한 억류에서 풀려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북한에서의 억류 기간을 놀라운 2년이라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2년여 동안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했고 북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탕자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잠시 갇혀있었지만 북한 주민들은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 평생 갇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여행을 하면서 목자가 양을 버려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계속됐다. 그것은 2년여 동안 나를 담당했던 북한 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시 꼭 만납시다며 눈물 글썽였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란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탈북민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들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다. 미국에 북한을 위한 NGO를, 한국에는 커뮤니티센터를 만들려고 추진하다가 2016년 3월부터 서빙라이프라는 북한 인권 구호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서빙라이프는 2006년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인 서승원 대표에 의해 설립됐으며, 창립 이후 북한 동포들의 인권 신장과 북한이탈주민의 국내 정착을 돕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제주도 열방대학에서 탈북민들, 남한 청년들, 디아스포라 한인(재외교포) 등 200명 정도가 함께하는 느헤미야 영어캠프를 열 예정이다. 이외에도 탈북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 문제, 학업 문제 등을 돕는 일도 하고 있다. 또 탈북민 자녀 가운데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는 소망의 집이라는 보육원 사역을 중국에서 펼치고 있다. 현재 6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양육받고 있다. 이밖에 다음세대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통일선교학교도 진행할 예정이다. 탈북민과 통일 관심자, 영어권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느헤미야 기도회는 이미 시작됐다.

 

통일되면 가장 먼저 평양에 가서 살고 싶다. 평양에 가서 느헤미야가 훼파된 곳에 다시 영적인 성벽들을 일으켜 세운 것처럼 북한 땅에 영적인 성벽들과 가정, 학교를 세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일들이 필요할 것이다. 남한의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다시 세우는 일에 함께하길 원한다.

 

내가 억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관심 때문이었다. 2400만명의 북한주민들을 위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기도하길 소망한다. 이제 인터넷상에서 북한 동포를 위한 100만 기도 서명 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5개 국어로 된 웹사이트를 만들어 전 세계에 흩어져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연대해 기도하는 기도의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다.

 

용광로에 들어갔던 것 같았던 북한에서의 2년여 시간은 주님과 사막에서 동행했던 기간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배운 교훈은 그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잊혀졌다고 생각된 날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잊으신 적이 없었다. 나선의 보초가 내게 던졌던 물음이 여전히 내 귓가에서 윙윙거리고 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어디에 사나. 중국인가, 아니면 조선인가.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그들도 잊지 않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평안의 나날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