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교 청년회

이끄심 10화 - 체험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10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4.02.20|조회수15 목록 댓글 0
이끄심 10화 - 체험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10


목숨을 걸고 들어온 대사관이었지만, 한국에 언제 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불안한 마음이 삐쭉삐쭉 올라왔지만 우리는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대사관에는 우리 말고도 이미 많은 탈북자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중에는 어려서 탈북을 한 탓에 학교 한번 못 가본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이름조차 잘 쓰지 못했다. 오랫동안 중국에 숨어 지낸 아이들이 무슨 학교생활을 경험했겠는가. 배움을 갈망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우셨던 영사관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그곳에 있는 몇 명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수 있겠냐고 하셨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콕 집어서 나에게 부탁하셨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렇게 영사관 안에서 소소한 스터디클래스가 열렸다. 나와 여동생은 한글 쓰기와 읽기, 중국어 천자문 쓰기 등 아이들에게 글쓰기와 책 읽기 훈련을 시켰다. 영사관님은 아이들이 공부하기 쉽게 한글로 된 책을 많이 구해다 주셨다. 그 책들은 대부분 이솝우화와 같이 교훈이 담긴 내용들의 책이었는데, 그 중에는 탈무드와 성경책도 있었다. 나는 한글로 된 책을 받을 때가 가장 기쁘고 책 한 권이 너무 소중했다.

그중에 이솝우화나 탈무드는 삶의 지혜를 주고 재미도 있어 참 좋아했지만, 이상하게 성경책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성경책을 뒷전으로 했던 나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베이징 대사관에는 우리 팀 말고도 먼저 들어오신 모자(母子)가 있었다. 그 모자는 누가 봐도 예수쟁이로 불렸고 흔히 말하는 충만한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경계하면서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오라버니가 내게 물었다, “서윤아, 너 혹시 하나님 알아?”


나는 첫 중국에서 만난 순자 이모를 통해서 교회는 들어봤지만 ‘예수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내가 하나님도 성경도 잘 모른다고 하자 그때부터 그 오라버니의 끈질긴 전도가 시작되었다. 하루는 성경을 가지고 와서 창세기 1장 1절을 읽어주시며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윤아,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야.”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철저하게 진화론을 배운 나는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된 것이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오빠도 지지 않고 나에게 말했다. “절대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흙이 어떻게 사람이 되었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루는 내가 오라버니에게 도전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디 한번 증명 해봐요.” 오라버니는 나에게 물었다. “서윤아, 공기가 눈에 보이니?” “아니요.” “공기는 눈에 안보이지만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죽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셔.” 오라버니는 또 하나님의 존재를 바람에 비유하며 열정적으로 나에게 하나님을 전하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렵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제는 나는 그 오라버니의 얼굴도 보기 싫을 만큼 하나님 이야기에 질려버렸지만 그 좁은 대사관 안에 도망갈 곳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어도 그 모자가 부르는 찬송가는 너무나 좋았다.  그들은 틈만 나면 마주 앉아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자연스럽게 성경은 이해가 안 되지만 노래는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 모자는 나에게 찬송가 몇 곡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들 옆에 앉아 열심히 따라 불렀다. 원래 노래를 좋아했기도 하고 한국 노래를 즐겨 듣기도 했기에 이 노래들이 한국에서 새로 나온 노래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그때 좋아했던 찬양은 “샤론의 꽃 예수”와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르는 시간이 끝나면 이제 말씀을 보자며 자연스럽게 성경을 폈지만, 나는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천근만근 내려오는 눈을 이길 수 없어 대놓고 졸았다. 그런 시간도 잠시, 얼마 있지 않아 그 모자는 우리보다 먼저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를 피곤하게 했던 오라버니가 먼저 한국으로 가시고 나니 매우 홀가분해졌다. ‘더 이상 나를 쫓아다니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대서 내 머리를 아프게 할 사람이 없다!’며 좋아했다. 


그런 데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고 있던 내 안의 두려움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할 때는 잊고 있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혼자 찬송을 부르는 것도 재미가 없었고 외로움이 몰려왔다. 혼자 고뇌하며 하루를 보낸 그날, 나는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서윤아!”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크게 불렀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너무 놀라 “누구세요?”라며 되물었다.


환하신 빛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그는 누구인가? 단호하면서 온화한 그 음성에는 부드러움과 사랑이 느껴졌다. 두 팔을 벌려 환한 형상으로만 있는 가운데 누구냐고 계속 따져 묻는 나에게 “나다. 네가 그토록 부인하고 있는 나다.”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그 음성이 내 귓가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졌던 나는 낯선 남성의 음성에 순간 “혹시 제 아버지세요?”라며 되물으며 그냥 울었다. 울음 가운데 위로받는 따뜻함이 느껴졌고, 흐느끼며 울고 있는 나에게 이런 음성이 들렸다. “이제부터 너는 기도하여라.”


깨어나 보니 실제로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내가 만난 빛이신 하나님이셨다. 시간이 지나 돌고 돌아 신학생이 되어 알게 되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I am who I am, εγω ειμι (에고 에미), I am He.”였다. 그래서 한동안 얼마나 가슴이 먹먹했던지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어나 보니 모두가 잠든 밤이었고, 나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다시 갓 태어난 신생아 철부지였다. 기도하라는 생생한 음성에 이끌렸지만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 혼자 고민하던 순간 ‘옥별’이란 동생이 생각났다. 옥별이 동생은 선교사님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사관에 오게 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였다.

옥별 이는 늘 혼자서 기도하는 아이였는데, 평소에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나는 즉시 옥별이를 깨우러 갔다. “옥별아, 옥별아!” 잠결에 놀라 깨서 눈을 비비는 옥별이에게 나는 급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옥별아, 언니에게 기도하는 것을 좀 알려줄 수 있니?” 아직 잠도 덜 깬 목소리로 옥별인가?대답했다. “기도요? 그거 그냥 언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다 하면 돼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을 꼭 해야 효력이 있어요” 그리고는 다시 누었다.


처음 불러보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계속 중얼거리며 손바닥에 그 이름을 적어 가며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외우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제 자리로 돌아온 나는 벽을 보고 앉았다. 남들이 다 잠든 밤, 나의 첫 기도가 시작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내 속에 있던 아픔들이 입술을 통 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마에 대한 상처였다.

내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미움 과 원망이 있었다. 우리 가정의 깨어짐도, 북한에서 탈출하고 북송을 당하고 했던 모든 힘든 순간들도, 남동생과 헤어져야만 했던 것도, 그리고 내가 몸이 아픈 것도 다 엄마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도와 여기까지 왔지만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싫었다. 칭찬에 인색하셨던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와도 맏이니까 당연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엄마는 나를 늘 위험한 곳에 앞세우고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칭찬이나 응원의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늘 엄마의 인정에 목마르면서도 엄마를 증오하는 애증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무엇보다 내가 너무나 사랑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 하셨던 엄마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꾹꾹 묵혀두어 응어리진 서러움이 다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펑펑 울며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엄마를 고발했다.

그렇게 다 뱉어내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 과 사건이 ‘It is done. 이제는 끝이 났다’ 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안전하게 이 곳 대사관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그저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배웠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을 외치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창살 사이로 살짝 만 열리는 작은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어제와 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어제와 똑 같은 하루일 텐데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저 밖에 풀들도 나무들도 다 너무 예쁘게 보일 뿐 아니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뿐 아니었다. 내 옆에 엄마와 동생이 너무나 예쁘게 보였다. 나의 달라진 모습을 엄마와 동생은 단번에 알아봤다. 항상 무표정이고 냉소적인 모습이었던 내가 달라졌다며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몇 주 동안 대사관에서 지내면서 내 마음을 짓눌렀던 두려움들은 다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칫 한국에 못 갈 수도 있다고 속삭이는 말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한국에 가고 안 가고가 내 삶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이 작은 건물 안에 있어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쁨과 행복이 나를 감싸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이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모녀는 드디어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꿈에도 가고 싶던 한국에 왔다. 이제 나도 떳떳한 교인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다짐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잘 몰랐었다. 그때는 내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몰랐었다.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는데, 말씀과 기도로 양육되지 않은 나의 삶은 ‘멈춤’이 아니라 ‘도태’된 삶이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삶이었다면 그건 소설이지 인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 온지 어언 20년이 넘었지만, 17년 가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해 보겠노라,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루어 내겠다.’고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왔던 것이 자기 우상이었고,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실 곳이 없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고집스러운 나에게 져 주셨던 것이다.


만물의 주권자이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는 절대 강압적으로나 힘으로 나를 몰아붙이지도 않으셨고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그리고 비로소 보이는 것, 한 번도 우리 가족을 놓지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뼈 저리게 깨달아 알게 된다.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때와 같이온 우주가 멈추는 것 같은, 온온몸에서전율이 흐르는 영적인 체험을 허락해 주시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알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www.opendoors.or.kr/
전세계 이슬람권, 공산권 교회, 성도 국제선교단체, 순교자, 중보기도, 세계기독교뉴스 제공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