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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X (변승우 목사님의 "칭의의 교리" 중에서)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4.02.29|조회수8 목록 댓글 0

  ▣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3. 신약의 세 번째 인용: 야고보서 2장 23-24절!

 

  (3) 속지 말라! 행함과 무관한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

 

  야고보서 2장 21-25절의 액면 그대로의 의미는,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 하나님은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자가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그 뜻입니다. 

 

  그런데 칭의 에 이미와 아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파고 들어가 보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사실이 도출됩니다. 

 

  첫째는,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믿을 때 행함을 산출할 수 있는 마음의 순종이 포함된 믿음으로 이미의 칭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야고보가 말한 믿음과 행함 둘 다 가지고 있고 오직 그런 사람이 궁극적인 구원인 아직의  칭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의 칭의에 대한 것은 14절을 다룰 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생략하고 이미의 칭의와 관계된 것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4 "이에 아브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은 처음부터 순종하게 합니다. 즉, 믿음은 순종을 낳고 이 둘은 서로 불가분리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인정했습니다. 

 

  로마서 1:5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로마서 16:26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이 두 구절은 로마서 전체를 감싸 안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순종을 낳지 못하는 믿음이 아니라 순종을 낳을 수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전했음을 뜻합니다. 또, 그것이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한 핵심 진리 중의 하나라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믿음은 순종을 낳고 즉각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즉각적이긴 하나 믿음 후에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보십시오. 믿음이 먼저 나오고 순종이 그 다음에 나오지요!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항상 믿음이 먼저고 순종은 그 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순종을 낳기 전에는 믿음만 있었을까요? 순종은 없었을까요? 즉, 믿음은 순종을 낳기만 할까요? 먼저 믿고 그 후에 순종이 따르고 이렇게 서로 분리되어 있을까요? 과연 처음 믿고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은 어떤 형태로든 순종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루터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병적일 정도로 이 점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는 것과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적어도 처음 믿고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는 십자가 보혈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 하나만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 순간, 그 외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은 오로지 십자가 보혈 공로로 받는 것이지만,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이 정한 칭의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맞지요! 그런데 회개에는 "지금부터 죄를 끊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요구되고, 믿음에는 "지금부터 내 뜻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회개는 회개가 아니고 믿음도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 십자가 보혈 공로를 의지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오직 십자가 보혈 공로만 믿고 의지하면 무조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믿고 있는 목사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믿음은 즉각적인 행함을 낳을 뿐 아니라 처음 믿는 그 순간에도 행함과 불가분리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동물이든 사람이든 잉태하지 않고 해산할 수는 없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욕심을 품는 순간 죄가 잉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물리치지 않으면 죄가 태어납니다. 또, 죄 안에는 사망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을 낳습니다. 그런데 죄가 욕심을 통해 잉태돼야 태어나는 것처럼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도 먼저 잉태되어야 하며, 우리가 처음 믿는 순간 믿음 안에 잉태됩니다. 그리고 그 뒤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순종이 완전히 분리되거나 무관한 순간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이제, 믿기만 하면 행함이 없어도 천국에는 간다며 행함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시겠지요.

 

  저는 교회들 안에 만연되어 있는 구원파적인 구원론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근절시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여러분에게 자세히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1) 구원의 조건인 회개와 믿음

 

  믿음은 믿기 시작하는 첫 순간에 행함을 잉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조건이 회개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막1:15, 행20:21, 히6:1). 그런데 회개는 죄를 자백할 뿐 아니라 버리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단지 구주가 아니라 임금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를 버리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는 진실한 결단이 그 안에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첫 순간부터 행함을 잉태할 수밖에 없고, 또 행함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백석대 홍인규 교수님이 속 시원하게 잘 말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적 사명은 모든 민족들로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1:5b). ...

 

  그러면 믿음과 순종은 어떤 관계인가? 많은 학자들은 믿음이 순종의 기초라고 이해한다. 곧 순종은 믿음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를 근원의 소유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순종을 개종 이후의 행동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 단계로 순종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종은 믿음과 동시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은 개종과 동시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4)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1:7)이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는 것에는 항상 순종이 포함되고, 마찬가지로 주께 순종한다는 것에는 항상 믿음이 포함된다."

 

  옳은 말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단지 행함을낳는 것이 아닙니다. 첫 순간부터 행함을 잉태하고 있고, 언제나 행함과 불가분리인 것입니다. 

 

  2) 창세기 12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 6절이 아니라 창세기 12장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즉시 행함을 낳는 믿음이었습니다(창12:4, 히11:8).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을 낳을 뿐 아니라 믿기 시작한 첫 순간에 행함을 잉태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만일 이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없으면 3절을 믿을 수 없습니다. 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때문에 1절과 3절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1절의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없으면 3절의 복음을 믿을 수 없고,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1절은 믿은 후가 아니라 믿을 때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믿음은 믿기 시작하는 첫 순간부터 순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을 들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단순히 자백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회개하는 첫 순간에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순종을 잉태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가 아니라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을 때 '지금부터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의 순종이 필히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순종을 잉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순종과 처음부터 하나입니다. 즉, 마음으로 믿는 것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둘 다 있어야 참 믿음입니다. 이제, 믿음이 처음부터 행함을 잉태하고 있고 행함과 무관한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겠지요!

 

  한편, 창세기 15장 6절에 하나님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이 처음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신칭의를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15장에는 12장 1절에 있는 믿음이 순종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과 4절에 있는 믿음은 즉각적인 순종을 낳는다는 것이 안 나옵니다. 단지 "믿었다"는 말만 나옵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 "십자가 보혈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된다. 오직 믿음이다!"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 믿은 것은 창세기 12장입니다. 또, 전에 자세히 설명해드린 대로, 15장의 "믿으니"는 단지 그때의 믿음이 아니라 12장에서부터 믿어온 믿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15장의 믿음은 12장의 믿음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15장 6절은 물론이고, 바울이 그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한 로마서 4장이나 갈라디아서 3장도 창세기 12장의 믿음과 다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행함을 잉태하지 않거나 행함을 낳지 못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서신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거나 설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확실히 분별이 되시지요! 

 

  3) 로마서 6장 6-7절

 

  이신칭의에 요구되는 참 믿음은 행함을 낳기 전에 이미 행함을 잉태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의 글에도 이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그런데 이 구절들은 해석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거의 단체로 오해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이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한 주석이나 강해집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심히 어렵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이 구절들을 연구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연구에 꼬박 한 달 이상 걸렸고, 세 번이나 원고를 다시 써야만 했습니다. 정말 힘들게 연구해서 두 시간 가량 설명할 수 있는 원고를 겨우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자세히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에 대한 설명을 6절이 아니라 7절로 시작하겠습니다. 

 

  로마서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절뿐 아니라 이 구절도 학자들이 해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칭의신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데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7절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더글라스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죄[의 권세]로부터 풀려났다'라는 뜻일 듯 싶다. '죽은 자'는 그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가리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7절은 사실상 6절의 반복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람이 죽으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취지의 격언을 인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다. 바울의 독자들이라면 랍비들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그와 유사한 격언들에 익숙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이 원문과 다르기 때문에 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도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 

 

  "'누구든지 죽은 자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적어도 AV, RSV, NIV에서는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번역에는 적절한 근거가 없는 듯이 보인다.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은 '데디카이오타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헬라어에는 '자유롭게 하다'에 해당되는 적절한 단어가 있다. 이는 '엘류테로오'로서, 바울은 18절과 22절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디카이오오는 로마서에서 열다섯 번 그리고 신약 전체에서 스물 한 번 나오는 모든 경우에서 '의롭게 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분명 그 구절은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번역해야 한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7절의 "의롭다 하심"이 해방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칭의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슈라이너는 6절의 일반적인 해석에 근거해서 7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구절이 논증하는 것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반드시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를 수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바울의 논증에 매우 중요하다. 칭의는 성화와 분리될 수 없다(참조 Ziesler 1989: 161).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죄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다."

 

  저도 오랫동안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7절이 처음 믿을 때도 믿음과 순종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6절의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학자들은 대부분 이 구절의 "죄의 몸"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뿐 아니라 로마서 8장 3절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의 몸 즉 죄의 세력이 멸해져서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해방된 것을 다룬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6절)이 직접 "죄의 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의 몸을 죽여 죄에게 종노릇하게 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을 뿐이고, 실제로 그것을 성취한 것은 십자가의 결과로 주어지는 성령님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려면, 6절의 "죄의 몸"과 "죄의 몸을 죽여"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연 "죄의 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세력 혹은 죄의 지배를 뜻합니다. 그 증거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의 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서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로마서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죄의 몸"이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만드는 죄의 세력을 뜻함이 분명하지요! 우리는 죄의 몸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6절에 나온 것처럼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의 몸"을 죽일까요? 그것은 그 다음 장인 8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바울이 죄의 몸을 무엇이 죽인다고 했습니까? 바꾸어 말해서, 무엇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습니까? 놀랍게도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처럼 십자가가 직접 죄의 몸을 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성령님(갈3:13-14)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6절 후반절의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는 바로 이것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이상, 여러분에게 6절의 의미를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인용한 7절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해석에 제동을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즉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성령을 통해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포함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역개정은 7절을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라고 번역했으나, 원어에는 "벗어나"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6절 전반절과 같은 뜻인 "죽은 자"가 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뜻이 되고,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된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도 오래도록 토마스 슈라이너의 해석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때문에 이 구절들을 고민하면서 깊이 묵상하던 중 저는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7절의 "죽은 자"가 6절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일치할 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2절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와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2절은 1절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더 이상 죄 가운데 거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 자체에 죄를 짓지 말고 순종해야 될 이유와 당위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바울의 대적들처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나는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할 것입니다. 7절의 "죽은 자" 안에 이런 결단과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죽은 자"는 성령을 통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한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7절에서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믿음이 처음부터 행함을 잉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구절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4) 로마서 6장 17-18절

 

  바울은 믿음이 처음부터 순종을 잉태하고 있고 행함과 불가분리라는 것에  대해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서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이드 존즈는 이 중 17절에 대해 "성경 가운데 크게 뛰어나고 두드러진 구절들 중의 하나"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본문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중추와 같은 구절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주는 신약성경의 가장 분명한 정의들 가운데 하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지 않은 자는 결코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한편, 저는 어려서부터 이 구절의 "마음으로 순종하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그 뜻대로 살기로 결단한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두 해 전 수양관에 로마서 주석 세 권을 가지고 갔는데, 세 권 모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반대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많은 연구를 한 후에 비로소 원래의 제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구절에 보면 "교훈의 본"이라는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이 주의를 끕니다. 던은 예수님이 본이므로 교훈의 본이 예수님을 뜻한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너무 나간 것입니다. 또, 어떤 주석에는 그것이 복음이라고 쓰여 있는데 깊이 연구하지 않고 너무 쉽게 내린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교훈의 본"은 무엇일까요?

 

  이 구절은 회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당연히 복음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그러나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복음은 믿어야 할 것이지 따라야 할 교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복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믿는 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교훈을 뜻함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보다 이것과 더 잘 어울리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5장 17-20절은 복음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18절에서 주님은 "다 이루리라"고 했는데, 그 성취의 핵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율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으나 동시에 복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21-48절까지 도덕법을 온전케 하여 계명들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정말 잘 어울리지요! 그래서 저는 이것이 바울이 말한 "교훈의 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의롭다 함만 주지 않습니다. 지켜야 할 교훈으로 인도합니다. 또, 복음은 의롭다 함뿐 아니라 성령을 부어줍니다(갈3:14).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지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신 그리스도의 율법의 계명들입니다. 즉, 마태복음 5장 21-48절에서 예수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들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 계명들로 인도합니다!(마28:20)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님이 그 의미를 온전히 밝혀준 그리스도의 율법의 계명들이 바울이 말한 교훈의 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해석이 옳다는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라는 문구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그 의미가 다릅니다. 존 스토트는 매우 중요한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너희가 ...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7절 하). 이 구절은 회심에 대한 가장 독특한 묘사이다. 그들이 '순종'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믿어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5). 하지만 그들의 순종 대상으로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아니고, 어떤 교훈이다. 이것은 분명 '바른 말' 혹은 사도적 교훈 체계로서, 아마도 초보적인 복음 교리와 초보적인 개인 윤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분명 회심을, 단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뿐 아니라 그 진리를 믿고 고백하는 것으로 본다. 더구나 바울은 이 가르침이 그들에게 맡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가르침에 맡겨졌다고(전하여 준 바) 쓰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동사는 '파라디도미'로서, 이는 통상적으로 어떤 전통을 전달해주는 것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이다. 바레트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듣는 사람들이 그 교리에 양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듣는 사람들에게 양도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랍비처럼) 전통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여전히 그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

 

  더글라스 무도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이 절에서는 교훈이 신자들에게 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교훈에 전하여지는 바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이례적인 표현 방식은 의도적인 것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신약의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 되는 그리스도교의 '교훈'의 권위 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냥 '교훈'이라고 하지 않고 '교훈의 본'(튀포스)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해석자들은 바울이 기독교 초기 교훈의 '원칙' 또는 '본'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맞는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그는 교훈의 또 다른 본과의 대조도 시사하고 싶어 한다. 고데(Godet)는 바울이 자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로마 교인들이 이미 들어 알고 있던 교훈의 본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교훈의 '모양'과 유대교 교훈의 '모양'이 대조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이제는  '[모세의] 법 아래'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권위 있는 교훈의 코드에 매여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모세의 율법과 대조되고 그 권위 아래 놓이게 된 "교훈의 본"이 무엇일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계명들입니다!

 

  고린도전서 9:20-2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그러므로 "교훈의 본"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계명들을 뜻함이 틀림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 순종"한 것이 어느 때인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일까요? 믿고 난 후일까요? 바꾸어 말해서 칭의 직전일까요 직후일까요?

 

  이것은 칭의에 필요한 첫 믿음이 행함을 잉태한 믿음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마음으로 순종한 것이 칭의 직전 즉 처음 믿을 때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 이 구절의 시제

 

  '마음의 순종'은 과거에 회심할 때 내린 결단을 뜻합니다. 

 

  첫째 증거는, 헬라어 시제의 차이입니다. 로마서 6장 12-16절에 나오는 '순종하다'와 '순종'은 모두 현재시제입니다. 16절의 '내주다'로 번역된 헬라어와 '순종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도 현재시제입니다. 

 

  그러나 17절의 '순종했다'로 번역된 단어는 과거시제입니다. '마음의 순종'과 연결된 18절에 나오는 "의에게 '종이 되었다'"도 과거시제입니다. 

 

  이처럼 17-18절에서 갑자기 과거시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바로 마음의 순종이 믿은 후인 현재가 아니라 처음 믿을 때인 과거에 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증거는, 문맥에 나타난 바울의 의도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순종을 권면한 근거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1-11절). 이것에 근거해서 순종을 권고했습니다(12-23절). 그런데 17-18절에서는 계속 순종을 권하지 않고 다시 근거를 환기시킵니다. 즉, 현재의 순종의 근거로 회심 때의 결단(마음의 순종)과 의에게 종이 된 신자들의 정체성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래서 과거형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순종한 것은 믿은 후가 아닙니다. 처음 믿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로마서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종"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는 말이 보여주듯 사람은 본래 모두 죄의 종입니다. 또, 믿는 사람도 죄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참조, 롬6:16). 우리도 죄의 종이 될 수 있고 그 결과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죄의 종이 아닙니다. 처음 믿은 직후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계속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이 죄의 종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믿음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죄의 종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더구나,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처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그 후 죄의 종이 되면 멸망합니다. 그런데 처음 믿을 때 죄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니 말이 됩니까? 그 상태론 사망에 이릅니다. 믿고 난 후에도 그렇게 살면 사망이고 그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처음 믿을 때 일어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처음 믿을 때 "지금부터 죄 짓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실제로 이것을 그런 뜻으로 봅니다. 시간관계상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대표로 더글라스 무의 말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순종하여'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께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개종의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믿음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한정될 수는 없다. 우리가 1:5에서 '믿음의 순종'을 해설할 때 논의했듯이,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를 주로 받들겠다는 다짐을 불가분적이며 서로 상대편을 해석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초점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받들겠다고 한 최초의 다짐이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항복이 포함된다. 바울이 '순종하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그를 생명의 주로 받드는 면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부분으로 강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설명이 참 깔끔하지요! 모든 신자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10:10)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회심할 때 마음으로 믿습니다. 동시에 그때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때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마음으로 결단합니다. 참 신자는 누구나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순종하는 이 두 가지를 했고, 이것이 곧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참으로 처음부터 행함을 잉태하고, 반드시 행함을 낳는 믿음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는 이와 같은 믿음의 특성을 옳게 이해했고, 거듭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신앙은 언제나 순종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어떤 것을 믿는 것만을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에는 언제나 신뢰의 요소, 위임의 요소, 복종의 요소, 믿는 바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 믿음은 순종입니다. ...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입니다."

 

  속이 다 시원하시지요! 옳은 말입니다. 참으로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그것이 어느 것이든 참 믿음이 아닙니다. 

 

  끝으로, 제가 믿음은 행함을 낳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행함을 잉태한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고 "오직 믿음, 오직 믿음" 하는 목사와 신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믿기만 하면 적어도 천국에는 간다!"고 주장합니다. 어이가 없는 말이지요!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4기지를 통해 확실히 증명해드린 것처럼 믿음은 처음부터 행함을 잉태하고 반드시 행함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신앙생활을 할 때 반드시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오직 그들만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그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끝까지 행함 있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반드시 천국에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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