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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스크랩] 변화를 위한 준비(존 비비어의 "승리" 중에서)

작성자종로사랑2|작성시간24.09.08|조회수5 목록 댓글 0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8-19)


  광야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는 곳이다. 물론, 하나님께는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이런 교제의 양식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변화는 쉽지 않지만, 그것은 항상 좋은 것이다. 변화는 우리의 편안한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변화를 거부한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한 번 삶의 형태가 자리잡으면, 그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것은 특별히 종교계에서 많이 일어난다.


  종교적인 본거지와 전통은 일찍 형성되며 깊게 흐른다. 모든 전통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마음으로가 아닌 단지 전통에 의해서 반응한다면 그는 생명이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종교적 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들을 반대하는 한편 과거에 하신 것들을 견고히 붙잡고 있으면서 외적으로만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언약의 자녀들임을 자랑했다. 자신이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들을 견고히 붙잡고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항했다. 그들은 전통과 예배의 규례에 집착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모든 안락과 안정의 영역에 도전하셨고, 하나님은 그들의 규모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규모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셨다.


  그들이 이 변화에 저항했고 그들의 전통에 집착했다. 종교적인 영은 감독을 받지 않으면, 결국에는 편견과 미움과 배신을 초래하는 정예주의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한계 안에서 역사하신다).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으며, 기독교 역사 속에 계속 일어나고 있다. 


  변화와 한 영광의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기꺼이 우리의 안전 지대를 떠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광야를 통해 우리를 기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삶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대제사장이었다. 요한의 유업은 아버지처럼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학교에 가서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하여 바리새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성령이 요한을 광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요한이 기도하면 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강하게 광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혼자 곰곰히 생각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자라난 친구들은 성경학교에 가서 수료증도 받고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안수 받을 것이고, 모든 회당에서 설교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만약에 내가 성경학교에 가지 않으면, 이 소명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나를 부르신 소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천사가 나의 출생을 선포했고, 내가 예언자가 되리라고 말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만약 내가 광야로 가면,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설교 초청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광야로의 불타는 소명은 그의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질문 공세를 잠잠케 했다. 그는 성령님을 따라 광야로 가기로 결심했다.


  누가복음 1장 80절을 읽어 보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누가복음 3장 2-3절은 말씀한다.


  " ...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하나님께서 요한을 준비시키신 곳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경학교가 아니라 광야였다. 모든 유대 땅과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에게로 왔다. 성령의 새로운 운동이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라 광야에서 불기 시작했다. 종교적 외식과 전통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을 준비하기 위해 기꺼이 변화되고 싶은 마음으로 요한에게 나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바로,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러 나오셨다. 요한은 사양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땅에서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내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고 즉시 광야로 이끌려 가셨다. 예수님이 광야로 이끌려 갔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지만, 40일의 시험과 시련을 받으신 다음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광야에서 돌아오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이제 예수님은 행하기 위하여 오신 그 사역을 수행할 모든 준비를 갖추셨다. 세례 요한이 사역한지 불과 몇개월 만에, 다른 새로운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광야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5:33)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은 종종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금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이 올랐다. 자기들은 모든 희생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주목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받고 있었다. 우리는 요한의 시대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던 방법 중에 하나가 금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요한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으로 전환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사역과 예배 방법이 열매를 맺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따르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많은 희생을 했고, 그들의 지도자는 감옥에 갇혔는데, 자기들의 규칙대로 사역하지 않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감정이 상했고 종교적 영을 갖게 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기억하라. 종교적 영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제지하는 반면,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에 집착한다. 왜 그런가? 한 때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것보다 그들과 친분 관계를 갖고 있는 그 사람과 그 단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초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한 때 하나님의 마음을 품도록 인도해 주었던 그 방법 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 교만과 공격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역을 위해서 시간과 돈도 투자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 주장해 온 것들, 획득한 것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들을 휴지하고, 변화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답변을 하셨는지 확인해 보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근심하게 할 수 있느냐"(눅5:34).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종교적 방법들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서 계시는데 왜 그들이 계속해서 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만약에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나오는 것뿐이다"(의역).


  종교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들은 금식이나, 어떤 것을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금식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고, 금식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보다 (혹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높인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교만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 수단이 원래의 열매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금식에는 유익이 있지만, 결코 하나님을 조종하는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쉽게 듣고 볼 수 있는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 주는 방법일 뿐이다. 그러네 하나님이 바로 그들과 함께 계실 때, 왜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금식을 해야만 하겠는가?


  다시 누간복음 5장 34-35절을 보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날에는 그들이 금식할지 모른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날에는 그들이 반드시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의 제자들은 단지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을 말했지만, 예수님은 다른 금식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금식은 신랑을 빼앗기는 그날에 하는 것임을 주의해 보기 바란다.


  예수님은 단지 음식에 대한 금식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가 없는 금식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다음 세 구절에서 주신는 비유로 설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금식은 바로 광야다. 이것을 조명하여 상기해야 한다. 광야의 정의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5:36-38)


  성경에서 새 포도주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새 포도주로 충만해야 한다.


  당신이 처음으로 성령 충만했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를 상기해 보라. 하나님의 임재는 감미롭고 강하다. 당신이 기도할 때마다, 그분의 임재가 느껴졌다. 당신은 하루종일 그분의 임재를 느끼곤 했다. 그분의 임재하심으로 때로는 교회에 앉아서 그냥 울기도 했다.

 

  그런데 한참 후 어느 날,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렇게 쉽게 느끼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전처럼 여전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광야에 도착했다. 광야 혹은 하나님의 임재의 부재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령 운동인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을 수는 없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에 사용했던 가죽 부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포도주 부대와 그릇은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처음 포도주를 넣을 때, 가죽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쉽게 늘어나고 쉽게 휘어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포도주 가죽 부대는 모든 습기를 흡수해서 부서지기 쉽고 단단해진다. 이런 상태에서 새 포도주를 부으면, 그 가죽 부대는 파삭파삭해서 쉽게 부서질 수가 있기 때문에, 낡은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의 무게와 발효 작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가죽 부대를 다시 사용하려면, 며칠 동안 물에 담가둔 후에 그 위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면 된다. 그러면 가죽 부대는 다시 부드럽고 유연해진다.

 

  우리는 영적 새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상징한다. 에베소서 5장 26절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야 한다.

 

  욥은 시험을 받을 때에 그의 육신에 필요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욥23:12).

올리브 기름을 문질러 바르는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죽 부대의 원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낡은 포도주를 비워야 한다.

 

  부대 속에 포도주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금식, 혹은 우리가 계속해서 말한 것처럼 메마른 시기를 의미한다.

 

  왜 하나님은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하게 하실까? 우리를 절망케 하시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비록 그런 일이 일어나겠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쓰실 때까지 당신을 선반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임재를 거두어 들이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탐색하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부드럽고 유연하게 된다. 단단하고 뻣뻣한 사람들은 하나님 찾기를 중단한 것이다. 그들은 사역 방법과 기도 방법과 교리 등에 굳어져 있다. 그들은 지난 경험에서 스스로 고안해 낸 공식으로 점점 굳어진다.

 

  그것이 이 사람들의 상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위대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를 따랐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고상한 소명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대신에, 자신의 신념과 방법으로 굳어졌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마다 새로운 가르침이 나타난다. 가르침과 교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해 가는 수단이다. 만약 우리가 가르침이나 교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우리를 종교적 속박이나 율법주의, 실수(그 전부)로 끌고 갈 것이다. 당신은 어떤 공식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식을 갈망해 왔다. 그들은 7단계 치료 방법, 4단계 전도 방법, 성공을 위한 10가지 성경 구절 등을 입수한다. 마침내 그들이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지식을 터득했을 때, 하나님 찾기를 중단하고, 그 전통 속에 정착한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그들에게는 '순전한 복음'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기도만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종교적 공식에 묶여 충실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 속에 성실히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탐색해야 한다고 분명히 언급하셨다.

 

  탐색에는 기계적인 절차가 없다. 탐색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5장 37-39절에서 하신 말씀을 상고해 보자.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망가지리라. 그러나 새 포도주늘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만 하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이는 그 사람이 말하기를 묵은 것이 더 좋다 함이라고 하시더라"(새성경).

 

  낡은 포도주에 익숙해진 사람은 즉시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습관적인 패턴과 중독성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요 단어는 '즉시'다. 우리로 하여금 새 포도주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낡은 포도주를 비워 버리고 새 포도주를 받을 수 있게 메마른 시기를 통과하도록 우리의 안전 지대를 깨뜨려야 하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아무것도 마실것이 없으면 심한 갈증을 느낄 것이고, "나는 이 포도주를 원치 않고 묵은 포도주를 원합니다"라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갈망한다면, 삶과 사역에 성령의 새로운 운동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당신은 광야의 시절에 대해 다윗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1-2).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갈증을 느꼈다. 그 결과 모든 일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한 사울 왕과 달랐다. 다윗은 소명을 받은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유연할 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했던 복음 전파 사역은 플로리다에서 청년부 목사를 한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청년부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두 개 주에, 주말마다 400만명 이상이 시청할 수 있는 두 개의 TV 방송국을 통해 복음을 전파했다. 또한 플로리다 중부 지역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일반 라디오 방속국에서 복음 전파하는 시간을 맡았다. 모든 거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청년부 목사직에서 해임될 것이고, 나는 너를 미국 동쪽 해변서부터 서쪽 해변까지,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국경까지, 알래스카와 하와이까지, 여러 교회와 도시로 보낼 것이다."

 

  성령님은 계속해서 성령님의 다음 사역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아내에게 말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 둘은 그것을 마음속으로 숙고했다. 성령님은 자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도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18개월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나중에는 불가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청년부에 가졌던 비전도 사라져 갔다(묵은 포도주가 비워지고 있었다). 내가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비전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밖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안에서는 갈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기억나는 모든 죄를 자백했지만, 내가 겪고 있던 메마름은 해갈되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지은 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고심하고 있을 때,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광야에 있는 것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올 변화를 위해서 너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나는 청년부 예배 전에 몇 시간씩 기도하곤 했다. 그리고 두 번은 설교할 다른 사람을 구하시라고 하나님께 애걸하기까지 했다. 내가 청년부 예배를 인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마치 담요와 같이 나를 덮었지만,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순간부터 다음 주일까지, 하나님의 임재는 떠났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그런 내적, 외적 시련들을 통과했다.

 

  이런 광야 생활을 1년 정도 보낸 후에, 하나님은 금식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약 일주일 정도 금식한 후에, 내 입에서 나와서 내 귀로 들은 기도가 있다. 그것은 내 생각을 통하지 않은 내 마음의 외침이었다. 

 

  "주님, 제가 한 사람도 없는 광야의 한가운데에 있든지, 수백만 명 앞에서 설교를 하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어떤 곳에서든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원할 것입니다."

 

  그 순간 갑자기 깨달아지면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보았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 그것이 바로 당신이 내 속에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주님을 사역이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유업이요 나의 첫 사랑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찾아왔을 때, 나는 사역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첫 사랑이신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바로 서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는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상기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

 

  사울은 자기의 사역을 사랑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다윗은 왕좌를 추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광야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을 기회가 있었고, 또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만약 다윗의 동기가 사울과 같았다면, 다윗은 사울을 죽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얻기 위해 중상 모략하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거짓말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사울의 계열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사역을 지키기 위해서 죽이거나, 사역을 얻기 위해서 죽이는 일들을 한다. 

 

  하나님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다윗'을 찾고 계신다. 성령의 새 포도주의 압력(성령의 기름부음과 임재)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인격은 우리가 닮아가고 싶은 사람을 추구함으로 계발되는 것이다. 

 

  변화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약 6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 회의를 하고 있는데 담임 목사님이 들어오셔서, 부목사들(당시 열 명의 부목사들이 있었다) 중에 한 사람은 곧 전임 순회 사역을 할 것이고, 더 이상 부목사로 사역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은 "존 비비어,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말했다.

 

  두 세달 후에, 불과 3주 동안, 나는 일곱 번의 설교 초청을 받았다.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 멕시코 국경 근처에서, 동부 해변 지역에서, 캐나다 국경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서, 그리고 다른 세 지역.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담임 목사님께 상의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보여 주셨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당신의 때가 온 것 같소."

 

  얼마 후에 담임 목사님은 나와 아내에게 안수해 주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전임 순회 사역을 해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18개월 동안 광야에서 우리 삶과 사역에 일으키실 변화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켰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런 사역에 대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을 내 속에서 계발하셨다. 이사야 43장18-19절을 읽어 보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길이 없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악화되는 것 같은 광야에서 이 사역을 탄생시켰다. 하나님께서 낡은 포도주를 버리시고, 새로운 것이 오고, 시련이 새로운 것을 강타할 때, 당신은 낡은 것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변화를 위해 우리가 준비되도록 광야를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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