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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청년회

불교개혁·사회 운동 둘이 아니다

작성자관세움|작성시간15.02.22|조회수138 목록 댓글 0
“불교개혁·사회 운동 둘이 아니다”
[전문] 민불련 30주년 기념 좌담회 ①창립배경

 

한국현대불교사에서 사회민주화와 불교개혁에 큰 발자취를 남긴 민중불교운동연합(이하 민불련)이 2015년 5월 4일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민불련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불교개혁운동에 참여했다. 우리 사회와 불교 내부에 끼친 궤적은 한국불교 현대사, 특히 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고리다. 94년 종단개혁이 가능했던 것 역시 민불련의 활동과 경험이 축적된 데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불련은 민중불교운동을 위해 뭉쳤다. 민불운동의 정신은 현재도 여전히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불자회(구 민중불교운동모임, 대표 서동석)이 지난 12일 불교여성개발원 교육관에서 민중불교운동 활동과 계승, 그리고 시대적, 불교적 과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민중불교운동연합에서 활동한 인물은 승·재가를 막론하고 우리 불교계 내부에 다양하다. 재가로는 종단과 불교개혁을 염원하는 재가불자 그룹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김경호 바른불교 재가모임 공동대표도 민불련 출신이다. 교계단체를 맡아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제도권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승가 역시 마찬가지다. 현 교육원장 현응 스님도 민불련 출신이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도 민불운동을 후원했다는 증언도 있다.

민주주의 불자회(구 민불동지모임)는 민불련의 활동을 지지하고 뜻을 함께 하는 일반 시민대중들과 불교 개혁, 청정승단 구현, 사부대중공동체 실현, 민주사회를 위한 사회적 실천과 기여, 소외된 이웃과 인권 문제 지원을 위한 제 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 회원 상호간의 교류와 정보나눔 등 지속적이고 실현 가능한 활동을 모색할 예정이다. 1980년대 민불련이 추구했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탓이다.

민중불교운동연합 30주년을 맞아 열린 좌담회 내용을 창립배경과 노선과 활동방향, 민중불교운동 정신계승과 향후 방향 등 3회로 나눠 전문을 소개한다. 민주주의불자회는 5월 4일 창립 30주년을 즈음해 세미나와 토론회 등도 준비하고 있다. 민불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앞으로 불교운동, 그리고 사회운동을 어떻게 설정하고 조직화할 지를 고민하는 자리다. 좌담회는 이남재(전 민불련 3기 조직국장, 현 민주주의 불자회 사무총장) 씨의 사회로, 서동석(전 민불련 3기 의장, 현 민주주의 불자회 회장), 연담 스님(전 민불련 1기, 현 조계종 제주 천제사 주지), 김영국(전 대불련 회장, 전 민불련 기획국장, 현 ‘연경’불교정책연구소 소장), 이용성(전 민불련 2기 조직부장, 현 (사)풍경소리 사무총장), 김경호(전 민불련 3기 기획위원장, 현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씨가 참석했다. 유승무(현 중앙승가대 불교사회학과) 교수도 참석해 민불련에 대해 평가했다. <편집자 주>

사회자(이남재)-민중불교운동 30주년을 맞았다. 시대적 불교적 과제는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민중불교 정신을 이어 우리 사회 불교종단에 어떤 기여 역할하고 목소리내고 행동할 것인가. 민불련 1기 2기 3기에 활동한 분들을 모셨다. 또 사회학자로 담론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유승무 교수 모셔 평가와 정리도 부탁드린다.

오늘 좌담회는 민불련은 왜 창립되어야 했나? 1, 2, 3기 활동 노선 정책 방향을 점검하고,노선과 견해 달리해, 대선 국면에서 입장을 달리해 갔던 측면도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할 부분이다.

활동 성과와 끼쳤던 영향들 -출재가 단체들의 태동에서 민불련 성과와 한계도 짚어보고자 한다. 민불련은 어떻게 보면 전위조직이었다. 대중조직으로 가지 못한 한계도 짚어봐야 한다. 또 후학들에게 민불운동 정신이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고, 불교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전망과 참여방안도 모색이 필요하다.

우선 오늘 참석한 분들을 소개한다. 먼저 연담 스님을 소개한다. 민불련 창립에 스님으로서 단지도 하며 군사독재에 항거한 온 몸으로 실천했던 분이다. 당시 법명은 성연 스님이다. 현재는 연담 스님이다. 현재 제주 관음사 말사 천제사 주지다.

서동석 대표는 민불련 3기 의장을 했다. 두 차례 투옥. 젊은 시절을 국립선방서 많은 시간 보냈다. 민불동지회 이름을 시대에 맞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 불자회로 이름을 바꿨다. 서동석 의장이 대표를 맡고 있다.

중앙승가대 유승무 교수는 이론은 실천서 검증되고 상호 발전된다. 이론뿐 아니라 실천에서 과제와 담론을 형성하는 사회학자다.

대불련 활동, 동국대 학생회장 총무원장 종책특보를 지냈고 평생 불교개혁과 불교운동 지평 여는 데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김영국 연경불교정책연구소장도 참석했다.

민불련 2기 조직부장을 했다. 참 신행과 실천에 모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하철에 법음을 전달하는 풍경소리 이용성 사무총장을 모시겠다.

민불련 3기 기획위원장을 했다. 총무원에서 근무했고, 아동작가로, 새로운 불교운동 담론을 만들고, 지지협동조합 만들어 불자들이 생산적이고 공동체적 삶을 형성하는 원력을 보이고 있다. 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을 모신다.

저(이남재)는 민불련 3기 기획국장을 지내고 조직국장도 했다.

서동석-조직국장 아니었나?

김경호-당시 우리 보다 저쪽의 공소장 내용이 더 정확하다. (웃음)

이남재-89년 민불련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구속돼 1년 6개월 복역했다. 그 뒤 1994년 개혁때 총무원에 들어갔다. 종단협서 활동하며 달동네에서 청소년 시설도 하나 하고 있다. 국제구호 단체인 지구촌공생회 사무총장하고, 나눔의집 사무총장도 하고 복지 쪽 일을 해왔다. 위드아시아 운영이사를 맡고 있다. 민주주의불자회(구 민불동지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좌담자를 소개해 드렸다. 창립 배경과 노선 및 방향, 활동성과와 한계, 민불운동 계승과 전망으로 이야기를 나눠가겠다.

이남재-창립배경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연담 스님이 창립 당시 스님들 참여 배경을 먼저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

  
▲ 민중불교운동연합 30주년 기념좌담회. ⓒ2014 불교닷컴


중앙포교연구회…민불련 승가 참여 계기

연담 스님-창립할 때 승가 쪽 참여시키는 역할을 했다. 재가 쪽 입장은 다른 분이 말했으면 좋겠다. 스님들이 민중불교운동연합에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여건은 민불련 전에 승가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스님들에 의해서 꾸준히 의지를 모아서 중앙포교연구회를 발족시켰다. 거르고 걸러서 18명이 가입했다. 회원 중에 서울민통련 발기인으로 대거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스님들이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때라, 장기표 선생 김근태 선생 등이 놀랄 정도로, 산 속에만 있던 스님들이 민통련 발기인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 뒤에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창립할 때 스님들과 재가가 하나로 뭉쳐서 했다.

서동석-중앙포교연구원이 1984년 쯤인가요?

연담 스님-명칭을 신불회라고 생각했었는데, 성격이 너무 드러나 포교를 위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공부하고 모인다고 해왔다. 1983년부터 했다.

서동석-비상 종단이후인가?

연담 스님-화순 만일사 주지 하다가 80년도 가서 1년하고 있을 수 없어서, 젊은 스님들이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승가대학에 들어가 작업하기 시작했다.

서동석-승가대 몇 기가 중심이었죠?

연담 스님-83학번 5기가 중심이었다. 교육시설이 다변화 되지 않고 해서 스님들 생활로 10여년 한 분부터 엊그제 출가한 사람까지 재교육 또는 현대불교학 배우려 모여들었던 때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서동석-참고로 1980년 광주항쟁 때 현장 때 계신 분이고, 도청 앞 분수대서 대중연설한 분이다. 당시 증심사 있다가 도반과 부처님오신날 준비하러 광주 왔다가 같이 온 스님은 총상에 척추가 나갔다. 그 이후 광주에서 탈출해 봉선사에 은신해 있다가 민불련을 만든 주역 중에 한 분이다.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 창립, 사회운동·불교개혁 둘이 아니다

김영국-승가부분 이야기하셨다. 재가 입장에서는 대불련을 중심으로 1982년 대불련 전국지도법사단을 만들었다. 형식은 대불련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단이지만, 출발은 불교개혁을 해야 한다. 1980년 10·27법난 이후 불교 상황이 암울했었다. 국보위에 의해 종정이 임명되고 총무원장이 만들어지고, 전두환 정권이 만든 정화중흥회의체제가 이어졌다. 1982년엔 총무원장 4명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불교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여익구 의장이 대불련 사무총장으로 와서 종단과 불교를 개혁해야겠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1983년도에 중앙승가대, 전국학인승가연맹, 대불련, 대불청 청년들이 모여서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를 결성했다. 7월 17일이었다. 마침 8월에 신흥사 승려살해사건이 발생해 이를 계기로 불교개혁 앞당기자고 해 구종법회가 시작되고 비상종단이 만들어졌다. 비상종단이 만들어진 후 8개월 만에 당시 보수적 신도 스님에 의해 비상종단이 와해됐다. 청년불교도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망이 보이지 않는 썩은 불교종단에 가서 활동해야 하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전두환 정권이 유화정책으로 학원자율화하고 학생을 대거 석방하는 상황에서 과연 불자들이 불교라는 작은 틀에 갇혀야 하나 등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최석호(법륜 스님) 법사 중심으로 하는 쪽은 수행중심으로 가야 한다. 사회운동보다 수행으로 불교를 바꾸자고 했고, 대불련은 사회운동과 불교개혁이 둘이 아니다는 생각에서 여익구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면서 대거 참여했다. 창립배경은 지금도 그렇지만 치열하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치열하게 논쟁하고, 그런 와중에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종식하는 게 바로 불교개혁이고, 사회개혁이 불교개혁이 다르지 않다는 차원에서 민불련 창립에 대거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민불련이 대중조직이 아니라지만 불교계에서는 공식적으로 민중불교를 내걸고 조직을 공개적으로 만든 것이다. 운동조직으로는 상당히 의미 있는 대중조직이었다고 본다.

  
▲ 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 30주년 기념좌담회. 왼쪽부터 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이남재 위드아시아 사무총장, 이용성 풍경소리 사무총장ⓒ2014 불교닷컴

민불련, 우리 사회 진보진영서 위상 분명했다


김경호-덧붙이자면, 시민사회의 투쟁 역량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군부독재가 기존 방식으로는 한국사회 컨트롤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일종의 완화책 유화책을 열게 된다. 학원으로 보면 학원자율화 조치가 되고, 1983년 비상종단이 와해됐지만 사실 불교 내적으로 성숙한 조직적 역량이 있었다. 승가적 역량, 대불련 불교사원화 운동 영향이 계속 형성돼 왔다. 비상종단이 와해되지만 불교사회문화연구소에서 여익구가 나와 여러 사람이 연결돼 구로동 자비포교원 등에서 자비신앙운동을 했다. 비합법 투쟁을 하던 운동 역량이 전위조직 형성으로 전환하고 민청련이 등장하고 민통련이 등장했다. 각 부분 운동이 건설되는 붐일 일어났다. 민족문화운동 결성한 후 불교 쪽도 하나의 축으로 나가자는 내외 압력이 있었다. 시기상조론도 있었다. 우리 역량이 부족하다. 고은 선생은 회의 때 ‘우리는 국제백도 없으니 살살하자’는 우스개 소리도 했다. 불교가 역량도 부족하고 역사도 일천했지만 과감히 치고 나갔다. 그것이 민불련 건설로 이어졌다. 조직건설로 볼 때 한국사회 진보운동 진영에서 서열이 높다. 먼저 저질러서 박살나긴 했지만,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의식 가졌던 승려가 척결대상이 된 것이 비극

서동석-1985년 5월 4일 민불련이 창립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1983년 신흥사 사건 나서 이를 계기로 모아진 젊은 승려와 종단 현실을 우려하고 불교의 사회역할을 고민하는 분들이 모인 게 소중한 자산됐다. 시대적 요구와 내부 역량이 모아지는 계기가 됐다. 불교사회문제연구소(불사연) 단위가 나름대로 고민들, 불교계 활동하거나 불교신자로 사회운동 하던 경험과 역량이 모여 민불련 만들어졌다. 민불련 이전 자산도 소중하다. 현 총무원장(자승 스님)도 회원이기 했다. 재가자 중심 연구소도 있었지만, 민족불교연구소라고도 있었다. 성문 스님이 비상종단이후에, 현응 스님(현 교육원장)이 있었다.·현기·자승 스님도 심부름 했었죠.

김경호-민족불교연구소는 조직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민불련을 건설하는 데 민족불교연구소가 승가 조직, 재정지원 등도 했었다. 당시 젊은 승려들이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 흘러 기득권 되면서 척결대상이 된 것은 우리 불교현대사의 비극이다.

서동석-1985년 이후 1994년까지, 젊은 소장 스님들이 94년 개혁불사 후 종단 중앙에 자리 잡으면서 시절이 하수상해 졌다. 당시 생각하면 진취적이고 불교 종단 한국사회를 걱정하는 세력들이었다.

  
▲ 민중불교운동연합 30주년 기념좌담회. 유승무 교수와 김영국 소장.ⓒ2014 불교닷컴

김영국-기독교 가톨릭은 70년대 활발히 운동했다. 불교는 활동이 약했다. 도시산업선교회 등 기독교 조직은 탄압을 세게 받아서 활동이 위축된 상황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불교계가 재가신도만이 아닌 스님들이 대중조직으로 뭉쳐서 대중투쟁조직을 만든 것이 상당한 큰 불교가 나서는 구나, 많은 비판도 있었지만 민중불교 여익구 선배가 낸 책으로 이념적인 논쟁도 있었다. 그 이전에 사원화 사건,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이 축적으로 조직이 만들어 졌다. 민불련 창립당시 인사동 밑 5층 건물 꼭대기에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정치권이나 다른 운동단체서 민불련에 많은 요청을 해왔다. 인원동원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힘이 약한가 라고 생각했지만, 투쟁 때 인력동원 요구받기도 했다 . 투쟁조직이나 야당 정치인들은 불교라는 상징성 때문에 우리 조직을 많이 필요로 했다. 김대중 김영삼도 민불련 사무실 와서 같이 연대를 이야기했다. 그런 상황 보면 초창기 상당한 조직이었다.

민불련 투쟁 경험이 94년 개혁 바탕 형성

이용성-긍정적 측면만 보신 것 같다. 당시 보면 저는 1986년부터 민불련과 관련됐다. 1983년 비상종단 끝난 후 강직으로 군대를 가고 86년 1월 제대해 다시 활동했다.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민불련 파견인원으로 합류해 일했다.

  
▲ 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 30주년 기념좌담회에 참석한 서동석 전 의장과 연담(성연) 스님.ⓒ2014 불교닷컴

그때 느낀 것들이 민불련 창립이 70년대부터 민불연구회라는 것부터, 80년대 전두환 정권 들어서 자생적으로 생긴 대불련의 변화들, 자연발생적 조직이 있었다. 민불련 창립 전까지 뚜렷한 투쟁 경험이 없었다. 필요는 안에서 용솟음 쳤지만, 구체적 투쟁으로 보이지 않고 , 있었다면 사원화 사건 등 탄압받은 사례들이었다. 자체적으로 투쟁 조직이 되지 않았던 때, 84년 유화정책이 되고 재야단체들이 각 부분별로 생기고 공간들이 열렸다. 욕구들이 결집하기 좋은 조건이었지만, 민불련이 투쟁이나 싸움, 조직한 경험이 없었다. 연대장에 나갔을 때 내용적으로 불교가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불교참여를 정치권이 바라고 요청했다는 것은 자체 역량이 많았다고 오해한 게 아니라 실제 그림이 좋았다. 스님들이 와 달라 요구도 많았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같이 하려던 연대의 손길이 있어 경험이 축적되고, 이 축적이 94개혁 때 효과적 조직을 구성하고 성취할 수 있었던 노하우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국-투쟁 경력이 없다는 데, 그건 잘못 안 것 같다.

이남재(사회자)-그 부분은 앞으로 노선 방향을 다룰 때 이야기하기로 하시죠.

10·27법난, 승가 사회운동 나서는 계기돼

유승무-그런 맥락에서 배경을 불교내부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로 확장하면, 우리사회뿐 아니라 남미나 일반사회로 보면 공적 문제를 책임지는 것은 국가나 정부 기구의 역할인데, 그 기관이 공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야당이 있지만, 대부분 독재겪은 나라들은 야당도 부패하면서 주로 사회운동 양상으로 표출되는 데, 학생운동과 종교개혁운동이 공적 영역에 관심 갖고 참여하게 된다.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고 공적 영역을 대변해 주기를 대중이 기대하는 요구가 있다. 한국사회가 70년대 80년대가 바로 그런 국면이었다. 이승만부터 형편없었지만 극단으로 된 것이 박정희 통치기간도 그랬고 시원찮은 정부가 지속되더라도 전쟁 후유증 등 이유로 그 이전까지는 이슈가 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이 학생운동 중심으로 일어나고 가톨릭농민회 등 종교계서 목소리내고 한 것은 대단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국가와 정부가 공적기능을 하지 않고 사익 취하고, 민중과 민주주의 본의를 이탈할 때 목소리 낼 자유로운 조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류 역사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배경이 70년대 80년대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생운동, 종교계 운동들이 탄생하고, 불교는 극적으로 10·27법난을 경험해 보고, 폭력기구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자각하는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학생운동이나 가톨릭 농민운동 등에도 불교는 잠잠하고 관심 없었는데, 실체를 온 몸으로 느낀 게, 10·27법난 때 법당에 군홧발로 막 들어오고, 그런 것이 실체를 확인하는 데 소중한 경험이었고, 스님들이 자각을 한 일차적 충격이 총칼 들고 들어오는 등 폭력성을 경헌한 것이 승가 반성과 자각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본다. 재가나 학생운동은 캠퍼스마다 흐름이 있어 자연스럽게 의식이 형성돼 왔다.
80년대 기점으로 승·재가서 자각이 일어나고 공적 문제를 이슈화하고 관심 기울인 흐름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고 운동적으로 큰 자산이 된 것 같다.
요약하면 운동세력 잘 한 부분도 있지만 국민을 대변할 국가 등 공적 기관이 심각해 조건들이 창충됐고 개입할 정치적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그때 참여하고, 제도종교를 벗어나 공적 영역에 관심 갖는 종교운동이나 힘들이 만들어 지는 지점이 70년대 80년대 인 것 같다.

'민불련 30주년 기념 좌담회 ➁ 노선과 활동방향은' 기사로 이어집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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