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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청년회

[스크랩] *... 마음을 닦는 인간의 행렬 1/4 [태을금화 8장 발췌]

작성자내안그분|작성시간18.09.30|조회수50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직역본금강경 날개를 펴다.pdf

    


*... 마음을 닦는 인간의 행렬 1/4 [태을금화 8장 발췌]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길을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힐 뻔하였다.
옆에 지나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는 ‘전봇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어리석은 사람이 깜짝 놀라 전봇대 앞에 섰는데
거기에는 불조심이란 팻말이 붙어있었다.
그러자 불조심을 가리키며 전봇대라고 말했다. 


얼만큼 가다보니 전봇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산불조심’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그러자 그는 팻말을 가리키며 ‘또전봇대’라고 말했다.
또 얼만큼 가다보니 전봇대에 ‘담배불조심’이란 팻말이 붙어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팻말 앞에 서서 한자 한자 가리키며 말했다. ‘또전봇댈걸’ 


눈이 먼 사람은 귀도 온전치가 못하다.
왜냐하면 보이질 않으므로 말로만 들어서는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한 때문이다.
태생부터 맹인에게 파란 하늘이란 말을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귀먼 사람도 마찬가지로 사물을 볼 순 있지만 그 용도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직접 시현하며 보여주어야 한다.


이처럼 눈과 귀가 한 묶음이 되어 움직이므로
어느 한 쪽이 망가졌다면 다른 한 쪽도 온전할 수가 없다.  

세상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맞물려 돌아가듯
음양의 조화를 통해 움직인다. 해가 N극이라면 달은 S극이고,
남자가 N극이라면 여자는 S극이다. 행복이 N극이라면 불행은 S극이고
번뇌가 N극이라면 해탈은 S극이고 중생이 N극이라면 부처는 S극이다. 
둘은 제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N극과 S극을 한 묶음으로 보질 못한다.
그것이 고통의 시작이다. 



*... 마음을 닦는 인간의 행렬 2


아무리 내가 원하는 한 극단만을 취하려 해도
어느 틈에 다른 극단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을 찾아 나선다.
마음만 정복하면 모든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그 마음이 N극이라면 찾아 헤매는 마음은 S극이다. 


둘은 결코 동떨어진 무엇이 아님은 알 때만이 우리의 방황은 멈춘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그것을 성취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N극과 S극을 잘라내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취하고자 하지만
잘라낸들 번번이 생겨나는 것이 N극과 S극이다. 


인간에게 깨달음이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마음 깊이 누구나 원함은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의 늪에서 건져 올리고 싶고,
맑고 향기로운 연꽃처럼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지니고 있다. 


사실 깨닫고자 하는 것은 안 죽고
병 안 걸리고 안 늙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깨달아도 변하는 바가 없다.
또한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고
즐거움과 행복만이 내 앞을 서성거리도록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즐거움과 행복 앞에서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깨닫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마음을 문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마음을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될 일은 없으며
이 마음을 버리고 저 마음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은
그러기 위해서는 집착심이 떨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욕망과 분노를 불러들이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집착을 떨치려면 세상이 무아와 무상으로 이루어져
공하다는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 



*... 마음을 닦는 인간의 행렬 3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즐거움에 탐닉해 있다면
참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기란 불가능하다.
즐거움을 누리기에도 부족한 삶인데 말이다.
그래서 고통이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한다.
따라서 구도자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고통과 죽음이다.


삶이란 생로병사의 거친 파도가 쉼 없이 몰려드는 망망대해에서
돛단배 한 척으로 바다를 헤쳐 나가는 힘든 여정임을 실감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문제인 마음을 문제 삼지 않기 위해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는 도전 정신이 없다면
마음은 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면서도
마음에 관한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를 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되어 가려는 것과 같아서 국화가 장미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의 입장에서 보면 온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이란
본성 외에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은 그림자와 같고, 인연의 결합으로 생겨난 허깨비와 같다. 

그런 까닭에 본성과 별개로 존재하는 마음이란 없으며
마음이란 본성의 나타남이지만 본성을 알지 못한 탓으로
마음을 진실한 무엇으로 여긴다는 것은
인간을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국화도 없고 장미도 없는데도
되어가려는 것은 국화와 장미의 개별적인 실체를 모두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노력이란 무명이며
무명을 통해서는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설 수가 없다.
더구나 일승법을 무명으로 남들에게 가르치며 이끌려는 것은
큰 허물이며 과보를 짓게 됨이라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지녔더라도 무명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도 잘못된 것이며,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이 들어서려면
땅도 하늘처럼 부서지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땅도 확실한 뿌리로써 연결되어야 한다. 




*... 마음을 닦는 인간의 행렬 4


땅은 뿌리 없이 허공에 한 점 티끌처럼 둥실 떠있을 뿐이니
하늘과 땅을 말미암아 생겨난 개념이란 허망함이며
따라서 어떤 개념이라도 인정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무명이다.
붓다는 영원불멸의 아트만을 인정하거나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집단을 외도라고 부른 것이다. 


무엇을 믿건 어떤 종교를 따르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닦는 구도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는
무명의 개념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은 잘못된 노력에 발을 내딛게 된다.
목적이 달라붙지 않도록 향 한 자루 탈 정도만 좌선하며
행주좌와에서 잘못된 개념에 들지 않게끔 마음을 한 점에 고정시키고,
숨 안 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흡과 맥박에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눈여겨 지켜봄이 가장 최선이라 할 것이다.  


인간은 끝없이 마음에 도전하고 있으며 세상 끝나는 날까지
마음을 정복하기 위한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나갈 것이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의 첫걸음은 모든 것은 한 묶음이기에
존재할 수 있음을 터득해야 한다. 


나를 나라고만 보고 남을 남이라고만 본다면
내가 하는 말에 남은 영향 받지 말아야 하며,
남이 내게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싫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만일 참으로 나와 남이 별개로 존재한다면
남이 싫은 소리를 한만큼 나도 그만큼 퍼부으면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더 많이 퍼부었어도 마음이 억눌린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N극과 S극처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없음의 비밀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를 주장하려는 아상이 깊을수록 세상에서의 고립은 심화될 뿐이며,
마음은 더욱 문제를 일으키기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http://www.bookk.co.kr/chmoo22?page=1&  무각명상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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