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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눈물과 영부인♡

작성자定久|작성시간13.02.05|조회수25 목록 댓글 0

                                             ♡국민의 눈물과 영부인♡

 

♡국민의 눈물과 영부인♡

2008-12-15. 김진(중앙일보 논설위원)

 

1960~70년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은

육영수 여사였다.

자신이 총에 맞아 죽은 74년 8월 15일,

육 여사는 남편에게 말했다.

 

“왠지 오늘은 행사장에 가고 싶지 않네요.”

아내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소리냐며 등을 내리쳤다고 한다.

영부인이 죽은 후 언론엔 민초(民草)의 추억이 실렸다.

 

 

“71년 초여름의 서울 명륜동 판자촌.

좁고 지저분한 골목을 끼고 비탈길을 30분이나 오르면

산중턱에 쓰러질 듯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남편을 잃고 떡장수로 억척같이 살던 홍연례 할머니는

위장병으로 몇 해나 몸져누웠다.

 

방 안엔 병자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곳을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사람은 육 여사였다.

할머니는 북받치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여사는 반 시간을 머물렀다. ‘용기를 잃어서는 안 돼요.

꿋꿋하게 이겨나가야 해요’.”

 

 

“68년 여름은 호남 일대에 가뭄이 극심했다.

광주는 식수조차 마시기 어려웠다.

육 여사는 도지사 관저에 조석(朝夕)으로 전화,

마음이 불안하여 숭늉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으며

세수도 못하겠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직접 광주로 나들이를 하였다.

지사 부인의 안내로 가장 한발이 심한

나주 공산면 화성리 마을로 갔다.

논바닥이 발이 빠질 정도로 쩡쩡 갈라져 있었다.

 

 

여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정부에서 굶기기야 하겠느냐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말라버린 웅덩이에 걸려 있는

양수기를 직접 돌려보며 혼자 울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지사 부인에게서 나는 듣게 되었던 것이다.”

유신독재 시절이었으므로 언론에 육 여사의 미담만

다소 부풀려 실렸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육 여사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았던 일에 대한 증언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포털이 육 여사를

‘사회사업가’라고 묘사할 정도다.

육 여사는 64년 각료 부인들과 함께

양지회 라는 봉사 모임을 만들었다.

 

어떤 부인은 모임을 남편을 위한

로비 창구로 활용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작은 것이고,

양지회는 지도층 부인들이 공동체를 위해

일했던 기구로 기억되고 있다.

 

 

30~40여 년이 지난 지금 양지회 같은

단체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기부·자선·봉사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조금의 연(緣)이라도 권력과 연결하려는

풍조가 있는 마당에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양지회가 있건 없건 중요한 인물은 영부인이다.

 

  

[글, 옮김, 編: 定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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