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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작성자定久|작성시간13.11.01|조회수15 목록 댓글 0

                        ♠“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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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2011-10-24>

 

우리 나이로 올해 82세인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은 풍채가 당당했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비서관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그는

‘인간 박정희’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김종신씨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돌아본 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이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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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나시스가 된 기분입니다”라고 하니 무척 좋아했다.

대통령은 김씨의 표현이 맘에 들었던지

주변 사람들에게 고속도로 얘기를 할 때마다 그걸 언급했다.

“고속도로 자체보다 그것이 국민에게 희망을 준다는 데

더 기뻐한 거지. 대통령은 정말 고속도로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헬기로

공중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 대한뉴스 캡처

5.16 당시만 해도 수출이라곤 오징어밖에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에. 박 대통령은 어릴 때

가난하게 산 것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래선지 머릿속에 잘살아 보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김종신씨가 지켜본 바로는

박정희는 결코 친미주의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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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과 국방력 강화에 미국의 도움이 필요해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오히려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군 시절 친미사대주의에 젖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그는 영어를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김씨는 박정희가 미국에 아부하는

장교들을 비판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우리 군대는 우리 국민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우방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거다.

원조를 받더라도 배짱을 튕기며 받아야지

왜들 꼴사납게 꼬리 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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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미국의 원조 물품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양담배와 성냥개비, 양초가 우리한테 무슨 큰 도움이 되나.

원조를 제대로 하려면 비누공장을 만들어줘야지.

언제까지 얻어먹고 살 건가. 빨리 자급자족해야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부산을 찾았을 때다.

동래의 한 호텔에 묵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미국인 사업가를 소개했다.

미국 총기회사인 콜트사 사장이었다.

총 팔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통역을 통해

그의 얘기를 듣고 나서 박정희가 짧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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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경만 사겠다.”

낙담한 콜트사 사장이 돌아간 후 박정희는

김종신 비서관을 비롯한 주변 참모들에게

“조준경만 있으면 우리 손으로

총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1975년) 단행된 개각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된

최규하씨가 화제에 올랐다.

김씨는 기자 시절 외무부장관이던

최씨와의 인연을 끄집어내며 “정말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박정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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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피곤하다. (대통령) 넘겨줘야지.

원래는 김종필한테 넘기려 했는데 너무 설쳐대서

최규하한테 넘겨주려 한다.”

“대통령은 아무나 합니까?.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그의 아부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그는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사장을

그만둔 후 더는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골 생활을 즐기며 독서와 집필로 세월을 보냈다.

한때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전철을 타면 박 대통령을 생각하고 자세를 반듯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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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게 영광스럽고 고맙다.

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박정희 대통령 모시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하고 또 일했다’고 말하겠다.”

그는 박정희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내(기자)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방에서 사진더미를 들고 나왔다.

사진 설명을 하는 그의 표정에서 종교적

신념 같은 희열이 엿보였다.

 

[글, 옮김, 編: 定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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