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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의 꿈♠(2)

작성자定久|작성시간14.01.19|조회수25 목록 댓글 0

                       ♠문경새재의 꿈♠(2)

 

♠문경새재의 꿈♠(2)

<2008-08-12>

 

돌이켜보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근대화에 몸살 나게

열정을 받쳤던 것은 ‘역사의 조바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남들이 뛰어갈 때 세상모르고 잠자던 뒤늦은 역사에 비로소 눈을 떴고,

 

아득히 앞서가는 나라들, 행복하게 잘사는 나라들을 따라가자면

그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야 한다는 조바심이

‘근대화의 심장’에 불을 당겼으리라.

 

 

가난은 굴욕이고, 가난에는 인권도 없고, 가난하면 국가도 없어진다는

역사의 아픔이 골수에 사무쳤기 때문에 ‘잘살아 보세’를 외쳤고,

‘하면 된다’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부추기면서 ‘빨리빨리’

가자고 지도자는 다그쳤다.

 

1960년 후반, 이웃 나라 중국 대륙에 고속도로가

한 뼘도 없을 때 산지가 7할인 이 작은 나라에 가당치도 않다는

고속도로를 닦으면서 대통령 박정희는 자동차를 만들자고 했다.

실가는 데 바늘 가듯이 자동차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의 자동차 생산계획 발표에 업계는 놀랐고,

교수와 지식층에선 후진국이 무슨 자동차냐고 반대했다.

대통령은 한술 더 떠 ‘1가구 1승용차’의 미래를 예고했지만

그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도 자가용을 마련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국내에서 자동차를 개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집에 자가용 한대씩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현대건설 정주영에게 던져둔 말이 있다. “당신이 길을 열어야 해.”

 


 ▲박 대통령은 1978년 11월 24일 40년 전 교편을 잡았던

문경국민학교를 찾아가 옛 제자들과 손을 잡

교정을 거닐며 정담을 나누었다. ⓒ 국가기록원

 

이 말을 덤짐으로써 자동차회사(현대차)가 생기고

국산 고유 모델의 자동차(포니)가 그로부터 8년 후에 탄생했다.

이후 자동차산업은 국가경제를 살찌우는 효자산업으로

급속 성장했으며 한국을 세계에 어깨를 겨루는

자동차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느 날 딸 박근혜가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낙관주의자세요, 아니면 비관주의자세요?”

“나는 현실주의자야. 그러나 나에게도 이상은 있어.” 거창하지 않고,

딸 앞에서도 약간은 쑥스러운 듯 소박하게 다듬어내는 말이

부녀간의 살가운 대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 “미국 사람들은

자동차를 한집에서 한대씩 갖고 있고…

”라며 우리도 잘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던 선구자의 꿈.

지도자는 홀로 꿈꾸지 않는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에게 꿈을 심어주고

보람의 열매를 주고 나라를 일으킨다.

 

박정희는 염력(念力)의 마술사처럼 온 국민에게 꿈을 심어 주었다.

꿈의 미래를 보여주고 이 나라를 그림처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978년 박정희는 문경새재 옛길을 찾았다.

새재의 제3관문인 조령관에서부터 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를 걸으며 식민지 시절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팔을 불던 추억을 회상했다.

 

 

 그때 그는 그곳에 차량통행을 금지시키고

도로포장을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지금도 문경새재 옛길은 자연의 호흡이

살아 있는 황톳길로 남아 있다.

 

그가 1937년부터 39년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하숙했던 집도

말끔히 단장되어 보존되어 있다. ‘청운각’이라고

이름을 붙인 25평 규모의 초가집이다.

 

 

 그가 쓰던 방에는 책상과 가방,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벽에는 사진이 걸려 있다.

매년 10월26일이면 제자들의 모임인

‘청운회’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글, 옮김, 編: 定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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