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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포을 아시나요.?(역사 바로잡기)

작성자심청정.|작성시간13.09.27|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고성에 와서 왜적과 싸운 고성의 첫 전투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적진포다. 향토사에 대해서 좀 안다고 하는 고성사람들도 당항포해전으로 알고 당항포해전만 기억을 했지 적진포 해전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고성사람들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적진포가 어디인지. 통영인지 고성인지 정확히 몰라서 그랬을 것이라고는 하나 옛 문헌인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대동지지)등을 통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곳인 적진포. 곧 지금의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옛 문헌의 기록을 찾아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로 가보자

먼저 적진포가 어디인지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다.(대동지지 大東地志) 전고典故에 보면

*일본구주 절도사 원료가 뒤에 승 신홍을 보내니 그가 와서 고성 적진포 즉 적진포에서

왜적 과 더불어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日本九州節度使源了 後遺僧信弘來與倭賊戰于 固城赤田浦卽積珍浦不克遂還其國)*는 기록에서 보듯 적전포 즉 적진포는 다른 곳이 아닌 고성이라고 명백히 밝혀 놓았다.

다음으로는 고성의 어느 곳이 적진포 인지를 밝히는 순서다. 이 역시 옛 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더듬어 보자,

積珍鄕 ;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積珍鄕 在縣東二十里)

-----------------------------(신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당동만 전경)

*남촌포보南村浦堡 : 동남으로 30리에 있으며 광해군 6년)에 현의 남쪽인 도선촌道善村에 세웠다가 11년에는 적진포積珍浦에 소모진召募鎭을 옮겨 세우고 남촌南村이라 칭하였다.

별장이 한 사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남촌南村 ;현 동쪽 20리에 있다.광해6년 갑인에 현의 남쪽도선에 진을 처음 설치하였다가 11년 기미에 현의 동쪽 적진포에 소모진을 이설하여 이로 말미암아 남촌이라 일컬었으며

별장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고있다.(新增)南村 在縣東二十里 光海六年 甲寅初設鎭于縣南道善 十一年己未移設 召募鎭於縣東積珍浦 因稱南村 差別將守之)----------- (여지도서)

남촌포보南村浦堡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으며 光海主6년(1614년)에 현의 남쪽 도선촌에설치하였다가 11년(1619년)에 소모진을 적진포로 이설하였으므로 남촌이라 한다.

별장 한삼을 두었다.(南村浦堡 東南三十里 光海主六年設于縣南道善村 十一年移設召募鎭於積珍浦 因稱 南村0別將一員)------------------ (대동지지 大東地志)

나열된 옛 기록을 정리를 하면 적진포는 고성현의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처음에 세운 남촌진은 현에서 동남으로 30리에 있는 도선에 설치를 했다가 이것을 현의 동쪽 20리에 있는 적진포로 이설했고 적진포를 남촌으로 부르고 별장 한 사람을 두어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적진포가 남촌이고 남촌이 곧 적진포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촌이라고 불리는 곳이 어디인지만 찾으면 그곳이 적진포 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밝혀지게 된다. 남촌(南村)은 어디였을까?.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를 예전에는 남촌이라 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신룡리 당동리 를 포함 인근 동해면과 통영시 황리 안정에 오래거주한 사람들 모두 화당리란 지명 이전에 남촌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옛 문헌이 하나있다.

*남촌진南村鎭 : 광이면에 있으며 읍 동쪽으로 20리(南村鎭 在光二面 邑東二十里)“라 했고

“광이면 :부의 동쪽에 있다.(光二面 府東)”

광이면 당동장 : 읍에서 20리 거리로 초3일.13일.23일에 개시(光二面 堂洞場 邑距二十里初三日十三日二十三日)

“남촌장 ; 읍에서 20리 거리로 초8일.18일.28일에 개시(南村場 邑距二十里初八日十八日二十八日)”을 기록한 (嶺南邑誌)다.

(영남읍지)1895년에 간행된 것으로 근 현대에 가장 근접한 기록이기에 비교 검토할 수 있다. 당동과 남촌은 읍에서 각각 20리 거리라 했다. 실제의 거리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옛사람들은 그 정도 차이는 무시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당동과 남촌진에 각각 장이 섰음을 알 수가 있다. 당동은 3일과 13일 23일 세 번 장이 섰고 남촌에도 8일 18일 28일 세 번 장이 섰으며 당동과 남촌은 엄연히 구분이 되는 지역임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당동의 장날은 3일.8일.13일.18일.23일.28일에 선다.. 이는 곧 남촌의 8일,18일,28일.의 장날이 없어지면서 당동에 흡수된 것이다. 그래서 당동은 남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촌은 화당리 이고 화당리는 적진포 라는 것이다.

당동堂洞이 塘洞으로. 南村이 화당리華塘里로 이름이 바뀐 것을 기록한 문헌은 (교남지嶠南誌)다.(교남지)는 경상남북도 지리지로 1940년에 간행되었다.

또 한가지 결정적인 것은 별장에 관한 기록이다. 고 문헌의 기록에서 밝힌 대로 도선촌에 진을 설치 했다가 적진포로 옮겨 남촌이라 했고 그곳에 별장을 두었다고 했다. 별장이란 산성. 나루 .포구 .보루. 섬 등을 지키는 종9품의 무관 벼슬이다.

*남촌진 별장 : 무관9품이며 진무15인. 지인7인. 사령12명이 있으며 능히 노군을 겸한다.

( 南村鎭別將 武九品鎭撫十五人知印七人 使令十二名.兼能櫓軍)------ (여지도서)

화당리가 적진포인 것은 화당리에 남촌진이 있었고 남촌진을 지키는 별장이 있었다.

그렇다면 별장의 행적이나 흔적이 이곳 어느 곳엔가는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화당리 마을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세로글씨로 “화당마을”이라고 쓴 큰 바위가 이곳부터 화당마을 임을 알려준다. 그곳에 오래전부터 마을을 나고 들면서 주민들의 치병과 무병장수를 빌며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했을 서낭당의 돌탑2기가 있고 그사이로 마을로 가는 길이 나있다. 이 서낭당은 민속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

길 오른편에는 서낭나무인 듯 수령이 250년이나 되었다는 보호수인 팽나무가 있다.

그 나무 밑에 이곳이 남촌진이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인 비문 3개가 나란히 서 있다.

돌에 새긴 비문은 “행별장김공진국선정비 行別將金公鎭國善政碑” “선락장군행별장황공응식宣洛將軍行別將黃公應植”절충장군행별장 折衝將軍行別將“등으로 이곳 남촌진인 적진포에 근무했던 별장들이 선정을 베풀고 임지를 떠나갈 때 주민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그들의 행적을 새긴 비문이다.

이것으로 이 마을이 남촌진이 었고 남촌진에는 별장이 있었으며 이 마을이 적진포라는 겄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리고 옛날에 마을을 진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만약 당동이 남촌이고 적진포 였다면 이 비문이 당동이나 그 근방에 있어야지 왜 화당마을에 있었겠는가?.

그간 혹자는 “영남호남연해형편도”에 나오는 ,용수100척기동풍 容數百隻忌東風,이란 고지도에 적힌 문구에 현혹하여 당동을 적진포 라고 주장을 하는 이도 있으나 그 것은 이곳 지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동은 바다밑이 완만한 경사구조로 돼 있어 배를 접안하기 용이하지 않다. 현재의 방파제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지 않았다면 배를 육지 가깝게 접안 수 없는 그 사유다. 임진왜란 당시 오늘날처럼 방파제 시설이 있었다면 또 모를까 노를 젖던 배가 썰물 때 뻘밭에 들어 않히는 당동에다가 군진을 설치했을 리가 없다.

 

화당리(옛 적진포)

 

반대로 화당리 포구는 수심이 깊고 배의 접안이 용이해 군진을 용수100척은 U자형의 오른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적진포인

화당리에서 옴팍하게 들어간 그 끄트머리인 당동만에 배 100척을 정박 시킬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봐야한다.

적진포가 논란이 되었던 지금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이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있을수 없다. 앞으로 당장 경상남도와. 고성군이 지금 추진 중인 이순신 프로젝트에 포함 대대적인 전적 승전지로 당항포 해전과 함께 그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왜선 13척중 이순신장군이 11척.2척은 원균이 격파한 이 전투는 이순신이 첫 출전에서 얻은 값진 전투였기에 그 의미가 당항포해전보다 크다고 봐야한다.

 

문학작품속의 적진포해전을 어떻게 묘사 했을까? 한번 따라가 보자.

그날 바다에서 밤을 보낸 조선수군은 이른 아침 창원 땅 남포藍浦를 떠나 진해의 고리량古里梁에 있다는 왜적을 찾아 여러 섬을 뒤적이며 수색하여 나아갔다. 바다에는 옅은 해무海霧가 드리워져 먼 곳을 식별하기 어려웠으나 해가 산위로 떠오르자 해무는 차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해무가 물러간 바다는 이제 시야에 들어왔다. 가조도의 나무며 바위의 윤곽까지 또렸이 보였다. 갯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도 드러났다. 멀리 거류산 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바다로 돌출된 지점에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거기는 적진포였다.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저기 저쪽을 봐라! 배들이 있다”

“적선이다! 적선”

앞서가던 탐망선 에서 정박한 배들이 적선임을 확인하자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멀리서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왜적선이였다. 대충 10여척은 넘게 보였다.

멀리 거류산 아래 당동마을 곳곳의 집집에서는 불타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연무가 자욱했다. 연기사이로 부산히 움직이는 왜적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한 무리의 왜군들은 이미 여염집을 뒤져 재물을 약탈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반반하고 젊은 여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고 가서 겁간을 하고 반항하면 사정없이 칼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한 이순신은 급히 노를 젖도 록 독려했다, 포를 쏠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이르자 명령을 내렸다.

“포를 쏘라”

“불화살을 날려라”

부하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어제 옥포에서 왜적선 을 26척이나 격파했었고 합포 에서도 5척을 불태운 터라 자신감과 함께 자신들을 지휘 하는 이순신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느꼈다.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배에 남아 있던 적병들은 엄청난 소리로 터지는 포의 위력에 놀라 모두 다 어쩔 줄 모르고 혼비백산하여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 산으로 달아나기 바빳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이순신 함대에서 내뿜는 엄청난 화력 앞에 전투는 아주 일방적으로 끝났다. 적선 13척 중에서 11척은 이순신 휘하의 전라 좌수군 이 격파를 했다, 나머지 2척은 경상우수군 원균이 쳐부수었다.

전투라고 하기에는 싱거운 식전食前 해장거리에 불과한 전투였다. 때마침 전투를 끝낸 시각이 늦은 아침이었다.

“모두들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잠시 쉬어가자”

이순신은 연일 벌어진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쉴 틈을 주었다. 그 자신도 지쳐 있었다.

어제와 오늘의 전투에서 44척이나 되는 홰선을 깨부수는 중에 유지 했던 팽팽한 긴장감이 풀어지자 피곤이 급격히 몰려왔다. 부하들 앞에서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긴 호흡을 했다,

그때였다. 남루한 옷에 머리를 산발한 어떤 사내가 등에 아이를 업은 채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장군님! 저는 적진포 윗마을에 사는 이신동이신동입니더. 왜적에게 붙잡혀 갔다가 몰래 빠져나왔습니더”

그는 말을 하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기 바빴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편안히 숨을쉬고 천천히 말을 해 보거라”

이순신은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난리 통에 아이를 업은 이신동이란 사내가 불쌍해 보여 밥과 국을 내주어 먹도록 했다. 사내는 배가 고팠던지 급히 한 그릇을 후딱 먹어 치웠다.

“이제 찬찬히 말해 보아라. 네가 여기 웬일로 왔드냐”

“장군님. 어제 저놈들이 어디서 왔는지 적진포에 나타나 닥치는 대로 재물을 빼앗아 소와 말에 가득 얹어서 저놈들의 배로 옮겨 실었십니더”

그는 말이 빨랐다. 이순신은 천천히 말을 하도록 그를 다독거렸다.

“소를 한 마리 잡더니 저쪽 당동에 배를 뛰워놓고 초저녁부터 밤새도록 술 마시고 띵가띵가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지랄 벅구를 합디더. 그런데 그 노랫소리를 가만히 들어본 께 우리나라 노래와 가이방합디더“

그는 이말을 마치자 돌아가려소 했다.

“네가 지금 아이를 업고가면 어디로 갈 것이냐? 나를 따라가면 무사할 터이니 함께 가도록 해라.“

이순신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장군님 아닙니다요. 말씸은 고마우나 늙으신 모친과 아내와 어린것이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찾아봐야 합니더”

그는 눔물을 흘리며 왔던길로 되돌아갔다.

아이를 업고 헐레벌떡 뛰어가는 그를 보자 마음이 착잡했다.이순신은 그가 전해준 말응듣고 생각에 잠겼다.

저놈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우리나라 음곡이라면 그들 중에는 붙잡힌 우리나라 백성이 섞여 있었거나 아니면 세가 불리해지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예 倭에 붙어버린 백성일 것이라 추측했다.

                                                                                -정해룡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적진포해전>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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