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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1)(2)(3)

작성자적벽해전|작성시간24.02.17|조회수4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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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1)


수염 깍으라고 세살배기에게 날카로운 면도날을 쥐어준다면 필경 세살배기는 면도날에 다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제도이다. 민주주의를 운용할 능력이나 역량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세 살배기 손에 쥐어 준 면도날이 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도 성장기 당시 최고급 열차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 어느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팬티를 벗기고 콜라병으로 오줌을 받는 장면을 본 일본기자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20년내 오지 못할 것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기차 좌석을 씌운 
고급천을 몰래 오려가는 통에 홍역을 앓기도 했다.

과연 우리나라 건국기에서 박정희 대통령 혁명 완수기까지 민주주의를 운용할 능력이 있는 국민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목하 중국에서 벌어지는 지하철에서 대소변을 보는 천박한 국민성에 대하여 많은 조롱을 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오랜 연구 끝에 민주주의 정착에 대한 조건을 남겼다.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 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중상층 형성, 국민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이다.

1. 물질적 산업적 토대 위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1인당 GDP 4,000불

2. 탄탄한 중상층

3. 민주시민교육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몇십불에 불과했고, 4,000불은 오래전에 남긴 연구기록으로서 지금의 GDP 기준이라면 두세배 더 높아 졌을 것이다. 지구상에 산업화와 경제성장 없이 민주주의를 성취한 나라는 단 한나라도 없다. 가난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성취한 예는 단 한 건도 없으며 부자나라가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나라는 많다.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무조건적인 조건이다.


국부 이승만의 통치시대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때론 독선적으로 국가를 이끌어간 국부 이승만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민도 수준으로는 국부 이승만의 절대적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고는 국가 운영이 될 수 없었던 시대였다.

국부 이승만의 하야로 개인적 역량과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영국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맨해튼 가톨릭대학교 영문학을 전공한 윤보선과 장면은 재벌급 집안에서 태어나 고난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다. 잘 살았다는 것이 흠이 될 수 없지만 그 시대 영국 옥스퍼드와 미국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쓰며 문학이나 전공하자고 유학간 대책 없는 사람들이었다. 윤보선의 당시 한학기 학비 700파운드는 논 수십마지기를 팔아야 하는 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그 절박한 시대 바다 건너 그 많은 돈을 쓰며 배운 것이 선비답게 고작 문학이다.

그들의 통치는 처참했다. 냉수 마시고 이빨 쑤시는 조선의 딸깍발이 보다 무능했고, 무식했으며, 무책임했다.
그들이 통치한 9개월의 짧은 집권기간 동안 시위는 2,000여회가 일어났으며 이유를 가리지 않은 시위는 매일 10회나 반복되었다. 거리의 윤락업소를 철폐 하자고 데모대가 지나가면 그 뒤를 윤락녀들의 시위대가 사람 무시 하지 말라며 지나갔고, 뒤를 이어 데모를 하지 말라며 피켓군단이 지나갔다. 윤보선과 장면은 그 거리의 풍경을 내려다 보며 한숨이나 쉬고 있었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서울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 인민군에게 강제 납북되었다가 김일성대학에 다니고, 거물 간첩이 되어 남파되어 혁혁한 간첩활동으로 영웅칭호를 받은 이용규가 있다. 그는 1976년 귀순하여 자유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자신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에서 4.19 시위에 대하여 회상하고 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자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400만명이 죽어간 전쟁이 몇 년이나 지났다고 북한이 남한보다 잘산다며 “가자 북으로”를 외치는 수준이 그 시대 민도였다.

국부 이승만은 대동세상의 유토피아에 목마른 조선은 반드시 빨갱이 국가를 추존한 것을 알고 있었다. 양반 몇몇이 백성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대동세상 그 세상이 곧 빨갱이 세상이다. 북한의 유교 빨갱이가 얼마나 지독한 생명력을 가지고 지금도 살아있는 화석으로 증거하고 있다.


미군정 시기 자유민주의와 공산주의를 두고 여론조사를 했다. 국민 80%가 공산주의 즉, 성리학의 대동세상을 흠모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좌우합작을 통한 정부 구성을 요구했다. 국부 이승만은 단호히 거절했다. 실탄이 장전 된 권총을 찬 하급장교를 보초 세워 국부 이승만을 가택연금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련에 잘지내자며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다, UN을 만든 앨저히스, IMF를 만든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미국의 국가기밀이 소련으로 실시간 넘어갔다.

볼세키비 혁명이 일어난 후 정확하게 5년 후 국부 이승만은 당신이 발간하고 있는 잡지 태평양에 “공산당 당부당” 논설을 실어 공산주의 위험성과 필망의 길을 예언했다. 트루먼이 공산주의 위험성을 깨닫고 트르먼 독트린을 미국 의회에서 선포한 것이 1947년이었다.

국부 이승만은 답답했다. 공산주의 대동세상을 꿈꾸는 어리석은 국민을 혼자의 의지로 꺽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민주주의를 향유 할 능력 없는 국민은 차라리 당장은 공산주의가 나았다. 그러나 국부 이승만은 면도날을 빼았았다. 울부짖는 어린아이를 혼내는 것은 면도날을 빼앗은 후이다.  국부 이승만은 자유대한민국으로 건국했다.

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2)

국부 이승만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3가지의  유산을 물려준다.

첫 번째는 한미 방위 상호조약이다.

전쟁의 장기화 및 전비로 인해 교전국 모두 피로에 지쳐 있었다. 트루만에 이어 대통령이 된 아이젠 하워는 6.25 사변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을 걸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평화라는 사기로 한반도에서 도망가려 했다. 아이젠 하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국부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했다. 얼얼하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아이젠 하워는 자다가 일어나 경련을 일으켰다. 처칠은 면도날에 얼굴에 생채기가 생겼다. 모택동은 게거품 물며 반공포로 한명 당 한국인 5명을 사살하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활로를 찾지 못한 아이젠 하워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 놓았다.
"이승만의 일방적인 행동은 약속 파기이다.
미국은 이승만이라는 적을 만났다.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

그리고 이승만 제거작전에 돌입했다.
국부 이승만은 아이젠 하워 턱에 어퍼컷을 꽂아 넣었다.
“비겁자 미국은 가라!
미국에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지어다.
우리에게는 자살할 권리가 있다” 처칠도 끼어 들었다.
“이승만은 배신자이다.
미국 정부는 당장 그를 대통령자리에서 쫒아내라”
깜량이 되지 못하는 처질에게 국부 이승만은 귀싸데기를 올려 붙였다.

“그 늙은이 아편전쟁이 끝났다는 것 여태 모르시네”

미국의 모든 언론이 들끓었다. 미군이 지키는 반공포로수용소를 국군이 가서 털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공산당과는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자살할 권리”는 미국을 초토화 시켰다. 겁쟁이 아이젠 하워, 비겁한 나라 미국은 전세계의 모든 일간지 1면 톱기사가 되었다.

자존심 상한 미국의 언론은 아이젠 하워를 난타했다.


국부 이승만에게 아이젠 하워는 투항했다.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절대 퇴장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결코 방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싸운다. 이승만의 불굴의 의지를 미국이 끝까지 지원할 것이다.“국무장관 덜레스는 국부 이승만에게 애국심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며 윌터 로버트슨을 특사로 보낸다는 친서를 보냈다.

즉각 국부 이승만 앞에 특사 윌터 로버트슨이 날라왔다.
”한미방위상호조약을 해줄테니 제발 휴전에 반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국부 이승만은 로버트슨을 15일 동안 12번의 회담을 통해 초죽음으로 만들었다.
당대를 아우르는 석학 국부 이승만에게 로버트슨은 애송이였다. 로버트슨은 백기 항복한 후 본국에 보고했다.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되어야 마땅하다”
국부 이승만은 로버트슨이 떠나고 조약 서명을 위해 날라온 국무장관 덜레스를 또 두결겨 팼다.

“먹고살 돈과 군대를 키울 돈을 내 놔라. 그리고 38선에 공산당이 처들어 올 길목에 인계철선을 설치하고 미국 너희들이 들어가서 지켜라” 미국은 당시 한국 수출액 34배에 달하는 현찰로 달러를 바쳐야 했고, 50년대에서 60년대를 넘어 한국 정부의 국가예산 86%~60%에 이르는 무상 원조 즉, 조공을 바쳐야 했다. 2만명의 대한민국 국비유학생을 미국의 돈으로 미국에 유학을 시켜 주어야 했다. 그 중 절반이 군장교였고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국부 이승만은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악질적인 불평등 조약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당당했다.
”야!! 미국 너희 말이야 너희들이 침략 당할 때 우리가 가서 싸워주고 도와줄께!!“

국민소득 몇십불에 불과한, 굶어 죽어가는 나라가 세계 최강 대국 미국이 침략 당할 때 군대를 보내 준다는 소리에 퇴임한 트루먼이 화가 잔뜩 났다.”이승만은 선지자인줄 알았는데 날강도였다“그러나 한미상호방위 조약에 도장을 찍은 덜레스 국무장관은 국부 이승만을 존경했다."나에게는 이 박사를 친구로 가진 것은 자랑이며 그는 실로 훌륭한 정치가이다"


국부 이승만의 미국을 돕겠다는 예언은 적중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월남전에서 국군 연인원 32만명을 파병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영리했다. 6.25 참전으로 4만여명이 전사한 미국에 보은하기 위하여, 확산되는 공산세력을 막기 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르더라도 마땅히 미국을 도와야 할 베트남전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악착같이 미국을 뜯어 먹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국 대사 W. G. 브라운에게 차용증을 받았다. 이름하여 브라운각서이다. 주한미대사는 ”군수지원 경제지원“을 정히 변제하겠음 이라고도장을 쾅 찍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강했다. 베트남전의 영웅이 되었다. 미국을 뜯어 먹을만 했다.

그런데 한국군에게 지급한 M-16 소총은 분실이 너무나 빈발했다. 미군이 쫒아와 조사를 해도 밀림에서 잃어버렸다는데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 무기는 계속 공급했다. 그 무기들은 귀항선에 실려 국내로 반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훔쳐온 M-16에 만족할 수 없었다. M-16 기술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량생산 국내 라이센스를 뜯어 통째로 강탈했다. 추가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에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을 하와이로 불러 만나 당시 최첨단 전투기 F-4 팬텀까지 뜯어내어 한순간에 아시아 공군력 1위가 되어 북한은 영원히 제공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뿐일까?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전을 통해 미국 뜯어먹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다못해 미국에게 김치 없어 밥 못먹겠다며 국군에 김치통조림 공급하라고 떼를 썼다. 국내에서 김치통조림 생산해서 비싼값에 미국에 팔고 미국은 한국군에 공급했다. 고추장 된장 짱아치가 포장 된 K-레이션도 만들어 팔았다.


국부 이승만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배워도 한참 잘 배웠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컬 하다. 가장 친미적인 대통령들이 미국 뜯어 먹는데는 야차같이 달려 들어 뜯어 먹었다. 반미면 어떻냐, 미국에 할말하겠다던 노무현과 문재인은 미국가서 밥도 제대로 얻어 먹지 못했고 무기만 수조원어치 사주고 국제 호갱이 되었다.

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3)

두 번째 남긴 유산은 교육받은 인재였다.

국부 이승만이 하와이에 한동안 정착하게 된 것은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으로 인한 한인학교 때문이었다. 국부 이승만은 한인학교를 시작하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남녀공학의 학교를 세웠다. 1914년 미국 하와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고 기숙사까지 갖추었다. 한반도에 남녀공학 학교가 설립 된 것이 해방 후에 가능했다.


국부 이승만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전쟁을 중에도 학교 수업은 멈추지 못하게 했다. 국부 이승만은 교육은 부모도 간섭할 수 없는 국민의 권리로 규정했다. 그 찢어지게 가난한 시대에도 정부예산의 20%가 교육예산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인재는 6.25 전란 중에도 징집을 하지 못하게 했다. 국부 이승만 재임 기간 중 70%를 훨씬 상회하는 문맹율을 22%(남성 11%, 여성 33%)로 낮춰 사실상 문맹을 퇴치했다.

또한 2만명의 인재를 선발하여 국비로, 미국돈으로 미국에 유학을 시켰다. 그 절반이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군 장교였다.
국부 이승만이 퇴임할 때 대한민국의 대학생 숫자가 영국과 똑 같아 졌다. 대한민국의 경제기적의 원인 중 하나는 우수한 인재이다. 산업화 시대 국부 이승만이 남긴 인재가 중추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국부 이승만은 자유, 시장경제, 민주주를 남겨 주었다.

국부 이승만은 1949년 ”산업부흥5개년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좌절 되었다. 잿더미가 된 전후시대는 미국의 모가지를 또 비틀어 돈을 뜯어냈다. 1인당 소득이 40달러이던 시절 236명의 젊은 과학도를 1인당 6,000달러를 들여 미국으로 원자력 해외연수를 보냈다. 1956년 국부 이승만은 원자력 연구소를 세우고 연수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지시하여 트리가마크 2 건설을 했다.


국부 이승만의 두뇌는 슈퍼컴퓨터급인데 원전을 없애려 한 문재인은 286급이다. 사람의 두뇌는 시대와 문명의 진보와 관계가 없는 것이 입증 된다. 1958년에는 거대한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착수했고, 호남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세워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 강원도의 석탄 수송을 위해 철도의 보수와 함백선, 영월선, 영암선신설에 집중했다.그 모든 재원은 국부 이승만 개인적인 역량으로 미국으로부터 갈취한 돈이었다.

국부 이승만 그는 대한민국의 선지자였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당신이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부는 이승만이다,좌빨들은 아니 우파라는 작자들까지 국부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대하여 게거품 문다. 한마디로 웃기는 개소리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익희씨가 기차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단독출마가 되어 무조건 대통령에 당선 되어 있었다. 부정선거를 지시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기붕이 벌린 부정선거를 두고 국부 이승만이 부정선거의 원흉이라며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운다. 물론, 국정 책임자 대통령으로서 아랫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은 있다. 그래서 하야했다. 이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굴레를 벗겨 드려야 옳은 것 아닌가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확하게 민주주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장준하는 자신이 발행하는 사상계에 콜론 보고서를 올렸다.

"한국에는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은 것도 기적이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부적당한 것 같다. 차라리 인자한 전제정치가 타당할는지 모른다. "젊은, 교육을 받은 계급이 그들의 재능과 힘을.충분히 발휘할 곳을 찾지 못하여 지식 프롤레타리아트로 발전해갈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 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가난한 국가의 유능한 자제가 일반 대학에 들어가는 수는 학자금 부족으로 인해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그들에게 어떠한 고등교육의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보통 군부 학교를 통해서이다. 이리하여 하층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다수 생기며, 특권적 관리 정치가에 분노를 갖게 된다. 이것은 폭발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이 타국의 예를 따라 군사 지배가 정당을 대체하는 그런 사태가 있을 수 있다 하는 의문은 정당한 것이다. 이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은 적다(보고서 내용 요약)”

윤보선-장면 정부의 민낮을 낮낮이 까발리며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한 보고서를 자신의 잡지에 올리며, 자진하여 일제의 학도병이 된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뒤이어 팔리 보고서가 백악관에 제출된다.

“1961년 2월 현재 한국과 국민들은 병든 사회(sick society)이다“정부, 언론, 교육, 교회, 기업 등 기본 기관들의 구조가 모두 정, 부패와 사기로 관통돼있으며 실제로 한국인들은 마치 양상과 언행을 통해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꾸며대는 망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 정답은 우리는 이미 한국 정부, 그리고 아직까지는 한국 국민들의 요청과 기본 승인 아래 이미 간섭을 하고 있다”며 “우리는 주권이라는 단어의 울림에 우리 자신이 속아 넘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러나 한국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최대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우리의 조치가 한국의 주도로 비춰지도록 다루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혁명의 다음이자 미완성 단계에 초점을 둔 1961년 4월19일이 적합하다. 전국경찰국장, 국가은행들의 행장, 새로운 감사관, 재무부 수주계약담당관 등 주요 직책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인물들을 새로 임명토록 하고 4월19일부로 포괄적인 공무원 청렴 개혁을 선포할 것을 설득해야 한다. 만일 이 같은 노력이 실패하고,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군사정변이 일 것이며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은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한국은 안정될 것이다”

보고서가 제출 된지 두달 만에 5.16 혁명이 일어났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하여 5.16 혁명에 대한 전적인 지지 선언을 하고 나선다.

 “516군사혁명을 보고 “4·19 혁명이 입헌 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60만 대군 중 혁명에 참여한 병력은 고작 3,600명에 불과했다. 한강대교를 사이에 두고 혁명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은 총부리를 겨누며 대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군에게 준동하지 말 것을 명령한 후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혈혈단신 한강대교를 건너갔다. 대치하는 국군은 홀로 걷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발포하지 않았다. 60만 대군 전체가 혁명군이었다.

실질적 국정 운영자 장면은 혁명소식을 들고 가르멜봉쇄수녀원으로 도망가 숨었다. 미국은 도망간 장면을 향해 "겁쟁이야 너는 끝이다.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며 혁명불개입 선언을 했다. 윤보선은 혁명 소식을 듣고 단발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도 명색이 한 국가의 대통령인데 혁명의 기운을 감지 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누대를 이을 창피함이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혁명이었고 때는 때로 오는 법이다. 올 것이 온 것 뿐이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대통령과 5.16 혁명세력에 분노하며 개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재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실권자 장면은 도망가서 잠적했고 윤보선을 찾아갔다. 매그루더는 진압 명령서를 윤보선에게 주며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문학도 윤보선 답게 화답했다.

"우리나라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안고 나오지 못한다.“

5.16 혁명은 무혈혁명이다. 혁명 과정에서 단 한명의 인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동서고금 인류사를 통틀어 혁명은 혁명의 대상을 반드시 제거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제거하지 않았고 기회를 주었다.
윤보선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표차이는 고작 15만표에 불과했다. 전라도에서 몰표가 나와 간신히 승리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은 야당 당수가 되어 끊임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뒷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5.16혁명을 어느놈이 군사쿠테타 또는 군사정변이라 하느냐?

그 시대 공부한 엘리트가 대한민국에 있었는가 묻고 싶다. 군 장교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임관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장교들은 국부 이승만께서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어 유학까지 다녀온 대한민국 최고의 파워 엘리트 집단이었다.[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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