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5·18 특별법·세월호 사건 그리고 민주노총.

작성자조석천|작성시간24.07.09|조회수59 목록 댓글 2

시체팔이뿐만 아니라, 확증편향성이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 역사가 밝혀지면, 1987년 체제의 허구성이 노출된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는 말은 진실을 외면 한 채, 확증편향성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 노출된다.

 

김영삼 정부 때 일이다. 허위의식의 이데올로기 논쟁이 1994년 7월 20일 서강대학교 박홍(朴弘) 총장이 ‘주사파 배후에 북한이 있고, 운동권 핵심이 밀입북 교육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불을 지폈다. 이에 대한 사회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사실 보도’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다. 언론은 ‘마녀 사냥’의 부당성을 강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청산운동이 벌어졌다. ‘이제 할말은 하자’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이데올로기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밑으로부터의 사회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북문제의 냉전 이데올로기는 정의와 부정을 떠나 더 이상 논의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사회가 지탱하려면, 그 사회에 대한 건전한 이념이 존재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념 논쟁의 금기로 인해 우리 사회는 이념의 건전성에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 이듬해 ‘5·18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11월과 12월에 노태우·전두환 두 전 대통령을 갑자기 체포 투옥한 뒤에 부랴부랴 12월 20일 홍준표의 건의에 따라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에겐 사형을, 노태우 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다.(김태산, 2023.05.30.)

 

한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1995년 11월 11일 서울 연세대학교 노천광장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그 대회에서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원동력인 우리들 노동자는 오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창립을 선언한다. (중략)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우리는 인간다운 삼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조건의 확보, 노동기본권의 쟁취,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 산업재해 추방과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가열 차게 투쟁할 것이”(민주노총 출범 선언문 중에서).(구은회, 〔민주노총 창립 20주년 기념식〕 〈강산 두 번 변해도 노동자 현실 그대로〉,「매일노동뉴스」, 2015.11.12)

 

스카이데일리 대담=조우석 평론가·정리=허겸 정치사회부장(2024.07.09.), 〈[특별대담] 권영해(전 안기부장, 1994〜1998) “교도소·무기고 습격 광주시민들이 했겠나”〉, 당시 안기부는 5·18이 북한 개입을 확인한 상태에서,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선전·선동·진지전 구축을 했다. 지금 거짓임을 알면서 5·18을 헌법전문에 넣겠다고 말과 같은 맥락이다. 사건의 정확성·공정성·객관성 등은 교과서에나 읽을 수 있는 일이 된다. 지독한 ‘확증편향성’임에 틀림이 없다. “▲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3일 조우석 스카이데일리 칼럼니스트와 특별대담에서 “안기부장 시절 북한의 5·18 개입 사실을 확인했다”는 본지의 6월21일자 단독 보도는 사실이라고 재확인했다. ©스카이데일리. 김영삼정부 시절 정보기관 수장이던 권영해(87·權寧海)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은 1980년 광주 5·18 때 북한의 개입이 확실하다는 견해를 재확인하면서 “광주사태 당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공격하고 무기고 40여 곳을 한꺼번에 턴 데다 좌익사범이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사람들은 결코 순수한 광주시민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권 전 안기부장은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조우석 스카이데일리 칼럼니스트 겸 평론가와 2시간에 걸친 단독 대담에서 본지가 6월21일자로 단독 보도했던 ‘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 기사가 대부분 사실임을 재확인했다...다만 그는 비밀공작을 지시한 배경과 관련해 “안기부장 취임 이후 내 관심은 남북한 통일 이후 남북 사이의 진정한 사회통합의 문제였다. 그래서 기초연구를 위해 북한 교과서 수집을 지시했다. 그걸 훑어보니 수도 없이 ‘5·18은 우리가 했다’는 서술이 수두룩했다. 놀랐다. 물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교육 차원의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 이상이었다. 그 전부터 나는 북한 개입의 개연성은 있다고 봤지만, 뭔가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권 전 부장은 “광주 5·18은 동시에 순수한 민주화운동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럼에도 “광주 5·18을 헌법 전문에 넣자는 정치권 논의에는 반대하며, 그건 정치권 놀음에 불과하다”고 밝혔다...권 전 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광주 5·18 개입 문제를 밝히자는 주변의 제안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책임 있는 정보기관 수장 출신인데, 재임 중 인지하고 파악했던 일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열어 떠들어댈 수 있느냐?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권 전 부장의 광주 5·18 관련 특별대담에는 최명주 전 안기부 1차장이 배석했다. 최 전 차장도 북한의 5·18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권 전 부장은 자신이 1994~1998년 안기부장 재직 시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에 관심 가졌던 배경과 그 이후 인지했던 사항을 2시간에 걸쳐 두루 밝혔다.

 

그는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된다는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북한 개입으로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5·18 개입을 증언한 정부 최고위 인사로서 그의 증언은 의미 있다. 동시에 그는 5·18 문제를 개헌 때 헌법전문에 집어넣자는 정치권 논의에는 부정적이라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주의란 대의를 집어넣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다음은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일문일답이다. -뒤늦게 광주 5·18과 관련한 증언을 하게 된 배경이 뭔가? “6월17일 자유민주당이 주최하는 위헌정당 진보당·더불어민주당해산국민운동본부 출범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레스센터에 갔던 것이 시발이었다. 전부터 나는 아내와 딸까지 함께 자유민주당 당원이다. 현재는 등 떠밀려서 당 고문까지 맡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때 대회장에 참석했다가 스카이데일리 기자를 만났다.”

-그럼 어떤 얘길 나누신 건가? “당시 기자가 내게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기에 소신대로 ‘그건 사실이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묻기에 ‘당시 광주 5·18에 왔다가 전사한 북한 군인들의 묘비가 청진에 있다’고 밝혔다. 언제 그걸 확인했느냐는 질문에는 ‘안기부장 현직 시절’이라고 밝혔다. 세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다. 정보기관 출신으로 너무도 상식적인 판단을 언급했을 뿐 특별한 건 없었다.””

 

5·18 북한 개입설을 알고도 특별법을 만든 위인이나, 세종시 출범으로 한참 열을 올릴 때 세월호 헛소문을 퍼뜨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코너에 몰았다. 어제 세종시를 방문을 했다. 그 규모하고, 정교한 빌딩들은 세계 어느 나라 행정수도도 추종하기 힘든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건설 당시는 지옥이었다.

 

세종시는 2002년 9월 신행정도시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10년 만에 실현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시키려고 했으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2010년 1월 7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특별법’, 즉 ‘9부 2처 2청을 세종시로 이전하는 원안을 관철시켰다.

공무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난감했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공무원은 ‘길과장’으로서 하루 4〜5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입장이었다.

 

1단계 작업으로 “2012년 9월 총리실 이전을 시작으로 기획재정부, 농림식품부, 환경부 등 6개 부처 및 소속 기관이 1단계로 이전을 완료하고 2013년 2단계로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등 18개 기관, 2014년까지 나머지 6개 기관이 이전을 끝내게 되는 진정한 행정중심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민경명, 2012.06.29)

 

2단계로 박근혜 정부는 20131212“13일부터 29일까지 정부부처 6곳과 10개 소속기관이 세종시로 이전한다고 11일 밝혔다. 이전 기관은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보훈처 등 6개 부처와 10개 산하기관으로 이전 공무원 수는 4888명이다.”(이재덕, 2013.12.12)

공무원의 불만이 쏟아지고, 사회는 점점 갈등의 독 안에 있었다. 공공부문의 기득권 카르텔 세력의 반발은 불보듯 뻔했다. 20131120일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방문했다. 그 당시 민주당 강기정 의원(3광주북갑)은 국회에서 대기 중인 청와대 경호 차량 앞을 지나가다 열린 차문을 발로 걷어차며 ! xx. 너희들이 뭔데 여기다 차를 대놓는 거야. 차 안 빼!’ 라는 욕설을 했다. 운전을 담당한 경호 순경은 누구시길래 차량을 발로 차고 가느냐.’며 상의 뒤편을 잡아 제압하다가 강 의원의 뒤통수에 가격당해 입술 안팎에 열 바늘을 꿰매는 상처를 입었다는 입었다.”(사설, 2013.11.20)

 

19대 운동권 세력의 국회 진입이 문제가 되었다. 2013년 대선평가위원장을 맡은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다수 들어와서 당을 망쳐놓았다. 국민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라 전제하고 . ‘이제는 운동권 경력만을 정치에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 전문성을 가진 능력 있는 각계각층 인사가 충원돼야 한다.’”라고 했다.(정녹용, 2015.09.19) 세종시는 20029월 신행정도시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10년 만에 실현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시키려고 했으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201017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특별법’, ‘922청을 세종시로 이전하는 원안을 관철시켰다.

 

공무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난감했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공무원은 ‘길과장’으로서 하루 4〜5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입장이었다. 1단계 작업으로 “2012년 9월 총리실 이전을 시작으로 기획재정부, 농림식품부, 환경부 등 6개 부처 및 소속 기관이 1단계로 이전을 완료하고 2013년 2단계로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등 18개 기관, 2014년까지 나머지 6개 기관이 이전을 끝내게 되는 진정한 행정중심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민경명, 2012.06.29.)

 

2단계로 박근혜 정부는 20131212“13일부터 29일까지 정부부처 6곳과 10개 소속기관이 세종시로 이전한다고 11일 밝혔다. 이전 기관은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보훈처 등 6개 부처와 10개 산하기관으로 이전 공무원 수는 4888명이다.”(이재덕, 2013.12.12.)

 

공무원의 불만이 쏟아지고, 사회는 점점 갈등의 독 안에 있었다. 공공부문의 기득권 카르텔 세력의 반발은 불보듯 뻔했다. 20131120일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방문했다. 그 당시 민주당 강기정 의원(3광주북갑)은 국회에서 대기 중인 청와대 경호 차량 앞을 지나가다 열린 차문을 발로 걷어차며 ! xx. 너희들이 뭔데 여기다 차를 대놓는 거야. 차 안 빼!’ 라는 욕설을 했다. 운전을 담당한 경호 순경은 누구시길래 차량을 발로 차고 가느냐.’며 상의 뒤편을 잡아 제압하다가 강 의원의 뒤통수에 가격당해 입술 안팎에 열 바늘을 꿰매는 상처를 입었다는 입었다.”(사설, 2013.11.20.)

 

19대 운동권 세력의 국회 진입이 문제가 되었다. 2013년 대선평가위원장을 맡은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다수 들어와서 당을 망쳐놓았다. 국민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라 전제하고 . ‘이제는 운동권 경력만을 정치에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 전문성을 가진 능력 있는 각계각층 인사가 충원돼야 한다.’”라고 했다.(정녹용, 2015.09.19)

 

그 와중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세월호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고, 민주노총와 민주당은 시체팔이로 탄핵의 도화선을 제공했다. 잘 기획된 사건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만들어놓은 민주노총이 세월호 사건에 큰 기여를 했다.

 

[MBC노조성명](제3노조)(2024.7.8.), 〈세월호 전원구조 오보는 민노총 언론노조가 주도..이진숙 책임 아니다!〉, 5·18뿐만 아니라, 세월호 사건은 같은 시체팔이이고, 확증편향성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먼저 참사 당일 ‘전원구조’ 자막이 보도된 경위다. 세월호 전원구조 오보는 알려진 것과 달리 MBN이 최초로 유포한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11시 1분 7초에 MBN이 복대 자막으로 『단원고 측 “학생 모두 구조”』라고 보도했고, 이어 MBC도 11시 1분 26초에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냈다. MBN 보도의 출처에 대해 MBN 기자는 단원고 강당에서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이 말하는 걸 듣고 기사를 내보냈다고 말했는데 나중에 세월호 특조위 조사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고 한다. MBC는 MBN 기자의 통화내용을 듣고 단원고 현지 취재중인 기자에게 확인을 했다고 전했다.

그 다음은 ‘전원구조’ 리포트가 방송된 경위다.

전원구조 리포트는 YTN이 제일 먼저 했다. 11시 3분이었다. YTN은 단원고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에게 확인을 거쳤다고 하는데 그 시간에 학부모들은 MBN 자막보도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결국 YTN이 MBN 자막을 보고 전원구조 오보를 ‘리포트’로 방송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MBC가 왜 MBN과 비슷한 시기에 ‘전원구조 오보’ 자막을 냈는지 아리송하다. 다음부터가 MBC 내부에 있었던 일이다. 시경 출입하던 MBC 사회2부 노○○ 기자가 MBN 기자로부터 ‘전원구조’ 이야기를 듣고 단원고에서 취재하던 정○○ 기자에게 연락해 “맞는 것 같다”는 답변을 듣고 회사에 있던 박○○ 기자에게 전달했고 박○○ 기자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 구조”』 라는 자막 문구를 작성해 직접 그래픽실로 가져가 방송하도록 했다. 보도그래픽실에는 보도국 주간뉴스부 (편집부) 양○○ 기자가 자막을 확인하고 있었고, 뉴스 스튜디오에서는 윤○○ 기자가 PD를 맡고 있었다. 처음 ‘전원구조 자막’이 확인 절차 없이 방송이 나간 경위다. 이러한 전원구조오보는 생방송 리포트로도 나와 11시33분 서울 MBC 오○○ 기자가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이 325명이였고, 이 학생들은 모두 안전하게 구조했다고 정부가 밝혔습니다.” 라고 보도했으며 11시 36분에 목포MBC 양현승 기자가 “전원이 구조가 됐다는 소식은 이곳에서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전했지만 서울MBC 염○○ 기자는 “조금 전 경기교육청 대책반에서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은 모두 구조됐다고 밝힌 상태입니다”라고 엇갈리게 보도했다. 지금까지 거론된 시경출입기자 (시경캡) 사회2부 노○○, 단원고 출입 정○○ 기자, 박○○ 기자, 주간뉴스부 양○○ 기자, 뉴스 스튜디오 윤○○ 기자, 방송을 한 MBC 오○○ 기자, 염○○ 기자 등은 모두 민노총 언론노조원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후 어떠한 징계도 받지 않았다. 방송사 내 취재의 중추였던 시경 캡 노OO 기자가 팩트를 확인했다고 한 이상 서울 MBC의 간부들이 이를 반박하며 목포MBC의 보도를 직접 인용하기는 어려웠다. 목포MBC 기자는 협력사이지 본사 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시경 캡 노○○ 기자 (민노총 언론노조원)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지난 10년간 어느 누구도 그를 징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목포MBC의 ‘전원구조 아닐 수도 있다’는 보고를 무시했다면서 서울MBC의 전국부장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2018년 3월 MBC 최승호 사장이 와서 정상화위원회라는 조사기구를 신설해 전원구조 오보와 관련된 민노총 기자 15명을 조사했지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MBC 전국부장의 책임도 묻지 않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솔뫼산 | 작성시간 24.07.09 전원구조 오보를 대문짝만하게 내고 나중에 집단사망을 발표해서 박근혜정권에 대한 분노를 극에 달하게하는 선동술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석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7.10 솔뫼산님. 맞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