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맹기(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명예교수)
국민교육헌장은 ‘민족중흥’의 기상을 담아.
국민교육헌장의 시대적 콘텍스트.
1967년 5월 3일 치르진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를 앞세웠지만’, 그 대척점에 섰던 신민당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그 결과 박정희는 116여만 표 차이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고, 그해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朴 대통령이 농촌을 기반으로 지지층을 확보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노력과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었다. 국민교육헌장 발표된 후 朴 대통령의 서세(逝世)까지 11년이 지났다면, 농촌지역의 가정교육, 학교교육 그리고 사회교육에 성과가 당연히 나타나야 할 것이다. 즉, 가정교육은 의식혁명이고, 학교교육은 ‘능률과 실제’ 수월성(秀越性) 교육의 혁명이고 그리고 사회(시민)교육은 사회 전반의 의식·능률 확산과 맞물렸을 것이다. 필자는 성과를 새마을운동의 실체와 통일벼 등으로부터 혁신결과의 실마리를 찾는다.
물론 이념적·역사적 피상적 분석만으로는 국민교육현장의 이념과 성과를 도출할 수 없고, 그 헌장 자체 생명력도 가질 수 없다. 본 논의는 국민교육헌장을 매개로 농촌 새마을운동 그리고 공장새마을 운동으로 민족중흥의 근거를 찾았다.
이는 농촌지역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기 위한 제도적 노력으로, 기념일을 제정하였다. 1967년 12월 朴 대통령은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했다. 또한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했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가정·학교·시민교육의 방향설정이며, 민족중흥의 실천이다. 이 헌장은 ‘반공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끝을 맺는다. 즉, 朴 대통령은 ‘민족중흥(民族中興)’으로 시작하여, 민족중흥으로 끝을 맺었다.
우선 이념적으로 풀어보자. 이 헌장의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집단.’을 일컫는다. 그러나 오랜 역사는 빈번히 ‘쇠잔의 길’로 들어설 때가 허다하다. 대한제국은 그 쇠잔의 길로 치달으면서,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민족분단까지 경험하게 이른다.
박정희 장군은 1961년 5월 16일 ‘생존과 자립’을 위해 혁명적 결단을 내렸다. 또한 안보와 번영을 위해 1972년 10월 17일 혁명적 유신을 발표했다. 그 사이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가정·학교·사회(시민)교육의 혁명적 선언을 한 것이다.
朴 대통령은 시민교육을 통해 ‘자주 독립국’과 더불어 세계 중심 국가로서 ‘인류의 공영’에 이바할 것을 약속했다. 더 이상 한민족이 주변국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기를 원한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애국애족‘, 즉 민족중흥은 절박한 과제이었으나,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경제발전과 세계 공급망생태계에 진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61년 당시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89달러였으나 북한은 320억 달러에 달했다. 소련·중공·북한 등 공산권의 호전성은 계속 안보의 위협을 가했다. 현재라고 달라진 것이 없다. 민심은 뿔뿔이 흩어지고, 외채는 늘어나고, ’김정은 수석대변인이 대통령이 되고, 부정선거는 강행되고, 공영방송은 선전·선동·진지전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갈수록 여론조작은 교묘하게 이뤄지고, 프로사회는 팽개친 채, 아마추어사회로 북한처럼 진행하고 있다. 절박한 현실에서 56년 전의 국민교육헌장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해 반추하고, 현실적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①콘텐츠의 혁명, ②콘텐츠 혁명의 실천: ⓐ새마을운동, ⓑ통일벼의 품질개량, ③국민교육헌장으로 민족중흥의 실현 등 순서로 논의를 전개한다.
2. 콘텐츠의 혁명.
자주독립국으로 향하는 조건으로서의 경제적 어려움은 예견된 일이었다. 다행히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의 세계 공급망생태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좌익에 경도된 제헌헌법을 자유주의·시장경제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미합의에 의한 개헌안으로 경제관련 법을 고치도록했다.(1952. 11. 29)
일단 안보와 자유주의·시장경제를 확고히 자리를 잡도록 초석을 깔았다. 국가 차원에서 자주국방을 위해 1971년대 초반 시작한 번개사업으로 세계 7번째 미사일을 쏴올릴 수 있었다.
또한 자유주의·시장경제에 관한 논의이다. 朴 대통령은 이승만 정부시절 개정되어 계속되어온 재산권의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승만 정부는 지하자원 등 생산요소의 국유화를 개인소유로 이전코자 했다. 제헌헌법에서 그 이후 수정된 조항을 보면. 국유화를 완화시켜 제120조 ①항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수산자원·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할 수 있는 자연력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채취·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할 수 있다.’ 제 122조 ‘국가는 국민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 제 126조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라고 개정했다.
국민교육헌장으로 시장경제에 더욱 가열차게 밀어붙였다. 이 헌장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민족중흥의 구체적 목표를 서술하고, 즉,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 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로 그 방향을 구체화했다.
구체적 행동강령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제도의 정비만으로 시대의 절박성을 풀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안보에 도움을 줄 방위산업은 직접 챙기고 다른 세계 공급망 생태계 구축을 위해 기업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여,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강화토록 했다.
민족중흥은 제헌헌법의 정신에 따라 생명, 자유, 재산 등 기본권을 존중함과 동시에, 전통적 예(禮)의 중요성과 다른, 절박성의 풀이 방법을 택했다. 예(禮)의 중시는 통합적 관계의 중시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작업현장에서 ‘노동과 자본’의 갈등 관계의 설정이다. 朴 대통령은 관계를 콘텐츠로 대신했다.
능동적 주체의 실사구시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역사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는 시대의 절박성의 극복을 성찰한다. 역사의 거울에 자신과 공동체를 투영시킨다.
시대적 절박성으로 우선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마주친다. 이는 1636년 12월 28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약 3개월간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3%91%EC%9E%90%ED%98%B8%EB%9E%80
당시 주요 인물로 김상헌은 예조판서이고, 최명길은 병조판서이다. 당시는 예조판서가 외교를 담당했다. 외교라고 해봐야 명나라와의 관계이다. 당시 명(明)과의 예(禮)와 의리를 중시하던 김상헌(金尙憲)이었고, 변수적 실리사상을 주장한 최명길(崔鳴吉)이었다. 김투를 원했던, 아니면 공동체 붕괴를 우선 염려했든 김상헌은 절의강상(節義綱常, 절개와 의리 그리고 삼강오륜)의 정신을 강조했으나, 절박한 상황과 일을 중시했던 실사구시의 최명길은 달랐다.
전쟁은 이기는 게임을 중심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최명길은 경세치용(經世致用, 경전과 시대의 절박성을 실용으로 방점)에 방점을 두었다. 병조판서 최명길은 당연히 기축옥사와 임진왜란으로 싸울 병사가 없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노동자가 귀했다. 최명길은 명분의 강조로 이기지 못할 전쟁 수행을 거부했다. 당시 김상헌은 조선의 주류이고, 또 최명길은 비주류였다. 김상헌이 명분론은 주장하자, 최명길은 ‘일이란 혹 때에 따라 달리지지만(事成隋時別) 마음이야 어찌 진리와 더불어 어기랴(心寧與道違)’라고 했다.
예(禮)를 통한 공동체 유지와 경세론에서 민족공동체 발전을 시도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기본권 중시, 즉 자유주의·시장경제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기독교적 입장은 신과의 일치, 자유 그리고 영생의 프레임으로 국난을 극복한다.(Immanuel Kant, 1997:118)) 여기서 자유는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순교를 택하더라도, 신과의 약속의 도덕율이 강조된다. 물론 도덕률은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다. 책임은 자유를 누리는 자의 의무이다. 책임은 절제를 요구하고, 절제는 자연법, 이성과 합리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신의 왕국 건설에 동참한다. 개인의 광기는 절제로 제어되도록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적 방법으로 현재의 절박한 상황을 반전시켰다. 개인의 발전이 사회의 발전과 함께 공유한다. 명분 중심이 아닌, ‘능률과 실천’에 방점을 뒀다. 개인의 발전을 공동체의 발전으로 승화시킨다. 직업은 귀천이 없고, 각분야의 능률을 시도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각 분야가 계속 전문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를 위해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라는 규정을 했다.
원심력적 확장력과 구심적 수렴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구심력이 없는 원심력은 나가서 돌아올 줄을 모른다. 흩어지기 쉽다. 여기서 헌법의 공화정신이 부각된다. 공화주의는 공화의 측과 심판의 축이 존재한다. 우선 관용의 정신이다. 안전성과 포용성과 여성다움의 원형은 다양한 가치의 ‘공화성’과 관계하고, 반대로 긴장성과 판단성과 남성다움의 각형(角形)은 다양한 가치를 통합하고 시비를 가리는 ‘심판성’과 의미 연관을 갖게 된다.(김형효, 2015③: 299)
공화성이 가치의 다양성과 관계된다면, 심판성은 가치의 통일성과 연결된다. 박 대통령은 정치건달을 철저히 단죄했다. ‘미친 x는 몽둥이가 약이다.’ 광기가 작동치 않으려면 절제가 필요한 상황이다. 어떤 정신문화이든 “공화·공존의 정신을 상실한 심판성 일변도의 가치는 절대주의적 교조성을 가져오기 쉽고, 역으로 심판성을 배제한 공화성(공존성) 일변도는 상대주의적 회의론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게 된다.”(김형효, 2015③: 299)
3. 콘텐츠 혁명의 실천
1)새마을운동.
한편 朴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과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 새마을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민교육헌장을 이념적 지표로 설치하고, 새마을운동을 활화산으로 만든 것이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장관회의에서 제안하면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3대 정신으로 삼았다. 개인과 마을공동체와 관계에서 민족이란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새마을운동에서 민족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있을 수 없다.(김형효, 2015③: 208) 온전한 민족은 객체로서 자기 자신의 주체 속에 가지게 된다. 각각 분리에서 보면 자기 것의 발생은 개인의 경우 성격에서, 민족의 경우에 민족공통의 성격에서 발단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의 자유로 포문을 열어놓았다.
이들이 “융합되고, 혼합되면 개인의 생각과 성격은 민족과 추상적으로 분리시키기 어려운 상태에서 개성과 민족성은 모든 사고에서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개성이나 민족성은 개인이나 민족에게 하나의 운명과 같이가게 된다.”(김형효, 2015④: 182)
한 민족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은 자기 자신을 객체로서 확대하여 재생산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러한 재생산의 과정에서 민족정신이 주체적으로 구체화되여, 민족중흥이 일어난다. 종족의 혁명적 성장이 혁명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서양의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쉽지않는 민족의 풀이지만, 전통 농촌사회의 ‘두레’와 ‘품앗이 정신’에서 객체와 주체 사이 관계가 늘 형성되어왔다. 집단적 게임으로도 적용이 된다.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낸 좌승희(현 한국제도경제학회 이사장)은 “저는 새마을운동을 ‘농촌 개발 게임(Rural Development Game)’으로 봅니다. 일종의 경제발전 게임이지요. 게임은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가정 하에서 끌어간다. ‘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 정책’에서 게임 현상이 나타난다.”(좌승희, 2024.10.28.)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는 마을을 3단계로 구분했어요.(좌승희, 2024.10.28.) “1단계 마을이 ‘자립(self-reliant)마을’, 2단계는 ‘자조(self-help)마을’이고, 맨 아래가 ‘기초(basic)마을’로 아무것도 안하면서 불평‧불만하는 마을입니다. 불평등마을을 인센티브로 평등한 마음을 만들었다. 새마을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3만4000개 마을이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전체 마을에 처음에 철근 한 톤과 시멘트 300포대씩을 주고 새마을운동을 하도록 했어요. 그러고는 사업계획 같은 것도 나와 있지만 절대 그대로 하지 말고 자기 마을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사업을 해서 농촌의 생산성을 높이고 소득이 들어오도록 일을 진행하라고 했단 말이죠. 그리고 6개월 뒤에 대통령이 장관‧교수‧자문위원‧공무원들을 파견해서 3만4000개 마을의 실적을 일일이 다 파악합니다...조사해 보니 전체 마을 중 약 절반이 좀 넘는 1만8000개 마을이 참여를 안 했어요. 그러자 박 대통령은 성과를 낸 1만6000개 마을만 지원하겠다고 했어요. 여기서 인센티브가 들어가는 거지요...인류 역사상 이런 정신을 가졌던 대통령은 없었어요. 이 원리가 바로 인센티브 원리지요.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상을 줘야 그 사람이 더 열심히 한다는 건 상식적인 얘기입니다...다시 말하면 ‘신상필벌’을 하자는 건데 다 반대했던 이유는 표가 안 나온다는 거예요. 하지만 대통령은 ‘내 말대로 하라’고 했단 말이죠. 그리고 그다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지원받지 못한 1만8000개 마을 중 6000개 마을이 스스로 돈을 모아서 새마을운동에 참여해서 성공을 했어요.”라고 했다.(좌승희, 2024.10.28.)
그 민족의 정신을 확대 재생산한다. 민족을 객체로 두고, 주체가 끌어당긴다. 객체를 두고, 주체가 추동한다. 능률은 이성과 합리성이며, 이를 향해 ‘상부상조’를 시도한다. 그 정신을 현재로 가져와 인성교육·시민교육과 연계시킨다. “정(情)을 나누고 상부상조 정신을 바탕으로 한 선현들의 아름다운 나눔 전통인 ‘품앗이’ 체험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인성의 씨앗이 잉태되고, 나눔을 체험하면서 인성의 씨앗은 서서히 자라가게 될 것으로 믿는다.”(최창섭·김인숙, 2024.09.03.)
품앗이 정신을 통해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새마을운동은 실제 이익공동체로 확산시킨다. ‘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 정책’을 편다. 자본·노동·기술을 융합하여, 능률을 극대화하고, 혁명적 돌연변이를 찾아낸다. 물론 자본과 기술이 요구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2월 한국 사절단은 에르하르트 총리를 만나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대가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데 성공하였고, 대일청구권협정으로 1962년 11월 12일 무상 3억불을, 그리고 장기처리 차관 2억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1964년에 베트남 파병까지 이뤄져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참전에 감사하며 미국정부가 1966년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였다. 朴 대통령은 한 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한 것이다.
그들을 통해 생활의 과학화를 시도한다. 인문·사회과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주관적인 결과와 전혀 무관한 지대에 등록하지는 않았다. 객관적 과학철학을 삶의 전영역에 확산시킨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소득증대뿐만 아니라, 공장새마을 소득증대 사회의 확산을 시도한다. 이는 농촌의 근대화작업이고, 도시의 중화학공업 육성이다. 한강의 혁명적 기적이 일어나게 한다. 농촌 소득증대사업은 확장은 더욱 활기를 띤다. “그런 다음에 생활 태도와 환경 개선, 소득 증대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도로 확장과 하천 정비, 농촌 주택 개량, 전기와 전화 시설 확충, 농경지 확장 등 농촌의 생활 기반을 개선하는 활동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주로 농촌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나 차츰 도시로 확대되어 전국적인 운동이 되었다. 운동의 성격도 ‘잘살기 운동’에서 올바른 정신을 강조하는 정신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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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변화를 시도할수록 정치권의 반발은 심했다.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朴 대통령은 ‘내 무덤에 침을 밷어라’라고 응수했다. 새마을운동은 ‘1969년 8월 초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수해 복구 현장을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1970년부터 시작됨으로써 청도군은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發想地)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민족중흥의 실천이면서, ‘잘살아보세’, ‘보릿고개 퇴치운동’ 등의 결실이었다. 그 운동은 또한 통일벼 ‘씨앗론’에서 실현이 된다. 통일벼 품종개량은 과학·기술의 산물이고, 그 원리를 중화학공업에 적용하면, 조국근대화가 달성되는 순간이다.
2) 통일벼의 품종개량.
朴 대통령은 그 민중중흥을 통일벼 씨앗에서 찾았다. 원래 한민족의 씨앗은 동의족의 역사에서 시작된다. 우랄알타이산맥을 기점으로 삶·언어·문화를 영위한 족속들이다. 한민족의 단백질 지도를 작성하고, 식물 씨앗의 단백질 성분을 축출하여 그 DNA를 몸에 주입하면, 한민족의 씨앗은 병으로부터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이들로부터 추출된 단백질은 줄기세포로 치명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바이오산업은 계속 발전을 거듭할 수 있다. 민족의 중흥은 몸 안에서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원리를 산업에 적용하면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다.
같은 맥락에서 식물에도 일정한 지역의 토양에서 성장과 진화를 거듭한다. 여름에는 모든 뿌리와 씨앗이 융성하게 자라지만 겨울이 되면 모든 식물은 뿌리와 씨앗으로 보존된다. 그 씨앗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진화된 모습으로 이듬해 다시 여름을 맞게 된다. 만약 과학·기술로 품종개량이 이뤄진다면 그 씨앗은 혁명적 방법, 아니 돌연변이로 성장하게 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다. 혁명적 중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씨족과 식물을 바탕으로 한민족은 중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인류 역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 구체적 현실을 보자. ‘잘살아보세’, ‘보릿고개 퇴치운동’이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발전된다. 민족개조론이 시행되는 일이지, 자본축적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사회 각분야의 콘텐츠의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관계의 혁명과는 거리가 먼 콘텐츠 혁명으로 이뤄진 것이다.
1970년 통일벼 모종이 뿌려지고, 71년 전국민에게 보급되어, 1977년 600.5만 톤의 쌀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된다. 보릿고개가 퇴치된 것이다.
벼에는 여러 가지 품종들이 있다. 그들 품종은 크게는 열대지역에 잘 적응하는 인디카 품종과 온대지역에 잘 적응하는 자포니카 품종으로 나눌 수 있다. 근래 우리가 밥으로 이용하는 것은 대부분 자포니카 품종이다. 육종학자들이 한 개의 벼 품종을 만드는 데에는 보통 5~10년이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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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업을 서울농대 허문회 교수(1927~2010). <출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가 역할을 했다. 계속해서 “인디카와 자포니카 품종을 3원 교배로 만들어진 잡종 집단으로부터 높은 생산성이 기대되는 벼들이 등장했다. 이 중 우수한 벼 종자를 선발하고 교배하여 세대를 진전시켜 나갔다. 품종 육성에 걸리는 기간을 줄이기 위해 여름에는 한국에서, 겨울에는 국제미작연구소(필리핀 로스바노스)에서 벼를 재배함으로써 1년에 2회 세대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육종사업은 농촌진흥청과의 협력을 통해 효과적 극대화했다. 그 결과 1971년에 ‘통일벼’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1972년부터는 농가에 보급되어 재배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쌀이 턱없이 모자랐다. 외화 부족으로 부족한 쌀을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쌀을 자급하는 일은 국가의 최우선 정책과제였다...‘통일벼’는 당시 다른 품종들보다 30% 정도 생산성이 높은 다수확 품종이었고, 병해충에도 강한 특성이 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통일벼’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정부 차원에서 쌀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1976년에 ‘통일벼’의 재배 면적은 전체의 44%로 확대되면서 평년보다 21.8% 증가한 521.5만 톤의 쌀을 생산해냈고, 역사상 최초로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게 되었다. 1977년에는 600.5만 톤의 쌀을 생산한 결과였다. 현미쌀의 생산성은 현미 기준으로 ha당 5.31톤으로서 세계 1위에 이르게 되었고, 쌀의 자급률은 113%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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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K-종자의 R&D는 활발하다. “아시아종묘 ‘한국 대표’ K씨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연구·개발, 1992년 설립된 아시아종묘는 △경기 이천 장호원과 전북 김제에 육종연구소 △전남 해남에 채종연구소 △전남 영암에 품질관리센터 △경기 하남에 도시농업백화점 ‘채가원’ 등을 두고 있다. 류경오 아시아종묘 대표는 아시아종묘를 ‘한국 대표’ K씨드(seeds) 회사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목표 달성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는 2024년 4월 기준 품종보호출원 227건, 품종보호등록 150건, 품종신고 1521여 건에 달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현재 주력 분야는 바이오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기능성 채소’ 종자 육성이다. 지난 9월에는 ‘혈당 상승 억제’ 효소인 AGI(알파 글루코시다제 억제제) 성분이 풍부한 고추 품종으로 천연물 소재 건강기능식품 원료 ‘일릭시(ILIXY)’를 개발했다. 또한 최근 잠이 오는 상추 씨앗을 ‘천연 수면제 제조’ 바이오 업체에 공급하기로 확정했다.”(김수정, 2024.11.21.)
한편 민족중흥으로 대한민국이 세계 중심국가로 이전하는 길목에 서게 되었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원인의 평등에 관심을 가진다. 자본& 노동의 적대적 갈등 관계가 아니라 민족 안에서 기회의 균등의 통합으로 수렴케 한다. 각 분야에서 일에 대한 만족과 더불어 민족중흥의 일어난다. 개인은 일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민족중흥의 일어난 것이다.
마르크스적 혁명이 아니라,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가정·학교·시민 등 교육이 활성화되고, 민족의 의식혁명이 이뤄진다. 朴 대통령은 ‘반공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는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4. 국민교육헌장으로 민족중흥의 실현.
현재 사문화된 국민교육헌장의 복원은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 국민교육헌장의 복원은 당시 시대적 절박성을 적극적으로 풀이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절박성을 더욱 부각시킬 때 복원이 될 수 있다.
결국 새마을운동은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고, 통일벼로 보릿고개를 퇴치시킬 수 있었다. 더욱이 朴 대통령의 각종 교육은 사고의 과학화, 산업의 과학화를 이뤄 명실상부한 전문사회를 앞당겼다. 더욱이 갈등적 관계성을 뒤로하고, 사회 각분야의 콘텐츠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로 회기한다. 사회 각분야의 북한식 아마추어적 관계사회가 성황이다. 자본&노동의 갈등사회가 만연하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된 이유로 첫째, 조상의 훌륭한 전통과 유산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둘째, 물량적 발전에 비하여 정신적 가치관 사이의 조화로운 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셋째, 국민의 국가의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되어 민족 주체성이 결핍되어 있으며, 넷째, 국민교육의 지표가 불분명하여 학교교육에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시대적 ·환경적 여건의 불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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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국민교육헌장’은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 모든 교육의 근본 지표가 될 필요성이 존재한다. 본 헌장은 “초장에서 한민족의 긍지와 사명의식을, 중장기에서는 생활의 규범 ·덕목을, 종장에서는 조국통일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헌장의 기본정신은 ① 민족주체성의 확립, ② 전통과 진보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 ③ 개인과 국가의 조화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으로 집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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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대인의 삶은 국민교육헌장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헌장으로서 소외된 현대인을 치유할 수 있다. 인성의 품앗이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소외현장을 찾아가보면 현대인은 너무나 많을 것을 알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주체성, 분주하게 일에 파묻힌 사람은 으레 자기를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건강이 나빠지거나 또는 일이 뜻과 같이 않을 때 인간은 문득 자기를 깊이 의식하며 자기 성찰의 세계로 침잠한다.”(김형효, 2015④: 175) 뿐만 아니라, 안보위협까지 느끼는 이때일 수록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음미하게 된다.
민족이나 국민은 하나의 유기체이기에 영원히 하나의 생명으로서 역사 속에 살아가야 한다.(김형효, 2015④: 177) 이때 개성이나 민족성은 개인이나 민족에서 하나의 운명과 같이 된다. 더욱이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가기 위하여 가장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성공 모델이 될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을 민족주체사상의 정립기준으로 삼는다. 김 명예교수는 “①신바람을 불러일으키되 그것이 광기화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길들여지는 방향에서 이뤄져야 하고, ②유아독존적인 최고의 정신보다 공동체의 화평을 가져오는 최적의 정신에서 그 기준이 설정되어야 하고, ③이 땅을 인간의 대지가 되도록 모든 엘리트주의·민중주의·계급주의와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본주의와 인도주의가 민족 주체사상의 정립을 위한 공준(公準)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김형효, 2015④: 204)
국민교육헌장의 실천으로서의 새마을운동은 “①한국 근대사에서 비로소 민중적 요구와 한과 접목되어 민중의 한인 빈곤, 무지, 난리, 사회적 푸대접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능성을 입증해주었다. 그 운동은 동시에 근대화의 의지라는 지도 이념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자기 창조적인 민족운동으로 건전하게 승화될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②새마을운동은 ‘최고의 정신을 숭상하기보다 ‘최적’의 정신을 사랑함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게 때문이다. 그동안 참다운 새마을 지도자들의 노력과 헌신은 ‘누가 집단에서 가장 최고냐’하는 물음에 대한 자문자답으로 일을 해온 것이 아니라 ‘누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최적의 정신으로 일을 할 수 있느냐’하는 마을 단위의 생각이 집약되어 추대된 것이다, ③이 운동은 아울러 다양한 종교를 갖고 있는 이 나라에 사회 통합의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종교의 통합은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의 장벽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지만, 단지 수동적으로 서로 헐뜯지 아니하는 것만 해도 성공이다.”라고 한다.(김형효, 2015③: 205∼6)
그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모든 종교가 갈등 없이 국가 발전을 위하여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갈등보다는 통합으로, 관계보다는 콘텐츠에서 일이 행복을 얻도록 한다. 더욱이 새마을운동은 국민 모두에게 실리를 줄 수 있고, 또 사회 가치의 통합이라는 명분을 찾을 수 있기에, 국민적 생활의 실리 추구와 정신 문화적인 가치 명분의 통합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 새마을운동의 행동강령으로서 국민교육헌장이 작동한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 역사를 창조했다.
국민교육헌장의 이념과 실천 그리고 성과가 분명하다. 국민교육헌장으로 민족중흥을 계속 실현코자했다. 더욱이 3.1운동 독립선언서와 국민교육헌장은 시기는 다르지만, 제헌헌법의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와 맥을 같이한다. 국민교육헌장은 분명 ‘민족중흥’의 기상을 담았다. 이는 세계 공급망생태계 안에서의 민족중흥이며, 성공적 의식혁명이었고, 현재도 적용할 수 있는 사회 전반의 혁신선언이다.
참고문헌
김수정(2024.11.21.), 〈5년간 2兆 투자...‘농업의 반도체’ K-종자 키운다〉, 《조선일보》.
김형효(2015), 『김형효 철학전작③ 한국 사상 산고』, 소나무.
김형효(2015), 『김형효 철학전작④ 한국 정신사의 현재적 인식』, 소나무.
좌승희(2024.10.28.)〈특별대담-上, “올 노벨경제학상 오판..한국경제 악영향 부를 수도”〉, 《스카이데일리》.
좌승희(2024.10.29.), 〈특별대담-下, “박정희 시대 독재는 경제 착취 아닌 시장원리 극대 화”〉, 《스카이데일리》.
최창섭·김인숙(2024.09.03), 〈‘인성에서 품앗이로, 그리고 품앗이는 인성을’ 잉태하는 첫 ‘인- 품 나들길에 서며’〉, 『인-품(인성에서 품앗이) 나들길에 서며』, 예인미술.
Kant, Immanuel(1997),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https://ko.wikipedia.org/wiki/%EB%B3%91%EC%9E%90%ED%98%B8%EB%9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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