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걸 보고 또다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자신 데안토에 독자로만 남겠다고 했으나 이것만은 올려야 겠다. 또다시 놈현 일가에 대한 배신감이 든다
먼저 권오석 개인을 살펴 보고저 한다;
권오석의 양민 학살 사건은 북괴의 남침으로 우리 국군과 유엔군들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갔을때의 일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전쟁이 약간의 소강 상태에 놓였을때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에서 북괴군들이 점령하고 있었을때 권오석(권양숙의 부)에 의해서 저질러진 무고한
양민 학살 사건이다.
권오석은 동네 주민 110여명을 강제 연행 하여 동네 외딴집 곡식창고에 가두어 놓고 재판장 자격으로
직접 재판을 하였으며 1948년 친구들 3명과 공업용 알콜을 탄 막걸리를 마시고 친구 한명은 사망하고
권오석은 실명한 사건으로 앞을 못보는 상황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주민들의 손바닥을 만저서 군살 배김의
상태로 A급 B급 C급으로 분류 하였으며 A급은 사형 B급은 부역 C급은 방면 하는 재판을하였으며
마산 으로 인민재판을 받으러 간다며 9명을 데리고 가다가 산골 으슥한곳에서 살해 했으며 그후 2명은
다른곳에서 발견된 사건 임
대선당시 노후보 여성특보 이은희는 권오석이 6.25당시 공산군의 부역을 강요받아 수복후 구속 됐으나 곧
석방 되었고 이때 권양숙은 2살이여서 전혀 모르며 그후 5.16후 사회불안요소 격리 차원에서 구속되어
71년 마산 교도소에서 옥사 했다고 했다.
그러나 대검 수사국 . 좌익 사건 실록에는 권오석은 이미 1949.6월1일 노동당에 가입하여 노동당
창원군 선전 위원장 부위원장.과 전 반동분자 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위원을 역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괴군이 점령 하자 자발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양민 학살을 주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군양숙의 나이는 네살이였다고 유족들은 증언을 하고 있슴.
또한 권양숙의 母 박덕남(당시31세 생존)은 진전면 여성동맹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항상 권양숙은 어머니의
치마를 붇 잡고 같이 다녔다고 함.
여성특보 이은희는 거짓말을 한것이다
권오석은.1950년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 받고 복역중 1956년 폐결핵과 양안 실명으로 형집행 정지로
석방 되었다가 1961년 재수감 되어 1971년 마산교도소에서 옥사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5.16후라는 말은 전혀 거짓인 것이다
당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원창 의원의 질의에 송정호 법무 장관이 사실 확인을 하였다함
또한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장인의 묘를 찾은 자리에서 "얼굴도 못본 사람이지만 그당시 좌 우로 싸운것은
양쪽 모두가 피해자"라는 말을 하여 유족들을 분노케 했다.
유족 대표인 변재환씨는 "뺨을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이 같은 피해자일수 없다"라고 한다
더욱 울분을 토하게 하는 것은
유족들은 사실 규명과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 하자라고 하는데.
권양숙은 "나는 어려서 기억 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고
권기문은 "그당시에 있었던 일이라 확인할길이 없다"라고 발뺌만 하고 있다
유족들은 권양숙의 母 박덕남이 멀정한 상태로 살아 있기 때문에 확인할길은 충분 하다고 하고 있다
또한 동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양민들이 학살된 지역에서 산을 하나 넘으면 권오석의 묘가 있는데 전경 두명이 서 있는 모습이 가끔 보이며.
경찰차가 가끔씩 순찰을 돌고 있다고 한다
반면 권오석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묘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끝으로 양민학살 진상규명 위원회 위원장 변재환씨는 "권양숙이와 일파들이 지애비의 과거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뉘우치고 사과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용서 할수 있다" 또한 "권오석이 형집행 정지로 집에 와 있을때
권양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기에 아버지에게서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 판단 하고 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