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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1~4

작성자Legio Mariae|작성시간06.03.16|조회수125 목록 댓글 0

출처 : 시대유감
cafe.chosun.com/korea

 

선거만 했다 하면 90% 이상의 몰표가 쏟아지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심각한 문제이다. 호남인들은 이런 호남 몰표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궁색한 변명과 합리화를 하면서 한편으로 책임의 전가에 급급한데 호남의 이런 주장들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이 문제에 대한 호남의 주장을 대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거시 나타나는 지역별 몰표 현상은 호남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남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전략으로 채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전략의 요체는 선거를 지역대결로 몰고 가서 호남표를 포기하는 대신에 영남의 몰표로써 이긴다는 것이고, 이 계산에는 영남의 인구가 호남보다 많기 때문에 영남의 70%로써 호남의 90%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지역감정에 기반한 선거전략의 실행으로 영남정권은 계속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호남에 대한 차별과 고립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호남은 생존적 차원에서 정당방위적인 몰표를 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호남의 몰표는 영남의 몰표에 대한 반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자기 지역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영남 정권의 계산된 전략에 의해 영남에서 먼저 나타난 것이고 호남의 경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약자의 저항권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에 대한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론이다. 역시 일관된 영남책임론이고 호남무죄론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우리나라 선거에서 지역적 표의 집중 현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선거는 언제부터일까? 김대중씨가 박정희와 경쟁했던 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별 지지도 집중현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광주가 광역시가 되기 전이니까 호남은 단순히 전북과 전남이었다. 전남에서 박정희 47만 9천표, 김대중 87만 4천표, 전북에서 박정희 30만 8천표, 김대중 53만 5천표였다.

반면 영남은 대구가 광역시가 되기 전이어서 대구/경북, 경남, 그리고 부산의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득표율은 대구/경북에서 박정희 133만표, 김대중 41만표였고 부산에서 박정희가 38만표, 김대중이 30만표를 얻었다. 경남은 박정희 89만표, 김대중 31만표였다.

전체적으로 영남에서 박정희는 72%, 호남에서 김대중은 64%의 득표를 했다. 상대적으로 자기 지역 출신에 대한 지지도는 이때도 영남이 더 높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성격에 있어서 이때까지만 해도 노골적인 전라도 몰표, 경상도 몰표라는 선거 정서는 보이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가 지역간 대결 양상으로 치닫지도 않았다. 영남이 박정희의 고향, 호남이 김대중 후보의 고향임을 감안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자기 고향 출신 후보에 대한 호감의 표현 정도를 넘지 않았던 것이다. 극히 상식적인 홈그라운드의 이점에 불과했다.

그 전인 63년도 혁명위원회 의장 박정희와 윤보선 전대통령과의 대결은 역사상 가장 미세한 표차를 보인 선거였는데 두 후보의 표차이는 겨우 15만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가 이긴 선거구는 오직 호남과 영남뿐이었고,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제주에서는 윤보선 전대통령에게 전패했다. 박정희는 겨우 15만표 차이로 이겼는데 이때 호남에서만 박정희는 35만표를 이겼다. 호남은 박정희 승리의 주역이었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텃밭으로 떠올랐다.

지금 호남 사람들은 영남정권, 특히 박정희가 72년 선거에서 김대중한테 신승하고 난 후에 김대중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출신지역이고 정치적 기반인 호남을 차별하고 고립시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호남은 오히려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준 지역이었고 김대중과의 대결에서도 박정희한테 그런 대로 만족할만한 지지를 보여준 지역이었다. 그리고 미세한 차이로 이긴 것으로는 윤보선과의 대결이 더욱 아슬아슬했다. 때문에 선거 이후에 김대중을 두려워해서 호남을 전략적, 의도적으로 박정희가 고립시켜 나갔고 호남의 지지를 아예 포기하고 영남에만 의존하게 되었다는 호남인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도 호남을 포기하고 영남의 지지만을 자신의 정치적 토대로 삼아야 할 어떤 이유도 명분도 필요성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의 득표 결과는 농업지역인 호남에서 박정희의 지지가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이다. 윤보선과의 대결에서는 호남은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했고, 김대중과의 대결에서도 충분한 지지도를 보여준 것이다.

영남과 비교해 봤을 때 호남에서 박정희가 얻은 득표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박정희의 중농 정책이 호남인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과정이 오늘날 호남인들이 한 목소리로 비난하는 것처럼 영남우대/호남차별, 공업우선/농업홀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농업중시는 당시의 농촌사람들한테 진심으로서 전달이 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측면에서의 호남차별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심정적으로도 그렇게 다가가기 않았던 일이다. 그것은 농업인구가 대부분인 호남사람의 박정희에 대한 호감이 잘 보여주고 있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2)

 

호남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한 타지역 사람들의 배타와 냉대를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71년의 대선이 시작되기 전부터였다. '하와이, 깽깽이'라는 속어가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것으로 유포되고 '라도 기질'이 사람들 사이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라는 것이 그 무렵에 청년기를 보냈던 이 나라 노장층의 공통되는 기억이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516혁명으로 집권하고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무렵에, 그리고 1차 5개년 계획이 겨우 완료된 시점에서 경제개발의 실제적인 성과가 가시화 되지도 않았던 무렵에 이미 전라도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64년 선거에서 호남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이 호남을 일부러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경제정책을 일부러 시행했을 리는 없고 당시의 경제 관료들의 증언이나 회고를 통해서 보더라도 권력층 내부에 그런 정서는 전혀 나타난 적이 없었다.

71년 김대중과 붙었던 대선에서도 확인된 호남에서의 만만치 않은 박정희 인기는 박정희 정권이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호남차별 정책을 시행한 바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설사 공업의 발전에 따른 도농간의 소득격차가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도시의 공장에 취업하기 위한 이농현상이 대규모로 발생하고는 있었다 해도 대표적인 농업지역인 호남에서 그것이 정권차원의 고의적인 차별정책의 산물이라고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한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국민 대중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간 전라도 기피 현상은 집권 세력의 출신지를 가지고 성격을 규정하는 훗날의 지역정권론이 태동한 것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7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당시의 박정희 정권을 '영남정권'이라고 칭한 사람은 없었고, 특정 지역인들에 의한 패권정치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정권이나 정치인에 대해서 '영남' 혹은 '호남'이라는 출신지역의 레테르를 붙이는 관행은 80년 이후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그렇다면 전라도 기피현상, 라도 기질에 대한 혐오는 누구에 의해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유포되기 시작했을까?

지금 호남인들은 라도 기질이라는 것이 영남정권에서 호남을 고립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유포시킨 악랄한 정치공작 내지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묘한 세뇌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호남인들은 전혀 라도 기질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고, 또 라도 기질로 해서 타지역 사람들한테 척이 진 일도 없는데 소수의 특정인들이 이것을 꾸며내고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퍼뜨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범은 영남정권과 영남인들이며, 그 발원지 역시 영남지방이라는 것이다.

자, 과연 이런 주장이 사실일 수 있는지 살펴보자. 60년대 중반이면 우리가 월남에 파병할 무렵이다. 겨우 경공업이 가동되기 시작해서 생필품의 국산화가 이루어 진 시기이다. 농촌의 난방이나 취사용 연료는 대부분 산에서 채취한 나무나 솔잎이었고, 도시는 연탄의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전기 사정은 열악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예고 없는 정전이 되던 시절이었다.

흑백 티비의 국산화가 꿈이던 시절이었고 수입 브라운관을 사용한 티비의 조립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식의 자급은 요원했고 농촌의 소출량은 국제 수준을 훨씬 밑돌았으며 봄의 춘궁기에는 악명높은 보리고개가 상존하고 있었다. 매년 여름마다 코레라, 이질, 뇌염 등의 전염병이 농촌 지역을 휩쓸었고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비참한 농촌생활을 피해서 이농현상이 일어난 것은 60년대 초반부터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고향을 크게 벗어날 일이 없는 농경사회의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러 고장 사람들이 뒤섞이면서 서로 부대끼는 경험을 하게된 것이 육이오 동란이었다.

이때 타지로 흘러 들어온 것은 대개 이북 사람들이었고, 이남 사람들 중에 피난을 내려 온 사람들은 유엔군의 영토 수복에 맞추어서 거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다수 지역 사람들의 단기간 혼입은 여러 가지 갈등과 마찰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거기서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텃세'이다.

즉 원래부터 그 곳에서 살던 토박이들의 위세와 유입자들의 위축이다. 그리고 생활 터전이 이미 있는 토박이들과 생존책을 새로이 강구해야 하는 유입자들의 입지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지역 기질의 왜곡이 나타나게 된다. 즉 토박이들과 유입자들은 각자의 기질 중에서 특수상황에 필요한 부분만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북 사람들인 경우에 이 기질이 거칠고 사납고 전투적인 면에서 두드러졌다. 평안도 기질, 함경도 기질이 남한의 터줏대감들과 심각한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육이오가 가져온 지역혼합은 전쟁이라는 절박하고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에 따른 타의적인 강제 이주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외지인이면서도 토박이들한테 사양이나 양보 없는 도전이 용인될 수가 있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외지인 신세라 해도 죽기살기식의 생존투쟁이 한편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토박이들을 치받아도 '그럴 수도 있는 일' 또는 '오죽했으면'하는 동정적 용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은 이런 혼합을 쉽게 융화되게 만들었고, 이북사람들은 재빨리 타지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반면에 호남은 육이오때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었다. 인민군의 남침시 호남을 경유한 것은 6사단 뿐이었다. 오직 1개 사단의 인민군만이 무인지대를 소풍가듯이 호남을 통과해서 진주, 마산 방면으로 진격했다. 호남에 잔류해서 호남을 행정적으로 통치한 병력이나 후방 행정요원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육이오때 호남은 인민군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인민군이 한번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속성상 농촌 사람들은 피난에 소극적이다. 후방으로(가봐야 부산뿐이지만) 피난을 간다해서 뾰족한 수가 없고, 최소한 농촌에서는 굶지는 않는다는 보장이 있기 때문에 호남인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육이오 전쟁 동안 대구, 부산을 낀 좁은 낙동강 지역에 전국 사람들이 몰려들어 뒤섞인 가운데 서로 치열하게 부대끼던 그 시기를 호남은 홀로 조용하게 넘긴 셈이었고, 이때 타지방 사람과의 혼합 체험을 가질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북사람들을 포함해서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 사람들은 피난생활을 통해 서로를 접촉하고 부대낀 소중한 체험을 이미 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성질과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부산넘 뱃놈성질은 어떻고, 평안도 아바이는 어떻고, 강원도 감자바우는 어떠하다가 대충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하와이 깽깽이의 정체는 이때까지는 베일에 쌓여 있었다. 호남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초창기에 이번에는 모든 지방이 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데 유독 호남만 대규모로 보따리를 싸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의 주무대가 호남이 된 것이다. 육이오때는 영남만 빼고 전국민이 움직여 다녔지만 60년대에는 전국이 제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데 호남만 집에 불난 사람들처럼 쫓아다니게 된 것이다.

이건 필연적으로 소수의 외지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토박이들의 텃세를 각오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육이오때 처럼 전국이 한꺼번에 움직인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으로 피난내려 온 이북사람들이 타지에서 누릴 수 있었던 땡깡과 곤조, 개기기, 앵겨들기가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소수자, 무산자, 하층계급으로서 하나 둘씩 밤열차의 삼등칸에서 낯설은 타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타지에 온 유입자로서는 처음으로 어떤 특권도 갖지 못한, 소수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라도 기질이 과거의 이북넘들 기질보다 심각하고 끈질긴 만성질환으로 착근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타국에 떠돌면서 받았던 질시와 냉대의 원인이 된 유대인기질이나 유럽 각국에서 천대받았던 집시들의 집시근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전라도 기질의 본질이 무엇이던지 간에 그것은 타지에 흘러 들어온 외지인이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받게 마련인 소수 근성인 것이다. 다수의 성질과는 이질적인 소수 그룹의 속성은 주류인 다수로부터 배척받게 마련이고 그것에는 '비정상, 불량, 열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전라도 기질의 실체는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특정 지역 사람, 특정 정치 세력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조작의 산물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 땅에 새로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3)

 

육이오 동란의 피난생활이라는 대규모 인구 혼합의 체험을 통하여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현지인과 외지인이 어느 정도 뒤섞인 채 안정을 이룬 상태가 되었다. 즉 순수한 증류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불순물이 뒤섞인 상태의 안정이었다. 유독 호남만이 클린한 상태의 순수한 호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육이오 이후 한국은 어느 지방 사람이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외지 또는 타향이라는 이질감을 크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왜냐 하면 이미 한번 크게 섞인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남은 타지인이 들어가면 당장 표가 났다. 호남은 혼혈되지 않은 호남인의 순수한 호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이유에서 제주도도 그렇다. 제주도는 내지인이 발붙이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타지인의 착근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대단히 배타적이고 텃세가 강하다. 그 다음 텃세가 강한 곳이 호남이다. 당연히 이 두 지방은 외지인들과 대량으로 뒤섞여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타지인이 호남에 들어왔을 때 그런 것처럼 호남인이 타지에 가도 금새 표가 났다. 뭔가 이질적인 요소로 겉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부대껴본 적이 없는 낯선 속성이기 때문이다. 면역체계에 입력되지 아니한 새로운 병원체인 것이다.

여기에 시너지효과를 가져온 것이 내가 다른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 군대에서의 '전라도 고참'이다. 호남 사람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군에서의 '전라도 고참'의 악랄함은 그 시대에 군대를 갔다 온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공통된 체험이고 기억이다.

이것이 가져온 효과와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호남 배척의 가장 큰 이유로 나는 이것을 꼽는다. 물론 군에서 '전라도 고참'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고 군대 문화의 한가지 특성으로 자리잡은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별도로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농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유입에 호남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 그리고 호남인들은 전쟁 중에 타지역 사람들이 겪은 혼합의 체험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타지로의 유입이 개별적이고 소규모적이고 분산된 것으로 진행되어 하나의 집단으로서 힘을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의 군에서 형성된 '전라도 고참 공포증'이 전국적으로 호남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고착시켰다는 점등이 '전라도 기피 현상'의 주원인이다.

그리고 라도 기질에 대한 공감과 확산은 그야말로 국민대중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퍼져 나갔고, 여기에는 어떤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배경이나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영남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어떤 증거나 정황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전라도 기피현상과 라도 기질에 대한 배타는 영남에서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영남에서만 있었던 현상도 아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은 증거를 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시기적 순서로 제일 빠르기는 서울이고, 강도로써 제일 강하기는 충청도였다고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영남은 전라도 기피 현상이 그리 심하지 않은 지역이다. 그리고 호남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봐도 타지 생활에서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겪은 차별이나 설움이 영남이 제일 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영남인이고 40년 이상을 영남에서 살아왔지만 전라도 차별 의식을 별로 대면하는 경우가 없다. 물론 완전히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우려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표면적인 전라도 혐오는 없다는 것이다. 영남 사람 마음 속에 그런 정서는 별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구름은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지역 감정 바로 보기'나 '영호남 갈등 문제' 또는 '동서 화합 문제'라고 붙이지 않고 '호남 문제'라고 결정한 것은 결코 영남과 호남 사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영남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일도 아니기 때문이고, 이건 호남과 호남을 제외한 전 대한민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호남 문제'라는 것이 가장 본질에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전라도 차별이나 호남 기피는 영남이 주도한 것이 아니며, 영남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것도 아니고, 영남에서 제일 극심했던 것도 아니고, 영남 정권이나 영남출신 대통령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라는 것. 이것을 우선 밝혀 놓고 다음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4)

 

대통령 선거가 아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역 몰표 현상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87년 김대중이 미국에서 돌아와 평민당을 창당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에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민당이란 지역 정당이 출현하기 전인 87년까지 있었던 일곱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호남에서 여당이 진 적이 없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호남에서도 집권당은 항상 과반수 이상을 당선시켰다. 호남에서의 여당 당선율은 전국의 평균율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김대중의 평민당 출현 이전에는 선거에서의 지역감정에 의한 몰표라는 것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에 지역감정을 이용한다거나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에만 매달린 맹목적이고 무조건이고 감정적인 투표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 선거에서의 투표 형태나 정당별, 지역별 득표율로 볼 때에 한국의 정치역학 관계에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바로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민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등장한 지역 정당이었다. 왜 평민당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역정당이며 순전한 호남정당에 지나지 않았느냐 하면 창당의 목적이 김대중의 출마를 위한 것이었고 그 토대는 바로 호남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김대중은 호남의 무조건적 맹목적 지지라는 특수 조건 한가지를 보고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고, 평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평민당에 끌어올 수 있었던 대부분의 지지세력이 오직 호남인들 뿐이었다. 김대중이 새로 만든 평민당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김대중의 출마에 반대하는 호남 출신의 정치인은 그것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남출신의 국회의원 또는 정치 지망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대중이 호남출신 정치인들의 생사여탈지권을 가질만큼 원래 카리스마가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87년의 김대중에게는 호남출신의 국회의원들을 죽이고 살릴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7년전에 있었던 광주사태였다. 광주사태를 통해 응축된 호남의 한이 김대중에게 기대와 희망으로 집중된 탓이고 이것은 거의 신앙적인 염원이 되어 있었다. 이런 한의 상징으로서의 김대중의 행보에 방해가 되거나 협조하지 않는 인물은 호남에서 용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러한 정서가 전국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오직 호남인들에게만 통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을 통한 염원의 실현 - 호남 차별과 전라도 기피의 설움을 해소하는 것 - 은 전라도인만의 비원이었지 타 지방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정서적 합일이나 공감대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호남 외에는 김대중의 출마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분위기였다. 후보단일화가 전국민적 요구요 염원이었고, 그 단일화의 주류는 김대중의 사퇴와 김영삼으로의 단일화였다. 이 후보단일화와 김대중 출마의 염원은 바로 대한민국 전체와 호남의 염원이 서로 대립하여 충돌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대중은 629 선언 이전의 출마포기 선언을 뒤집고 평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에 출마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나라의 나머지 전체와 대립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처절한 호남대 대한민국간 전쟁의 시발이었다. 아직도 그 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그 모든 책임이 김대중 한사람에게 있다고 본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거의 불가피하게) 확산된 전라도 혐오증과 광주사태로 응축된 호남인의 한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자산으로 확보하여 철저하게 이용한 끝에 결국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김대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했던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호남의 한을 풀어주지도 않았고, 당선만 되면 1년 안에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쳤던 지역감정 문제, 동서갈등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았다.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고 심화시켜서 이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망국적 병폐로 만들어놓고야 말았다.

김대중은 호남을 철저하고 이용하고 잔인하게 배신했다. 김대중은 호남의 공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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