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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투 5~8

작성자Legio Mariae|작성시간06.03.17|조회수144 목록 댓글 1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5)

 

그 길고도 잔인했던 6월이 하루 남았던 날, 군부 독재권력의 항복 소식이 전 국민의 귀를 때렸다. 노태우의 629선언, 직선제 수용. 국민들은 믿기지 않아서 테레비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고, 길거리의 라디오 스피커 앞에까지 행인들이 모여들었다.

노태우는 승산이라고는 1프로도 없는 모험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직선제를 해서 광주사태를 일으키고 집권했던 전두환이 지명한 후계자 노태우가 이긴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어림없는 일로 보였다.

그만큼 당시에 직선제 선거의 부활과 국민의 선택에 의한 정부의 정통성 회복, 그리고 군부 정권의 종식은 전국민의 염원이고 소망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암흑의 세월 동안 수많은 민주 투사들이 희생되었고, 국민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 6월의 항쟁은 얼마나 가열차고 고난스러운 것이었냐 말이다.

민주주의 실현과 군부정권의 종식, 평화적 정권교체는 대한민국 4천만 국민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혐오증과 호남 기피증에 의해 축적된 설움과 광주사태를 통해 응축된 호남의 한, 그리고 그것을 해소해야 한다는 호남의 염원은 그것이 비록 강렬하고 생존적인 것이고, 절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민주화의 열망에 비하면 지역적인 염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전체의 염원보다 전라도의 염원이 우선될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4천만 한국인의 한보다 호남의 한이 중요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양자가 부딪힐 때는 후자가 양보를 해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순리였다.

그러나 87년 대선에서의 김대중 출마와 평민당 창당은 호남의 염원을 대한민국 전체의 염원과 정면으로 충돌시켰다. 호남을 나머지 전체 한국과 대립되는 반대편 축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김대중이 한국과 호남에 저지른 죄악의 으뜸이다.

87년 이후로 호남은 정치적으로 나머지 한국의 적이 되어버렸다. 호남의 죄는 87년에 김대중을 지지한 죄였다. 그래서 노태우 6년의 쓰라린 세월을 더 참아야 하게 만든 죄였다. 그에 대한 분노가, 그 허탈함이, 그 허망함이, 그 좌절감이 이후 한국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비틀고 왜곡시키고 말았다.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 세력과의 혼혈을 가져와서 나중에 누가 편이고 누가 적인지 이삭과 쭉정을 가려낼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87년 선거에서의 민주화 세력의 패배가 불러 온 것이 와이에스의 3당 합당이고, 그것의 역풍으로 보게 된 것이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정책공조, 연합정권의 탄생이다.

과거의 청산도, 학살자에 대한 처벌도, 독재정권의 청산도, 역사 바로세우기도, 지랄이나 나발이나 꼴갑이나 육갑이나 모든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 짬뽕 국물에 말은 비빔밥이 되 버렸다.

바야흐로 개판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학살의 주범, 독재 정권의 수괴가 민주화 대통령을 가리켜 주막강아지라 하고, 문민대통령이 이 수괴를 지칭하여 왈 골목강아지라 하는 목불인견의 참상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은 87년 평민당의 창당부터이며, 모든 책임은 출마를 강행한 김대중에게 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호남인들은 그 책임이 영남인에게 있다고 한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6)

 

2002년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부산 사나이 노무현을 95%라는 나와서는 안 되는 지지율로 당선을 시켰다. 이회창은 1%에서 2% 사이를 밑돌았다.

노무현과 이회창이란 두 후보의 인물 차이가 과연 95 : 1이나 되는 것이 정상이냐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호남인들 대답이(물론 네티즌들의 글에 의한 거지만) 이회창이 문제가 아니라 한나라당이란 정당에 모여있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광주의 주범들, 학살자들, 그리고 과거의 부정부패 정권의 인물들이 그대로 모여있는 정당이 한나라당인데 단 한표인들 지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오히려 1%라도 이회창 찍은 넘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분개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은 신한국당이다. 신한국당의 전신은 민자당이고 민자당은 알다시피 민정당과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다. 그러니까 한나라당은 과거 박정희 세력부터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에 김영삼의 민주화 세력이 혼혈된 짬뽕국물당이다.

그런데 이 짬뽕국물당 소속의 박계동의원이 1995년에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했다. 물론 이런 폭로가 김영삼의 내락이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박의원의 비자금 폭로는 광주사태의 두 수괴에 대한 김영삼의 처벌의지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18특별법을 제정한 문민정부는 96년 2월에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광주사태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혐의로 기소해서 28차례의 공판을 거듭한 끝에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이어진 항소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의 확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감방에 들어갔다.

광주사태의 희생자들과 호남인의 복수는 영남정권의 영남대통령이라고 호남인들이 그토록 욕을 해댄 김영삼과 단 1%의 지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정당이 주도하여 이루어낸 것이다.

누구도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끌어내서 사형,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게 하고, 무기징역, 17년 징역의 확정판결을 끌어내서 진짜로 감방에 처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과 민자당은 해냈다. 성공한 쿠테타를 처벌한 세계 정치사 초유의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해서, 성에 안차서 그 정도로는 1%의 지지도 아직 보낼 수 없다고 하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95%의 지지를 보낸 정당, 새천년민주당이 무엇을 했는가 보자. 그 정당의 창설자이고 오너이고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대통령에 출마하자마자 전노 사면을 떠들고 나왔다. 97년 5월이다. 이것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층을 흔들기 위한 김대중의 선수였다.

할 수 없이 표를 지키기 위한 교육지책으로 이회창도 9월에는 전노 사면 쪽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회창의 사면제의를 한마디로 거부했다. 이회창으로서는 쓴잔이었다.

도대체 광주 사태의 한을 풀어야 하는 사람이 누군 지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영남출신 대통령 김영삼이 독한 마음을 묵고, 숱하게 정적들을 만들면서, 온갖 역풍을 뒤집어쓰면서 집어넣은 두 학살범을 김대중은 단순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무위로 돌리려고 들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에 대해 호남인들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당선되자마자 당선자 신분으로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노 사면을 정식으로 요구했고 김영삼은 두 사람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766일, 노태우는 783일 동안 콩밥을 먹다가 나왔다. 두사람이 전직대통령 신분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당당하게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호남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피를 토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전노가 전직대통령으로 폼을 잡고 단상을 장식한 그 취임식에 박수치기 바빴다. 피를 토하기는커녕 기뻐 춤을 추었다. 나는 그것으로써 호남인들이 전노를 용서한 줄 알았다. 김대중의 전노 용서와 학살 세력에 대한 화해를 추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다시 5년이나 지난 200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광주사태의 관련자들이 있는 정당이어서 한나라당은 1%의 지지도 해줄 수 없노라 한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약에 그런 이유로 한나라당은 1%도 지지할 수 없다면 김대중은 호남사람들한테 맞아죽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단 한표도 얻으면 안 된다.

한나라당이 까막소에 집어넣은 전노를 풀어주고 대접해 주고, 법원이 선고한 벌금도 안 받으면서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보호해주고 돌봐준 정당이 새천년민주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정치와 호남인들을 보면 내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나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호남인들은 영남인들을 원망한다. 광주사태의 가해자라고 영남을 손가락질한다. 호남차별의 주범이라고 영남인들을 욕한다. 나는 영남인으로서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7)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대미가 부러지고,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왜곡되게 만들었으며, 선거가 지역감정에 기반한 지역간 전쟁으로 변질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87년의 평민당 창당과 김대중의 출마 강행이다.

그 이전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 정당이라는 것이 없었다. 여당에도 영호남 의원들이 골고루 있었고,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를 해도 인물 위주의 선택이었지 정당 위주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그런 공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물론 여야 정당의 공천은 무소속이나 군소정당의 공천으로 출마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했다는 것이지 여야 중의 어느 정당 공천이 곧 당선보장이라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양당정치인 한국에서 여당이나 야당의 공천은 같은 조건하에서의 싸움을 의미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중 특정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소속되어 있던 정당을 탈당하고 새로 창당되는 정당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된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평민당이다. 여야 막론하고 호남의원들은 전부 김대중이 흔드는 깃발 밑에 줄을 섰다. 자기의 출신지역인 호남의 여론, 지역유권자들인 호남인들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평민당이 만들어지면서 호남출신 국회의원들이 한 곳으로 쏵 몰려버리고 나니까 김영삼의 민주당과 노태우의 민자당은 호남 의원이 전혀 없는 기형적인 모습이 되고 말았다.

호남인들은 말하기를 영남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한 전략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호남을 배제하고 아예 호남의 지지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영남의 몰표에의존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호남의 지지를 기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87년에 김대중이 호남을 싹 쓸어가 버린 탓에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다. 87년 이후에 김대중의 호남 정당 외에 다른 정당이 공천을 해서 호남에서 당선시킬 가능성은 제로였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정당에는 호남 출마 희망자를 아예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가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그 고생을 하려 들겠나 말이다. 영남정권이라서 일부러 호남을 버렸다, 포기했다 하는 건 완전한 호남인들의 억지요 뒤집어 씌우기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정치와 선거에서의 지역간 헤게모니 쟁탈전은 평민당이란 지역정당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지역별 몰표 현상도 마찬가지로 87년의 대선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지역감정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정당들이 지역별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 아니다. 사실은 지역 정당이 출현함으로써 정치가 지역별로 나뉘게 되었고, 선거가 지역간 전쟁으로 변질되게 된 것이다.

지금 호남인들은 초원 복국집 사건처럼 영남정당이 선거전략으로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이용해 왔다고 주장하는데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선거에서 지역적 단결을 호소하게 된 이유는 정당들의 지지 지역이 확연하게 갈라져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정당에 영남 의원과 호남의원들이 다 있다면 그 정당의 운동원들이나 후보가 어느 지역에 가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소리를 할 수가 있겠나 말이다. 정당이 영남의원만 모인 당, 호남 의원만 모인 당으로 딱 갈라져 있으니까 '우리가 남이가?' 소리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당이 지역별로 갈라지게 만든 사람은 바로 김대중이다. 그의 권력욕이 특정지역 사람들로만 채워진 기형적인 정당을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정당이라는 괴물이 이후 한국정치를 엉망진창의 진흙탕 속으로 끌고 다니게 되었다.

김대중은 지역 정당을 만들어서 한국정치를 지역간 전쟁으로 변질시킨 범죄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역사 앞에 져야만 할 것이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8)

 

(펌)

저는 두가지를 말하기 위해서 이 글을 퍼왔습니다.
첫째, 호남에게 과연 민주화의 정통성이 있는가?
둘째, 호남에게 과연 95% 지지의 명분이 있는가?
만약 그러한 호남의 지역감정이
정통성이 없고 명분도 없는 것이었다면
저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들은 대한민국을 망친 죄인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


김대중은 광주사태로 구속되어 형무소에 있던 중에 전두환한테 속죄의 반성문을 써서 바쳤다. 두 번 다시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미국에 보내주면 한국 정부에 대해 어떤 비방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은둔해서 살겠다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사면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물론 미국에 도착하자 말자 전두환한테 서면으로 했던 약속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날부터 망명정치인으로 행동했다.

김영삼을 비롯한 국내의 민주화 세력은 전두환 치하에서 박통때 보다 더한 탄압과 압제 속에서 독재정권과 싸워 나갔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명언이 나온 것도 이때다. 김영삼은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20일을 넘기는 초인적인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언론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했고, 그 기간 중에 가장 신문지면을 크게 장식했던 뉴스는 지리산 반달곰이었다. 야당 지도자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보다 반달곰의 생사가 훨씬 중요한 나라가 당시의 대한민국이었다. 김영삼의 단식은 '현안문제'라는 이상한 단어로 표현되어 한 두 줄씩 기사화 될 뿐이었다.

당시의 민주화 투쟁은 김영삼의 민주산악회와 김상현이 지도하던 민추협이 두 개의 기둥이었다. 김상현은 김대중이 미국으로 떠나고 없던 시기에 호남의 민주화 세력을 돌보고 있었다. 김영삼의 단식투쟁과 가열찬 6월 항쟁에 밀린 전두환이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하게 하고 곧바로 김영삼, 김대중의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의 삼파전만이 전노의 유일한 활로였다. 당시에 전노측에서 김대중한테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도 무성하게 돌았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없는 동안에 모진 고생을 하면서 동지들을 돌봐왔던 민추협의 김상현 의원을 숙청해 버린다. 고생한 대가는 찬밥이었다. 그리고 629 이전에 '집권세력이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자신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던 불출마선언을 번복하고 평민당을 창당하게 된다.

온 나라의 민주세력과 국민들이 후보단일화를 열망했지만 김대중은 그것을 외면하고 결국 노태우 정권이 등장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당시는 누가 보더라도 김대중이 양보를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그의 불출마선언 번복은 군부독재 세력에게 기사회생의 활로가 될 것임이 너무도 뻔했다.

전노가 믿는 오직 한가지가 그것이었다. 87년에 후보단일화를 위해 양보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훗날 김대중이 과오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로 끝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상처와 후유증을 한국 정치에 남긴 행위였다.

4천만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고 오로지 호남의 한에 기대어 출마했던 결과 김대중은 계산대로 호남에서 90%가 넘는 광적인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전북의 경우 948,995표를 얻었고, 김영삼은 겨우 17,130표를 얻었다. 2002년 선거에서 노무현과 이회창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노태우는 김영삼보다 10배나 많은 16만표를 얻었다.

전남의 경우, 김대중은 1,317,990표를 얻었고 김영삼은 고작 16,826표였다. 노태우는 그래도 10만표를 넘어 12만표를 획득했다. 광주는 김대중 45만표, 노태우 2만3천표에 김영삼은 고작 2천5백표였다.

반면에 경남을 보면 김영삼이 987,042표, 노태우가 792,757표이고, 김대중이 86,804표를 얻었다. 경북은 김영삼이 47만표를 얻은 반면에 노태우가 170만표를 얻었다. 김대중은 4만표 정도였다. 부산은 김영삼이 110만표를 얻었지만 노태우도 64만표였고 김대중도 18만표나 얻었다.

그 외 지역은 대부분 김영삼이 김대중을 앞섰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87년 선거에서 광주, 호남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지역 후보에게 맹목적이고 비정상적인 몰표를 던지고 나왔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현상은 노태우에 대한 지지가 상당히 나왔다는 점과 김영삼에 대한 가혹한 대접이었다. 부산, 영남의 경우 김영삼에 대한 몰표 현상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고 김대중에게도 꽤 많은 표가 나왔다. 결과는 2위인 김영삼과 근소한 차이로 노태우 당선이었고, 김대중은 차이가 좀 지는 3등이었다.

이 선거 결과에 분노한 것이 부산/영남, 그리고 전국의 민주화 열망 세력이었다. 노태우가 미운 만큼 김대중이 미웠다. 민주화 세력의 승리가 눈앞에서 날라 가 버렸다. 김대중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부산, 영남이 호남에 섭섭했던 것이 김영삼에 대한 무자비한 배척이었다. 부산, 영남은 김대중을 그리 박대하지 않았다. 상황에 비추어 볼 때는 예상보다도 김대중 표가 많이 나왔다.

이런 호남의 맹목적 몰표는 그 후의 선거에 계속되는 반작용과 역풍을 불러오게 된다. 지역감정에 의한 선거가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 지는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남인들은 입만 열면 '영남인들이...'하고 말한다. 영남정권이 시작했다고 우긴다.

영남사람들은 입이 없고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동안 차별받고, 기피되면서 따돌려져 온 것이 사실이고, 광주사태의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니까 참고 봐준 것이다. 과부 동서의 푸념이니까 '오죽하면'하는 심정으로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호남도 해묵을 만큼 해묵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또다시 95% 라는 황당한 짓거리로 택도 없는 인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소외 받는 약자도 아니고, 차별되는 아웃사이더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진골이고, 로얄퓨플이고, 실세들이니까 더 이상 봐주고 양보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대놓고 할말을 다해도 좋은 그런 상황이다 이 말이다. 과부 동서가 부자 홀애비한테 재가를 잘해서 호강하고 사는데 그런 동서 푸념을 계속 들어주고 있어야 될 필요가 있겠나? 인자는 택도 없는 소리로 징징거리면 뺨이 석대다.


각설하면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가 87년에 호남에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그 선거는 평민당이란 호남정당의 출현으로 해서 지역 대결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졌던 선거였다. 특정 지역 출신의 의원들이 전부 한군데에 모인 정당이 있게 되면 자연히 정치 구도가 지역 대결로 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지역감정이 지역정당과 지역간 대결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역으로 김대중이란 한 개인의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 지역정당이 출현함으로써 이후의 모든 정치역학이 지역간 대결과 지역감정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이 평민당이란 지역 정당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호남의 차별과 광주사태라는 지역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한 개인이 개인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서슴없이 망설임없이 주저하지 않고 호남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아버렸다. 87년의 평민당 창당과 김대중 출마는 호남 문제와는 관계없는 일이었고, 호남 문제의 해결이나 전라도의 한을 풀기 위한 정치 행위도 아니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돌아와 불출마선언을 했던 김대중이 629 이후에 대권 도전의 욕망과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결과이고, 호남인들이 김대중의 당선을 호남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착각했던 우매함이었다.

김대중의 출마는 호남 문제와는 전혀 무관한 개인적 야망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의 열망도 김대중에게는 하나의 수단이고 제스추어일 따름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 김대중이 보여준 통치행태는 그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김대중의 생애는 그가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로 호남의 한을 풀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자로써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정치행로는 박정희라는 군부지도자에 대한 투쟁으로 드러난 반사적인 모습뿐이다. 그의 사회주의적이고 좌파적인 성향이 반독재 투쟁의 모습에 가려서 잘 안 보였을 뿐이다.

김대중은 호남인의 아픔을 같이 하려한 적이 별로 없었고, 호남인으로서 호남 문제에 그리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없다. 그런데 왜 호남인들은 그런 김대중을 자신의 메시아로 구세주로 삼았는지 그것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단지 고향이 목포 사람이라서? 전라도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통령 자리에 접근한 인물이라서?

저는 호남인의 바람이 진정한 한의 해결이나 차별의 해소나 전라도 기피현상의 불식이 아니라 전라도가 특권층으로 특별한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남인들에게는 그런 패권의식이 없다. 영남 출신 대통령들이 장기간 집권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해서 영남인들이 어떤 우월의식을 갖게 됐거나, 특권의식이 있거나, 패권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차별받고 설움받은 소외계층이었다는 전라도 사람들은 대단히 강고하고 끈질긴 패권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대통령 자리를 자기네들의 특권유지의 방패로 여기고 있다. 죽어도 그 자리는 다른 지역에 내줄 수 없다는 광적인 집착과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이런 지역적 패권주의나 대통령에 연결된 특권의식은 망국의 원인이 된다. 싹을 잘라야 한다.

수십년 집권하면서 조국을 근대화시키고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주역인 영남인들도 갖지 않는 특권의식, 패권의식을 호남이 갖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걸 방조하고 내비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나라 결단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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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 대한민국 | 작성시간 06.05.13 그대말이 한치의 틀림없이 옳소...........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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