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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작성자푸른 돌(靑石)| 작성시간23.01.09| 조회수15|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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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푸른 돌(靑石)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1.09 1.며칠 전에 오랜만에 겨울 비가 내렸다.
    대지를 푹 적시게 좀 많이 왔으면 좋을텐데..지난 가을부터 겨울 들어 계속 가물어 남쪽엔 농사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는데 좀 많이 오면 좋으련만 어디 자연이 우리 맘대로 되는가?
    추운 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온갖 채소나 과일까지 생산하는 시대다. 1년 내 싱싱한 야채를 풍성한 밥상에 올린다. 대량 생산을 하니 겨울에도 과이 비싸지 않게 야채나 과일을 먹을 수 있다. 한 때는 수입 과일 때문에 국산 과일이 밀린 적도 있었으나 요즘은 조금 비싸더라도 자신과 가족 건강을 위해 공해 없는 친 환경 자연산을 많이 찾는다. 그러니 우리 밀 우리 콩을 찾는 분들이 많아져 사양화 되어가던 농산물이 되살아 나는 것 같다. 소비자 단체에서 전국적으로 '우리 농산물 살리기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문제는 채소나 과일을 농약을 치지 않고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창궐하는 병충해를 농약을 치지 않고는 이겨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인체에 해가 없는 농약을 개발해서 극복하고 있다. 아무리 약한 농약이라도 인체에 전혀 해가 없는 농약을 제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 농약 무공해 농산물 생산이 바람직 하겠지만 아직은 쉽지 않을 것 같다..=>
  • 작성자 푸른 돌(靑石)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1.09 2.이전에 도열병이나 벼 멸구가 그렇게 무성했다.
    여러 번 농약을 쳐본 적이 있다. 더운 여름에 훌쩍 자란 벼 사이로 무거운 분무기 메고 농약을 치면 땀이 비오 듯 쏟아진다. 어쩌다 재미 삼아 몇 번 해봤으니 농사 일이 얼마나 힘든지 어깨 너머로 슬쩍 훔쳐 봤을 뿐이다. 큰 저수지가 있는 동네는 작은 가뭄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대개의 논이 천수답(天水畓)이니 조금만 가물어도 벌써 물 걱정을 한다. 논 옆이 개천이면 물 웅덩이를 판다. 거기에 항상 일정한 물이 고여 있다. 그러다 가물면 그 물을 퍼 올린다. 모터 펌프도 드문 시절이라 두래박으로 퍼 올리는 힘든 일이다. 상일이네 동네는 거의 계단식 다랭이 논이라 리어카나 경운기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모든 농사 일을 오로지 지개로 져다 날랐다.
    그러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지붕 개량을 하고 부엌과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변했다. 골목과 농로를 넓혀 리어카나 자동차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반 만년 동안 변함없던 초가집의 농촌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새마을 운동의 공과(功過)를 논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잘 살아 보자'는 그 운동은 분명히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요원의 불길이 되었다..=>
  • 작성자 푸른 돌(靑石)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1.09 3.어느 핸가 엄청 가물었다.
    서울서 여름 방학이 되어 고향을 갔다. 그런데 그 때까지 모내기를 못하고 있었다. 상일이 기억으로는 그 해 가뭄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벼농사는 거의 망치고 대신 메밀이나 고구마 감자를 심었다. 지하수를 파서 물을 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지하수도 가물면 물이 마른다.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관정 사업을 벌여 가뭄에 대비했지만 심한 가뭄에는 대책이 없었다.
    상일이네 논이 동네 맨 위에 너덧 마지기가 있었다. 원래 밭인데 아버님께서 3~4년을 피땀으로 일군 논이었다. 그 밭 바로 위에 깊은 산골에서 1년 내 콸콸 쏟아지는 샘물이 있었던 것이다. 밭을 논으로 일구겠다는 생각은 그 샘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경사가 높은 밭을 논으로 일궜으니 논두렁 높이가 거의 2~3미터는 되었다. 다행히 밭 위 야산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많았다. 석수공을 불러 바위를 깨어 논둑을 쌓아 올렸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무모한 일을 시작한다고 만류했지만 묵묵히 꿋꿋히 일을 계속 했다. 결국 3~4년 만에 물 걱정 없는 문전옥답 서너 마지기를 일궈냈으니 온 동민이 놀랐다. 작고 약한 체구에 황소 같은 고집과 강단은 동네서 아무도 못 말렸다..=>
  • 작성자 푸른 돌(靑石)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1.09 4.아버님의 강단과 고집은 유별나고 남달랐다.
    논 대여섯 마지기와 밭 열 마지기 정도로 큰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당시 동네서 훨씬 더 부잣집도 자식을 중고등학교도 보내지 않고 농사 일을 시켰다. 그러니 없는 살림에 아들을 대학까지 보낸다고 칭찬보다 흉 보고 나무랐다. 다행히 농사와 함께 어업을 겸했기에 그나마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잡아온 새우나 멸치를 말려서 농번기가 끝나면 멀리 육지로 도부를 나갔다.
    상일이가 어릴 때라 항상 어머니의 정이 그리웠다. 도부를 나가면 여자의 몸으로 객지에서 얼마나 힘든 고생과 섧움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가난한 농부 부부가 자식 만이라도 눈 띄우겠다는 일념으로 사시사철 한 시도 쉬지 않았다. 아버님은 농사일 하며 방배 타고 고기를 잡았고 어머님은 농번기가 끝나면 도부를 나갔다. 남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자식 교육에 올인 하셨던 것이다.
    형님이 대학 다닐 때 면 내에서 대학생이 다섯 명도 안되었다 한다. 그것도 풀칠 하기도 바쁜 가난한 농부가 그랬으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을지 상상이 안 된다. 상일이가 어릴 때는 할머니 품에서 자랐지만 크면서 항상 엄마의 정이 그리웠다..=>
  • 작성자 푸른 돌(靑石)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1.09 5.부모님의 하늘 같은 은혜에 두 아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다.
    형님은 부산 D대학 법대를 나와 고시 공부를 4~5년 더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서울 시청 9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상일이도 서울 K대 법대를 나와 2~3년 더 고시 공부를 했지만 아니다 싶어 일반 기업체에 들어갔다. 그러니 두 형제가 부모님의 평생 염원을 풀어 드리지 못한 불효 자식이 되었다. 아마 부모님의 열정과 정성으로 공부를 했더라면 고시보다 더 한 것도 되었을 것이다.
    형님은 서울 시청에 근무하며 고향 사람들 뒤를 많아 봐줬다. 후배들이나 동생들을 서울로 불러 기업체에 많이 넣어줬다. 서울시 보건소 보직을 받았는데 보건소가 꽤 힘을 쓰는 곳이었다. 당시 보건소 위생과라 하면 국세청 못지 않은 곳이었다. 모든 식당이나 유흥업소와 음료와 주류 업체가 다 보건소의 인 허가와 지도 단속을 받았다. 그러다 서울 J구 보건소가 무슨 사고가 터져 집중적으로 감사를 받았다. J구 보건소 직원이 집중 감사에 반발하며 단체 행동권을 발휘해 일제히 사표를 냈다. 그랬더니 설마 했으나 사표를 낸 사람들 모두 수리하고 말았다. 그 후 형님은 본의 아니게 새로운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작성자 ▒ 飛龍 ▒ 작성시간23.01.10 깊어가는 밤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좋은 일
    슬픈 일 두루 거치며 살아가는 세상

    행복한 밤 보내세요
  • 답댓글 작성자 푸른 돌(靑石)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1.12 오늘도 하루 해가 저물어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날들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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