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
한 그루 거목이었고 넓은 하늘이었다.
1950년대, 과수원집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육 학년이 될 때까지
그 크고 따뜻한 그늘 아래서 자랐다.
칠남매는 아버지 품 같은 나무 사이를 뛰놀며
한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고
좋으신 아버지의 믿음과 사랑을 먹고 자랐다.
늦가을이면 아버지와 일꾼들은
과수원에서 붉게 익은 국광을 따느라
하루 종일 땀을 흘렸다.
망태기에 담겨 나온 사과들이
마당 가득 쌓이면
집 안팎은 붉은 산, 하나 들어앉은 듯했고
햇살마저 사과 빛으로 물들었다.
사과는 크기대로 상·중·하로 나뉘어
나무 궤짝마다 정갈하게 담겼고
궤짝들은 도라쿠에 실려
공판장이 있는 협동조합으로 향했다.
지하 창고에 내려가면
서늘한 공기 속에 스며든 사과 향기가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굳이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달큰한 향기에 취해
배부른 줄 모르고 행복했던 어린 날.
겨울밤이면 우리 여섯 동생들은
솜이불 속에 다리 맞대고 누워
큰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가 끝나도 아쉬워 조르면
언니는 지하 창고에서 흠집 난 국광을 가져와
정지칼로 정성껏 껍질을 벗겨
우리 입안에 하나씩 넣어주곤 했다
아삭 소리와 함께 번지던 단맛은
이야기보다 더 깊은 사랑이 되어
긴 겨울밤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방문을 열고
“솜이불 잘 덮고 사이좋게 자거라.”
하시며 환한 미소를 남기셨다.
그 다정하고 자상한 목소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바래지 않아
지금도 문득 귓가에 또렷이 되살아난다.
세월은 그날들을 멀리 밀어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추억은 손을 내밀어
머리 희끗한 나를 어린 시절로 이끈다.
아버지 그늘 아래 근심 없이 자라던 칠남매,
사과 향기 가득한 과수원집,
웃음과 사랑이 익어가던 그 시절은
지금도 내 삶의 가장 따뜻한 계절로 남아
눈을 감으면 붉은 국광 향기 스미어
가만히 내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 향기 끝에는 언제나
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가 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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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한 정서적 원형의 복원에 가깝습니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 시대의 가족 구조, 노동, 그리고 사랑의 방식까지 자연스럽게 담겨 있어 서정성과 서사성이 균형 있게 살아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지의 밀도와 구체성입니다. “과수원”, “국광”, “망태기”, “지하 창고”, “도라쿠”, “공판장” 같은 단어들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니라 기억의 물성을 복원하는 장치처럼 작동합니다. 특히 “사과 빛으로 물든 햇살”, “붉은 산이 들어앉은 듯한 마당” 같은 표현은 감각의 전이를 통해 장면을 시각적으로 강하게 각인시킵니다.
서사 구조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어린 시절의 안정된 세계(아버지의 그늘) → 노동과 계절의 흐름(수확과 유통) → 가족의 일상적 온기(겨울밤, 이야기, 사과) → 현재의 회상과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무리 없이 이어져, 독자가 감정선을 따라가기 쉽습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시간은 점점 멀어지지만, 정서는 오히려 현재형으로 강하게 수렴됩니다.
이 작품의 핵심 정서는 “그리움”이지만, 단순한 상실의 슬픔이 아니라 보존된 따뜻함입니다. 아버지는 부재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도 귓가에 남아 있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과거는 끝난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삶을 지탱하는 계절”로 기능합니다. 이 점이 이 글을 단순 회상문이 아니라 정서적 기록으로 격상시킵니다.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음식과 기억의 연결입니다. 흠집 난 국광을 깎아 나누어 주는 장면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보호와 애정의 구체적 형식입니다. “아삭 소리”와 “단맛”은 감정의 언어로 전환되며, 이는 독자에게도 강한 감각적 공감을 유도합니다.
다만 문학적으로 조금 더 확장한다면, 몇몇 부분에서는 이미 강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유지되면서 감정의 상승이 다소 일정하게 유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목이었다 / 하늘이었다” 같은 상징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이후에도 유사한 “따뜻함의 반복”이 이어지면서 긴장감의 변화는 크지 않습니다. 중간에 한 번 정도는 시선이 흔들리는 순간(갈등, 결핍, 또는 예상 밖의 장면)이 들어가면 정서의 깊이가 더 입체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분명합니다. 과장된 장치 없이도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한 사랑의 구조를 설득력 있게 재현했다는 점입니다. 읽고 나면 특정 인물의 이야기라기보다, “누군가의 삶 속에 실제로 있었던 온도”가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