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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산문과 시학

2019년 산문과 시학 제32호 최중수 제4회 산문과 시학문학상 수상 및 작품평 박하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23|조회수0 목록 댓글 0

2019년 산문과 시학 제32호 최중수 제4회 산문과 시학문학상 수상 및 작품평 박하

 

󰡔숫자 4와 오간 이야기󰡕의 작품세계

박 하(수필가 시인 소설가)

 

영혼을 일깨우는 성숙한 삶의 자세로 다져진 수필의 정수!

수필을 향한 끝없는 도전과 열정의 결실

 

문학에 심취하여 늘 책을 읽고 사색하며 글을 써 온 삶에 경의를 표한다.

글이 진솔하고 꾸밈이 없으며, 글 속으로 빠지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집 6권을 세상에 내어놓았다는 일은 열정 없이는 해낼 수 없다. 수필 공부를 스스로 터득해서 글을 써 온 것이다. 서정적이면서도 생활인의 사색이 담겨있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애정과 관심의 시선으로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솔직한 느낌과 앞으로의 소망이 담겨있으며 담백하고 소박하다.

글이 술술 읽히며 다음 장이 궁금하여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다.

최중수 작가만의 빛깔과 목소리, 그만의 브랜드를 갖고 있다. 친근감과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 녹아있어서다.

삶 속에서 소소한 소재를 찾아낸 글들은 독자의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글은 진실에서 피어나는 꽃!

진실을 표현하는 데에는 지나친 수식이나 가식이 필요 없음을 말해준다.

함축과 절제로 문장에 탄력과 여운이 있으며, 생활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글감으로 채택한 글 속에 작가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독서와 매스컴을 통한 체험을 꾸준히 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자연과 이 사회의 모든 상황을 사유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글이 편안하게 읽어지며 진정성이 느껴지는 한편 철학적 사고, 작가적 인생관, 역사의식 등을 느끼게 해준다.

글 속으로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요즈음 재미없는 글을 누가 읽는단 말인가. 글이 재미나고 술술 읽히며 다음 페이지가 궁금하게 만들어 뒷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계의 소리

 

얼어붙은 낙동강 변에서 쩡, 하고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대한이 지나가다 보내준 대망의 신호다. 입춘이 몰고 올 온기를 꿈꾼다. 새벽 닭소리에 희망을 걸듯 머지않아 다가올 새봄에 기대를 모아 본다.

언 손을 호호 불며 손가락을 꼽아보니 물러갈 추위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상을 뒤덮은 백설 위로 스쳐가는 칼바람은 동면에 든 생명체를 흔들어 깨워줄 것만 같다. 언젠가는 겨울잠에서 툭툭 털고 일어설 몸들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빠르게 바뀌는 화면처럼 말없이 겨울을 밀쳐낼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봄꽃은 피어난다. 두꺼운 땅껍질을 비집고 솟아나는 생명의 소리는 일상에 쫓기는 군상에게 소박한 꿈을 안겨준다. 편안하게 앉아 귀를 기울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니 노랑나비와 흰나비가 나풀나풀 춤을 추며 날아오다 사라진다. 환영(幻影)은 이렇게 다가올 계절을 불러 웅크린 몸을 풀어준다.

그 옛날 가난에 짓눌렸던 보릿고개 시절을 잊지 못한다. 범부와 아낙들의 한숨소리는 얼어붙은 삼동의 강바람만큼이나 처연했다. 바닥난 에너지로 버티다 보면 어디선가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밭갈이에 나선 어미 소 뒤를 따르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는 농부의 소박한 꿈이었다. 졸졸졸 흘러가던 냇물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나목의 기지개 켜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연한 새싹을 내미는 생명의 소리, 소생하는 모든 것들은 내일이 있어 살맛을 느끼게 한다.

봄날의 들녘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되찾아 간다. 동면에서 깨어난 미물의 움직이는 소리가 느슨해진 삶에 활기를 더해준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영접의 축가가 메아리친다. 먼 산허리엔 장끼의 욕정 어린 울음소리도 한몫한다. 강남 갔던 제비도 지지배배 소리를 지르며 찾아온다. 영농 준비에 바쁜 농부의 콧노래 소리가 희망을 불러온다. 고단한 심신으로도 꿈을 잃지 않는 농부의 일상에서 희망을 본다.

 

나목들이 묵시로 삼동을 보낸 산야에도 새 생명의 소리가 요동친다. 따스한 봄볕은 새싹을 틔워 낸다. 어기찬 생명력에 찬사를 보낸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식물계를 바라보며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진달래, 개나리가 피었다가 지고 나면 다음 계절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어느 순간 산야는 신록으로 바뀐다. 바쁘게 내닿는 시간은 잠시도 잡아둘 재간이 없다. 언제 새싹을 내밀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는지 분간조차 못한 채 계절은 바뀌고 만다.

농촌 들녘엔 바쁘게 오가는 농부의 발길이 분주해진다. 과일과 오곡은 자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저마다 열심히 살아가는 동식물계의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어느 순간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삼복을 일러준다. 다디단 낮잠에서 들려오는 농부의 코 고는 소리는 잊었던 향수를 되찾아 준다. 온갖 근심 모두 접어둔 채 단잠에 빠진 농부의 모습은 말 없는 평화였다. 고된 영농이었지만 낮잠이 살맛을 나게 했다.

봄이 소망의 절기라면, 여름은 정열의 계절이다. 푹푹 찌는 태양 아래선 무슨 일에나 덤벼 보고 싶은 열정이 솟아나 용기를 낸다.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폭우는 삶에 대한 의지를 더해준다.

뽑아내도 끝이 없던 잡초와의 전쟁, 논밭에서의 고된 하루가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숨을 멈춘 채 땅 위에 귀를 대면 뿌리 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다. 끝없이 뽑아내도 돌아서기 바쁘게 뻗어 나가던 잡초의 생명력에 힘을 얻었다.

이즈음에 와서야 독한 제초제가 농부의 근심을 시원하게 풀어주지만 때로는 잔인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잡초지만 무자비하게 씨를 말리려 드니 그렇다. 그래도 얼마 못 가 풀밭으로 바뀌고 만다. 잡초와의 전쟁도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다.

지상의 생명체는 자연의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잡초의 짧은 삶은 자연계의 변화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어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을 불러온다. 오곡백과가 영그는 소리에 계절은 절정을 이룬다.

가을은 떠남의 계절이다. 식물계는 이런 순리도 거역하지 못한다. 모든 식물은 자연의 뜻에 응한다. 동식물에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떠나기 위한 이동의 행렬은 부산하게 이어진다.

어느 날 자고 나면 하얀 서릿발이 대지를 뒤덮는다. 지상의 생명체는 고개를 숙인 채 긴 침묵에 든다. 이렇게 해서 생명의 소리는 고단했던 생애의 막을 내린다. 다년생 식물은 긴 혹한을 견뎌내기 위해 다시 에너지를 축적한다.

 

가을이 요란한 계절이라면 겨울은 인고와 묵시의 계절이다. 꽁꽁 얼어붙게 하는 혹한은 끝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송곳바람이 남성적이라면 눈 내리는 소리는 여성적이다. 이처럼 자연은 강약의 변환으로 지상의 생명체를 다독여간다.

사계를 채우는 생명체와 대자연의 소리는 세월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짧기만 한 인간사도 보내놓고 보면 꿈결 같다. 무한한 시간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만상의 소리는 지구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계속되리라.

한 해를 보내며 듣고 흘리는 희비의 소리는 복잡한 우리 모두의 귀한 삶이다. 살다 보면 좋은 소리와 싫은 소리 모두 받아 안아야 한다.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피치 못할 운명이다.

순환의 고리로 연결된 사계의 소리에서 가버린 세월을 더듬는다.

 

사계의 변화를 잘 대변해주는 글이다. 봄이 소망의 절기, 여름은 정열의 계절, 가을은 떠남의 계절, 겨울은 인고와 묵시의 계절이다. 그의 깊은 통찰력에 감탄한다. 최중수 수필가는 순환의 고리로 연결된 사계의 소리에서 가버린 세월을 더듬으며 글을 맺는다. - 「사계의 소리」

 

 

언덕길

 

경사진 등산로를 오르다가 길섶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는다. 봄볕을 받은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앞다투어 피어난다. 나무마다 움이 돋고 꽃망울이 맺히는 꽃잔치 준비에 생명력을 얻는다. 눈을 감아본다. 그 옛날 어머니와 함께 넘나들던 고향집 앞 언덕길이 떠오른다. 마음은 두고 온 고향 집으로 달려간다. 메뚜기 이마 같은 꼬부랑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넘나들었다. 이고 진 채 논밭으로 오가던 언덕길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순환도로가 개설돼 현대 문명이 경적을 울려댄다. 일상은 편해졌지만, 소음과 매연으로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높아져만 간다. 편리한 생활 이면엔 이런 문제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 또한 피치 못할 숙명이다. 툴툴거리면서도 달콤한 문명의 이기를 뿌리치지 못하는 게 현대인이다.

이웃 동네로 나들이 갈 때도 언덕길을 넘나들었고, 가마 타고 시집갈 때도 이 길뿐이었다. 농산물 운반 수단도 지게와 황우의 등이 전부였다. 영농으로 고된 삶을 살았던 어른도 이젠 뵐 길이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승길로 들었고, 먹고살기 위해 정든 고향 땅을 떠난 지도 오래다. 대가족 사회에서 핵가족 사회로의 변천은 예상외로 빨랐다.

 

가정사에 어려움이라도 생기면 숙부님과 종숙부님, 종조부님과 모여앉아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보탰다. 웬만한 매듭은 어렵잖게 풀려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논밭에 나가 손발이 닳도록 흙과 하루해를 보냈다. 향리라는 제한된 지역 내에서의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해학과 인정이 살맛을 나게 했다. 이웃과 힘을 모아 공동작업으로 마을의 숙원사업을 해결해 냈다. 협동심은 자연 속에 잠들었던 동네를 개발해 고도성장으로 이어진 모태가 되었다. 이젠 모두 아련한 그리움으로만 남아 멀어져 가는 기억이 아쉬움을 더해준다.

언덕길은 반백년 동안이나 어머니가 걸어온 지난했던 삶의 역사였다. 눈감고 환상으로 불러내야 겨우 골안개처럼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실바람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 땀으로 보낸 어머니의 고달팠던 생은 기억 저편에 아린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수입은 논밭에서 얻어낸 열매뿐이라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도 바빴다. 가난했던 집안의 종부로 사대 봉제사에다 길흉사까지 손등에 물기 마를 날이 없었다. 온갖 시련을 말없이 견뎌 내셨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형제는 인간의 도리를 배워 사회인으로 성장해 갔다.

가팔랐던 언덕길, 그 길보다 더한 가시밭길이 어머니의 가슴속엔 운명처럼 자리했을 것이다. 어쩜 그 시절을 살았던 모든 이들의 삶이었으리라. 한가한 시간이면 이런 고뇌의 세월을 극복해 온 어른들의 삶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곤 한다.

앞산 허리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삼월, 어머니는 꽃상여를 타고 다시는 못 올 언덕길을 넘어 조상님의 발치로 가셨다. 현대문명에 밀려 사라진 언덕길처럼 어머니의 가슴속에도 서리서리 품어 지냈을 혹독한 시련의 언덕길이 백골의 진토와 함께 봄눈처럼 녹아내렸을 것이다.

이젠 마당가에만 나서도 개설된 도로로 사라진 언덕길 너머 자리한 선영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어머니는 이승의 일상을 고단하게 했던 언덕길이 사라진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부답이다. 한 번씩 고향을 찾을 때마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옛날의 언덕길을 회상하곤 한다.

일상을 고단하게 했던 고향집 앞의 언덕길처럼, 내 참혹했던 생애에도 언덕길을 악성종양처럼 품고 지내야 했었다. 고향을 등진 지도 벌써 사십여 성상으로 접어든다. 썩어서 부서지는 새끼줄처럼 아린 추억도 희미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수없이 넘나들었던 언덕길, 그 고단했던 시절의 나날이 노후의 이 하루에 마지막 에너지로 불쏘시게 역할을 해준다.

 

경기가 바닥을 친다는 요즈음 청춘들의 팍팍한 일상에 마음이 멎는다. 젊어서의 고생은 분명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구직으로 동분서주하는 젊은이들은 먼 옛날 우리 세대가 넘나들던 언덕길보다 더한 시련도 슬기롭게 견뎌 내리라. 등산로 옆 간이의자에서 일어선다. 환영으로 떠오른 고향집 앞 언덕길을 먼 기억 속으로 쟁여 넣으며 터벅터벅 정상으로 향한다.

 

작가는 등산로 옆 간이의자에 앉아서 언덕길을 떠올려본다. 종부로서 어머니께서 살아온 지난했던 언덕길의 삶을. 저자도 고단했던 시절의 언덕길을 수없이 넘나들며 시련도 슬기롭게 견디어내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요즘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힘들어 아픈 청춘들에게, 시련도 슬기롭게 견디어 내리라는 기원을 보낸다. 환영으로 떠오른 고향집 언덕길도 기억 속에 담으며 일어선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존경심, 사랑이 글 속에 조용히 깔려있다. 은연중에 효심이 드러나는 좋은 글이다. - 「언덕길」

 

 

 

 

들꽃 지는 계절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한적한 들길을 걷는다. 두고 온 고향 산하에 대한 그리움에 가버린 날들을 떠올리다가 낯선 들꽃 한 포기에 시선이 멎는다.

고요가 겨운 길섶에 애잔한 모습으로 맞게 되는 가녀린 자태가, 이리저리 한직으로만 떠돌던 공직 시절의 자화상으로 환치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따스한 봄날 새싹을 틔워내 여름밤의 폭풍우를 견뎌낸 들꽃 한 송이가 말없이 져간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후미진 들녘에서 조용하게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풀꽃을 좋아한다. 외롭다거나 슬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생긴 대로 다소곳이 살아가는 모습에 반해서다. 농부는 수확의 계절이라며 부푼 꿈으로 분주하게 오간다. 생명력을 노래하던 희망의 봄도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비바람과 땡볕 아래 연약한 씨앗 하나가 새싹을 틔워낸 진통의 순간이 장하게 느껴진다. 한 해를 보내면서 자연의 은혜 속에 성장해 온 인고의 세월이 대견스럽다. 이제 꽃과 열매를 뒤로한 채 이별 길에 드는 들꽃 한 송이가 여생에 힘을 보태준다.

사람이나 동식물 모두 순리를 따를 때면 아름다워 보인다. 연약한 식물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태어나는 수가 많다. 나름대로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자존심 하나로 알아주는 이의 사랑을 받고 싶어 했을 수 있다.

자연의 혜택 속에 볼품없는 씨앗 하나로 대를 이어 가는 식물계의 생명력에 빠져든다. 창조주의 섭리에 말없이 따르는 식물의 성장기가 성스럽게 느껴진다. 한 해를 돌아보면 제법 긴 시간 같지만, 순간에 불과하다.

인간사도 태양과 비구름, 바람의 뜻에 따라 피고 지는 식물계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보내는 나날은 지루할 때가 많지만 뒤돌아보면 그저 촌음에 불과하다. 희로애락으로 살다 보면 웃고 울게 되는 순간도 적지 않다. 고단한 삶이라도 자연에 순응하는 수목을 바라보며 살아볼 만한 가치를 느낀다.

생로병사를 굽이굽이 돌아 넘다 보면 어느새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앞을 가로막는다. 때로는 무미한 순간이 오뉴월 장마처럼 치근덕거리며 생활에 권태를 더해준다.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인간의 짧은 생을 말한다는 건 무모해 보인다.

현직 근무 시절엔 계급사회라는 특성상 선의이긴 했지만, 경쟁만은 피할 수 없었다. 정을 우선으로 치는 개성 탓에 두어 차례 승진을 양보한 뒤 편한 마음으로 명예롭게 물러났다. 이젠 미관말직에서 공직을 마무리했던 그 날을 한 송이의 들꽃처럼 처연한 심사로 돌아본다.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많은 걸 잃고 또 버려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사소한 바람이라면 편안한 마음으로 여생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소리 없이 져가는 한 송이의 들꽃, 꽃과 열매와 잎이 진 후면 삼동의 한파를 견디며 소생의 계절을 위해 몸부림을 쳐댈 것이다. 여생은 해마다 어김없이 오가는 계절 따라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들꽃과 함께하리라.

화원에서 필요로 하는 임자를 위해 공주 노릇을 해 온 관상용 꽃들, 들녘 후미진 곳에서 말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져가는 들꽃 모두 부여받은 생을 최선을 다해 지켜 내리라.

고속승진으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해도 하나 섭섭할 게 없다.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내 생을 들녘 외진 길섶에서 말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져 가는 들꽃에 비유해 보았다.

자연의 심술을 견뎌 피워낸 들꽃이 튼실한 열매를 맺듯, 힘겹게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후에도 최선을 다해 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살맛을 느낀다. 들녘 외진 길섶에서 긴 사념을 접으며 툭툭 털고 일어서는 심신이 가벼워 좋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후미진 들녘에서 조용하게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풀꽃. 사람이나 동식물 모두 순리를 따를 때면 아름답다.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 보잘것없는 내 생을 들녘 외진 길섶에서 말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져 가는 들꽃에 비유해 본 글이다. ‘글은 그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잘 작가의 모습과 흡사하다. 조용하고 겸손한 삶이 글 속에 그대로 배어난다. - 「들꽃 지는 계절」

 

 

 

그리워지는 옹달샘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가 떠오른다. 다시 불러보니 옛 맛은 아니 난다. 그만큼 오염된 수질에 진력이 나있기 때문일까. 반세기만이지만 꿈속에서나마 유년의 고향으로 달려가곤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보호해 주어야 할 대자연, 그 자연이 겪는 고통을 바라보는 심사가 편하지 못하다. 우리 스스로 편리한 삶을 핑계로 못살게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훼손된 자연의 생태계를 방치하다 보면 자멸할지도 모른다. 오염된 환경을 푸념하다 보면 물 맑고 정자 좋던 실개천과 옹달샘이 그리워진다.

나와 동생은 삼복을 맞아 까맣게 그을린 채 염천을 보냈다. 육십여 년을 훌쩍 뛰어넘은 아득한 기억 저편의 추억이다.

고개 넘어 외딴집에 살던 종조부님 댁의 물심부름은 형제의 몫이었다. 사철 맑은 물이 펑펑 솟구치던 뒤뜰 감나무 밑의 샘물이 지금도 가끔씩 생각날 때가 있다. 바위틈에서 솟아나던 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미지근했다.

어른들은 물맛이 좋고 시원하다며 형제를 불러 모으길 좋아했다. 찌그러진 주전자를 하나씩 건네주며 시원한 냉수를 가득 채워오라 했다.

“어 시원하다. 그 물맛 좋다. 이놈들 심부름도 잘하지. 암 그래야지.”

도리깨로 보릿단을 내리치다가 흘러내리는 구슬땀을 훔치며 내뱉는 머슴들의 한마디에는 해학과 정이 묻어났다.

본가는 식수가 귀했다. 수맥을 찾지 못해 고생이 많았다. 대를 이어 써 온 우물은 겨울이 오기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논두렁에 파놓은 시답잖은 우물인데, 집으로부터 200여 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 바닥에 묻힌 커다란 두멍에 길어온 물을 저장해 써 왔다. 물을 조금만 낭비해도 혼쭐이 났다. 그래서 식량 못지않게 아껴 썼다.

요사이는 농어촌에도 생활용수는 간이상수도로 펑펑 쓰고도 남아돈다. 지금도 수도꼭지 앞에만 서면 삼복 속에 물을 길어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처럼 갈증을 모르는 세월 속에 살면서도 불평은 끊이지 않는다.

'60∼70년대만 해도 농촌의 들녘은 거닐 만했었다. 불과 반세기 만에 세상은 이만큼이나 변해 버렸다. 또래의 목동은 학교가 파하기 바쁘게 소와 함께 산야로 나섰다. 갈증이 나면 논두렁에 파놓은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래도 탈이 없었다. 산골짜기 따라 졸졸 흘러내리는 옹달샘도 소몰이꾼의 갈증을 풀어주는 데 한몫했었다.

물에 대한 가치를 고향집에서 터득했고, 지금도 뇌리에 각인돼 있다. 한시도 없어서는 아니 되는 물, 잘못 관리하다간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것도 물이다.

나는 대구시청에서 상수도사업 분야에만 이십 년 가까이 봉직하다가 퇴임했다. 안전한 수돗물을 헐값에 공급하는 일로 청춘을 보냈다. 낙동강 물을 취수해 안방에서 물 사발을 들기까지의 전 과정을 고르게 체험했다.

수돗물은 과학적인 정수처리와 수질검사를 통해 생산, 공급되므로 안전하다. 요즈음엔 고도 정수처리(물에 오존을 접촉시켜 살균 및 색도, 맛, 냄새, 중금속 등을 제거하고 유기물을 산화)로 수돗물이 생산된다. 수질검사도 47개에서 57개 항목으로 확대 운영한다. 원수 취수 과정에서도 수질 자동측정기를 설치해 페놀 등 6개 항목을 상시 감시한다.

급수관 개체 공사도 시효 기간을 넘기는 일 없이 제때 실시한다. 음용에 이상이 없는 수돗물을 생산해서 깨끗한 급수관으로 급수된 수돗물도 못 믿는 게 현실이다.

안전한 수돗물을 먹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소비자의 수질관리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건물에 설치된 저수조나 옥내 급수관의 관리에 달렸다. 소홀히 할 경우 이물질의 퇴적 및 관 부식 등으로 정수장에서 깨끗한 수돗물이 생산, 공급되어도 가정에서 수질이 악화할 수 있다.

양질의 수돗물을 생산하려면 상수원이 오염되지 않고 깨끗해야 한다. 물 부족도 문제지만 수질관리가 더 급하다. 양이 부족하면 절수로도 길이 있지만 심각한 오염으로 되돌릴 수 없는 수질이라면 방법이 없다.

고도 정수 처리시설로 생산된 수돗물도 그대로 먹는 가정은 흔치 않은 줄 안다. 위생적으로 생산된 수돗물을 다시 정수기로 정수해 쓴다. 생수업체에서 생산된 물도 여러 종류가 판매된다. 자연계에서 사랑받는 물도 이렇게 상업적으로 이용되면 흥정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훼손된 대자연에 대한 복구의 기회를 놓치면 말기 암환자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는 가족의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오염된 대자연만 회복되면 잃어버린 수질은 저절로 돌아온다.

옛날 즐겨 찾던 옹달샘이 다시 망막에 떠오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으니 깨끗한 수돗물이나마 걱정 없이 먹었으면 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갈증이 나면 논두렁에 파놓은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래도 탈이 없었다. 나 자신도 학창시절에는 교회 중고등부 수련회를 영천 은혜사 근처로 가서 계곡의 물로 밥을 지었다. 우물물은 여름에는 간이 서늘할 만큼 시원했고 겨울에는 희한하게도 따뜻했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유럽에는 생수를 사 먹는다고 하기에 하도 희한하고 의아해서 눈이 콩사탕 만하게 커졌던 일. 이 글을 읽으니 공감이 간다. ‘수돗물은 과학적인 정수처리와 수질검사를 통해 생산, 공급되므로 안전하다.’ 라는 글에서 저자의 직업의식이 잘 나타난다.

-「그리워지는 옹달샘」

 

숫자 4와 오간 이야기

 

“4자가 세상에 태어나 사고라도 쳤습니까. 뉘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까. 사람들은 왜 4자란 이름 부르기를 그리도 꺼리나요. 모 장례식장에선 전화번호를 4444로 불러주더군요. 곡소리 속이었지만 대우해준 정이 고마워 미소를 지었습니다. 수리(數理)를 다루는 일부 수학 전공자의 편견 없는 사랑에 존재의 의미를 느껴 버텨냅니다. 어느 재주꾼이 지어준 4자란 이름 한자의 명예를 위해 살아남을 작정입니다.”

4자의 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4자야, 내가 들어도 딱하다. 4자가 겪는 고통은 이해할 만하네. 4자란 이름을 편리하게 쓰면서도 개똥 피하듯 돌아서기만 하니 앞뒤가 안 맞는구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4자란 이름을 바꿔 부를 수도 없지 않겠는가. 사람의 가벼운 생각으로 4자처럼 피해를 보는 경우는 인간사에서도 어렵잖게 본다네.” 나는 꿈속이지만 4자의 어려운 처지를 알아 이렇게 맞받는다.

“노인 보소. 작명을 했으면 불러주는 게 정상 아닙니까. 1, 2, 3, 4, 5, 6, 7·····, 이렇게 잘 나가다가 4자를 빼먹는 경우가 있으니 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고슴도치도 아니고, 왜들 피하려고만 듭니까. 그렇게 4자가 싫으면 1, 2, 3, 넷, 5, 6, 7·····, 이렇게라도 불러주던가.”

 

4자의 넋두리는 강도를 더해간다.

“4자야, 네 입장을 이해한다. 사람은 죽기를 싫어하거든. 언젠가는 때가 되면 떠날 수밖에 없는데도 그러네. 사(死) 자만 보면 고개를 돌리니 4자만 피해를 보는구나. 4자와 사(死) 자가 같은 소리란 이유 하나만으로 4자만 죽을 맛이네. 내가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하면 반분(半憤)이라도 풀리겠나. 불평한다고 오랜 세월 써 온 4자라는 이름을, 앓던 이 빼듯이 없애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4자가 터뜨리는 불만에 이렇게 응수해 본다.

“살다 보면 고층건물이나 승강기 등의 순서가 필요할 땐 매정하게도 4자를 쏙 빼버리니 기분이 상하지요. 1F, 2F, 3F, 이렇게 잘 나가다가 왜 4F대신 5F가 불쑥 나타납니까.”

4자는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어른 보소. 어디 이뿐인 줄 아십니까. 〇〇문학회에선 1, 2, 3집을 간행한 뒤 4집은 건너뛴 채 5집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참 핑계도 가지가지네요. 영감님은 문인 아닙니까.”

4자는 수필가인 내게로 화살을 돌린다.

“4자야, 그런 일도 있었나. 허참 가관이다. 말문이 막히는구나.”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 눈만 껌벅거린다.

“4자야, 사람들은 이기적인 경우가 많아. 4자에게 말하기는 그렇다만, 전직 대통령을 지낸 분은 자신을 닮았다고 연예계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인재를 출연 금지시킨 적이 있었지. 구금당한 연예인은 하고 싶은 연기를 못했으니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숨어 지냈을 거야. 죄라고 해봤자 닮았다는 죄밖에·····. 잘났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람의 오만이 이 정도니 4자가 만사를 접는 게 현명하지 싶네.”

“4자야, 사람들 하는 일이 좀 어설프다는 걸 이 노인도 인정은 한다네. 국어사전엔 어린아이의 〇〇를 귀엽게 부르는 말로 ‘잠지’라 적어 놓고도 고추라고 부르지. 고추도 고추 나름이지, 아기 주먹만 한 고추도 어렵잖게 오가는 세월이잖아.”

“또 남녀의 성기가 사전에는 〇〇나 〇으로 나와 있지. 그런데도 문예지나 신문기사 등을 보면 남녀의 보물인 성기를 암호문이나 몹쓸 물건인 것처럼 XX나 X로 표기하지. 부담 없이 부르자고 사전에 올려놓고도 대중 앞에선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남녀 성기의 본명(本名). 부르지도 못할 이름을 누가 지어 사전에 올렸을까.”

“사람은 꽤 영특해 보이지만 이런 허점도 안고 산다네. 그러니 4자도 웬만하면 노여움을 풀고 똑똑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운명대로 살아가게나.”

“영감님, 4자가 한 수만 가르쳐 드릴 게요. 어느 양반이 남녀의 성기를 그렇게 부르기 어렵게 작명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4자의 감각으론 남자의 성기는 ‘물말뚝’ 여자의 성기는 ‘깊은 숲속 옹달샘’으로 부르면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싶네요.”

“사람들은 성기의 본명 한 번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한 채 기껏해야 물건, 거시기, 그것, 은밀한 곳, 예민한 곳 등으로 부르는 꼴을 보니 딱합니다.”

4자는 이렇게 뜬금없이 불쑥 한마디 내뱉는다. 4자는 제 앞가림도 못한 채 수동적으로만 지내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다.

“성기의 본명을 제대로 불러볼 기회라야 잠자리에 든 내외끼리나 가능할까. 이도 한물간 영감과 할망구쯤 되면 모를까. 신혼부부야 낯 뜨거워서 어렵겠지.”

“아니면 취중이나 언쟁 중에 이성을 잃어 맹수처럼 날뛰다가 거침없이 성기의 본명을 불러볼 정도지. 배짱 좋은 남녀라면 분위기에 따라 외쳐볼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옆에선 쌍욕 한다고 투덜댈 거야. 이름을 욕이라니 어불성설이네.”

“부르자고 약속해 놓고도 시원스럽게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 어디 이뿐이랴. 그러니 4자야, 섭섭해도 이제 노여움일랑 훌훌 털고 맡은 임무나 다해 보게나. 나는 마음에 없는 소리 안 듣고 사는 줄 아는가. 세상살이 다 그렇다.”

나는 4자에게 이렇게 어르고 달래본다. 4자는 오가던 얘기 중에 비위에 거슬리는 말끝마다 발끈하더니 더 이상 군소리가 없다. 듣기 거북한 말만으로 옥신각신하다 이제 지쳤나 보다.

새벽녘의 선잠에서 꿈속을 헤매다가 눈을 뜨니 4자는 또 날 빙그레 웃게 한다.

“4자가 세상에 태어나 사고라도 쳤습니까. 뉘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까. 사람들은 왜 4자란 이름 부르기를 그리도 꺼리나요. 모 장례식장에선 전화번호를 4444로 불러주더군요. 곡소리 속이었지만 대우해준 정이 고마워 미소를 지었습니다.(중략)

새벽녘의 선잠에서 꿈속을 헤매다가 눈을 뜨니 4자는 또 날 빙그레 웃게 한다.

 

글의 서론이 재미를 유발하며 결론까지 재미있다.

해학과 익살로 유머러스하게 쓴 글이다.

- 「숫자 4와 오간 이야기」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최중수 작가는 글과 삶이 일치하기에 인간적인 냄새가 풍긴다. 마음의 창을 통하여 타인과 세상을 보며, 나아가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 정신이 투철함이 삶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좋은 수필이란 정서적, 지적, 심미적, 깨달음, 유머와 위트, 수사학적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즐거움 중에서 한 두지만 있어도 잘 쓴 수필이라고 하는데, 이 모두를 수용하고 있다.

수필적 소재를 수필답게 구성하여 좋은 작품으로 수필에 열정을 바쳐온 삶에 찬사를 보낸다. 우리 수필계에 거목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특집1

제4회 산문과 시학상 수상 소감

 

최 중 수

 

졸작을 수상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고맙다는 인사드립니다. 저의 수상으로 수상권에서 밀려난 작가님께 송구스럽다는 말씀드립니다. 다음 기회엔 좋은 작품으로 수상의 영광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수상 소식 받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뿐, 쳐다만 보아왔던 문학상 값을 어떤 노력으로 해낼지 걱정이 앞섭니다.

문학상을 날카로운 칼날과 무딘 칼등에 비유해본 적이 있습니다. 작품이 상의 권위에 못 미칠 경우 심기는 칼날처럼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요. 반면 작품이 상의 수준을 능가할 정도라면 칼등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경우 전자에 속할 것 같습니다.

문학상의 권위는 수상자의 몫이라 생각하니 칼날을 쥔 기분입니다.

수상자마다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쯤은 하리라 믿습니다. 상에 대한 보답차원에서라도 이정도의 노력쯤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수상식장에서 박수만 쳐오다가 수상자가 되고 보니 가볍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문예창작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작두 위에서 춤을 추던 무녀의 투혼으로 수필 창작에 열정을 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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