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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수필

꽃 피는 봄날을 기다리며/여창복 선생님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5|조회수2 목록 댓글 0

꽃 피는 봄날을 기다리며

 

 

친구 명희와 함께 대구역으로 나갔다. 여 선생님이 도착할 시간이다. 대합실에서 출입구 쪽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느새 카페 ‘사진 올림’에서 익히 보아 온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다. 전보다 한결 밝고 건강해 보인다.

여 선생님은 내가 카페지기로 있는 ‘산문과 시학’의 회원이며, 내가 쓴 수필의 애독자이기도 하다. 친한 친구를 모시고 오라는 부탁에 나는 명희와 함께 나왔다. 오늘은 카페지기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며 일부러 길을 나서주셨다니,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대구역 8층 식당가 한식 전문점 ‘유경’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으니 늦가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 후 전주비빔밥이 황금빛 놋대접에 담겨 나온다.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콩나물, 무나물, 표고버섯, 당근채가 정갈하게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놋그릇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한때는 그 반짝임만으로도 집안 살림의 부지런함을 가늠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한 숟가락씩 곁들여 비벼 먹었다. 그 맛이 유난히 따뜻하다.

식사를 마친 뒤, 나의 첫 수필집 『파랑새가 있는 동촌 금호강』의 무대이기도 한 금호강을 보여드리고 싶어 우리는 동촌으로 향했다.

강과 산,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강둑을 따라 걷다가 우리는 강가로 내려섰다. 오리 모양 보트가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한때 이곳은 대구 사람들의 유일한 휴식처이자 주말이면 인파로 북적이던 유원지였다.

나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로 이어졌다. 여름이면 금호강에서 멱을 감고, 친구들과 조개와 피라미를 잡아 고무신에 담던 시절. 봄이면 강 건너 유원지의 벚꽃이 연분홍 구름처럼 피어나고, 그 아래 웃음소리가 넘실거리던 풍경.

소풍 온 가족들의 도시락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던 어린 나는, 결국 친구와 남동생을 데리고 소풍을 나섰다가 빈자리 하나 찾지 못해 보리밭을 헤매던 날도 있었다. 그날의 도시락은 결국 뛰어다니며 섞인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연 비빔밥’이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어느 봄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가 나를 업고 금호강을 건너던 순간, 물속에 잠겨 숨이 막힐 듯했던 공포. 겨우 살아났을 때의 허탈함과 안도감. 정성껏 캐온 모란꽃 새순이 사실은 가죽나무 새순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느꼈던 어린 실망까지.

이처럼 금호강은 내 삶의 기억을 하나하나 품고 있는 강이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친구와 여 선생님은 조용히 귀 기울여 주었다.

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대구의 명소 ‘녹향’ 음악감상실로 향했다. 그곳은 대한민국 제1호 고전음악감상실로, 1946년 문을 연 이래 오랜 세월 예술가들의 쉼터가 되어 온 공간이다. 양주동, 이중섭, 유치환 등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예술가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새롭게 단장된 실내는 이전보다 한층 단정하고 따뜻했다. 낡은 의자는 모두 새것으로 바뀌었고,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흰 덮개가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의 깊이 위에 정성이 덧입혀진 느낌이었다.

주인 이창수 선생님의 배려로 우리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나는 송민도의 ‘여옥의 노래’, 명희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여 선생님은 안다성의 ‘바닷가에서’를 열창했다. 순간만큼은 작은 무대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이어 우리는 중앙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감나무에는 주황빛 감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공원에서 만난 이순우 시인님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웃음이 이어졌다. 그 웃음 속에는 오래된 인연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행복노래방’에서는 다시 노래가 이어졌다. 여 선생님은 ‘사랑이 메아리 칠 때’, 명희는 ‘야생마’, 나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를 불렀다. 이순우 시인님은 ‘눈이 내리는데’를 부르셨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시처럼 느껴졌다.

노래가 끝날 무렵, 묵은 스트레스는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저녁은 이 시인님이 한턱을 내셨다. ‘장터뷔페식당’에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담아왔다. 전복죽, 호박죽, 국수, 잡채, 각종 나물과 비빔밥, 감주까지, 소박하지만 풍성한 식탁이었다.

대구역에 도착하니 출발 시간까지 15분이 남아 있었다. 즐거운 하루였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여 선생님께, 우리도 같은 마음이라고 답했다.

“꽃 피는 봄날에 다시 만나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금호강처럼 길게 이어질 인연을 마음에 담은 채.

 

이 글은 단순한 하루의 나들이 기록을 넘어, 개인의 기억·지역 공간·예술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수필적 서사로 읽힙니다. 전반적으로 정서의 흐름이 안정적이고, 공간 이동에 따라 기억과 감정이 확장되는 구조가 잘 살아 있습니다.

우선 가장 큰 미덕은 장면의 구체성입니다. 대구역, 금호강, 녹향 음악감상실, 중앙공원 등 실제 장소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되면서 글의 현실감을 높입니다. 특히 전주비빔밥이 황금빛 놋대접에 담겨 나오는 장면이나 금호강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시각적·촉각적 이미지가 살아 있어 독자의 몰입을 돕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핵심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기억의 층위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방식입니다. 현재의 산책과 대화 속에서 어린 시절 금호강의 경험(수영, 소풍, 공포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호출되면서, ‘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삶 전체를 품은 기억의 저장소로 확장됩니다. 이 부분은 수필로서 매우 중요한 성취입니다.

 

 

음악감상실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녹향’이라는 공간의 역사성과 인물들(예술가들)에 대한 언급이 단순한 배경 설명을 넘어, 현재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경험과 연결되면서 시간의 층위(과거 예술가들–현재의 화자들)가 겹쳐지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글에 은근한 품격을 부여하는 요소입니다.

 

다만 몇 가지 보완점도 보입니다.

 

첫째, 전체적으로 에피소드가 풍부한 대신 중심 주제가 다소 분산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우정’, ‘지역 공간 기행’, ‘어린 시절 회상’, ‘예술적 향유’가 모두 들어 있지만, 이를 하나로 묶는 핵심 정서나 문제의식이 조금 더 선명해지면 글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 감정의 표현이 대체로 안정적이고 따뜻하지만, 때때로 정서의 고조나 대비가 약해 단조롭게 느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공포(금호강 사건) 같은 장면은 더 압축적으로 강조하면 전체 흐름에 긴장감을 줄 수 있습니다.

 

셋째, 인물 소개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제시되어 있어, 일부는 독자에게 설명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인물의 성격이나 관계는 행동이나 대화를 통해 조금 더 드러나게 하면 서사적 자연스러움이 강화될 것입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은 기억과 장소, 음악과 인간관계가 부드럽게 어우러진 따뜻한 기행 수필입니다. 큰 사건 없이도 독자의 감정을 이끌어가는 힘이 있으며, 특히 ‘금호강’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삶의 시간성을 담아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조금만 중심축을 더 선명히 하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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