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폭설
박하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
소리 없이 내려와 세상의 모서리를 지우고, 오래된 기억 위에도 하얀 이불을 덮는다. 눈은 늘 그렇다. 잊었다고 생각한 시간들을 슬며시 깨워낸다. 하얗게 쌓이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겨울날의 풍경 하나가 먼 영화의 장면처럼 천천히 되살아난다.
그날은 설날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하늘빛이 심상치 않았다.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공기에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한 묵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늘 그랬듯 시골집에서 명절을 보내고 대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엌에는 명절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노릇하게 부친 전, 정성껏 무친 나물, 고소한 조기구이, 뜨끈한 탕국, 달콤한 감주까지. 설날의 온기가 아직 식지 않은 음식들을 위생용기에 담으며 분주히 짐을 꾸렸다. 남편은 며칠 뒤 다시 시골에 올 것이니 짐을 너무 많이 싣지 말라고 재촉했다. 평범한 귀갓길이 될 줄 알았던 그날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 식구는 작은 1톤 트럭에 몸을 실었다.
집 앞 사거리에 이르자 길은 이미 귀성 차량들로 꽉 막혀 있었다. 차들은 거대한 강물처럼 움직이지 못한 채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길이 열렸다. 그때 어디선가 앰뷸런스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경찰 차량과 레커차가 지나갔다. 가까운 곳에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도로는 점점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갔다.
그 와중에도 뻥튀기 장수는 차와 차 사이를 누비며 과자를 팔고 있었다. 우리는 무심코 한 봉지를 샀다. 고소한 뻥튀기 냄새와 바삭한 소리는 지루한 정체 속에서 작은 위안이 되었다.
청로에 가까워지자 마을 사람들은 길가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우연히 먼 친척 아주머니를 만났다.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며 나눈 짧은 인사는 얼어붙은 겨울 풍경 속에서 피어난 작은 꽃 같았다.
청로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상황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더니 서서히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스노체인도 없이 오른 길은 이미 얼음판이 되어 있었다. 남편은 브레이크를 힘껏 밟으며 차를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중력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뒤차들의 경적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반대편 버스 기사까지 창문을 열고 이런저런 조언을 건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후진. 그것만이 남은 선택이었다.
남편은 고개를 돌린 채 조금씩 차를 움직였고, 나는 창문 밖을 살피며 길을 확인했다. 뒤차들을 향해 연신 손을 들어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차량들은 점점 늘어났고, 사람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몇몇 운전자들이 차에서 내려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언제까지 이렇게 갈 겁니까?”
날 선 목소리가 눈보라 속을 파고들었다.
남편은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불만 섞인 말들이 이어졌다. 그때 한 어르신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날씨에 누가 일부러 그러겠소. 다들 조금씩 양보합시다.”
그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사람들은 다시 자기 차로 돌아갔지만, 내 가슴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눈보라는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눈 덮인 이곳이 마치 시베리아 벌판 같았다. 옆 차선의 차들이 후진해가는 우리 차를 몹시 딱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버스차장처럼 상반신을 차창 밖으로 내밀고 전후좌우를 살폈다. 수천의 흰 나비 떼가 난무한다. 시야가 흐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에 딸아이는 면 수건으로 차 앞 유리창을 부지런히 닦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후진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문득 그 와중에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영화장면이 떠올랐다. 흰 눈 벌판의 시베리아 유형지를 끌려가는 카츄사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네프로도프의 모습이….
바람은 매서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쳤고, 세상은 순식간에 시베리아의 설원처럼 변해 갔다. 딸아이는 작은 손으로 계속 차의 앞 유리를 닦아내며 아빠를 도왔다. 남편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끝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들이 다 멈추었다.
어디선가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는 능숙하게 차량 사이를 정리하더니 우리 차에 올라탔다. 침착하게 방향을 잡아 차를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가 건넨 도움은 폭설 속에 켜진 한 줄기 등불 같았다.
마침내 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차들이 오가는 길 위라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겨우 청로 다리를 건너 가음과 춘산 방향으로 길을 돌렸다.
얼마 후. 눈보라 너머로 붉은 벽돌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집이었다.
그 순간의 안도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거친 바다를 헤매다 항구의 불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숨이 흘러나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불과 몇 킬로미터 남짓한 길을 오는 데 세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그날 우리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절실히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낯선 사람의 작은 친절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딸아이는 학교를 결석하면 개근상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다음 날 폭설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 출석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금세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
아이와 남편은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한참을 웃고 뛰어 놀았다.
남편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눈밭 위를 뛰노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하얀 햇살처럼 번져가던 그 겨울날.
그 모습은 이제 한 장의 오래된 사진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흘렀다.
딸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은 떠나도 함께한 시간은 떠나지 않는다. 눈 내리던 길 위에서 나누었던 걱정과 안도, 서로를 향한 손길과 웃음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지금도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사철나무 가지마다 내려앉은 눈꽃이 희미한 불빛을 머금고 있다. 흰 눈은 지나간 시간의 상처와 그리움을 덮어 주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사랑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눈 오는 날이면 나는 가끔 그 겨울로 돌아간다.
폭설 속에서 길을 잃을 뻔했던 순간보다, 서로를 붙들어 주던 따뜻한 마음들을 먼저 떠올린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갔지만, 그 겨울의 눈은 아직도 내 마음 한켠에 소복이 쌓여 있다.
그 눈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남편과 딸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마치 오늘 내리는 눈처럼, 조용하고도 환하게.
*작품평
작품평: 「그 겨울의 폭설」
「그 겨울의 폭설」은 한 차례의 폭설 속 귀갓길 체험을 중심으로, 가족애와 인간적인 온기,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의 힘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낸 수필입니다. 단순한 사건의 기록을 넘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삶과 사랑의 의미를 성찰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줍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생생한 현장감입니다. 설 다음 날 귀경길의 정체, 명절 음식 냄새가 가득한 부엌, 얼어붙은 고갯길에서 후진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 차창 밖으로 몰아치는 눈보라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독자는 마치 그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청로 고갯마루에서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장면은 긴장감이 뛰어나며, 독자의 몰입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냅니다.
또한 작품은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운전자들의 불만 어린 시선 속에서 느끼는 미안함과 불안, 남편을 향한 안쓰러움, 그리고 낯선 청년의 도움을 받았을 때의 안도감이 진솔하게 전달됩니다. 특히 "폭설 속에 켜진 한 줄기 등불 같았다"는 표현은 그 청년의 친절이 지닌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작품의 정서적 중심을 형성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작품은 단순한 추억담을 넘어 상실과 기억의 서정성으로 확장됩니다. "딸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는 짧고 담담한 문장은 앞서 묘사된 모든 장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독자는 비로소 이 이야기가 단순한 폭설의 기억이 아니라, 이미 떠난 남편과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의 기록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은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깊은 감동을 남깁니다.
문체 역시 돋보입니다. 눈을 "세상의 모서리를 지우고 오래된 기억 위에 하얀 이불을 덮는 존재"로 표현하는 도입부와, 마지막의 "그 눈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남편과 딸의 웃음소리를 듣는다"는 결말은 서로 아름답게 호응하며 작품 전체를 하나의 원형 구조로 완성합니다. 눈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기억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을 매개하는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다만 중반부의 톨스토이 『부활』과 시베리아 유형지 장면에 대한 언급은 작가의 내면 연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다소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흐름을 잠시 끊는 느낌도 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연결하거나 간결하게 다듬는다면 작품의 집중력이 더욱 높아질 수 있겠습니다.
종합하면 「그 겨울의 폭설」은 폭설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인간적 연대,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의 가치를 따뜻하게 전하는 수작입니다. 읽고 난 뒤에도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남편과 딸의 웃음소리를 듣는 화자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으며, 독자 또한 자신의 삶 속 소중한 겨울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입니다. 특히 담백한 진정성과 절제된 감성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