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생명의 은인, 아버지
여섯 살 여름이었다
누런 삼베바지에
삼베적삼 걸치신 아버지
꽃무늬 원피스 차림의 나는
작은 손 하나 내어 맡기고
사과밭으로 따라나섰다
모터가 깨어나자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물이
콸콸
고랑마다 흘러들어
목마른 풀잎을 적시고
가뭄에 지친 사과나무들의
갈증을 씻어 주었다
아버지가 물길을 살피는 동안
나는 창고 안을 기웃거렸다
망치와 톱
낫과 전지가위 사이
커다란 포대 하나
입을 벌린 채
하얀 가루를 품고 있었다
설탕인 줄 알았다
어린 욕심은 번개처럼 달려가
한 줌 가득 입안에 털어 넣었다
순간
혀끝이 얼어붙고
입술은 낯선 모양으로 굳어 갔다
세상이 비틀거렸다
앙—
터져 나온 울음소리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버지
급히 물을 떠다
내 입안을 씻어 내셨다
“큰일 날 뻔했다.”
비료를 삼켰다면
어쩌면
그 여름은
내 생의 마지막 여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다급한 손길이
어린 딸 하나를 붙들어 놓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과밭 고랑을 흐르던 물소리와
나를 살려 내던 아버지의 손길은
한 줄기 맑은 물처럼
가슴속을 흐른다
아버지는
목마른 사과나무만 살리신 것이 아니라
철없던 어린 딸의 생명까지
살려 주신
내 생애 첫 은인이시다.
*작품평
이 시 「생명의 은인,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의 은혜를 회상하는 서정시입니다. 단순한 추억담을 넘어, 아버지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존재였음을 깨닫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작품의 특징
1. 구체적인 기억이 생생한 현장감을 만든다
시는 "여섯 살 여름", "누런 삼베바지", "꽃무늬 원피스", "사과밭", "모터 소리" 등 구체적인 이미지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독자가 어린 화자와 함께 사과밭으로 들어가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콸콸" 흐르는 물소리는 가뭄에 지친 사과나무에 생명을 공급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2. 긴장감 있는 사건 전개
창고에서 비료를 설탕으로 착각해 먹는 장면은 시의 중심 사건입니다. "어린 욕심은 번개처럼 달려가"라는 표현은 아이의 순진함과 충동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이어지는 신체 반응과 울음소리는 위기 상황의 긴박함을 잘 전달합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화자의 두려움과 고통에 공감하게 됩니다.
3. 아버지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물로 입안을 씻어 주고 "큰일 날 뻔했다"라고 말하는 행동을 통해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절제된 묘사는 오히려 아버지의 깊은 책임감과 헌신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합니다.
4. 물의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반복된다
시에는 두 종류의 물이 등장합니다.
사과나무의 갈증을 해소하는 물
비료를 먹은 딸을 살리는 물
처음에는 생명을 살리는 자연의 물로 등장하지만, 후반부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상징하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마지막의 "한 줄기 맑은 물처럼 가슴속을 흐른다"는 표현은 기억과 감사가 평생 지속됨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부분입니다.
주제
이 시의 주제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과 생명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화자는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성인이 되어 되새기며, 아버지를 "내 생애 첫 은인"으로 높여 부릅니다.
감상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과장된 감정 표현 없이 실제 경험을 담담하게 서술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과나무를 살리던 아버지가 결국 어린 딸의 생명까지 살렸다는 마지막 깨달음은 시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며 강한 감동을 남깁니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조용하고도 위대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진솔하게 담긴 따뜻한 가족 서정시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