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분홍 하이힐
미스터 박이 선물한 구두
그와의 만남은
분홍 하이힐 끝에서
가볍게 흔들리다
어느새 먼 하늘로 사라졌다
금성라디오에서는
남일해의 노래
<빨간 구두 아가씨>가 흐르고
또각또각
높은 빌딩만 바라보던 그녀는
곁에서 함께 걷는 이의
마음의 걸음은 보지 못했다
겨울 공기처럼 차갑게 식어 가던
이별의 뒷모습
가랑잎 한 장
바람에 떠나가듯
가버렸다
어느 날
교회 청년회에서 만난
미스터 리의 전화 한 통
구두 소리 똑똑똑
걸음을 재촉하던 순간
길 건너편에서
하얀 운동화 끈을 고쳐 매던
낯익은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스 김, 천천히 와도 됩니다.”
바람결에 실려 온 그 목소리
단정한 머리칼 사이로
싱그러운 햇살이 번지고
어느새 우리는
정겨운 눈빛을 나누며
말보다 먼저 마음을 건네고
저녁노을 물든 강둑길을
나란히 걸었다
이번에는
또각이는 구두보다
서로의 걸음에 귀 기울이며
푸른 여름 저녁
우리는 나란히
지평선 쪽으로 걸어갔다.
이 시는 **‘신발’과 ‘걸음’**을 중심 이미지로 삼아 한 번의 실패한 사랑과 새로운 만남, 그리고 성숙해진 사랑의 의미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작품평
「분홍 하이힐」은 선물 받은 구두를 매개로 사랑의 시작과 끝, 그리고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서정적으로 보여준다. 시 속의 분홍 하이힐은 단순한 패션 소품이 아니라 화자의 젊은 시절 꿈과 설렘,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대를 상징한다.
첫 번째 만남에서 화자는 "높은 빌딩만 바라보던 그녀"로 묘사된다. 이는 미래와 성공, 혹은 이상을 좇느라 정작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던 모습을 의미한다. "마음의 걸음은 보지 못했다"는 표현은 이 시의 핵심 구절로, 사랑이 단순히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속도와 마음을 이해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그 사랑은 "가랑잎 한 장 바람에 떠나가듯" 허무하게 끝난다.
이후 등장하는 미스터 리는 이전 사랑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특히 "미스 김, 천천히 와도 됩니다"라는 대사는 시 전체의 정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상대에게 속도를 맞추라고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태도 속에서 배려와 이해의 사랑이 드러난다. 하얀 운동화는 화려한 분홍 하이힐과 대조되며, 꾸밈보다 진정성과 편안함을 상징한다.
후반부에서 화자는 "이번에는 또각이는 구두보다 서로의 걸음에 귀 기울이며"라고 말한다. 이는 외형적 조건이나 순간의 설렘보다 상대의 마음과 삶의 리듬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랑의 자세를 보여준다. 마지막의 "푸른 여름 저녁 / 우리는 나란히 / 지평선 쪽으로 걸어갔다"는 결말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희망과 동행의 의미를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계절의 변화(겨울에서 여름으로), 신발의 이미지(분홍 하이힐과 하얀 운동화), 그리고 걸음의 모티프를 통해 사랑의 성장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서정적이면서도 이야기성이 살아 있어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며, "사랑은 상대의 걸음에 귀 기울이는 일"이라는 따뜻한 메시지가 오래 여운으로 남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