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육이오의 기억
1950년 유월의 어느 날
문화센터 강의실에서
월래에 피난 살았다는 한 여인을 만나
차를 마셨다
집에 돌아와
나는 천천히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6·25가 터진 지 며칠 뒤
소방서 나팔꽃 모양 경보기 사이로
확대경처럼 부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면민 여러분, 피난하십시오.
우리 집도 서둘러 보퉁이를 꾸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집을 지키겠다며 버티셨고
삼촌과 숙모는
여기 남으면 포탄에 맞는다며
두 분의 등을 떠밀었다
쌀과 보리쌀, 미숫가루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은 작은 항아리들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 이고
한 손에 또 보따리 들고
남동생 아기를 등에 업고
네 살배기 나는 엄마 곁에 바짝 붙었고
큰딸과 작은딸 손잡고 뒤따르게 하며
과수원집을 떠났다
개와 닭들이 슬픈 눈으로 울었다
아버지는 이미
후생원 아이들을 트럭에 태워
피난길에 오른 뒤였다
겨우 올라탄 기차 안
사람과 짐보따리가 뒤엉켜
숨 쉴 틈조차 없었다
구석 한 자리를 얻었지만
아이들의 숨결은
사람들 틈에 눌려
가늘어졌다
엄마가 건네준 주먹밥
아버지 주먹만 한 밥덩이와
대구포 한 조각
우리 세 자매는
아껴가며 베어 물었다
짭짤한 생선 맛과
조금 단 밥알
그날의 허기 앞에서는
세상 어떤 진수성찬도
그보다 맛있지 않았으리
전쟁은 그때
우리에게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는
먼 소문 같은 것이었다
저녁 무렵
피난지 월래 바닷가에 닿았다
폭격에 지붕이 날아간 초가집
바람이 주인처럼 드나드는 곳이
우리의 새 집이었다
언니들은 천막학교로 가고
홀로 남은 나는
조개껍질을 밥그릇 삼아
모래밭에 소꿉상을 차렸다
먹구름이 밀려오던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기 갈매기 한 마리
어미를 찾는지
울며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그 울음결을 따라
어린 내 가슴에도
엄마가 밀려왔다
“엄마, 엄마…”
부르자
빠른 발자국 소리
모래밭을 가르며
엄마가 달려왔다
환한 얼굴로
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 순간
전쟁도 가난도 몰랐던 아이는
엄마 품 하나로
세상을 다 얻었다
작품평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적 비극을 거창한 이념이나 전쟁의 참상 자체보다 생활의 기억과 가족의 풍경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시인은 문화센터에서 만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계기로 자신의 기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전쟁을 겪은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피난을 떠나기 전 경보기에서 흘러나온 "면민 여러분, 피난하십시오"라는 방송, 쌀과 보리쌀, 장독을 챙기던 가족들, 개와 닭들의 울음소리 등은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특히 어린 화자의 눈에 비친 풍경들은 역사책 속 전쟁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시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기차 안의 풍경과 주먹밥, 대구포 한 조각의 기억은 전쟁이 가져온 결핍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고통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어떤 진수성찬도 그보다 맛있지 않았으리"라는 표현을 통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소박한 행복을 드러낸다.
후반부는 작품의 정서적 절정이다. 폭격으로 지붕이 날아간 집에서 생활하던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놀다가 아기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엄마를 찾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미를 찾는 갈매기와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리고 "빠른 발자국 소리"와 함께 달려와 아이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전쟁의 공포를 압도하는 사랑의 이미지로 완성된다.
마지막의
"엄마 품 하나로
세상을 다 얻었다"
라는 구절은 이 시의 주제를 집약한다. 어린아이에게 전쟁과 가난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어머니의 품은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세상이었다. 시인은 이를 통해 전쟁의 기억을 단순한 고난의 기록이 아니라 모성애와 가족애의 기억, 그리고 인간을 지탱하는 사랑의 힘에 대한 이야기로 승화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사실적인 회상과 섬세한 감정 묘사가 조화를 이루며, 전쟁 세대의 체험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울림으로 전달하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을 통해 전쟁의 비극과 어머니의 사랑을 대비시킨 점이 큰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