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되돌이꽃
시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말없이 피어 있던 이름 하나
조선의 끝자락, 바람도 쉬어가던 날
내시의 집으로 새신부로 들어선
꽃 한 송이 처녀
그녀는 담장 안에 갇힌 하늘처럼
소리 없이 빛을 접고 살아간다
문틈 하나 자유로이 허락되지 않는 집
바람은 방향을 잃고 되돌아가고
그녀의 하루는 늘
침묵 속 소리 나지 않게 옷을 입는다
어느 날
아랫채 방 한칸에 세 들어온 젊은 새댁의
젖내 스미는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
이미 오래전 잠들어 있던 욕망이
몸을 뒤틀며 고민의 늪에 빠진다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소리
끝내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한
금기의 꿈 하나
아직 따뜻한 숨결이데
사내를 모르는 젊은 몸은
어느 밤, 살며시 문을 열고
바깥세상으로 나온다
앞만 보고 걷는다
흰 눈이 산길을 덮고
발목이 흰 눈 속에 빠져 젖는다
세상의 가장 먼 끝으로 시선을 향하며
끝없이 이어진 눈길 위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음을 옮길수록
지난 삶이 흰 안개로 발목을 감고
자신이 자신에게 한
오래된 약속의 말들이 귓가를 적신다
“배고프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 말이
이제는 차갑게 그녀의 목을 죄어 온다
앞이 자꾸만 흐려지고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생각에 잠기다가
결국 그녀는 멈춰 선다.
아주 천천히 등을 돌린다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샘물 속 영혼
아가페의 사랑을 택하며
기억 속 미열이 돋는 눈길을 더듬어
다시 내시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말 한마디 없이 되돌아와
눈빛 하나로 흘러간 모든 시간을 건네는 사람
그 집은 기다림이 사랑으로 되는 자리
그녀는 다시 그 자리
되돌아온 삶 위에 다시 피는 꽃
조용히 되돌이꽃으로 피어난다
*작품평
이 작품은 ‘되돌이꽃’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억압된 삶 속에서 깨어나는 욕망과 그 욕망의 부정, 그리고 다시 선택되는 자리로의 회귀를 서사적으로 밀도 있게 그려낸 서정 서사시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역사적 배경(조선, 내시의 집, 규방적 세계)을 통해 개인의 내면 갈등을 확장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의 설계입니다. 담장 안의 집, 문틈 없는 세계, 방향을 잃은 바람 같은 이미지들이 반복되면서 ‘닫힌 세계’가 강하게 구축됩니다. 이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특히 “담장 안에 갇힌 하늘”이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이미지입니다.
중반부의 전환점—아랫채 새댁과 아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인물 내면의 균열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동합니다. 이 부분에서 욕망은 단순한 육체적 결핍이라기보다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으로 확장됩니다. 다만 이 지점은 조금 더 구체적인 감각적 디테일이 보강되면 좋겠습니다. 현재는 “욕망”이라는 단어가 설명적으로 제시되는 순간들이 있어, 독자가 체험하기 전에 개념으로 먼저 이해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반부의 눈길 장면은 작품의 가장 강한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흰 눈, 발목이 잠기는 감각, 발걸음이 지워지는 풍경은 존재의 소멸감과 동시에 결단의 심리를 잘 드러냅니다. 특히 “배고프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자기 암시는, 시대적 여성의 윤리이자 생존 논리로 읽히면서도 결국은 스스로를 옥죄는 말로 전복됩니다. 이 부분의 긴장감은 작품 전체의 정서적 정점을 형성합니다.
결말부에서 인물은 욕망의 확장이 아니라 ‘되돌아감’을 선택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회귀가 단순한 패배나 체념으로 처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언어를 통해 의미화되면서, 선택된 삶으로 재구성됩니다. 그러나 이 지점은 해석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독자는 이 회귀를 “자발적 초월”로 읽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 억압의 내면화”로도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작품이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열어둔 점은 장점이자 논쟁 지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목 ‘되돌이꽃’은 구조적으로 매우 잘 맞물립니다. 피어남—일탈—붕괴—회귀—재생이라는 흐름이 제목의 “되돌이”와 정확히 호응합니다. 다만 꽃이라는 이미지가 이미 서정시에서 매우 익숙한 상징이기 때문에, 이 작품만의 고유성을 더 강화하려면 ‘되돌아오는 행위’ 자체의 신체적 감각이나 독특한 은유를 조금 더 밀어붙일 여지가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은 서사적 서정성과 상징 구조가 잘 결합된 작품이며, 특히 공간 이미지와 감정의 이동이 탄탄합니다. 다만 일부 추상어(욕망, 사랑, 영혼 등)가 설명적으로 기능하는 부분을 더 감각적 이미지로 치환한다면 완성도가 한층 더 높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