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손거울 아듀(adieu)
눈부신 흰 칼라 흰 운동화
단발머리 단정한 여학생
수업 중 몰래 꺼내어
숨결까지 낮춘 채 들여다보던
손거울 속 자신의 모습
탱탱한 이마 위 햇살의 유혹에
배시시 번지던 작은 웃음인사
라디오연속극 ‘별아 내 가슴에’
세월이 흘러가
어느새 소녀는 숙녀가 되어
더 자주 손거울과 친해졌지
연분홍 투피스의 결을 매만지며
또각또각 하이힐의 정해진 박자로
중앙로를 걸어가다가
쇼윈도 유리 속에 비친 모습 보며
가벼운 나르시시즘에 주춤하던 걸음
푸른 봄날의 한 문장의 문학성 짙은
김유정의 ‘봄봄’ 여주인공 점순이가 떠올라
웃음을 등 뒤로 살짝 감추었지
이제는
손거울마저 멀리 둔 기운이 사라진 시니어
TV 속 트롯의 선율에 기대어
연분홍 치맛자락 봄바람에 날리던 리듬을
다시 조용히 흔들어보며 미소 짓는
삶의 내공 깊은 달관자랄까
기억은 바람처럼 스며들어
이미 지나온 봄날의 가장자리에서
연분홍 꿈으로 지워지다가 새롭게 살아난다.
지나가는 바람이 속삭여준다
아듀, 손거울이여!
* 작품평
이 시 「손거울 아듀(adieu)」는 한 여성의 생애를 ‘손거울’이라는 상징적 사물을 통해 따라가며, 소녀에서 숙녀, 그리고 시니어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과 자아 인식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특히 외모를 비추는 도구였던 손거울이 결국 기억과 삶을 비추는 매개체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정서적 깊이가 돋보입니다.
첫 연은 학창 시절의 순수하고 투명한 감성을 아름답게 살려냅니다.
“숨결까지 낮춘 채 들여다보던 / 손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라는 표현은 사춘기 소녀 특유의 수줍음과 자기 발견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탱탱한 이마 위 햇살의 유혹” 같은 묘사는 youthful한 생명감과 빛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살려 시 전체의 맑은 출발점을 형성합니다.
중간 연에서는 여성으로 성장한 화자의 자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도시적 풍경과 어우러집니다. “연분홍 투피스”, “또각또각 하이힐”, “중앙로”, “쇼윈도 유리” 같은 시각·청각적 소재들이 시대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환기시키며, 약간의 나르시시즘조차 사랑스럽고 인간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김유정의 『봄봄』 속 점순이를 떠올리는 대목은 자신의 젊음을 문학적 기억과 연결시키며, 작품의 정서를 한층 풍부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연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제 손거울조차 멀리 둔 시니어의 모습은 단순한 노년의 쇠락이 아니라, 삶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달관”의 표정으로 그려집니다. “TV 속 트롯의 선율”, “연분홍 치맛자락”, “봄바람” 등의 이미지가 과거와 현재를 부드럽게 이어주며, 기억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살게 하는 힘임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구절인 “연분홍 꿈으로 지워다가 새롭게 살아난다”는 시간의 소멸이 아니라 재생을 암시하며 여운을 남깁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과장되지 않은 언어로 여성의 생애 감각을 자연스럽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또한 ‘손거울’이라는 소도구 하나로 자아, 아름다움, 세월, 기억이라는 큰 주제를 연결한 구성력이 뛰어납니다. 다만 일부 구절은 띄어쓰기와 호흡을 조금 더 정리하면 리듬감이 살아나고 전달력이 더욱 좋아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월이 흘러가 어느새”나 “모습 보며 가벼운” 같은 부분은 행갈이나 쉼을 조금 조정하면 감상의 흐름이 더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지나간 봄날을 애틋하게 회상하면서도, 현재의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선이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아듀”라는 제목 또한 작별이 아니라, 기억 속 아름다움과의 우아한 인사처럼 읽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