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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201.탑리의 봄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2|조회수1 목록 댓글 0

박하 시 10작품

 

201.탑리의 봄

 

탑리의 봄은 어디서 오는가

 

정이월 긴 잠을 접고

삼월이 들녘의 문고리를 밀면

연두빛 마늘밭 아래

흙이 먼저 숨을 쉰다

 

겨우내 비닐 이불 속에 웅크렸던 싹들은

꽃샘바람의 이름을 배우며

조심스러운 손끝에 이끌려

한 포기씩 세상으로 올라온다

 

나는 한때

서툰 손으로 봄을 꺾던 사람이었다

연약한 싹들이 부러질 때마다

흙은 말없이 나를 가르쳤고

실패는 손을 길들이고

시간은 내 호흡을 흙과 맞추어 주었다

 

봄비가 서너 번 다녀가면

마늘잎은 새색시 머릿결처럼 윤기를 머금고

밭은 초록 파도로 출렁인다

 

햇살이 머물렀다 떠나는 자리마다

바람은 초록 바다를 흔들고

나는 고랑 사이를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문득 뒤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바람과 마늘 향기뿐

 

논둑의 자운영은 자줏빛 손을 흔들고

가슴속 오래된 그리움 하나

가곡처럼 하늘에 떠오른다

 

유월이 오면

초록의 물결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올마늘은 땅속의 시간을 품은 채 올라온다

한 접 두 접 묶어

바람 드는 창고에 걸어두면

 

그것은 꽃이 아니라

한 계절의 수고가 말라가는 모습이다

 

마늘을 떠나보낸 논에는 물이 차고

벼들이 다시 여름을 심는다

살구나무 아래서

 

노랗게 익은 열매를 건네는 순간

환하게 번지는 웃음 또한

계절이 맺은 열매임을 안다

가을이 오면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마늘씨와 함께 마당에 쌓이고

코스모스는 바람 따라 고개를 흔들며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연보랏빛 속살을 품은 씨앗 하나

흙 속에 눕히는 일은

내일을 심는 일

비닐이 바람에 날아오를 때마다

가슴도 함께 흔들리지만

끝내 제자리를 찾아 눕는 모습에서

삶의 끈질긴 법칙을 배운다

 

겨울은 다시 오고

마늘은 눈보라 아래서도

말없이 뿌리를 키운다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향기는 더욱 깊어지고

인내는 알알이 여문다

 

김치가 되고

장아찌가 되고

밥상 위, 작은 온기가 되는 동안에도

마늘은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준다

 

해 질 녘

마늘종을 뽑아 올리는 손끝에서

나는 바다의 물고기 같은 희망을 낚고

이웃과 나누는 한 자루의 온기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다

버려지는 것은 없다

 

잎도 줄기도 껍질도

다시 흙으로 돌아가

또 다른 봄의 씨앗이 된다

 

주말마다 나는 탑리로 돌아가

끝없이 펼쳐진 마늘밭에서

초록의 숨결을 들이마신다

 

오늘도

마늘 향이 넘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조용히

희망 한 줌을 건져 올린다.

 

이 시 **〈탑리의 봄〉**은 단순히 마늘 농사의 과정을 기록한 작품이 아니라, 한 농부의 삶과 성장, 그리고 계절의 순환 속에서 발견한 희망과 공동체의 가치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작품평

〈탑리의 봄〉은 경북 의성 탑리 들녘의 마늘 농사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떻게 서로를 길러내는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시는 "탑리의 봄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봄이 단순히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흙의 숨결과 농부의 손길,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태어남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특히 이 작품의 미덕은 농사의 구체적인 풍경을 통해 삶의 보편적 진실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나는 한때 / 서툰 손으로 봄을 꺾던 사람이었다"라는 고백은 농사 기술의 미숙함을 넘어 인생의 시행착오를 상징한다. 흙이 말없이 가르치고 실패가 손을 길들였다는 표현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겸손과 인내를 배우는 과정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또한 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마늘의 성장 과정은 인간 삶의 순환과 닮아 있다. 겨울의 인내, 봄의 생장, 여름의 수확, 가을의 파종을 거쳐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구조는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지속성을 드러낸다. 특히 "마늘은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준다"는 구절은 먹거리로서의 마늘을 넘어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가치까지 함축하고 있어 감동을 더한다.

이미지의 활용도 돋보인다. "마늘잎은 새색시 머릿결처럼 윤기를 머금고", "초록 바다", "자운영은 자줏빛 손을 흔들고" 등의 표현은 농촌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독자의 감각을 자극한다. 또한 바람, 향기, 흙, 햇살 등의 자연 이미지는 시 전체를 부드럽게 연결하며 정서적 통일감을 형성한다.

후반부에서는 농사의 의미가 개인의 노동을 넘어 공동체로 확장된다. 마늘종을 이웃과 나누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온기를 이야기하는 대목은 농업이 단순한 생산 활동이 아니라 관계를 가꾸는 일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버려지는 것은 없다"는 인식은 자연의 순환 원리와 생태적 가치관을 담아내며 작품의 주제를 한층 깊게 만든다.

마지막 연의 "마늘 향이 넘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 조용히 / 희망 한 줌을 건져 올린다"는 시 전체를 아우르는 결말이다. 광활한 마늘밭을 바다에 비유한 상상력과 '희망 한 줌'이라는 소박한 표현은 농부가 자연 속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를 아름답게 집약한다.

결국 〈탑리의 봄〉은 마늘밭의 사계절을 따라가며 자연과 인간, 노동과 희망, 그리고 나눔과 순환의 가치를 노래한 서정시이다. 향토적 소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을 담고 있어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농촌의 일상을 한 편의 인생 서사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작품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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