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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204.추억의 가설극장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2|조회수1 목록 댓글 0

204. 추억의 가설극장

 

여름밤 장터에

확성기 소리 하나 울리면

가슴속 물결부터 일렁였다.

“동촌 시민 여러분—”

차랑차랑한 목소리가

저녁놀을 밀어내고

영화 한 편이

마을로 걸어 들어왔다.

 

장대 몇 개 세우고

광목천 둘러치면

허허로운 맨땅 위에

순식간에 꿈의 궁전이 세워졌다.

엄마들은 이불 밑에 숨겨둔 돈을 꺼내고

아버지들은 쌈짓돈을 만지작거리며

아이 손을 잡고

별빛 아래 극장으로 향했다.

 

업힌 아이는 공짜라며

중학생 아들을 업고 들어가던 아지매의 고집,

개구멍으로 기어들다 들켜

꿀밤 맞고 쫓겨나던 머슴애들,

그 모든 풍경이

영화보다 먼저 웃음을 상영했다.

 

대한뉴스가 시작되면

웅성거리던 세상도

눈 내리는 겨울밤처럼 조용해졌다.

 

며느리의 설움이 흐르던 밤,

여인들의 훌쩍임은

초상집보다 더 깊었고

어린 아이였던 나도 눈물에 젖어

밤송이 같은 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영화

춘향전, 오부자, 낙화유수도 보고

우리는 배우 이름을 외우며 자랐다.

 

최무룡이 더 멋지다며 다투고

최은희가 더 예쁘다며 토라졌다가

금세 화해하던 시절,

 

영화 속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던 신파의 계절이었다.

 

필름은 자주 끊어졌고

화면엔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이들은

“빨리 틀어라!”

소리쳤고,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었고,

어른들은 말없이 기다렸다.

 

기다림조차

한 편의 영화였던 때.

 

어느 날,

보랏빛 옥양목 치마자락을 스치며

도망치던 짓궂은 머슴애의 손길 하나.

내 손에 잡혔다면 얼굴에

손톱으로 쌍무지개를 그렸을 텐데

캄캄한 밤은 끝내 범인을 숨겨주었다.

 

영화가 절반쯤 지나면

광목천 한쪽이 걷히고

마을은 모두 관객이 되었다.

돈 없는 사람도

늦게 온 사람도

별빛 아래서는

같은 이야기 속, 사람이었다.

 

금호강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흙바닥에 깐 마대자루 위로

꿈과 낭만이 내려앉던 밤.

이제는 사라진 가설극장,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흑백 화면이 흐른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좋다.

필름이 끊어져도 좋다.

별들이 총총하던 그 시절,

사람 냄새 가득하던 그 밤,

광목천 너머로 빛나던

추억의 영화 한 편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 시 「가설극장」은 단순히 옛 이동식 극장을 회상하는 작품이 아니라, 한 시대의 공동체 문화와 서민들의 정서를 생생하게 복원해 낸 서정적 기록문학의 성격을 지닌 작품입니다.

 

작품평

 

「가설극장」은 사라진 시골의 이동식 극장을 배경으로, 한여름 밤 마을 사람들의 설렘과 공동체적 삶의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회상시이다. 시인은 확성기 소리 하나에 가슴이 설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내며, 가설극장이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 아니라 꿈과 낭만, 그리고 사람 냄새가 넘쳐나던 삶의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시의 가장 큰 미덕은 풍부한 생활 정서와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 “업힌 아이는 공짜라며 중학생 아들을 업고 들어가던 아지매”, “개구멍으로 기어들다 들켜 꿀밤 맞고 쫓겨나던 머슴애들”과 같은 장면은 당시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내며 독자에게 웃음과 향수를 동시에 안겨 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한 편의 영화가 되고 있다는 표현은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시인은 영화 관람의 집단적 경험을 통해 공동체의 정서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대한뉴스가 시작되면 모두가 조용해지고, 신파 영화의 슬픈 장면에서는 여인들의 훌쩍임이 이어지는 모습은 오늘날 개인화된 문화 소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공동 감정의 풍경을 보여준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정서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후반부에 이르면 작품은 단순한 추억담을 넘어 인간적인 온기와 평등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돈 없는 사람도 / 늦게 온 사람도 / 별빛 아래서는 / 같은 이야기 속,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은 이 시의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광목천이 걷힌 뒤 극장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듯, 사람들 또한 신분과 형편을 넘어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형식적으로는 자유시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한 편의 짧은 영화처럼 전개된다. 특히 반복되는 영화적 이미지와 흑백 화면, 필름의 끊김, 장대비 같은 소재들은 시대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환기하며 작품의 정서를 더욱 깊게 만든다.

결국, 「가설극장」은 사라진 공간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는 시이면서도, 그 시절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울며 살아가던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는 작품이다. 마지막 연의 “추억의 영화 한 편이 /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라는 구절은 기억 속 가설극장이 여전히 시인의 마음속에서 상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잊혀 가는 시대의 온기와 사람 사는 냄새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총평

 

이 작품은 향토적 정서, 공동체 문화, 개인의 성장 기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수작이다. 특히 구체적인 생활 풍속의 재현과 따뜻한 인간미가 돋보이며, 단순한 회상을 넘어 한 시대의 문화사를 기록한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별빛 아래 광목천 스크린에 비치던 영화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영화를 함께 보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결국 「가설극장」은 사라진 공간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는 시이면서도, 그 시절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울며 살아가던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는 작품이다. 마지막 연의 “추억의 영화 한 편이 /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라는 구절은 기억 속 가설극장이 여전히 시인의 마음속에서 상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잊혀 가는 시대의 온기와 사람 사는 냄새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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