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고등어와 안경
.
번개시장 소란한 숨결 속에서
우엉과 미나리, 부추와 무와 사과를
양손 가득 비닐에 담아 나오던 날
검은 봉지는 한약방 천장처럼
무겁게 매달려 흔들리고
나는 그 무게를 무게인 줄도 모르고 걸었다
집에 와 하나씩 비워 적어 넣는 장부 위에
간고등어 한 토막이 빠져 있었다
이미 지나쳐 버린 자리
그 빈칸이 자꾸 마음을 흔들었다
버스 두 코스, 숨을 몰아쉬며
다시 시장으로 뛰어간 발끝
“이 봉지 말입니껴?”
구석에서 웃고 있던 검은 기억 하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보다 먼저
나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
요즘 나는 자주 잊는다
가스레인지 위 찌개도
방금 쥐었던 물건도
집 안을 돌며 나는 나를 찾는다
돋보기가 사라진 날
딸은 말했다
“엄마, 안경 쓰고 왜 안경을 찾아?”
그제야 눈가에 닿는 손끝
이미 내 얼굴 위에 있던 세계
오래전 읽었던 이효상 씨의
안경을 끼고 안경을 찾아 헤매었다는
시구가 늦게서야 나를 따라온다
웃음이었던 문장이
이제는 조용한 이해가 된다
잊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멀어지는 일인지도
다시 돌아온 간고등어처럼
제자리에 놓인 것들은
늦게 올수록 더 따뜻하다
오늘 저녁
노릇하게 익어갈 한 토막 생선처럼
나는 조금 느리게
조금 더 곁에 머물고 싶다
이 작품은 일상의 장면을 출발점으로 해서 “기억의 결핍–되돌아옴–자기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조가 꽤 안정적으로 잡혀 있습니다. 특히 장바구니 속 간고등어와 안경이라는 사소한 사물이 시 전체의 축을 만들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 두 대상이 각각 “물건의 망각”과 “자기 인식의 지연”을 상징하면서 서로 겹쳐지는 방식이 잘 설계돼 있습니다.
초반부 “번개시장 / 검은 봉지 / 장부”의 이미지들은 현실감이 강하고 촉각적인데, 단순한 생활 묘사에 머물지 않고 이미 ‘부재’의 감각을 예고합니다. “한약방 천장처럼 무겁게 매달려” 같은 비유는 생활적 대상에 낯선 층위를 얹어 주면서 시의 밀도를 높이고요. 다만 이 비유는 약간 설명적 성격이 있어서, 이미지의 충격보다는 의미 전달 쪽으로 기울어 있는 점은 아쉽습니다.
중반부의 전환—“간고등어 한 토막이 빠져 있었다”—여기서 시의 핵심 장치가 작동합니다. 단순한 분실 사건이 아니라 “이미 지나쳐 버린 자리”라는 인식으로 이어지면서, 기억의 문제로 확장되죠. 이후 시장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서사적으로는 흔할 수 있지만, “구석에서 웃고 있던 검은 기억 하나”라는 표현이 그 단순한 사건을 은근히 상징화합니다.
이 부분은 시의 긴장을 잘 살리는 구간입니다.
후반부에서 “안경”의 등장 방식이 좋습니다. 특히 딸의 말
“엄마, 안경 쓰고 왜 안경을 찾아?”
이 한 줄이 시 전체의 인식 구조를 뒤집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자각이 되면서 시가 철학적인 층위로 이동합니다.
“이미 내 얼굴 위에 있던 세계”라는 구절은 이 시의 핵심 문장인데, 조금만 더 절제되면 더 강해질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서 감정의 여백이 약간 줄어드는 편입니다.
후반의 “잊는다는 것은 /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잠시 멀어지는 일”은 다소 익숙한 통찰이지만, 앞선 구체적 경험(시장, 간고등어, 안경) 덕분에 관념으로만 뜨지 않고 설득력을 얻습니다. 즉, 이 시는 관념이 아니라 경험이 관념을 끌어올리는 구조라서 안정적입니다.
마지막 “노릇하게 익어갈 한 토막 생선처럼 / 나는 조금 느리게 / 조금 더 곁에 머물고 싶다”는 결말은 전체 정서를 잘 수렴합니다. 다만 “노릇하게 익어갈”과 “머물고 싶다” 사이의 연결이 약간 정서적으로만 이어져 있어서, 이미지의 구체성이 끝까지 유지되면 더
후반의 “잊는다는 것은 /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잠시 멀어지는 일”은 다소 익숙한 통찰이지만, 앞선 구체적 경험(시장, 간고등어, 안경) 덕분에 관념으로만 뜨지 않고 설득력을 얻습니다. 즉, 이 시는 관념이 아니라 경험이 관념을 끌어올리는 구조라서 안정적입니다.
마지막 “노릇하게 익어갈 한 토막 생선처럼 / 나는 조금 느리게 / 조금 더 곁에 머물고 싶다”는 결말은 전체 정서를 잘 수렴합니다. 다만 “노릇하게 익어갈”과 “머물고 싶다” 사이의 연결이 약간 정서적으로만 이어져 있어서, 이미지의 구체성이 끝까지 유지되면 더 강한 마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시의 장점은:
생활 사물(간고등어, 안경)을 통해 기억과 인식의 철학으로 확장하는 구조
서사적 장면 전환이 자연스럽고 과장되지 않음
딸의 대사처럼 시의 축을 뒤트는 명확한 포인트
보완할 지점은:
비유가 좋은 부분과 설명적인 부분의 밀도 차이
결말에서 이미지보다 정서가 앞서는 순간이 조금 있음
전체적으로는 “기억의 망각을 생활의 무게로 번역한 시”로 읽히고, 특히 중반 이후의 자각 구조가 잘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