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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고드름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3|조회수0 목록 댓글 0

고드름 

 

겨울이 땅을 잠근 날

세상은 숨을 멈춘 듯 얼어 있었고

나는 처마 끝에서

투명한 칼날 같은 기억을 보았다

 

고드름

수정처럼 매달린 겨울의 혀

손끝으로 떼어내면

장갑은 금세 젖어

차가움은 오히려 따뜻한 놀이가 되었다

 

하늘이 잿빛으로 무너져 내리던 날

눈은 온 세상을 지워버렸고

다음 아침

처마 밑에는

비밀처럼 길게 자란 얼음의 열매

 

우리는 그것을 보석이라 불렀고

동요를 부르며

겨울의 이름을 입속에 굴렸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긴 장대 하나로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겨울을 깨뜨리며

우리는 그것을 먹었다

달지 않은데도

왜 그렇게 달게 느껴졌는지

 

얼음 칼을 들고 뛰놀던 아이들

등 뒤에 몰래 심어 놓은 차가움

그리고 곧장 되돌아온 웃음

겨울은 언제나 장난처럼 아팠다

 

이제는

지구가 조금씩 숨을 바꾸어

그 겨울의 모양은 희미해지고

오염된 공기 속 기억만이

조심스레 입술을 뗀다

 

오늘 밤

창밖에 다시 눈이 내리고

나는 잠시 믿는다

 

언젠가 다시 처마 끝에

수세미 열매처럼 탐스럽게

겨울이 매달릴지도 모른다고

 

나는 조용히

그 얼음에게 말한다

고맙다고

한때 세상을 맑게 얼려 주어서.

 

 

 

이 시는 ‘고드름’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겨울 사물 하나를 중심에 두고, 개인의 기억–공동체의 유년 경험–기후 변화에 대한 감각까지 자연스럽게 확장해 나가는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출발점은 아주 단순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시간과 세

계 인식이 넓어지면서 시의 스케일이 커집니다.

 

가장 강한 미덕은 감각의 촘촘함입니다. “투명한 칼날 같은 기억”, “수정처럼 매달린 겨울의 혀”, “겨울의 이름을 입속에 굴렸다” 같은 표현들은 고드름을 단순한 얼음이 아니라 ‘맛과 촉감, 언어까지 가진 존재’로 변환합니다. 특히 혀·입·먹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고드름이 시각적 대상에서 신체적 기억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부분은 시의 중심 정서—차가움과 놀이, 위험과 달콤함의 공존—을 잘 지탱합니다.

 

중반부의 “우리는 그것을 보석이라 불렀고 / 동요를 부르며” 구간은 집단 기억의 장면으로 확장되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줍니다. 고드름이 개인적 회상이 아니라 한 시대의 겨울 풍경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겨울의 이름을 입속에 굴렸다”는 구절은 언어와 감각을 겹쳐 놓아 시적인 밀도를 높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의 톤이 변화합니다. “지구가 조금씩 숨을 바꾸어” 이후부터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들어옵니다. 이 전환이 이 시의 중요한 구조적 장점인데, 유년의 고드름이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계절성’의 상징으로 바뀝니다. 특히 “오염된

공기 속 기억”은 과하지 않게 현재성을 끼워 넣는 좋은 선택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언젠가 다시 처마 끝에… 겨울이 매달릴지도 모른다고”는 희망과 의심이 동시에 걸려 있는 문장이라 여운이 큽니다. 그리고 끝의 “고맙다고 / 한때 세상을 맑게 얼려 주어서”는 전체 시를 감정적으로 닫는 문장으로서 안정적인 결말입니다. ‘얼린다’는 행위가 억압이 아니라 정화로 재해석되는 점도 좋습니다.

 

다만 약간의 보완 여지도 보입니다.

 

이미지가 매우 풍부한 대신, 중반 이후에는 좋은 문장들이 다소 연속적으로 “쌓이는 방식”이라 긴장도가 조금 완만해집니다. 한두 지점에서는 이미지 대신 단단한 단문이나 더 날카로운 전환이 들어가면 리듬이 더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수세미 열매처럼 탐스럽게”는 독특하지만 앞선 이미지(고드름, 수정, 보석)와 비교하면 결이 약간 이질적이라 의도된 대비인지 한 번 더 다듬어 볼 여지는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겨울의 물성’에서 출발해 ‘기억–언어–환경 변화’로 확장되는 구조가 잘 설계된 서정시입니다. 감각적 이미지가 중심이면서도 마지막에는 윤리적/생태적 감각까지 닿아 있어서, 단순한 회상시보다 한 단계 넓은 층위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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