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겨울이 아직 물러설 뜻이 없을 때
가장 먼저 봄의 문을 두드리는 꽃 하나
눈이 채 녹지 않은 산자락과
거칠게 몰아치는 남쪽 바닷가에서
말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붉은 얼굴 하나가 피어난다
다른 꽃들이 아직 흙 속에서
봄을 꿈꾸고 있을 때
이미 계절을 앞질러
스스로 봄이 되어 버리는 꽃
흰 눈 위로 떨어진 붉은 꽃잎은
차갑도록 선명하고
그 차가움 속에서 오히려
더 뜨겁게 살아 있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생의 기운이다
베란다 한쪽
봉긋이 부풀어 오르는 꽃망울 앞에서
나는 문득 놀란다
이 조용한 시간이
이토록 단단한 생명을 품고 있었던가
붉은 꽃잎과 샛노란 수술
윤기 있는 초록 잎의 조화는
꾸밈이 아니라 본능
아름다움이 아니라 존재
피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피어 있음으로 완전한 것
동백의 꽃말처럼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말이 되지 못하고
붉은 빛으로만 남는다
오래도록 지지 않는 마음은
병풍 속 동박새처럼 날아와
조용히 사랑을 옮겨놓는다
씨앗에서는 기름이 짜여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되고
머리카락을 단장하는 손길이 되고
녹을 막는 숨결이 된다
꽃은 아름다움으로 살고
씨앗은 생존으로 이어진다
동백은 피고 지는 것 너머까지
조용히 품고 있다
바람이 거셀수록
붉음은 더욱 또렷해지고
마치 꺼지지 않으려는 불꽃처럼
마지막까지 자신을 놓지 않는다
피는 순간 이미 지는 순간을 품고
지는 순간조차 한 장면이 되는 꽃
꽃잎은 시들지 않은 채 떨어지고
비 오는 날이면
미련처럼 땅 위에 남는다
벌과 나비가 잠든 계절
동백은 새를 불러들인다
작은 날갯짓 하나가
꽃의 생을 이어 간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도
자연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봄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
동백은 조용히 물러난다
주인공의 자리를 붙잡지 않고
계절을 완성한 뒤 사라진다
뜨겁게 피어나
미련 없이 져 가는 방식으로
문득 오동도의 바다가 떠오른다
푸른 바다와 붉은 꽃이 맞닿던 자리
겨울과 봄이 겹쳐지던 순간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다시 그 숲으로 가고 싶다
말없이 피어나
가장 먼저 봄을 데려오는
그 붉은 꽃을 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