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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무의 계절, 집 맛/무의 계절과 집 맛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무의 계절 집 맛 시

 

무의 계절, 집 맛

 

 

가을이 깊어질수록 땅속에서 건져 올린

하얀 시간 하나

무는 조용히 식탁 위로 걸어 올라온다

 

사계절 반찬에 두루 쓰이는 무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식구처럼

언제나 국물, 나물, 졸임 속에서도

제 맛을 잃지 않는다

 

늦가을 무가 가장 달다 하여

입 안에 넣으면 햇살처럼 퍼지는 단맛

그 맛으로 겨울의 문턱을 넘는다

 

어묵탕에 들어간 무는

국물을 맑게 씻어내며

작은 손자의 웃음을 데려오고

 

동치미 속 무는

사이다처럼 톡 쏘는 국물과 함께

딸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고

아삭하게 씹히는 소리까지

겨울의 노래가 된다

 

소고기무국 속에서는

말 없는 국물이 더 깊어지고

백년손님 같은 과묵한 사위도

그 한 그릇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채 썰어 볶아낸 무나물에는

할머니의 손끝 온기가 살아 있고

오래된 부엌의 기억이 조용히 스며 있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무생채는

큰손자의 비빔밥 위에서

콩나물, 시금치 사이를 비집고 올라

가장 먼저 젓가락을 부른다

 

깍두기는 언제나

사철 내내 식구들의 가장 익숙한 기쁨이고

 

된장 한 술 넣은 고등어조림 아래 깔린 무는

비린내를 잠재우는 숨은 도우미로

밥 한 그릇을 완성시키는 조용한 주인공이 된다

 

감기 기운이 스며들 때면

생강, 도라지, 배, 대파와 함께

무는 물이 되어 끓어오르고

한 모금에 몸속 찬 기운을 몰아낸다

 

무는 그렇게

말없이 가족의 계절을 지키는

가장 투박하고도 다정한 맛이다

 

오늘도 식탁 위 하얀 무 한 조각이,

우리 삶의 허기를 조용히 채워준다.

 

 

작품평

이 작품은 ‘무’라는 매우 일상적인 식재료를 중심에 두고, 계절성과 가족의 기억을 겹겹이 쌓아 올린 점이 가장 큰 힘입니다. 단순한 음식 묘사가 아니라 “식탁의 기억”을 통해 삶의 정서를 끌어내는 방식이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우선 인상적인 부분은 이미지의 일관성입니다.
하얀 시간 하나”, “햇살처럼 퍼지는 단맛”, “겨울의 노래같은 표현은 무의 색감과 계절성을 반복적으로 변주하면서, 무를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시간을 품은 존재로 확장합니다. 특히 어묵탕, 동치미, 소고기무국, 무생채 등 구체적인 요리들이 나열되면서도 산만해지지 않고, 오히려 가족의 식탁이라는 하나의 축으로 모이는 구조가 잘 잡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정서의 방향입니다.
이 작품은 무를 통해 가족의 역할 분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손자의 웃음, 딸의 마음, 과묵한 사위 같은 구체적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음식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가 됩니다. 이런 방식은 서정시에서 자칫 추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매우 생활적으로 붙잡아 둡니다.

후반부의 “감기 기운이 스며들 때” 이후 부분은 특히 좋습니다.
무가 약재처럼 기능하면서 생강, 도라지, , 대파와 함께 치유의 음식으로 확장되는 흐름이 자연스럽고, 마지막 삶의 허기를 조용히 채워준다는 결말은 전체를 잘 수렴합니다.

다만 보완할 점도 있습니다.

첫째, 정서의 밀도가 일정하게 높아서 중반부 이후에는 약간의 반복감이 생깁니다.
무의 다양한 요리 활용이 장점이지만, 유사한 정서(따뜻함, 가족, 위로)가 계속 이어지면서 감정의 결이 조금 평평해질 수 있습니다. 중간에 한 번 정도는 예상 밖의 대비(: 쓸쓸함, 결핍, 혹은 무의 거칠고 투박한 면’)가 들어가면 긴장감이 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둘째, “백년손님 같은 과묵한 사위” 같은 비유는 재미있지만 약간 설명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이미 음식과 장면이 충분히 정서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인물 설명은 조금 더 절제해도 효과가 유지될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무’의 상징이 매우 긍정적으로만 확장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따뜻한 가족, 위로, 계절의 중심으로만 기능하는데, 무의 단단함, 매운맛의 가능성, 거친 뿌리채소로서의 이미지가 조금 더 드러나면 상징성이 더 입체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작품은 “음식 서정시”로서 완성도가 높고, 특히 생활 감각과 가족 서사가 자연스럽게 결합된 점이 돋보입니다. 다만 현재의 따뜻한 정서에 약간의 균열이나 대비를 더하면, 더 깊고 오래 남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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