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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살강청소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4|조회수2 목록 댓글 0

살강청소

 

이른 아침

일복 몸빼이 바지로 갈아입으며

나는 집을 청소한다

먼지가 아니라 마음을 쓸어내기 위해

 

경쾌한 음악이 주방에 먼저 들어와

구석의 어둠을 두드린다

반나절 동안 쓸고 닦고 비워내니

집은 환해지고

내 마음 안쪽 창고까지 맑아진다

 

문득 흑백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홉 살의 여자아이가

살강 문을 열고

사기그릇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

샘가에 퍼질러 놓고

지푸라기와 비누 거품 사이로

묵은 때를 문질러 지우며

새것이 되어가는 순간을 믿던

제바른 손

 

헹궈진 그릇들이

햇빛처럼 마르는 동안

나는 이미 엄마의 칭찬을 알고 있었다

“우리 세째딸, 참 부지런하구나”

 

엄마의 목소리는

늘 도착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 닿았다

살강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릇처럼

기쁨도 순서대로 정돈되었다

 

아궁이의 그을음이 다시 내려앉아도

그 잠깐의 빛나는 시간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깨끗함의 사기그릇이 아니라

깨끗해진 마음이 남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싱크대 앞에서 그날을 다시 산다

그릇을 꺼내고

크기대로 나란히 세우며

어릴 적 소꿉놀이처럼

순수한 마음 하나로

오늘의 주방을 다시 정돈한다

 

 

*** 작품평

이 시는 일상의 ‘청소’라는 행위를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기억과 정서의 회복 의식으로 확장시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입니다. 살강과 싱크대, 현재와 과거, 노동과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치면서 한 편의 서정적 시간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우선 초반부의 “먼지가 아니라 마음을 쓸어내기 위해”라는 진술은 시 전체를 여는 핵심 명제처럼 작동합니다. 물리적 청소가 곧 내면 정리라는 은유가 분명하게 제시되면서, 이후의 모든 장면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정화의 과정’으로 읽히게 됩니다. 특히 “구석의 어둠을 두드린다” 같은 표현은 사물에 생동감을 부여하면서 공간을 심리적 장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살강을 둘러싼 과거 회상입니다. 아홉 살 아이가 그릇을 씻는 장면은 매우 구체적인 생활 이미지인데, “지푸라기와 비누 거품 사이”, “제바른 손” 같은 디테일이 들어오면서 거의 촉각적으로 살아납니다. 이 장면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믿음’의 경험으로 그려지는 점도 중요합니다. “새것이 되어가는 순간을 믿던”이라는 구절은 어린 시절의 세계 인식을 잘 드러내며, 현실적 경험이 아니라 정서적 신념의 시간으로 과거를 위치시킵니다.

 

엄마의 목소리 부분도 이 시의 정서적 핵심입니다. “늘 도착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 닿았다”는 표현은 물리적 언어가 아니라 감각 이전의 정서적 예감으로 엄마를 재구성합니다. 이로 인해 엄마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 ‘내면화된 인정의 목소리’로 확장됩니다. 그 결과 청소라는 행위는 단순히 집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다시 불러오는 의식처럼 작동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현재와 과거가 자연스럽게 겹치면서 시의 시간은 선형성을 잃고 순환 구조로 변합니다. “지금도 나는 가끔 / 싱크대 앞에서 그날을 다시 산다”는 구절에서 과거는 회상이 아니라 반복되는 현재가 됩니다. 이 지점이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수행되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굳이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정서가 매우 안정적이고 서정성이 잘 유지되지만, 중간에 긴장이나 균열이 거의 없어 약간 단조롭게 느껴질 여지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궁이의 그을음’ 같은 현실의 거칠고 어두운 요소가 더 강하게 개입했다면, 깨끗함의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대비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청소라는 반복적 노동 속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겹쳐 살아내는 감각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독자는 ‘정리된 공간’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의 기억 구조’를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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