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버무리
이른 아침, 쑥국이 밥상에 오르면
봄은 이미 국물 속에서 눈을 뜬다
보리밭 위 종달새의 떨림
소쿠리 하나 끼고 나서던 어린 날들
양지 바른 들녘에 웅크려 앉아
조심스레 고개든 쑥을 뜯으면
소쿠리마다 봄이 차올랐다
지푸라기 섞인 쑥을
어머니는 한 잎 한 잎 다듬어
말없이 멥쌀가루와 버무리셨다
그 손끝에서 피어오르던 쑥 향기
김이 오르는 양푼 둘레에 둘러앉아
칠남매는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쑥떡쑥떡거리는 말 음식이 되던 시절
쫀득한 한 입마다
봄이 혀끝에서 터졌다
세월은 인스턴트 음식처럼 빠르지만
그 편리함이 허기를 달래준 뒤 허전함
맛은 지난날 심오한 깊이를 알고 있다
강물이 천만리 더 흐른 후
아침에 다시 쑥을 씻어
멥쌀가루와 조용히 버무려
찜솥 위에 봄을 올린다
식탁 위 사기그릇에 담긴 쑥버무리
한 사발 뜨는 순간
잊힌 시간들이 천천히 되돌아오고
봄은 다시
입안 가득히 오래된 빛처럼 번져간다
**작품평
이 작품은 ‘쑥버무리’라는 음식 경험을 매개로, 개인의 기억과 세대적 정서를 봄의 감각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서정시로 읽힙니다. 전체적으로는 음식의 조리 과정 → 가족 공동체의 식탁 → 시간의 경과 → 기억의 재현이라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하나의 작은 풍경이 인생의 서사로 확장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장점은 감각 이미지의 밀도입니다.
“봄은 이미 국물 속에서 눈을 뜬다”, “소쿠리마다 봄이 차올랐다”, “봄이 혀끝에서 터졌다” 같은 표현은 봄을 추상적인 계절이 아니라 ‘맛과 향, 온도’를 가진 물질처럼 체험하게 만듭니다. 특히 쑥이라는 재료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기억의 촉매로 기능하면서, 시 전반을 관통하는 중심 상징으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강점은 ‘손의 노동’과 ‘가족 공동체’의 정서입니다. 어머니가 “한 잎 한 잎 다듬어” 버무리는 장면, “칠남매”가 둘러앉아 먹는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돌봄과 생존이 결합된 시대의 생활 감각을 구체적으로 복원합니다. 이 부분은 감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소재인데도, 비교적 절제된 서술로 유지되어 설득력이 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현재의 시점으로 이동하며 ‘시간 비평’의 성격을 띱니다.
“세월은 인스턴트 음식처럼 빠르지만”이라는 구절은 현대성에 대한 인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인데, 앞부분의 촉각적 이미지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주제 의식을 강화합니다. 다만 이 대목은 다소 설명적인 진술에 가까워, 앞의 상징적 이미지들과 비교하면 시적 밀도가 약간 낮아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지막 연의 “사기그릇”, “되돌아오고”, “오래된 빛” 등의 표현은 기억 회귀의 정서를 잘 마무리하지만, 결말의 감정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리되면서 여운이 약간 정돈된 방향으로 수렴하는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앞부분의 감각적 열림이 강한 만큼, 끝에서도 조금 더 이미지 중심의 열린 결말을 유지했다면 여운이 더 길게 남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시는
쑥과 봄을 통한 기억의 촉각화
가족 공동체의 생활 풍경 복원
현대적 속도감에 대한 은근한 비판
을 하나의 서정적 흐름으로 잘 엮어낸 작품입니다.
특히 ‘음식’을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을 호출하는 장치로 사용한 점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